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구원투수 이명박 강판 위기?' - 전종휘/ 한겨레21 기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5:45
조회
342

전종휘/ 한겨레21 기자




축구가 감성의 스포츠라면 야구는 이성의 스포츠다. 우선 축구는 시간의 스포츠다. 정해진 시간 안에 누가 더 많은 득점을 하느냐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한다. 전후반 기본 90분을 놓고 인저리 타임을 빼면, 전후반 45분씩 경기를 진행한다. 아무리 경기를 오래 끌어도 100분을 넘어서는 일이 없다. 하지만 일단 전·후반전이 시작되면 45분 동안 거침없이 경기가 진행된다. 비록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지만 그게 선수들의 플레이를 통해서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다. 선수들은 밀물처럼 상대방 진영을 향해 공을 몰고 들어가다 상대편이 공을 차지하게 되면 다시 썰물처럼 수비 진영을 갖추며 자기편 문지기를 향해 빠진다. 감각적인 밀고 당기기 가운데 순간적인 판단이 있을 뿐 감독과 선수의 이성이 개입하기란 쉽지 않다. 선수들이 평소 상황에 따라 훈련해 온 양상대로 경기는 흘러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경기 내용에 대한 감독의 반응이 격렬하다. 자신의 의지가 좌우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으므로...

반면, 야구는 매 이닝마다 상대방에 의해 이뤄지는 플레이에 대한 우리 편의 반응이 그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다. 경기 시간은 매번 다르다. 짧으면 2시간 길면 5시간대이다. 야구의 특징은 투수가 공을 던지지 않으면 타자의 스윙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루상에 주자가 있다면 그 주자의 액션이 투수의 공 던지기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감독의 작전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게 야구의 매력이다. 그래서 야구는 이성의 스포츠이다. 감독이 덕아웃을 뛰쳐나올 때는 심판의 판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뿐이다.

다시 축구 이야기로 돌아가자. 현대 축구에 있어 미드필더의 구실은 갈수록 강조된다. 19세기에 대략 현재의 모습을 갖춘 축구에 있어 오프사이드라는 대단히 오묘하고 특이한 규칙은 20세기 초에 도입됐다. 이로 인해 수비수가 공격수에게 일방적으로 공을 차주고 공격수는 그 공을 받아 골문을 향해 슛을 날리던 단순한 경기 양상이 복잡다단하게 진화하게 됐다. 미드필더를 거치면서 상대 수비의 빈 뒷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틈을 잘 치고 들어가는 축구가 재미있는 축구다. 공의 흐름이 가장 빠르다는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면 현대 축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깨 두어 번 흔들면 수비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스러지고 그 사이 슛을 때리는 공격수 호나우두(브라질)의 한 때 화려한 플레이가 더 눈에 띄게 마련이나, 축구를 잘 아는 사람들은 미드필더가 공격과 수비의 중간에서 어떻게 우리 편에게 공을 배급하고 상대방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느냐를 잘 읽는다고 한다.

반면, 야구는 영원히 투수의 스포츠이다. 상대방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우리 편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지느냐에 경기 결과가 70% 안팎 좌우된다. 배구는 공격수에게 공을 띄워주는 세터의 스포츠이고, 농구도 공을 배급하는 가드의 스포츠인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야구는 투수놀음이기 때문에, 투수의 구실이 매우 명확하게 구분돼 있다. 선발, 중간 계투요원, 마무리가 있다. 선발 투수는 5회가 지나기까지 대체로 3점 안쪽에서 상대방 점수를 묶는 구실을 한다. 그 사이에 우리 쪽 타자 요원들이 점수를 뽑아야 한다. 중간 계투는 선발의 힘이 빠졌을 때 등판해 마무리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겨주기까지 관리하는 구실을, 마무리는 그야말로 상대방 타선을 마지막까지 봉쇄하는 구실을 맡는다.

080507web01.jpg
지난 6일 저녁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사회를 스포츠로 비교해봤을 때 도대체 어떤 구실을 맡은 것일까? 축구로 치자면 공격형 미드필더요 야구로 치자면 구원 투수다. 적어도 이명박을 찍은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중원 싸움에서 밀리고 공 배급이 원활치 않아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감독(국민)이 그라운드에 긴급히 투입한 미드필더다. 미드필더의 덕목은 넓은 시야를 갖고 경기의 템포를 조절하면서 적절한 곳에 공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미드필더가 가만 보니 경기장을 너무 좁게 쓴다. 미국 쇠고기는 별다른 검증 없이 들여오기로 하면서 간과 쓸개를 다 빼어줄 듯 하지만 대북 문제에 있어서는 옹졸하기 그지없다. 공 배분은 더 엉망이다. 그렇잖아도 부자들의 부의 축적과정은 의심스럽고, 소외되고 차별받는 이들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모자라 갈수록 강퍅해지고 있는 이 사회에서 ‘비즈니스-프렌들리’를 내세우며 한 쪽에만 일방적인 애정의 시선을 보낸다.

또한 구원투수 이명박은 지고 있는 야구 경기에 상대 타선을 꽁꽁 묶기 위해 마운드에 섰다. 이명박을 찍은 사람들에게는 그렇다는 얘기다. 그는 어떡하든 상대 타자가 안타를 치고 나가 홈베이스로 들어오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삼진을 잡으면 좋고, 병살을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투수의 맹활약은 필요조건일 뿐이다. 우리 편 타선에 불이 붙어야 조건은 충분해진다. 그런데 이 구원투수가 잇달아 안타를 내어주는가 하면, 사사구를 남발한다. 공 조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걸 저당 잡힌 채 오로지 일류 대학 하나에 목숨을 걸도록 요구받고 있는 학생들에게 방과 뒤 학교에서 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어차피 ‘강제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어불성설의 타율적 상황에 놓인 아이들에게 선택은 없다. 서울대에 학생 한 명이라도 더 보내야 명문 소리를 듣는 교장과 재단 이사장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뻔 한 이치다. 이미 바람은 불었다. 시교육청이 0교시는 계속 불허한다니까 이제는 1교시를 조금 당겨서 수업을 한단다. 학교 수업이 빨리 끝나도 학원 강사의 강의와 자율학습이 기다리고 있으니, 학교의 명성과 부모의 만족을 위한 학생들의 ‘노예 학습’ 시간은 더 늘일 수 있다.

보다 못한 누리꾼들이 구원투수 이명박을 강판시키라며 서명을 하고 나섰다. 더 이상 사적 이익이 공공의 안녕을 갉아먹고, 혈맹에 대한 충성에 민족과 국민의 안녕이 위협당하는 사태를 지켜볼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연일 광화문과 여의도에 촛불을 켜게 만든다. 감독이 투수의 강판을 최종 결정하면 투수가 마운드를 내려오지 않을 재간은 없다. 감독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자신의 구실에 충실할 때 패전투수의 나락에 떨어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자, 손가락 사이에 배어 나오는 땀을 닦으면서, 도대체 진짜 감독은 누구이고 감독의 작전지시는 어떤 것인지 차분히 응시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