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수준 미달의 대통령 역사의식(이유정 인하대 법대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4:47
조회
274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4776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1945년 해방이 된 후 지금까지 60년 동안 어느 정부도 손대지 못했던 일을 민간단체가 해낸 것이다. 해방 이후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탓에 왜곡된 역사는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친일행위를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왜곡된 역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말이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친일행적으로 얻은 재산과 지위를 이용하여 부와 권력을 재생산하는 하는 동안,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재산도, 건강도, 목숨도 잃은 채 응당 받아야 할 명예나 포상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잊혀져갔다. 혼란한 근현대사를 살다보니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지 말라. 혼란으로 인해 진실이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명단이 발표되는 기자회견장 밖에서 피켓을 들고 항의를 하고 있는 보수. 극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몇몇 단체들의 시위 장면을 보면서,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수립하지 못한 대가로 우리국민이 얼마나 많은 혼란을 겪었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긴 시간을 혼란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새삼 암담한 마음이 든다.

080502web01.jpg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4월 29일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4,776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하필이면 3.1절 기념사에서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독립유공자들’에게 ‘과거에 발목이 잡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며 뒤통수를 치던 대통령은, 얼마 전 일본 천황을 만나는 자리에서 상전이라도 만난 듯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더 이상 과거의 잘못을 묻지 않겠다고 바라지도 않은 인심을 베풀고 돌아오더니, 친일명단 수록 예정자 발표가 나던 날에는 “우리가 일본도 용서하는데 친일 문제는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한다”며 찬물을 끼얹었다. 도대체 누가 일본을 용서했다는 것인지 그리고 친일로 인한 공과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진심으로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은 그동안 우리에게 단 한번이라도 진심어린 사죄를 하지 않았다. 잊을만하면 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총리의 신사참배 강행 등으로 한.일 관계에 불신과 분란을 조장해 왔다. 일본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나 사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이들에게 피해를 보상해 준 것도 아니다. 용서를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하나도 마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말인가. 내 것을 빼앗아가고도 미안해 할 줄 모르는 날강도를 일부러 찾아가 굽신거리면서 “모든 것을 덮고 용서할 테니 앞으로 잘 지내보자”며 손을 내미는 것과 똑같은 꼴이다. 이러한 굴욕적인 외교를 실용이라고 부르는 정신 나간 언론부터 반성할 일이다.

‘친일로 인한 공과’라는 표현도 그렇다. 물론 친일명단 수록자들 가운데는 개인적인 능력과 노력으로 우리 사회에 기여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공’이 친일이라는 역사적 ‘과오’를 덮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공’은 ‘공’대로 인정하되, 진실은 진실대로 밝히고 역사에 길이 남겨두어야 한다. 이것이 균형 잡힌 시각으로 ‘공과’를 보는 방법이다.

대통령은 이날 종교지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국민 의식을 바로잡는 일은 정부가 할 일이 아니고 정부는 모범을 보일 뿐”이라면서 “종교지도자들이 국민의식을 바로잡는 일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누가 할 소리를 누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자리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에게 진심으로 당부한다. “대통령의 역사의식을 바로잡는 일은 국민들이 할 일이 아니고, 국민들은 모범을 보일 뿐이다. 제발 종교지도자들이 나서서 대통령의 잘못된 역사의식을 바로잡는 일을 해 달라.” 정말이지 수준 미달의 대통령 밑에서 살기 괴로운 요즘이다.

 

이유정 변호사

* 現 법무법인 자하연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 경력
사법연수원 제33기 수료, 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 검사, 법무법인 자하연 변호사,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