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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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광조/ CBS PD “서유럽과 미국에서 만들어져 전 세계로 퍼져 나간 근대사회는 미래에 대한 낙관을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삼아 왔다. 그러나 경험과 이성을 두 축으로 문명의 발전을 의심하지 않았던 인류는 지난 수십 년간 환경 문제 등 예기치 않은 도전에 부딪히고 있다. ‘위험사회’와 ‘성찰적 근대화’란 개념을 통해 근대문명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독일 뮌헨대 울리히 벡 교수를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장훈 교수가 만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실체와 돌파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편집자)... 장훈 : 당신이 발표한 ‘위험 사회’의 개념은 환경 위기, 복지국가의 실패와 같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위험사회’란 어떤 것이며 그런 개념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울리히 벡 :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서 정치, 경제, 사회 체제를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런 합리성의 부수적 결과들이 예측 불가능해 짐에 따라 일상생활 속에서 커다란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체르노빌에서의 원자력 유출 사건이라든가 광우병, 여러 가지 환경 재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계급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사람들은 점차 더 많은 불확실성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사회적 변동들이 폭발적으로 분출되고 있었지만, 사회과학은 이러한 새로운 현상들을 포착할만한 개념의 빈곤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계급이라는 오래된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저나 학생들 모두 이러한 개념적 범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대안적 개념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위험사회’는 그 결과입니다. 장훈 : 당신은 현대의 복지국가가 이런 ‘위험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위험사회’의 극복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울리히 벡 : 여전히 기술 관료제에 의존하고 있는 현대 국가로서는 위험사회를 불러온 근본적 요인인 기술적, 경제적 합리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 국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대규모의 생태 재난과 같은 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시민들에게 공적 안전을 제공해야 할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했습니다. 저는 위험사회의 극복은 대의 정치제도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책임지고자 하는 시민운동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민주주의는 국가를 비롯한 제도권 영역으로부터 일상적인 생활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위험사회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2000년 12월 14일) '위험사회' 저자인 사회학자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수 백 만년에 걸쳐 형성되고 굳어진 자연의 생리(소는 풀을 먹는다)를 이윤을 위해(기술합리성의 추구) 파괴한 결과(동물성 사료를 먹임으로써 소를 육식동물로 만들어 버린) 빚어진 광우병. 위험에 무기력한 국가와 자신들의 문제를 직접 책임지려고 하는 시민과 시민운동. 인용이 좀 길었지만 지난 5월부터 두 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위험 논란과 촛불시위를 이 보다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위에서 인용한 인터뷰 기사는 경향신문도 아니고 한겨레신문도 아닌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다. ‘그 때는 이런 인터뷰 기사를 실어 놓고 지금은 왜 그러냐’고 비아냥거리거나 따지려는 게 아니다. 길지 않은 칼럼에 저렇게 긴 인터뷰 기사를 인용한 건 순전히 안타까움 때문이다. 위험사회. 독일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개념화한 이 ‘위험사회’는 사회학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없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너무도 쉽게 다가오는 개념이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화재, 아현동 가스폭발사고... 물론 이런 사고들이 한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울리히 벡이 말하는 위험사회란 기술 관료제에 기반하고 있는 현대 국가 모두에 적용되는 것이고 그 위험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그가 세계적인 사회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들이 몇 백 년 동안 이룩한 근대화를 불과 수 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룬 대한민국에서 위험사회라는 말이 지닌 울림은 남다를 수밖에 없을 터. 지난 4월 1일 조선일보는 “한국은 아주 특별하게 위험한 사회다, 첫 내한한 ‘위험사회’ 저자 울리히 벡 교수 인터뷰”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가 울리히 벡 교수의 ‘위험사회론’에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고 적지 않은 지면을 통해 그의 이론과 생각을 소개한 건 그가 세계적인 학자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위험사회’에 대한 경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반성 또는 성찰이 바로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인식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깔려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치면이든 경제면이든 사회면이든 기사 형태가 스트레이트든 분석이든 인터뷰든 언론은 끊임없이 문제를 지적하고 경고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고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겠다는 의지가 깔려있다. 우리가 조선일보뿐만이 아니라 숱한 신문지면과 방송 뉴스에서 접하는 각종 고발 기사들, 이것이 위험사회에 대한 성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 논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명박 출범 이후 불거진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에 관한 논란에 대해서는 ‘성찰’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마치 ‘불량 철근 좀 들어갔다고 한강 다리가 무너지랴’라는 식이다. 물론 불량철근 좀 쓴다고 꼭 다리가 무너지고 빌딩이 무너진다는 법은 없다. 쓰레기 시멘트로 아파트 짓는다고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지하철에서 석면에 노출된다고 해서 모두가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 매순간 이런 저런 위험에 노출된 채 살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먹고 광우병 걸릴 확률이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얘기도 이런 슬픈 현실을 지적한 것 아니겠는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교통사고 사망률이나 산재 사망률에 비하면 그깟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쯤은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쇠고기 수입업자나 협상 책임자가 할 말이지 언론이 할 말은 아니지 않는가. 더구나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미국산 소를 다 도살하라는 것도 아니고 미국산 소는 아예 안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예방할 수 있는 위험은 예방하자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불합리한 요구인가. 우리정부가 우리가 구매하는 쇠고기에 대해서 만이라도 광우병 전수검사를 하자고 제안하고 동물성 사료강화조치를 요구했더라면, 설사 정부의 그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도 국민이 이렇게 화가 났겠는가. 비유하자면 이렇다. 지금 국민들이 요구하고 있는 건 불량 건축자재와 쓰레기 시멘트가 들어간 아파트와 학교, 다리를 다 부수고 새로 짓자는 게 아니다. 그것이 성수대교 붕괴, 상품백화점 붕괴와 같은 대형 사고를 일으킬지 아토피를 포함한 피부병을 일으킬지, 언제 누구에게 암을 일으킬지는 모르지만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앞으로는 불량자재를 쓰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어진 구조물에 대해서는 정기적으로 검사를 해서 사고가 나지 않게 예방하자는 것이다. 이게 무리한 요구인가? 이게 친북좌파 운운할 사안인가? 정치인과 기업가들이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이런 위험, 그 결과를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위험, 당장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해도 사회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경고와 참견, 이게 바로 언론 본연의 임무 아닌가. 우리들 대부분은 내가 사는 집이 불량 자재로 지어졌다는 걸 알면서도 적응하며 살고 세상의 자잘한 부조리도 그러려니 하면서 참고 지낸다. 하지만 가려움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긁어서 피가 나는 자식들을 본 부모라면 ‘안 죽으면 되지’라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돈 좀 아끼자고 불량자재를 계속 쓰자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철근이든 시멘트든 쇠고기든, 공짜도 아닌데 말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69 | 추천: 1
안수찬/ 한겨레 기자 그러니까, 넌 열일 제쳐두고 반성부터 심각하게 해야 돼. 며칠 전 당국이 널 감옥에 잡아 가둔 건 차라리 다행한 일이야.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지만 말고, 이번 기회에 생각 좀 해봐. 시민운동가들이 모여 석방대책위원회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거기에 끼어들어 네 석방 따위를 요구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굳이 석방을 촉구하려면 그건 촛불시민들을 위한 것이어야겠지. 넌 그저 그 곳에서 책도 읽고 좌선도 하면서, 시민운동가의 역할과 자질에 대해 성찰이라는 걸 한번 해봐. 도대체가 말이 되느냔 말이야. 지난 10년 동안 너는 시민운동에 매진했잖아. 그것 말고 달리 한 게 없잖아. 그런데 가히 ‘운동 전문가’라 할 만한 네 지성과 감성이 이번 촛불집회에 기여한 바가 뭐 있느냐고. 집회 사회도 보고, 거리행진도 이끌었다고 말하고 싶겠지. 다시 물어볼게. 그거 정말 네가 한 거야? 거리와 광장을 채운 촛불 시민들의 상상력을 봤지? 하나의 거대한 문화공연과도 같았던 그 기발함과 발랄함을 봤지? 어느 운동가보다 단호하게 발언하고, 어느 교수보다 분명하게 논리를 밝히는 고등학생, 주부, 대학생, 직장인들을 봤지? 넌 지금까지 한번이라도 그런 식으로 데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있어? 넌 도대체 뭘 했냐고. 시민운동가로서 이번 촛불집회에 대해 책임질 일이 하나도 없다는 거, 이거 부끄러운 일 아닐까? (이쯤에서 너는 기자로서의 내 구실에 대해 따지고 싶겠지만, 흠흠, 오늘은 네 이야기만 하도록 하자고) 하긴, 우리가 기억하는 데모란 그저 숭고하고 치열하고 엄숙하고, 그리하여 절망적인 그런 것들이긴 했지. 너와 내가 만나 이 기묘하고도 질긴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그 치열하여 절망적이었던 ‘데모들’의 기억 때문이잖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안진걸 조직팀장이 지난 6월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 경복궁역 앞에서 장관고시 철회와 전면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게 강제 연행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9년, 전교조가 만들어졌지. 너는 광주에서 나는 대구에서 전교조 선생님들을 지킨답시고 데모 흉내를 냈지. 그때 우린 촛불집회 같은 건 생각도 못했지. 고작해야 종이비행기를 접어 교실 밖으로 던지거나,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시국 집회의 한켠에 모여 앉는 따위가 전부였지.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날, 교문을 붙잡고 엉엉 울어버린 게 우리의 마지막이었지. 우리는 누구에 맞서는 것인지도 잘 모른 채 그저 항의하고 분노했지. 어떤 친구는 퇴학당했지. 어떤 친구는 스스로 학교를 그만둬 버렸지. 어떤 친구는 항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지. 그리고 우리는 또 울었지. 그때 기억나지? ‘교사는 노동자’라고 말하는 전교조 교사들은 모두 빨갱이다. ‘참교육’이란 중고생들을 의식화시키려는 책동이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썼잖아. 교사와 학생들의 집단행동에 처음엔 주춤했던 정부도 보수 언론들의 보도를 계기로 전교조 교사들을 모조리 해직하고 그것도 모자라 감옥에 집어넣었잖아.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 데모 한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사춘기 시절에 알아 버렸지. 올바른 것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돼 버렸지. 대학 신입생이던 1991년, 그 해 봄을 잊을 수가 없지. 3월부터 6월까지 10여명이 죽었어. 고등학생, 대학생, 노동자가 죽었지. 시위하다 전경에 맞아 죽고, 거기에 항의해 투신 또는 분신하여 죽었지. 일주일에 한명씩 죽어나가는 거리에 나가려면 말 그대로 죽을 결심을 해야 했지. 그 시절엔 밤이 되면 라이터를 켰어. 종로를 메운 군중이 구호를 외칠 때마다 무수한 별빛처럼 명멸했던 라이터 불을 보며 우리는 환호했지. 해직된 옛 선생님들도 만났지. 이젠 대학생이 된 제자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선생님들도 함께 데모를 했지. 87년 6월 이후 최대의 인파라고, 드디어 뒤집어진다고, 우리는 흥분했지. 그 다음의 일도 기억나지? 다시 한 번 조선일보가 ‘죽음의 굿판’ 운운하며 우리를 악의 화신으로 만들었지. 동료의 투신자살을 부추겨 유서까지 대신 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빨갱이들이라고 몰아갔지. 각계각층에 주사파가 침투해 있다고 선전했지. 장관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대학생들을 희대의 패륜아라고 손가락질했지. 공권력이 대학생을 때려죽일 때, 우리는 왜 밀가루조차 던지면 안 되는 것인지, 우리는 정말 알지 못했지.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상은 조용해졌지. 신문과 방송은 소련의 붕괴를 축하하고, 빨갱이들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했지. 대학 졸업을 눈앞에 둔 1996년, 아마도 90년대의 진정한 마지막이라 할 만한 그 때, 우리는 연세대에 있었지. 조선일보는 한총련 출범식에 모여든 대학생들을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주사파 집단으로 매도했지. 일본 전공투와 비교하면서 극렬 테러집단으로 몰아갔지. 경찰은 들어오는 길, 나가는 길을 통째로 막았지. 배가 고파도 먹을 것조차 없었지. 그렇게 열흘 동안 학생들을 굶겨 힘을 빼고, 일시에 진입해 모두 잡아갔지. 몰아놓고 때려잡는 토끼몰이식 진압의 초대형 버전이 그때 만들어졌지. 10여대의 헬기를 띄워 사실상의 군사작전을 펼쳤지. 그렇게 5800명의 학생들이 일시에 끌려갔지. 우리 같은 놈들을 선배라고 믿고 따라온 1학년, 2학년 후배들이 많이 잡혀 갔지. 선배들은 분해서 울었고, 후배들은 무서워서 울었지. 다시는 데모 같은 거 하지 않겠다고, 자아도취에 불과한 시위 따윈 아예 때려 치고, 진짜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만한 일을 하겠다고. 우리는 결심했지. 너는 시민운동을 택했고, 나는 언론을 택했지. 그리하여 진걸아, 너와 내가 기억하는 모든 데모는 장렬했지만 절망적인 것이었지. 우리는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고 번개처럼 달려와 시위대의 머리를 잡아채 강력한 헤드락을 걸고 니킥으로 명치를 가격하는 백골단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지. 닭장차에 갇히는 순간 시작되는 전경들의 무수한 발길질이 왜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지 잘 알지. 누구건 마음만 먹으면 빨갱이로 낙인찍어 감옥에 보내버리는 조선일보가 얼마나 거대하고 강력한지를 잘 알지. 공안정국이 일단 시작되면, 세상 모든 항의의 목소리가 통째로 사라져버린다는 것도 잘 알지. 그게 보수정치의 본질이라는 것도 너무너무 잘 알지. 1998년 초, 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그 기억을 모두 나누고 있었지. 80년 광주항쟁처럼 시대를 넘어 추앙받지 못하고, 87년 민주항쟁처럼 승리의 기억으로 뭉친 하나의 세대를 낳지도 못했던 너와 나의 그 ‘데모들’은 오직 우리끼리만 서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었지. - 거대한 절망. 그것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지. 아무도 우리의 비극을 모를 거라고 제 슬픔에 취해 술잔을 기울였지. 나는 말이야, 진걸아. 촛불시민들이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어떨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아마 잘 안될 거야.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나는 지금도 가끔 울컥해. 나이를 먹어 그런지, 예전처럼 눈물이 막 쏟아지고 그러진 않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앞이 흐려지는 일이 많아. 절망하는 게 아니고 말이야, 위로받는다는 생각, 드디어 우리의 그 불행한 ‘데모들’이 위안 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야. 촛불시민들은 사제단의 미사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고 하지만, 실은 바로 그들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온을 주고 있는 것 같아. 그렇구나. 데모는 엄숙하고 장렬하여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기쁘고 발랄하고 상쾌한 어떤 것이었구나. 바로 그래서, 성취하여 얻는 바가 적어도 데모 자체로 즐겁고 행복한 것이었구나. 그런 ‘행복의 힘’이야말로 조선일보와 정치검찰과 백골단과 청와대를 모두 넘어서는 원천이구나. 그걸 모르고 우리는 그저 죽을 결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구나. 진정한 운동이란, 그 성취가 대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행복해야 하는 것이구나. 대통령이 항복할까 하지 않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우리 같은 옛날 데모쟁이들과는 달리, 이들 촛불시민들은 오늘은 어떻게 보다 새롭고 즐거운 방법으로 거리와 광장에서 시간을 보낼까를 고민하는구나. ‘해방구’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여 권력자들을 몰아낸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자리한 해방의 욕망을 끄집어내어 표현하는 바로 그 시간과 공간을 일컫는 것이구나. 뭐, 그런 상념 끝에 또 한 번 감상에 젖어 울컥하는 것이지. 시민운동가와 언론인으로서 너와 나는 이제 촛불시민들의 앞길을 진지하게 고민해야겠지. 그게 우리의 몫일 테고. 그렇지만 말이야. 그런 짐을 잠시 벗어놓고, 그저 이 촛불의 물결에 지친 몸과 마음을 맡기고 그 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 더 중요할 지도 몰라. 어쩌면 지도가 필요한 것은 촛불시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일수도 있으니.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공권력에 대한 공포, 보수언론에 대한 열등감, 정치권력에 대한 집착 따위의 ‘80년대식 트라우마’를 모두 벗어던지는 촛불의 의식화를 먼저 거쳐야 할 것 같아. 그럴려면 우리 데모 좀 더해야겠지? 무슨 해결책 따위를 성급하게 기대하기 전에 너와 나는 케케묵은 20세기의 허물부터 벗어 던져야겠어. 그러니 진걸아, 나와라. 공부 좀 하고 난 다음에 감옥에서 나와서 거리에서 만나자. 그리고 지칠 때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을 때까지, 실컷 데모하자. 저들이 말하는 질서와 평화 따위는 그런 걱정에 날밤을 새는 저들에게 줘버리고, 우리는 해방구의 질서와 평화를 단 며칠이라도 좋으니 조금 더 누려보자. 권력을 얻어 그 권력으로 인해 자유로워질 것을 기대하기 전에,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유쾌하게 만드는 진짜 데모의 기억을 만들자. 가난하고 초라한 지성과 감성을 가진 탓에 이 촛불의 물결에 조금도 보탬이 된 바 없는 듯 하여 더욱 쑥스럽고 미안한 나는 그저 그런 정도의 소박한 기대만 갖고 이 여름을 버티려 해. 그러고 나면 아마도 가을 무렵엔 조금 더 깊은 혜안이 생기지 않을까, 장담하기 힘든 그런 희망도 곁들여서 말이야. 천둥벌거숭이 같은 시민운동가 안진걸도 아마 나와 비슷할 거라고 믿어. 술 마시면 말이 많아지는 것 말곤 닮은 데라고 하나도 없는데도 사람들이 우리 둘을 자꾸 비교하려고 하여 서로 기분이 많이 나쁜, 참여연대의 안수찬, 너 안진걸에게 한겨레의 안진걸, 나 안수찬이 보낸다. 씩씩하게 잘 지내라.
2017-07-20 | hrights | 조회: 329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광화문에 수십만 개의 촛불이 모여 쇠고기 재협상을 외치던 날, 청와대 뒷산에 올라 많은 반성을 했다는 대통령은 그로부터 닷새 만에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대국민 선전포고를 했다. 도대체 대통령이 생각하는 국가 정체성이란 것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다. 국어사전에서는 정체성의 뜻을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고 풀이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변하지 않는 본질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이고, 민주공화국이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주권의 운용이 국민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한다. 6월 한 달 내내 촛불시위에 나선 국민들이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것이었다. 국민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정부가 민주공화국의 정부로서 정체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국민들의 뜻을 존중하고,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값싸고 질 좋은 미국 쇠고기’를 홍보하면서 미국 축산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미국 정부가 보증만 해주면 안심해도 좋다는 식으로 미국정부의 선처에 기대지 말고 한 나라의 정부답게 검역주권을 행사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를 국가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다니, 그동안 대통령이 무엇을 반성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24일 국무회의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그는 이날 "일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시위는 정부 정책을 돌아보고 보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지만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대통령은 아마도 대한민국과 미국이 같은 나라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미국 사람처럼 미국말 하고(심지어 우리나라 역사도 영어로 배우고), 미국 사람들이 먹는 소고기 먹고(심지어 안 먹고 버리는 뼈나 내장도 아까우니 먹어주고), 미국 사람들이 원하는 일만 해 주면 진짜 미국처럼 강대국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런 친미 사대주의적인 태도가 국민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반미성향이 없던 사람들까지도 반미로 돌아서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국가정체성 운운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수구언론들이 부시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 민망하다 못해 얼굴이 화끈거린다. 퇴직을 앞두고 이삿짐 쌀 준비를 하는 미국 대통령을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꼴이라니.... 가르쳐주지 않아도 국민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사실을.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정부의 역할은 국민들의 뜻에 따라 통치하고,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국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내팽개치는 일을 정부가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촛불에 놀라 미국으로 달려간 협상단이 가져온 보따리에 실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허울 좋게 내세운 민간자율합의라는 것이 사실상 아무런 구속력이 없다는 사실을. 전국 수만 곳의 음식점에서 원산지 표시가 제대로 지켜지는지 여부를 감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국민들의 의사와 안전은 안중에도 없이 덜커덕 퍼주기 협상을 하고 돌아와 국민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대한민국 정부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흔들어놓은 장본인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대통령이라는 사실도 또한 알고 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고 있는 혼란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실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국가 정체성을 운운하며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국민의 뜻을 저버린 권력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에, 국민들은 앞으로도 촛불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92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정책팀장 중학교 2학년 딸아이가 광우병협상이 타결되고 촛불이 막 타오르기 시작하던 시점에 던진 질문이었다. 처음엔 질문의 의미를 파악 못해 잠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 의미가 파악된 후 난 좀 허둥거렸다. 이유는 그저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그 나이의 나로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질문을 하는 딸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 다른 하나는 현 정부 들어 소주잔 기울이며 열심히 뉴스 보며 개탄만 하고 있던 소위 운동 한답시는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0교시, 야자부활, 방과 후 교실 영리단체에 허용’ 그리고 광우병 미국소의 수입에 대운하의 문제까지 조목조목 나름의 논리로 따지는 딸을 보면서 ‘컴퓨터만 한다고 타박할 일은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받았다면 너무 오버인가? 그러나 그 날 이후 딸과 정치를 주제로 대화가 통하고 관계는 더욱 살가워졌다. 나는 딸이 자랑스럽고 딸은 엄마의 일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뉴스를 함께 보며 흥분, 분노하고 5년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 중에 있다. 그러던 딸이 오늘 6/10 100만 촛불문화제에 참석하자고 했더니 안하겠다고 한다. 그 이유는 지난 5월말 경찰의 과잉진압과정에서의 시민에 대한 폭행, 특히 여대생에 대한 군홧발 폭행을 보고나서 무서워졌단다. 시민에 대한 무차별 폭행을 보고 누구나 가슴 한 구석에서 서늘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같이 참석하고 싶었지만 굳이 설득하지 않았다. “걔네들은 트라우마가 없어서 그래” “난 아직도 시위를 나가려면 무서워” 지난 6월 5일 72시간 릴레이 문화제를 앞두고 5월 31일 물대포현장에 있었던 386세대 활동가들의 말이다. 물대포를 쏘아대자 “온수! 온수!”를 외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자 “노래해!”, “개인기!”를 외치던 풍자와 해학이 넘치던 시위대를 묘사하면서 한 자조 섞인 말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트라우마(상처)가 있다. 군부독재의 정권연장을 저지하기 위해, 거의 매일 거리로 나갔던 우리들의 시위양상은 현재와는 사뭇 달랐고, 전투경찰, 백골단, 최루탄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열심히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 중에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폭력을 경험해야 했다. 거리에서, 닭장차 안에서 군홧발과 곤봉에 짓이겨져야 했고, 발밑에서 씩씩대며 어지러이 돌아다니거나 내 머리통을 맞출 것만 같던 최루탄은 그 당시의 ‘시위’를 두려움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런 두려움을 직면해야 하는 것은 쪽팔림, 비참한 고통이다. 촛불문화제를 통해 ‘시위’ 양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실감하면서, 어쩌면 저들은 정말 ‘시위’에 대한 상처가 없어서 저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도 해본다. 가정폭력피해여성들이 그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상황을 견딜 만해서가 아니라 두려움의 노예가 되기 때문에 그 상황을 벗어날 엄두조차 못 내는 것이다. 도저히 어찌해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거대한 벽, 힘에 대한 무력감이 원인이다. 그것이 폭력이 갖는 잔혹함이다. 인격의 파괴, 존엄성의 파괴... 두려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을 외면하기 위해 심리적 노예상태를 자초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폭력이다.   지난 1일 새벽 서울 경복궁역 부근에서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을 요구하는 학생들이 스크럼을 짠 채 경찰 살수차(물대포)를 맞으며 버티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80년대 시위를 경험했던 우리는 인정하기 싫지만 심리적으로 ‘시위’=‘두려움과 긴장’ 이라는 도식의 노예상태는 아닌지 모르겠다. 그나마 그런 두려움을 앞두고도 또 다시 ‘시위’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가진 것은 불행 중 다행이지만, 트라우마가 없는 요즘의 참여자들이 부럽고, 여전히 두렵다는 누군가의 말에 팍! 공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나, 우리를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슬픔이다. “상처는 절대 없어야 해, 상처는 삶에서 많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우리 아이들은 상처 없었으면 좋겠어.” 경찰의 폭력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경찰청장 퇴진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며 나누었던 얘기들이다. 여성으로서, 사회에 저항하는 세력으로서, 우리는 개인적, 공적 상처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상처를 극복할 힘이-유머든, 해학이든, 내공이든-부족하고 방법을 몰랐던-가르쳐주지도, 있지도 않았던-우리들은 상처를 보지 않기 위해 도피를 택한 경험들이 있고, 그 도피는 또 다른 상처로 우리 안에 각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난 40여년은 그 상처를 직면하고 치료하기 위한 몸부림의 과정이었고, 그러한 과정을 ‘부당한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어서...’ 라는 말로 포장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체육관을 다니며 ‘때리는 법’을 배우는 것은 나름 상처에 저항하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시대적으로 상처를 많이 만들어내는 상황에 던져져 봤던 우리는 그래서 내 딸들만큼은 상처가 없는 청정지대에서 자라길 바란다. 그러나 경찰 군홧발에 짓밟힌 여대생과 그 장면을 화면으로 본 많은 아이들은 간접적으로 폭력을 경험하고 상처를 내면화 했을 수 있다. 딸아이의 참석거부이유가 바로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폭력으로 인한 상처는 여성이나 아이만이 아니라 남성, 어른, 경찰도 예외는 아니다. 양천구의 한 전투경찰은 선배들의 구타와 성추행으로 괴로워하다 자해까지 시도했었다. 자신을 해치면서 까지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추행부분은 발뺌을 하는 경찰은 또 한 번 그 경찰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군홧발로 여대생을 폭력 한 것에 대해 경찰은 사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과의 대상은 당사자 여대생이 아닌 여대생이 다니는 대학의 총장이었다. 이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가? 대체 왜 사과를 했을까? 국내 유수의 대학 총장을 구슬리면 여론이 잠잠해질 것이라 기대했었나보다. 국민을 우습게 여기고 힘과 권력에 아첨하는 경찰의 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나 절망스럽다. 그걸 또 무슨 자랑이라고 팝업까지 걸어 놨다. 감 떨어져도 한참 떨어진다. 직접 폭력을 당한 시민들, 그 장면을 통해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꼈을 더 많은 국민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고 상처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다. 그리고 폭력을 행사한 경찰은 가해자로서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혹은 지속적 가해자가 될 상황에 놓여있다. 이들도 피해자다. 공권력의 행위(정치적 행위)가 개인적 삶들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런 경우 행위의 책임자는 마땅한 책임을 져야하고, 행위의 재발방지를 위한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어청수 경찰청장은 사퇴하고, 경찰 내부 폭력문화를 근절하기 위해 조치해야 한다. 나아가 국가에 의한 폭력근절 시스템과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민주적으로 각성된 개인들의 집단적 행위가 필요하다. 개개인의 주권으로부터 국가의 권력이 구성됨을 명확히 알려주는 것과 더불어, 국가 권력의 역할은 개인의 주권을 보호해야함을 알려 주고 실현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촛불문화제는 시작일 뿐이다. 그동안 법/제도 등 민주주의를 담을 그릇을 만들기 위한 싸움을 해왔다면, 지금은 민주주의의 내용을 만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말 한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 안전할 권리, 상처 없이 행복할 권리를 생활 속에 실현하는 것, 그것을 위해 국가가 노력하는 것이 정치임을 촛불문화제를 통해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 5년... 기대된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07 | 추천: 1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이 때 국외에 계신 건 축복입니다” 이른바 우상숭배죄로 대학에서 재임용을 거부당한 이후 음으로 양으로 내게 도움을 주셨던 한 신부님께서 동경에 있는 내게 메일을 보내며 하신 말씀이었다. 대선과 총선 과정을 겪으며 허탈하고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그걸 안 봐도 되니 복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황당한 뉴스거리가 쏟아져 나오던 대선과 총선 당시, 나는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공부도 놀기도 강의도 하면서 재임용 탈락 파문으로 소진된 기운을 좀 보충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에 별 관심 없는 일본이라는 곳에 있다 보니, ‘포털 사이트’를 통해 접하는 소식 외에는, 한국의 요동치는 듯 한 정국이 그다지 입체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모르지 않았고 상상도 되었지만, 체감의 정도는 달랐다. 확실히 새로운 시대 그러다가, 학교에서 교육부를 피고로 제기한 항소심 참석차 금년 3월경부터는 한 달에 한 번 가량 한국에 드나들게 되었다. 그 참에 가족과 동료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5월 이후 이른바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결정을 거부하는 새로운 차원의 시위 문화였다. 일본에만 있었다면 입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묘미가 느껴졌다. 축제 같은 시위, 중구난방 속의 일사불란, 기성 언론보다 빠른 개인 언론, 모두 새로운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모습들이었다. 죄들 ‘조중동’만 보는 줄 알았는데 ‘조중동’을 거부하는 목소리까지 포함하여, 내게 메일을 주신 신부님의 허탈감이 상쇄되고도 남을 신기한 모습들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새삼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역시 우뇌적인 한국 80년대 광주항쟁이나 6월 항쟁은 물론, 2002년 월드컵 응원 열기, 2004년 대통령 탄핵과 그 역풍의 에너지가 신선하고 가상하더니, 2007년에는 그 열기가 단번에 쇠귀에 경 읽기처럼 반대로 회귀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더니 2008년에는 순식간에 새 대통령 지지율을 20%대로 끌어내리는 그 변화무쌍한 기운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21세기 한국이 확실히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국인은 감성이 넘치는 ‘우뇌적’ 기질이 다분하다는 것도 다시 확인되었다. 한국 사람들의 저 뻗치는 에너지를 일본인에게 소개해주고도 싶었다. 그러면서 정말 궁금했던 것은 이 역동적인 에너지는 과연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심심한 천국과 즐거운 지옥 5월말 재판 참석차 한국에 왔다가 이번에도 허무하게 변론을 끝내고 다시 동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 공항은 비를 뿌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이륙하자마자 비행기는 구름 위로 솟아올랐고, 끝없는 구름바다의 세계가 펼쳐졌다. 지상의 짓궂은 날씨와는 영 딴판이었다. ‘따뜻한 눈’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폭 안기면 그대로 안아줄 것 같았고, 덤벙덤벙 뛰면 순식간에 이리 저리 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마치 천국 같은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현실이 아니었다. 현실은 구름 위 고요함이 아니라, 저 구름 아래 혼돈 속에 있었다. 가끔씩 이상 기류를 만나 허공에서 흔들리는 기내가 현실이기도 했다. 그러는 순간 하늘에서 펼쳐졌던 천국에 대한 상상은 멈췄다. 현실은 흔들리는 비행기였고, 변화무상한 저 구름 아래 세계였다. 역시 내가 두 발 디디고 서야 할 곳은 상상 속의 ‘심심한 천국’이 아니라, 지상의 ‘즐거운 지옥’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기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잘은 몰라도 방향 하나는 분명했다. 그저 내가 아는 것 하나, 어떻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텐데 하는 것뿐... 이삼십년 가량 종교 공부를 해오면서 확신하게 된 것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의 문제였다. 다양한 종교, 무수한 교리들이 있지만, 결국은 ‘생명’이라는 한 마디로 수렴된다는 것이었다. 종교는 생명을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문제이지, 교리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문자적 교리를 지켰느냐 어겼느냐가 아니라, 생명을 살렸느냐 죽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비행기는 구름 위로 솟아올랐고, 끝없는 구름바다의 세계가 펼쳐졌다. 지상의 짓궂은 날씨와는 영 딴판이었다. ‘따뜻한 눈’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거니 싶었다. 사진 출처 - 필자 종교와 권력과 욕망 그런데 이상하게 종교들이 넘쳐나는데 죽임도 넘쳐난다. 종교의 이름으로 편 가르고 죽이기 일쑤이다. 구원의 교리를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이상하게 비구원적 현실은 줄지 않는다. 왜일까. 그 많은 교리라는 것이 실상은 권력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생명 자체가 다급하고 중요한 곳에 새삼 교리는 필요치 않다. 생명을 직접 살리고 살기 보다는, 그저 저 멀리의 대상처럼 간주하는 힘과 여유 있는 곳에서, 교리는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교리의 특성은 그 내용보다, 그 교리를 낳은 곳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교리를 지킨다는 것은 교리를 산출한 힘에 동의하거나 종속되는 것일 때가 많다. 여기서는 교리의 근본정신은 사라지고, 교리를 지탱하는 권력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하는 공간성이 부각된다. 권력 밖에 있는 자는 진리 밖에 있는 자로, 비생명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니 종교의 이름으로, 교리의 이름으로 억압과 죽임을 당연시하는 풍조도 생겨나는 것이다. 죽임과 억압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무한히 소유하고 싶은 욕망, 무한히 확장하고 싶은 욕망, 그것도 가능하다면 나만... 그것이 교리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분명 교리는 포장이다. 그런데 그렇게 포장되고 나면 내용을 잊어버린다. 포장은 내용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내용과 동일시된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이 생명의 존재 방식은 사랑의 원리에 따른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결국 네 것을 나누어 생명을 살리라는 요구인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포장된 교리 자체에 안주하며, 제 소유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둔갑시킨다. 교리와 소유가, 욕망과 종교가 혼동되거나 동일시된다. 재물이 종교로 둔갑한다. 사실 인간은 그 둔갑의 과정을 안다. 알면서도 스스로 속는 것이다. 그래야 속 깊은 자신의 욕망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의 욕망을 타고 적어도 겉으로는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속으로는 알면서도 이른바 ‘뉴타운’으로 속이고 알면서도 ‘뉴타운’에 속는다. 차라리 몰랐다면 깨우치기라도 하겠건만, 알면서도 스스로 속는 실상은 더 고치기 힘든 중병이다. 한국인의 넘치는 우뇌적인 에너지는 과연 알면서도 스스로 속아오고 속여오던 그동안의 실상을 폭로하는 힘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내가 정치를 한다면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나는 때로 정치가 하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가령 내가 책임 있는 정치가,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은 지금보다 가난해 질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가난이 저주라고 배워온 그간의 자기 최면적 둔갑술로 인해 가장 나는 반종교적이고 가장 무능한 정치가로 낙인찍혀 탄핵될 것이다. 아니 애당초 정치의 현장으로 들어설 기회조차 누려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지난 이삼십년간 공부한 바에 따르면, 나는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가는 것이 정치라고 여전히 생각한다. 그것이 종교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브’한 헛된 공상이겠지만, 그런데도 인류의 종교적 천재들은 한결같이 그 헛된 공상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인 것도 분명하다. 한 때 그런 마음으로 목사가 되었다 보니,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나는 마치 습관처럼 여전히 그런 꿈을 꾼다. 한 낮 꿈으로 끝날 공산이 확실할 터인데도... 그래도 그런 꿈에 동의하는 이들이 있다면, 설령 지금보다 가난해지더라도 그런데서 행복을 찾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정치’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다. 그저 공상이지만, 아마도 예수가 정치를 했다 해도, 그런 공상적인 정치를 했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즐거운 지옥의 미래는 그런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장로가 현직 대통령이다. 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만, 그 때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함께 가고 더디 가는 정책을 펼쳤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가 그렇게 많아도, 그 교회에서 더디 가는 정치를 원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대부분 그 반대였다. 아, 이 모순을 어찌 할 것인가. 전 세계가 그리 가려고 애쓰는 마당에 어찌 어느 특정인 탓만을 할 수 있겠는가만, 그래도 늘 아쉽다. 포장과 내용을 혼동하지 말고, 생명이라는 내용이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늘 가슴 한 켠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도 정치하겠다고 나설 필요가 없어진 시대가 ‘하느님 나라’일 테니, 그 때까지 이 ‘모순’은 지속될 것이다. 그런 때가 올 거라는 기대도 사실 별로 없다. 그래도 그 모순이 없는 시대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나의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차라리 반예수주의 선언이나 하고 정치를 하면 모를까,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를 이용하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종교, 그런 정치는 싫다. 교리를 지킨다며 사람을 죽이는 종교는 싫다. 빨리 간다며 여러 사람 버리고 가는 그런 정치는 싫다. 이 땅의 무수한 교회들, 장로 대통령, 차라리, 정말 차라리 창(모)과 방패(순) 가운데 하나는 포기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런 선택의 기로 앞에 있기는 나도 마찬가지이니, 제 숙제도 못하면서 어찌 남에게까지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그런 상상까지 못할 이유도 또 뭐 있겠는가. 구름 위를 날면서 구름 아래 펼쳐지고 있는 즐거운 지옥의 미래를 꿈꾸며, 내 앞 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았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58 | 추천: 0
1차 중동전쟁 60주년 기념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1948년 5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종결과 동시에 발발한 1차 중동 전쟁은 아랍 국가들이 공모하여 이스라엘 국가(팔레스타인 땅의 56.47%)를 파별시키기 위해서 벌인 사건이 아니었다. 아랍 국가들은 처음부터 그럴 의사가 없었고, 그럴만한 군사력도 없었다. 이 전쟁은 ‘1947년 11월 유엔 분할안이 아랍 영역(팔레스타인 땅의 42.88%)으로 명시한 땅을 어느 국가가 차지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영국의 위임통치 종결과 동시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발발한 전쟁은 ‘수적으로 압도적이며 통합된 아랍 군대가 모든 유대인들을 지중해 속으로 처넣으려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전쟁에 대한 ‘다윗과 골리앗’ 버전인, ‘통합된 아랍의 전쟁위협’이라는 선전은 위대한 이스라엘, 유대 민족 국가 창설 신화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오늘날에도 이 신화는 이스라엘인들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면서, 이웃 아랍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태도를 결정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화는 근거가 전혀 없으며, 놀랄만한 것도 없다. 이스라엘은 단독으로 이 전쟁을 치룬 것이 아니었으며, 국제 사회로부터 막대한 외교적, 물질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영국 위임 통치 시절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은 오직 팔레스타인 게릴라들 뿐이었다. 영국 위임 통치 당국은 전략적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무력화시킨 반면, 시오니스트 게릴라 조직들에게는 잘 무장하고 훈련받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시오니스트들은 대부분 제 2차 세계 대전 중 영국군 소속으로 전투 경험을 획득하였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종결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자는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대체되었다. 미국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 선포 즉시 이를 승인하였다. 이후 오늘날까지 미국은 이스라엘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민족회의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정부를 구성하였고, 1948년 10월 1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물론이고 트랜스 요르단과 이라크 정부도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승인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아랍 군대들이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위하여, 이스라엘로부터 팔레스타인 땅을 방어하기 위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작전을 수행했다는 신화는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아랍 국가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도와야한다는 아랍 대중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조차 않았다. 1948년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이 철수할 즈음에 유엔 결의가 아랍 영역으로 명시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자국의 국경들을 확장하려고 시도하였다. 유대 국가에 대항하는 아랍 통합이라는 허구적인 선전은 이스라엘에게 ‘아랍의 적들에게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실체를 강화’시켜야한다는 명분만을 제공해왔을 뿐이었다. 당시 영국의 위임 통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스라엘을 무력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위협할만한 토착 팔레스타인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과 시오니스트들이 이미 이러한 토착 팔레스타인 세력들 대부분을 살해하거나 추방하였기 때문이었다. 1948년 전쟁 초기에 이스라엘 군대는 지중해를 통해서 보급품과 장비들을 받아들였으며, 약 2만 7천 명으로 구성되었고, 잘 정비된 조직 체계, 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여 잘 훈련된 병사들과 막대한 재정적 원조와 정교한 군사 전략을 갖추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정착촌 예비군 약 9만 명도 보유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나크바'(대재앙의 날)를 맞아 주민들이 거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형 깃발을 함께 들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반면 1948년 전쟁에 참가한 아랍 연합(이집트, 트랜스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군대 대부분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고, 적당한 무기도 없었으며, 주로 지역 치안을 담당했던 경찰들로 구성되었다. 아랍 연합 군대 중 어느 정도 잘 훈련되고 적당한 무기가 있는 군대는 영국군이 훈련시킨 트랜스 요르단 군대뿐이었다. 전쟁 초기에 배치된 약 2만 3백 명의 아랍 연합 군대 중 트랜스 요르단 군대는 4천 5백 명 뿐이었다. 그런데 당시 트랜스 요르단군 사령관은 영국인 존 글럽(John Glubb)이었다. 영국이 1921년에 6개월 동안 매달 5천 파운드의 보조금을 압둘라 아미르에게 지급함으로써, 압둘라 아미르는 1921년에 트랜스 요르단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1921년부터 1956년까지 요르단군 사령관은 영국인들(F.G Peak와 John Glubb)이 담당하였다. 당시 이 영국인 군사령관들이 요르단 정치에서 막강한 결정권을 휘둘렀다. 트랜스 요르단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사이의 전투는 유엔 분할안이 아랍 국가 영역으로 명시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스라엘이 공격하면서 발발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은 영토를 유엔 분할안이 아랍 영역으로 명시한 지역으로 깊숙이 확장하여 팔레스타인 전 영토의 78%를 차지하였고, 나머지 22% 중 트랜스 요르단이 서안(West Bank)을, 이집트가 가자(Gaza)를 차지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아랍 연합 국가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파괴시키려했던 사건이 아니었고, 1947년 유엔이 아랍 국가 영역으로 명시한 지역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아랍 각 국가들이 벌인 전쟁이었다. 트랜스 요르단이 주도하는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 국가를 파별시키려고 했다는 신화는 허구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59 | 추천: 0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광우병 쇠고기 촛불모임이 전국을 달구는 요즘, 이명박 정부는 이에 맞서 예의 그 ‘골라내기’ 전법을 시도하고 있다. 전주의 한 고등학교 학생을 수업 중에 끌고 가 배후가 누군지 추궁하였다고 한다. 경찰은 집회 주동자를 ‘골라 내’ 엄단하겠다고 연일 으름장이다. 서울시는 궁색하게도 ‘변상금’ 논리로 연일 이어지는 촛불시위의 오점을 어떻게든 ‘골라내려’고 했다. 그러더니, 광우병 쇠고기 협상의 진실을 알리는데 앞장서 온 언론도 ‘골라내려’ 하고 있다. 모 방송사의 광우병 쇠고기 프로그램이 청와대의 외압으로 애초 계획된 날짜에 방영이 이뤄지지 못했고, 급기야 지난 16일 정부의 이른바 ‘홍보대책회의’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경향신문 같은 언론에 광고를 줄 필요가 있냐”는 얘기도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속한 단체에서는 평화를 주제로 한 아이들의 책을 모아놓고, 지역 곳곳을 돌며 전시하는 일을 하는 데, 이를 위해 한 100권 정도의 어린이 ‘평화책’이 평소 사무실에 진열돼 있다. 그 중 ‘노란별’이란 책이 있다. 동화 ‘노란 별’은 덴마크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어느 덴마크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코펜하겐이 나치에 의해 점령된 후 왕궁에 걸린 나치의 깃발을 내리게 했는가 하면, 그는 평소에도 호위병 하나 없이 코펜하겐의 거리를 둘러볼 정도로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이 컸다. 1941년, 당시 나치는 유태인을 구분하기 위해 유태인들로 하여금 ‘다윗의 별’이라 불리는 노란별을 가슴에 달고 다니도록 했다. 유태인들을 ‘골라 내’ 관리하기 위한 선별과 배제의 조치였다. 유태인임에도 노란별을 달지 않으면 그 즉시 총살형에 처해졌다. 유태인들에게 노란별을 달도록 한 나치의 조치가 내려지자 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군대를 일으켜 맞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고, 가만있어도 사람들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홀로 말을 타고 거리에 나섰다. 그의 가슴에는 노란별이 달려 있었고, 곧이어 덴마크인 모두의 가슴에 노란별이 달리게 된 것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얼마 전부터,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과천시의 주택가 곳곳에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연일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나선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이 작은 실천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정부는 이마저도 불법 논리로 단속을 시도하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 작은 실천조차 ‘골라내야 할’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실천은 지금 전국으로 번질 조짐이다. 가히 ‘노란별 현상’이라 할만하다. ‘미친 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골라내려’는 정부의 선별과 배제의 논리에 맞서 국민들 스스로가 가슴에 노란별을 달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는 앞으로도 온갖 불법논리, 선동, 사주 따위의 논리를 동원하며 ‘골라내고’ 노란별을 붙이려 할 것이지만, 이제 이는 분명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이미 강물처럼 형성된 민의를 거스른다는 것은 스스로 화를 더욱 키우는 꼴이 될 테니. 차라리 광우병 쇠고기 반대에 대한 단속과 검열과 추궁을 멈추고 과연 누가 반대자인지 숙고해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지혜로운 처신이 아닌가 싶다. 나치 치하에서 덴마크 왕은 스스로 먼저 가슴에 노란별을 다는 것으로써, 온 백성의 마음을 모으고 위기를 극복해냈다. 나치 독일군은 당시 어떤 저항도 없이 코펜하겐에 무혈입성 하여 덴마크를 장악했다. 미국의 광우병 쇠고기도 사실상의 무혈입성을 얻어냈다. 독일군의 코펜하겐 무혈입성은 덴마크 왕이 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고, 미국 광우병 쇠고기 무혈입성 선언은 왕(대통령)이 ‘굴복’한 결과이다. 덴마크 왕이 무력으로 저항하고자 했다면 덴마크의 많은 백성들이 죽었을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는 무혈입성 선언을 얻었지만, ‘조용한 저항’에 직면했다. 덴마크 왕이 보여줬던 지혜의 처신을 한국에서는 백성들이 스스로 실천하고 있다. 도시의 광장에서 밤마다 저항과 축제의 촛불이 밝혀지고, 집집마다 현수막이 걸리는 ‘노란별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현 정부가 ‘잃어버린 10년’에 집착한 나머지, 국민에 대한 태도도 10년 전, 아니 20년 전의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국민들의 노란별 현상이 덴마크 왕과 같은 누군가의 선동이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검열과 단속, 억압으로 민의의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치치하의 덴마크에서 독일군들은 유태인들을 ‘골라내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궁여지책 끝에 그들은 덴마크 국왕을 협박하면 국민들의 행동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왕궁으로 국왕을 찾아갔다. 독일군 장교가 “독일군이 두렵지 않소? 당장 노란별을 떼시오!” 국왕인 크리스티안 10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나는 덴마크에서 최초의 유태인이요” ‘섬김의 국정’을 펴겠다던 이명박 정권은 너무 일찍이 그 섬김의 대상이 국민이 아님을 드러내고 말았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17 | 추천: 0
이광조/ CBS PD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을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다. 대통령은 ‘정부가 설마 위험한 쇠고기를 국민에게 먹이겠냐’며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값 싸고 품질 좋은 미국산 쇠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소비자를 위한 결정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정작 그 소비자들은 ‘정부가 국민의 건강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결정을 했다’며 분노하고 있다. 독재자의 폭거에 항거했던 굵직굵직한 저항운동을 제외하고 국민 다수가 이토록 분노하고 자발적인 행동에 나섰던 전례가 있었던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청소년들까지 대거 나선 것을 보면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상황의 이런 심각성은 정부도 또 이른바 보수언론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정부와 몇몇 보수언론들의 진단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됐다. 정부는 광우병을 우려하는 여론을 반미좌파들에 의해 선동된 오도된 여론이라고 규정하고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사실’, 아니 자신들의 신념을 국민에게 설득하기 위해 갖가지 진기한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나부터 먹겠다’는 대통령과 행정부처 구내식당에 미국산 쇠고기를 사용한 꼬리곰탕을 메뉴로 올리겠다는 장관, 광우병에 걸린 소라도 살코기는 안전하다는 국회의원까지. 여기저기서 솔선수범해서 먹겠다는 선언이 잇따르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산 쇠고기가 절대 안전하다며 신문광고를 내고(미국 정부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말이다) 광우병을 우려해 쇠고기 협상 반대에 나선 촛불시위를 두고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운운하며 시민들이 비과학적인 미신에 사로잡혔다고 비난하는 국회의원도 있다. 혹자는 이런 얘기도 한다. 세상에 100퍼센트 안전한 게 어디 있냐고.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골프장에서 벼락 맞아 죽을 확률만큼이나 희박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부 관계자들이나 정부 편을 드는 전문가들의 말처럼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수학적으로 무시해도 좋을 만큼 적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학적으로 확률적으로 무시해도 좋을만한 수치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를 말하는 건가? 광우병이 처음 발견된 영국의 경우 지금까지 약 15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지는 모르지만 혹시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주장하는 분들이 ‘그 정도면 1년 동안 발생하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아니 걱정스럽다. 교통사고로, 각종 강력 사건으로 또는 천재지변으로 이 순간에도 숱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값싼 쇠고기 배 불리 먹고 몇 십 명, 몇 백 명 쯤 희생되는 건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르겠다. 쇠고기 먹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게 평가되는 걸 보면 ‘이밥에 (쇠)고기 국 먹는 것이 공산주의’라는 북한이 언뜻 떠오르기도 한다. 정말 국민들에게 그렇게 값싸고 품질 좋은 쇠고기를 공급하고 싶다면 호주산 쇠고기에 관세를 낮추고 수입을 확대하든지 몽골에서 쇠고기를 수입하든지 대안을 찾으면 될 일이다. 아무리 확률이 낮은 위험이라도 사전에 예방을 할 수 있는 위험을 방치하는 건 상식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용납되기 어렵다. 그 뿐인가. 이런 예방할 수 있는 위험을 방치하는 건 실용을 표방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신념에도 맞지 않다. 왜 그런가. 유럽의 사례를 보자. 지난 1990년 5월 광우병이 처음 발견됐던 영국에서 인간 광우병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당시 영국 농림부 장관이었던 존 검머는 “영국 쇠고기는 안전하다”며, 자신의 딸과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해 쇠고기 버거를 먹는 장면을 연출했다. 다행히 당시 검머 장관의 딸은 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쇠고기 버거를 먹지 않았다고 하지만 검머 장관의 이 시식행사 이후 영국에서는 엄청난 광우병 파동이 불어 닥쳤다. 그 뒤 영국에서는 18만 두가 넘는 소에서 광우병이 확인됐고 이로 인해 약 4백만 마리가 소각 처리됐다. 말이 4백만 마리지, 이건 대 학살이다. 영국만큼 심각하진 않았지만 광우병 파동으로 인해 프랑스와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국가들은 천문학적인 경제적 손실은 물론 대외적인 신인도 하락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뿐인가. 영국에서는 1995년 인간 광우병으로 19세 청년이 사망한 뒤 지금까지 약 150명 이상이 인간 광우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광우병의 잠복기간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50년에 이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2015년쯤부터 해마다 약 2만 명 정도의 영국인이 인간광우병으로 사망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지난 2001년까지 동물 사료를 먹은 애완용 고양이 100마리가 광우병으로 죽었다. 확인된 것만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동물성 사료를 먹은 다른 애완동물들도 광우병의 위험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 위험은 현재 진행형이다. 예방할 수 있는 위험을 방치했다가 만약 미국에서 유럽과 비슷한 상황이 초래된다면 그 후과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미국에서 축산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놓고 볼 때 아마 공황상태가 초래될 것이다. 이런 위험을 방치하고 키우는 것이 미국에 이로운 일인가? 영국을 휩쓴 광우병 파동이 재연되질 않길 바라지만 마냥 안심하기에는 모든 게 너무 불확실하다. 미국은 광우병의 공포가 유럽을 휩쓸던 지난 1997년 동물성 사료 규제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동물성 사료 규제 조치는 반추동물에게 반추동물의 부산물로 만든 사료를 금지했을 뿐 다른 동물의 부산물로 만든 사료는 계속 허용했고 이런 사료정책은 지금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광우병은 반추동물에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종 사이에서 교차 감염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미국의 상황은 불안하기만 하다. 미국의 경우 광우병은 밍크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모피를 만들기 위한 가죽을 벗겨내고 남은 살코기와 부산물은 동물성 사료로 만들어져 소에게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국에서 동물성 사료가 제조되는 과정을 한번 들여다보자. 미국의 공장식 축산업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화제의 책 <성난 카우보이>를 썼고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했다 윈프리로 하여금 ‘햄버거 못 먹겠네’라는 그 유명한 발언을 하게 만든 하워드 리먼은 자신의 책에서 그 과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하워드 리먼은 몬태나 주에서 대를 이어 축산업에 종사했던 사람이다. “농장에서 나온 가축 이외에 사료업자가 좋아하는 또 하나의 재료는 안락사 시킨 애완동물이다. 전국의 동물 수용소에서는 매년 6-7백만 마리의 개와 고양이가 죽어간다. 예를 들어 로스앤젤스만 하더라도 매월 약 2백 톤의 안락사한 개와 고양이를 사료 공장으로 보낸다. 이런 섬뜩한 혼합물을 빻아서 증기로 쪄내는데... 무거운 단백질 원료는 말려서 갈색 가루로 만든다. 그 중 4분의 1 정도는 배설물이라고 보면 된다. 이 갈색 가루는 가축의 사료뿐만 아니라 대부분 애완동물의 사료에 첨가된다. 축산업자들은 이것을 ‘농축단백질’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는 9천만 마리의 육우 가운데 약 75퍼센트의 육우에게 ‘영양가를 높인’ 동물성 사료를 일상적으로 먹인다.” 섬뜩한 광경이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97년 동물성 사료 규제정책을 실시한 뒤에도 이런 현실에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소의 피는 여전히 소의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서는 지난 2003년 광우병 소가 발견된 뒤 지금까지 모두 세 마리의 소가 광우병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됐다. 약 1억 두에 이르는 소를 사육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확률적으로 아주 낮은 가능성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의 경우 광우병 검역체계가 유럽연합이나 일본에 비해 대단히 허술하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2003년 12월 첫 광우병 소가 발견되기 전까지 전체 축우의 0.1 퍼센트에 대해 광우병 검사를 실시했다. 광우병 소가 발견된 이후 광우병 검사 대상이 1 퍼센트로 확대되었지만 다시 0.1 퍼센트로 축소되었다. 이에 비해 유럽연합에서는 전체 축우의 25 퍼센트에 대해 광우병 검사를 실시하고 있고 일본은 모든 축우에 대해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만약 유럽연합이나 일본처럼 광우병 검사 대상을 늘리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더구나 그동안 미국에서 확인된 광우병 소 3마리 중 2마리는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서 뭘 먹고 컸는지 확인조차 못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광우병 파동 이후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정착되고 있는 강력한 동물성 사료 금지조치와 이력추적제, 강화된 광우병 검사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우리 정부의 ‘오역’ 또는 ‘거짓말’과는 달리 미국의 동물성 사료 통제조치는 오히려 후퇴하지 않았는가. 현재 미국의 동물성 사료통제 조치는 소의 월령이 30월 미만인 경우 광우병 여부는 확인도 하지 않은 채 특정위험물질을 포함한 모든 부위를 다른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고 그 가축을 다시 소의 사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무책임한 조치가 아무런 후과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세상에 그런 요행은 없다. 미 농무부가 자체 조사를 통해 밝혀낸 도축과정의 문제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에서 처음 광우병이 발견된 2003년 12월 이후 14개월 동안 도축과정에서 광우병 검역과 관련해 모두 829건의 위반사례가 확인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미국 산 쇠고기를 과연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월령 30개월 미만의 경우 특정위험물질까지 수입하기로 했으니 현재의 합의대로라면 쇠고기 가공품이나 소의 피로 만든 사료 등도 수입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광우병 쇠고기가 수입될 가능성뿐만 아니라 광우병이 국내에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문제가 확실히 개선됐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미국에 가본 사람이라면 적지 않은 미국 소비자들이 ‘grassfed’ 등의 마크가 찍힌 유기농 쇠고기를 먹는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많은 선량한 미국 시민들이 공장식 축산업에 의해 ‘제조’되는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염려하고 있다. 미국 소비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건 광우병뿐만이 아니다. 항생제와 호르몬 남용, 유전자 변형 사료 사용 등 미래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모르는 문제들이 한 둘이 아니다. 미국의 허술한 광우병 예방, 검역제도를 비판하는 건 이기적인, 또는 반미적인 행동이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 소비자는 물론 미국 소비자, 나아가 전 세계 소비자의 건강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지구적인 윤리를 확립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경쟁자는 세계 각국의 지도자’라는 대통령의 말을 기억한다. 무한경쟁시대에 국익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하겠지만 지구온난화나 먹거리의 안전 문제 같은 지구적인 이슈와 관련해서는 윤리적인 경쟁도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에도 세계적인 지도자가 나와야하지 않겠는가. 지극히 현실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더라도 미국 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강화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수입을 하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우선 안전성이 검증된 것부터 하자는 얘기 아닌가. 그 뒤에 미국에서 동물성 사료 강화조치가 제대로 이행되는 것을 확인하고 협상을 거쳐 수입을 확대하면 될 일이다. 소 한 마리 당 광우병 검사 비용이 20달러 정도라고 한다. 검사 두수가 늘어나면 그 비용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미국 산 쇠고기의 신뢰를 확보하는데 이 정도 비용도 지출하기 어렵단 말인가. 당장 전수 검사가 어렵다면 유럽연합 수준으로 샘플을 확대하는 노력이라도 보여야할 것 아닌가.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다. 미국 정부는 자신들이 가공 처리하는 모든 쇠고기에 대해 자발적으로 광우병 검사를 하려던 기업을 오히려 방해했다. 국내에도 쇠고기를 수출하던 ‘크릭스톤팜스’라는 업체가 일본으로 쇠고기를 수출하기 위해 전수검사를 하려다 미 농무성의 제지를 받고 현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가? 난 대한민국 국민만큼이나 선량한 미국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지구적인 차원의 환경과 생명은 어느 한 국가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촛불시위를 반미로 매도하는 분들이여, 미국 시민들의 안전을 진정으로 걱정해 봤는가. 제발 친미 좀 제대로 하자.
2017-07-20 | hrights | 조회: 240 | 추천: 0
안수찬/ 한겨레 기자 1996년 3월, 런던의 봄(이라기보다 겨울)은 음산했다. 회색 구름이 머리 위 50m 상공에서 하루 종일 사람들을 짓눌렀다. 비와 눈이 섞인 진눈깨비가 하루걸러 한 번씩 거리에 흩날렸고, 오후 5시가 되면 해가 졌다. 그 도시에 왜 내가 있었던가. 실연의 상처를 입고 난생 처음 해외로 도피한 것이 한 달이 되고 석 달이 되고 여섯 달이 됐는데, 물론 그런 '고급스런 도피'가 가능했던 데는 아버지가 큰 맘 먹고 가산의 일부를 탕진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난데없이 혼자 지리산을 며칠씩 헤매고, 절에 들어가 한 달씩 눌러 앉고, 선배에게 두들겨 맞아 볼이 퉁퉁 부어 들어오는 장남을 구제하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튼 실연의 청춘이 그 마음을 다져 잡기에 런던의 겨울은 너무 강퍅했는데, 춥고 습하고 배고팠다. 물가는 비싸고 말은 통하지 않고 친구도 없었다. 그때 이따위 감상의 갈피를 사납게 헤집고 들어온 사건이 하나 발생했으니, 이름하여 '미친 소 파동'이었다. 1986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영국에서 '미친 소'가 발견됐다. 10년 뒤인 1996년 3월, 영국 정부는 이 미친 소의 질병이 인간에 감염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비록 10년 동안 끌긴 했지만, 그들의 정부는 그래도 도덕적이지 않나. 스스로 그 사실을 실토하다니!) 기다렸다는 듯 그 해부터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 먹었던 미친 소의 위력이 잠복기를 거쳐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급히 수만 마리의 소를 도살했지만, 영국은 물론 세계가 발칵 뒤집힌 뒤였다. 유럽연합(EU)은 즉각 영국 소의 유럽 본토 반입을 금지했다. 소고기를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BBC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mad cow disease'라는 새 단어를 하나 배웠다. 그건 마치 ‘쌀밥을 먹으면 10년쯤 뒤에 뇌에 구멍이 생기면서 미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설사 그게 말이 된다 해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는가. 아무리 천하의 BBC가 그렇게 보도해도 나는 실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고기를 그냥 먹었다. 아시아에서 온 가난한 이주민이었던 나는 가격이 폭락한 소고기를 왕창 사서 자취방에서 불고기도 하고 두루치기도 하고 스테이크도 해서 먹었다. 10여년이 지난 요즘, 나는 급격하고도 치명적인 기억력 감퇴 증상을 겪고 있는데, 그게 잠복기를 거친 영국 미친 소의 변형 단백질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20여 년 동안 상복한 알코올과 니코틴의 위력이 이제야 발휘되기 시작한 때문인지, 심각하게 헷갈리고 있다. 여하튼 1996년 3월, 영국 사회는 큰 논쟁에 휩싸였다. 광우병을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가 일전을 벌였다. 어느 날 오후, 영국 정부(당시는 블레어 집권 직전의 보수당 정부 시절이었다)는 런던 국회의사당 앞에서 이벤트를 하나 벌였다. 국회의원들이 직접 거리에 나와 영국산 소고기를 '무료로' 나눠 줬다. 내각을 포함한 의원들이 직접 그 소고기를 먹는 시연도 벌였다. 어땠을 것 같은가. 시민들의 반응은 열화와 같았다. 빅벤 시계탑으로 유명한 템즈 강변의 국회 의사당 앞에 런던 시민들이 줄을 서서 그 소고기를 받아 갔다. 다만 줄지어 소고기를 받아간 시민의 절대 다수는 노인이었다. 영국에는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 유난히 많은데, 네 발 달린 보행기나 큼지막한 지팡이에 몸을 기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 '안전한 영국 소고기'를 무지하게 받아 갔다. 어차피 인간 광우병의 잠복기가 적어도 10년 이상이니 그 노인들은 걱정할 게 별로 없었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보수당 정부는 새로운 프로파간다를 시작했다. 이른바 '음모론'이었다. 영국 소의 위험성이 완전히 입증된 것이 아니고, 체계적 검역을 거칠 경우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데도, 프랑스와 독일 등이 영국을 왕따 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치즈는 안전한가? 독일의 햄은 안전한가? - 뭐 이런 질문을 던지며 영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때마침 유럽연합의 주도권을 놓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각축을 벌일 때였다. 오랜 진통 끝에 유럽연합의 꼴이 제대로 갖춰진 것이 1995년이었다. 영국인들이 보기엔 유럽연합의 '단결된 힘'을 과시한 첫 정책이 영국 미친 소 대응책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옛날부터 영국의 성장을 시기한 프랑스, 독일이 유럽연합을 만들어 세를 굳힌 뒤, 미친 소 사태를 과장해 영국 경제에 대한 본격적인 '해상봉쇄'에 들어갔다는 논리였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 음모론은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리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영국에선 샐러리맨들이 미국식 햄버거를 곧잘 끼니꺼리로 애용했는데, 맥도날드와 버거킹이 앞 다퉈 '영국산 소고기가 아닌 호주산 소고기를 쓴다'고 선전했다가 영국인들에게 엄청 항의를 받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들 햄버거 체인점은 한동안 소고기가 들어가는 햄버거를 일체 판매하지 않는 것으로 사태를 모면했던 것 같다. 그때 영국 좌파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생명운동'을 벌였다.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 채식주의자(라기보다는 채식운동가) 등이 노동당 좌파 블록과 연합했다. 주장의 스펙트럼은 다소 넓었는데, 모든 육식을 금지해야 한다는 급진 채식운동가들의 논리부터 식용 가축의 사육만이라도 금지하자는 논리까지 다양했다. 다만 가축이라는 이름을 빌어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방식으로 소를 대량 사육해온 인류 문명이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라는 성찰의 기운은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다. 런던 시내의 극장을 통째로 빌려 '채식 영화제'를 열기도 했는데, 가축의 사육과 도축 과정에 대한 다큐멘터리부터 육식의 반문명성을 풍자하는 단편영화까지 다양한 '고급 프로파간다'가 쏟아졌다. 그 시절 나는 실연의 상처를 잊고 행복해졌다. 불고기를 먹고 부른 배를 두들기며 가디언과 BBC에 등장하는 좌우 논쟁을 즐겼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심지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정책 담당자는 물론 과학자, 철학자 등이 모여 생명, 가축, 육식, 무역 등의 전반을 가로지르는 토론과 논전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보다 이런 공론을 정책적 결과로 결실 맺는 민주주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즐거웠다. 영국인들은 결국 ‘타협과 조정’에 성공한 셈인데, 이후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일을 금지시키고 각종 검역체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소의 뇌·척수 등 광우병 위험부위에 대한 식용을 일체 금지했다. 식용 가축의 '생태적 사육'과 '위생적 유통'을 위한 사회 체제를 갖추는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영국의 검역체계는 광우병에 대처하는 유럽연합 회원국 전체의 모범이 됐다. 유럽연합은 영국의 미친 소를 수입하는 대신 미친 소 대응책을 수입한 셈이다. 미국과 비교할 수 없는 유럽연합의 도덕적이고 과학적인 검역 체계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미국의 미친 소를 다루는 이명박 정부의 허술한 실용주의를 타박하는 것은 두말이 아까울 정도다. 정상적인 보수주의자라면 한국 닭 수입을 금지하는 미국에 대해 연일 비방을 퍼부어야 옳다. AI 조류독감 파동이란 철새에 병원균을 묻혀 반도로 날려 보내는 이웃 나라들의 음모이며, 조류독감에 걸린 닭도 충분히 익혀 먹으면 아무 탈 없으니, 날지도 못하는 닭을 조리하여 식용으로 포장해 수출하겠다는 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떼라도 써야 한다. 그 정도는 돼야 미국의 미친 소와 한국의 감기 닭을 비교급으로 놓고 무역 협상을 벌일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이 그 정도의 역할을 해줄 때, 진보주의자들은 한국의 조류독감과 미국의 광우병 사이에 놓인 ‘생명’의 문제를 짚어 보편적인 생태운동의 차원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다시 한 번, 보수주의자들이 친미주의자가 되고 진보주의자들이 애국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보수 언론이 ‘미국 소가 한국 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니다’라는 기묘한 비교급의 기사를 쓸 때, 그것은 분명 비겁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다만 그 안에는 진보주의자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이 아주 없지 않다. 한국 소는 정말 안전한가? 한국인들이 소를 기르는 방식은 미국의 기업적 축산농에 비해 얼마나 더 생태적인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생태적으로 기른 소를 먹는다는 일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은 동물사료를 먹은 수입소를 먹고 돈 많은 이는 생태적으로 기른 국산소를 먹는 일의 생명권적인 계급 불평등은 과연 시장의 조절기제에 맡겨 해결해도 괜찮은 문제인가? 이런 물음이 사라진 미국 미친 소 파동을 지켜보는 일은 안쓰럽고 쓰리다. 삶의 기본과 국가의 기초를 지키는 몫을 보수주의자들이 하지 못할 때, 그 사회에는 어떤 상상력도 들어설 수 없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학교급식에서 미친 소 볶음밥을 먹고, 하교 길에 분식집에 들러 미친 소 뼈 분말스프 라면을 먹고, 집에 돌아와 미친 소기름 샴푸로 머리를 감을 생각을 하는 나는 '자 이제 우리도 생태적으로 올바른 삶을 위해 전면적인 채식을 시작해 볼까' 따위의 제안을 아이 앞에 내놓을 수 없다. 코앞에 들이닥친 생존의 위협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는 성찰을 할 수가 없다. 미국 미친 소가 싼값에 들어오면 한국 소를 생태적으로 기를 축산농도 생태적으로 길러질 한국 소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분노가 사색을 짓누른다. 저열한 실용주의가 먹고 사는 실용 그 자체를 무너뜨린다. 하여 오늘은 그냥 거리에 나가 미국 미친 소를 들여오려는 미친 사람들에 대해 미치도록 욕하는 것으로 한국 진보주의자 노릇의 전부를 대체하도록 하자. 언젠가 우리도 미친 소와 감기 닭을 앞에 두고 인간과 동물의 생명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면서.
2017-07-20 | hrights | 조회: 247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4776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1945년 해방이 된 후 지금까지 60년 동안 어느 정부도 손대지 못했던 일을 민간단체가 해낸 것이다. 해방 이후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탓에 왜곡된 역사는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친일행위를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왜곡된 역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말이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친일행적으로 얻은 재산과 지위를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 재생산하는 하는 동안,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재산도, 건강도, 목숨도 잃은 채 응당 받아야 할 명예나 포상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잊혀져갔다. 혼란한 근현대사를 살다보니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지 말라. 혼란으로 인해 진실이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명단이 발표되는 기자회견장 밖에서 피켓을 들고 항의를 하고 있는 보수. 극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몇몇 단체들의 시위 장면을 보면서,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수립하지 못한 대가로 우리국민이 얼마나 많은 혼란을 겪었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긴 시간을 혼란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새삼 암담한 마음이 든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4월 29일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4,776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하필이면 3.1절 기념사에서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독립유공자들’에게 ‘과거에 발목이 잡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며 뒤통수를 치던 대통령은, 얼마 전 일본 천황을 만나는 자리에서 상전이라도 만난 듯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더 이상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겠다고 바라지도 않은 인심을 베풀고 돌아오더니, 친일명단 수록 예정자 발표가 나던 날에는 “우리가 일본도 용서하는데 친일 문제는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한다”며 찬물을 끼얹었다. 도대체 누가 일본을 용서했다는 것인지 그리고 친일로 인한 공과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진심으로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은 그동안 우리에게 단 한번이라도 진심어린 사죄를 하지 않았다. 잊을만하면 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총리의 신사참배 강행 등으로 한.일 관계에 불신과 분란을 조장해 왔다. 일본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사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이들에게 피해를 보상해 준 것도 아니다. 용서를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하나도 마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말인가. 내 것을 빼앗아가고도 미안해 할 줄 모르는 날강도를 일부러 찾아가 굽신거리면서 “모든 것을 덮고 용서할 테니 앞으로 잘 지내보자”며 손을 내미는 것과 똑같은 꼴이다. 이러한 굴욕적인 외교를 실용이라고 부르는 정신 나간 언론부터 반성할 일이다. ‘친일로 인한 공과’라는 표현도 그렇다. 물론 친일명단 수록자들 가운데는 개인적인 능력과 노력으로 우리 사회에 기여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공’이 친일이라는 역사적 ‘과오’를 덮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공’은 ‘공’대로 인정하되, 진실은 진실대로 밝히고 역사에 길이 남겨두어야 한다. 이것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공과’를 보는 방법이다. 대통령은 이날 종교지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국민 의식을 바로잡는 일은 정부가 할 일이 아니고 정부는 모범을 보일 뿐”이라면서 “종교지도자들이 국민의식을 바로잡는 일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자리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에게 진심으로 당부한다. “대통령의 역사의식을 바로잡는 일은 국민들이 할 일이 아니고, 국민들은 모범을 보일 뿐이다. 제발 종교지도자들이 나서서 대통령의 잘못된 역사의식을 바로잡는 일을 해 달라.” 정말이지 수준 미달의 대통령 밑에서 살기 괴로운 요즘이다.   이유정 변호사 * 現 법무법인 자하연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 경력 사법연수원 제33기 수료, 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 검사, 법무법인 자하연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등
2017-07-20 | hrights | 조회: 278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