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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날다 - 이은규/ 전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5:56
조회
295

이은규/ 전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잠자리가 날고 있었다. 날고 있으나 나아가지 않고 공중에 제자리걸음 하듯 날개 짓 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의 폭우로 텅 비어 버린 하늘을 제 세상인 듯 날고 있는 잠자리. 햇볕을 받은 날개는 윤기까지 났다. 잠시 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은 맑은 날씨를 기대해도 되겠다 싶었다. 여름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오전에 잠시 밖에서의 일을 보고 늦은 점심을 집에서 먹었다. 중학생인 딸 현하는 여행 가방을 진작부터 챙겨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부터 주말까지 아이는 청원군 어암리에 있는 수녀원으로 피정을 간다.


 열흘 전, 아빠와 엄마가 방학선물이라며 선사한 피정을 아이는 거부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기가면 친구가 없잖아요, 친구가 없으면 심심하고 재미없어요.” 애초부터 쉽게 응하리라 기대하지 않았었다. “너에게로의 여행을 하는 거야, 침묵하면서 자고 싶을 때 자고, 쉬고 싶을 때 쉬고 하면서 말이지. 무엇보다 수녀님이 초대했잖아, 현하 이쁘다구 하시면서.” 지난겨울 잠시 아이와 나는 수녀원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기억을 상기시켜도 아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거부했다. 할 수 없다 싶어 준비한 협상조건을 제시했다. “피정 다녀오면 옷 사줄게!” 한창 사춘기인 딸이 머리단장과 옷단장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기에 사후 옷 쇼핑을 협상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아이는 울던 울음을 그치고 금세 웃었다(이 순간 나는 내가 당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네! 그럼 갈게요.” 이를 지켜보던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피정도 선물인데 무슨 옷을 사준다고 그래요?” 어찌됐든 아이는 결정을 했고 나름대로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스스로 준비했다. 옷가지며, 세면도구며, 필기도구까지...


 아이는 간단하게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처음엔 고민했지만 나 자신을 알고 싶어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피정을 마친 후의 내 모습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막상 가기로 결정한 후 아이는 오히려 피정을 기다려 왔다.


 청주에서 어암리 수녀원까지는 약 50분이 소요된다. 나는 가는 동안 아이에게 피정에 대한 안내와 수녀원 부근의 산책길과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소소한 정보들을 제공하기로 마음먹었었다.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 제법 한적한 도로로 접어들었을 땐 아이는 잠이 들어 있었다. “헐~” 입맛을 다시면서도 아이가 깰까봐 차의 속도를 늦추었다.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차창너머로 들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비가 내린 후의 날씨는 맛깔나게 선선했으며 주마간산 격이었지만 자연풍경은 여름이 제법 익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호등에 걸려 차가 멈추어 섰을 때 나는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계절로 치자면 딸아이는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서 초여름에 접어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인생이 살고 있다. 다섯 아이들과 아내와 나, 그리고 아이들의 할머니).


 지난겨울과 봄, 크고 작은 소동으로 아이는 우리를 긴장시키고는 했다. 아이 스스로 억울해하면서도 선생님들에게 찍혀버렸음을 알고 있다. 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야생이다. 그런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말뿐이었다. “네 행동에 진중하고 그리고 태도는 당당해라. 우리는 널 믿어.” 내심 나는 아이가 탈학교를 선언해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는 학교는 싫은데 친구들이 좋아서 그리고 비록 꼴찌이지만 공부가 슬슬 재미있어진다고 했다. 나는 아이의 말이 진심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상황을 인내함이든 혹은 어쩔 수 없는 순응이든 그 속마음인들 어찌 알 수 있을까마는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음이다. 이미 생겨버린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팽창시키고 있음을 또한 안다.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해 버린 노회한 부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심초사다. 덜 혹독한 인생의 계절을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며 다툼과 욕망이 판치는 야생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도 있음을 볼 수 있기를 그리고 그런 세계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맛난 진수성찬도 스스로 입에 넣지 않는 한 억지로 떠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안내는 할 수 있어도 선택은 아이의 몫이다.


 수녀원에 들어서자 아이는 차에서 가볍게 내렸다. 정해진 숙소에 짐을 풀어 놓고 아이와 나는 손을 잡고 산책을 했다. 아이는 낯익은 신부님과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하며 어느새 마음을 풀어놓고 있었다. 네 시부터 시작되는 피정일정 시간이 되었을 때 아이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드디어 나 혼자만의 시간이란 말이지. 기대된다. 으흣” 그러면서 “아빠 안녕히 가세요” 하며 돌아섰다. 나는 아이를 불러 세웠다. “현하야 아빠 안아줘야지.” 아이가 다가와 나를 안았다. 아니 안아 주었다(녀석은 나와 떨어져 있음이 서운하지도 않은가 보다). 가볍게 발걸음을 놓는 아이를 보며 오전에 보았던 잠자리가 떠올랐다. 계절은 흐르고 여름은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