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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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청소년들의 인권, 우리 사회가 지켜줘야 한다!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차장 “경수야~ 어서 빨리 일어나야지! 학교 늦겠다.” 경수는 아무 대답 없이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기만 한다. “경수야~ 빨리 일어나!” “아.. 엄마~ 딱 5분만, 5분만 더 잘게요.” 경수 엄마는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지만, 큰 목소리로 다시 경수를 깨워본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빨리 안 일어나!” 거실 시계는 어느덧 6시를 가리키고 있다. 경수는 거실 시계의 시간을 잊은 채 매일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몸의 시계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미래의 주인공’이라는 딱지가 붙은 대한민국 ‘보통 청소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하루 타임스케쥴에 자신을 끼워 넣는다. 밥은 입으로 먹었는지, 뭐로 먹었는지도 모르게 허겁지겁 뚝딱 해치운다. 더욱 피곤한 날에는 속이 쓰려 아침밥을 굶기도 태반이다. 7시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로 향하는 아들의 축 처진 뒷모습에 경수 엄마, 아빠는 마음 속 눈물을 흘리며 고등학교 때만 잘 버텨달라는 자조 섞인 주문을 해본다. 경수는 집을 나선 후,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손잡이를 잡고 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정신이 몽롱하다. 옆에 서 있는 친구와 얘기하고 싶지만, 자신도 그리고 친구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제 정신(?)들이 아니다. 교실에 들어섰다. 자율학습 시간이다. 잠은 오지만, 학교 선생님에게 들키면 혼날까봐 엎드려 자지는 못하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졸고 있다. 1교시 영어 수업이다. 잠을 깨기 위해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왔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지만 이를 악물고 쏟아지는 잠을 참아본다. 하지만 잉글리시는 계속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처럼 흐느적거리며 들릴 뿐이다. 2교시 국사 수업이다. 입시과목이 아닌 터라 어제 학원선생님이 내준 수학숙제를 한다. 저녁 7시, 경수는 보충수업,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마치고, 곧바로 학원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학원 버스가 학교 정문 앞에서 경수를 픽업해준다. 진짜(?) 공부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경수의 엄마가 몇몇 학부모들과 함께 학원계를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실력 있는(?) 학원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학원수업이 끝나고 다시 학원버스에 몸을 맡기고, 집에 돌아온다. 이미 11시가 훌쩍 넘었다. 경수는 지방에 살고 있는 사촌 경숙이가 야자부터 학원까지 1시가 넘어서야 집에 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나마 애써 달래보며 아파트 현관문을 연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응. 그래. 오늘 많이 힘들었지? 간식 준비했으니까 그거 먹구...” 엄마가 얘기하신다. 결국 경수는 허기진 배를 간식으로 채우고 다시 새벽 1시가 넘도록 학원숙제를 한다. 그리고 책상에서 엎드려 자다가, 엄마가 깨워줘서야 침대에 몸을 던져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6시. “경수야~ 경수야~ 어서 빨리 일어나야지. 학교 늦겠다.” 경수는 아무 대답 없이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기만 한다. “경수야~ 빨리 일어나!” “아.. 엄마~ 딱 5분만, 5분만 더 잘게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빨리 안 일어나!” 눈을 비비며 힘든 몸을 겨우 추슬러 일어나는 경수는 순간 ‘데자뷰 악몽’을 떠올린다. ‘어휴~~ 오늘은 새로운 날인데, 어제, 그제 본 일이 또 반복되겠구나.’ 그리고 쓰린 배를 부여잡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의식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난다. 경수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자화상이다. 선발 경쟁 체제라는 입시교육 아래에서, 우리 아이들이 인질로 잡혀있고,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사회이다. 한국사회가 결국 사회적 음모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12일, 서울시 의회 교육문화위원회에서 학원교습시간의 무제한을 골자로 하는 조례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경쟁력 강화와 현 학원들의 연장운영 행태 속 탈세 및 위법행위에 따른 규제 철폐를 내세웠다. 아울러 정연희 교육문화위원장은 모방송 인터뷰에서 “성인들이 일을 하다 과로해서 죽었다는 얘기는 있어도 학생들이 공부하다 피곤해서 죽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기도 하였다. 지난 2007년에도 서울시 의회는 학원교습 연장 조례안을 통과시켰었다. 이에 여러 학부모단체, 청소년단체, 시민단체 등이 연대하여 조례안 본회의 통과를 반대하였고, 결국 조례개정안을 심사 보류하는 결과를 가져왔었다. 하지만 2008년에 들어서자 서울시는 이제 아예 학원교습시간을 무제한으로 하자고 하였다. 여론은 매우 부정적이었고, 참교육학부모회, 전교조, 흥사단, 참여연대 등 여러 단체들이 학원시간연장저지시민운동본부를 발족하여 서울시 의회를 규탄하는 직접행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다행히도 18일 서울시 의회 본회의에서 이 조례안이 폐기되었다.   학원 시간 연장 저지 시민운동본부’ 회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태평로 서울시의회 앞에서 학원 교습시간 24시간 허용 조례 추진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사이, 서울시의회에 방청하러 온 초등학생들이 기자회견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러나 여전히 한국사회, 특히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더더욱 선발경쟁체제로 변질되어갈 것으로 보인다. 정연희 위원장은 학생들이 공부하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통계청의 최근 조사결과에 따르면 2006년 한해 청소년 사망 원인의 2위가 자살이며, 가출경험율 또한 2005년 9.9%에서 2006년 10.9%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에 2008년 1월 (사)한국사회조사연구소의 ‘심야학습과 청소년의 가출 및 자살충동’ 조사결과 보도자료(2007년 10월 조사, 전국 2,838명의 고등학생 대상, 다단계무선층화집락표집 방식)의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업성적 때문에 부모, 교사로부터 동시에 심리적 압박을 받는 청소년들과 새벽별 보면서 집을 나서고 달밤에 귀가하는 등하교 시간이 극단적으로 늦거나 이른 청소년, 4시간미만의 잠을 자서 수면이 극도로 부족한 청소년들 가운데 가출충동을 느끼고, 실제로 가출을 하고, 자살 충동을 느끼는 청소년이 월등하게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결국 학업성적으로 부모와 교사로부터 동시에 심하게 압력을 받는 청소년 가운데 63.7%가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응답하였다. 다시 경수를 떠올려 본다. 내일엔 또 다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희망의 말도 있지만, 매일 아침 6시에 힘들게 일어나는 경수에게는 다가올 내일이 단지 ‘데쟈뷰 악몽’으로 여겨질 뿐이다. 반복되는 데쟈뷰 악몽을 더 이상 맞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악몽을 끊어버리기 위해 자살충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오늘도 죽음과 길거리에서 휘청거리는 경수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엄마, 아빠, 학교와 학원선생님, 교과서만이 주는 희망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감싸줄 수 있는 그런 희망. 그러려면 지금과 같은 선발경쟁 입시체제로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의 인권을 짓밟지 말고, 죽음과 길거리로 내모는 사회적 음모와 범죄 공모를 중단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경수야~ 사랑한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42 | 추천: 0
전종휘/ 한겨레 기자 2002년 6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걸고 서울시장에 당선된 때만 해도 내심 기대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개발시대를 대표하는 그가 다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인다는 점에서는 마뜩찮았지만, 그 취지는 공감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도인 서울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천에 40년 넘게 덮여 있던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그 물길을 다시 사람에게 개방한다는 것은, 폐쇄에서 개방으로, 토목 중심에서 생태 중심으로, 자동차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라는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청계천의 겉모습은 썩 나쁘지 않다. 삭막한 도심의 휴식처로서 제 구실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요새는 그 인프라를 활용한 ‘청혼의 벽’처럼 부가적인 서비스까지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실망스러운 것은 복원의 과정이었다. 건설회사 회장 출신 시장에게 곳곳에 조선시대의 문화재가 숨 쉬고 있는 5.8㎞ 길이의 청계천을 복원하는 데는 2년 2개월이면 족했다. 시민들은 복원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지혜를 모아 해결해나가는지, 그 과정 자체를 즐길 권리가 있었으나 이는 무시됐다. 광통교와 수표교 등 각종 문화재 훼손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일을 추진하는 시청 공무원들은 대권이라는 원대한 꿈에 부풀어 있는 시장님께서 퇴임 전 테이프커팅을 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꾸준히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소외된 것은 바로 시민이다. 3800억여 원의 세금이 투입된 이 거대한 사업의 진행 과정을 느끼고 즐기며 고민하는 과정을 생략 당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위행위와 같다. 남녀간, 혹은 동성 간의 사랑에서는 오르가즘 자체보다 그 것을 향해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지만, 자위행위는 오로지 결과로서의 오르가즘만이 의미를 갖는다. 이명박 시장 시절 이뤄진 숭례문 개방도 같은 맥락에 있다. 개방은 분명 진취적인 행정이었으나 숭례문의 안전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문화재 관련 단체들의 지적은 반영되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런 단체들이 소외된 듯하지만, 결국에는 숭례문 스스로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잿더미로 변하며 정작 자신이 소외돼왔음을 드러냈다. 실용의 이름을 달고 정작 중요한 과정은 생략한 ‘결과의 정치’ ‘보여주기의 정치’의 폐해가 텔레비전 생중계 화면 속에서 가장 스펙터클하게 구현된 사건이었다. 짙푸른 강물과 모래톱, 흰 급류의 조화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 강천보가 들어서면 수장될 운명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명박 대통령은 이제 대운하라는 또 다른 소외의 정치를 시작했다. 대운하 사업이 시작되면,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터클 정치가 이 땅에서 구현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심지어 국립대학인 서울대 교수 100여명이 대운하 반대에 나섰지만 이 대통령의 눈에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반대 여론까지 수렴하되 1년 안에는 공사를 시작한다”는 형용모순의 언어 속에서 ‘개전의 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운하는 다시 수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킬 것이다. 수만 년을 따로 흘러 온 물줄기를 이어놓았을 때 이 땅에 닥쳐올 재앙을 걱정하는 이들, 물높이 확보를 위해 깎여나갈 강변의 풀과 수초 그리고 그 안에 숨고 알을 낳으며 살아온 물고기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는 이들, 이틀 걸려 부산에서 서울까지 물건을 나를 사업자가 어디 있겠냐며 사업 자체의 타당성이 없다고 믿는 업계 관계자들, 개발의 과정에서 마을 공동체가 깨어지고 흩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원주민들까지... 모두가 소외의 대상이다. 사람은 그렇다 치자. 정작 가장 크게 생활 터전의 대변화가 불가피한 공사 대상 강줄기의 물고기들은 논의구조 속에서조차 빠져 있다. 어떻게 보면 그 강의 주인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인근 땅주인들이 아니라 대대손손 그 안에서 살아온 물고기들인지도 모른다. 숭례문은 소외의 대가를 불로써 증명했다. 사람들에게 숭례문은 그냥 돌과 나무를 깎아 만든 건축물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 앞에 흰 국화를 갖다 바침으로써 사람의 죽음에 필적하는 예우를 갖췄다. 이제는 그 국화를 들고 강변으로 달려가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남한강에 사는 누치야, 낙동강이 보금자리인 붕어야, 금강이 제집인 버들치야, 영산강이 고향인 메기야, 너희들은 지금 너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알고나 있니?
2017-07-11 | hrights | 조회: 469 | 추천: 0
- 국고보조금 특혜와 비리, 문화관광부도 책임 져야 손상훈/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사무국장 최근 방송에서는 종교인의 과세에 대한 논쟁이 한창인데, 이제는 논쟁의 흐름이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게 해야 한다는 주장과 모두 내게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고 있는 상황이다. 연봉 1억 원 이상의 고액 수입이 있는 종교지도자의 경우, 세금을 내야 한다와 그렇지 않다는 논쟁이 뜨겁다. 우리나라의 종교정책을 담당하는 문화관광부 종무실은 이런 논쟁에서 너무나 겸손해 보이다 못해 자유로운 느낌마저 든다. 세금을 걷는 문제와 더불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궁금했고, 종교계에 어떤 특혜를 주고 있는지 아니면 정당한 예산을 사용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었다. 한 시민단체의 문화관광부 종무실 정보공개청구 회신 자료에 따르면 2008년 종무실의 예산 정책방향이 첫째, 다종교 사회의 종교간 화합 및 이해 증진, 둘째, 종교자원을 활용한 국민여가문화 확대, 셋째, 전통 종교문화자원의 보존 및 계승 세 가지이다. 그리고, 2008년 1년 예산은 일반회계 275억여 원으로 2007년에(239억여 원)비해 36억여 원 증가했다. 이런 예산가운데, 종교문화활동 지원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종교정책 및 국제종교교류 등 협력사업 항목은 있으나, 국내의 쟁점이 되고 있는 과세 문제는 2008년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2009년에는 포함될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부서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될까? 오는 하반기 예산심의를 지켜보고 모니터해야 할 항목을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불교계 관련 여러 가지 예산지원이 매우 많은데, 종교문화기반구축(227억 원) 가운데 한글 대장경 전산화 등 수년에 걸친 사업에 약 20억 원, 전통사찰보존법에 근거하여 전통사찰보존정비사업(93억 원), 대한불교 진각문화 전승관 등 종교문화시설 건립에 40억 등이 올해 예산으로 책정되어 있다. 전통사찰보존정비사업은 지난 10년간 416억여 원이 지원되었으며, 2007년 한해만 153개 사찰에 약 90억 원이 지원되었다. 문제는 이런 예산이 집행된 후 정상적인 검증 절차를 거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광부 종무실이 제시한 아래 도표를 보면, 나름대로 검증절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만 조계종 교구본사 2개 이상에서 국고보조금 횡령 유용 사건으로 교구본사 주지가 구속되거나 처벌을 받았다. 종교인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주장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2006년에 있었던 종교비판자유실현시민연대 회원들의 시위 모습.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문광부는 전통사찰지원 선정기준은 대상시설물인 불전·법당시설, 선원(선방) 등의 보수 시급성, 사업내용, 시·도 우선순위, 기 지원 실적 등을 종합하여 승려, 학계 및 문화예술계 전문가로 구성된 전통사찰심의위원회 (9인 내외)의 심사를 거쳐 선정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비 사업으로 선정된 각 사찰의 사업보고 및 정산보고 내역은 각 시·군·구에서 정산서를 보관하고 있다고 밝혀 총괄적인 관리 기능에 허점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매년 조계종 등 전통사찰에서 일어나는 국고보조금 횡령 유용 사례가 개별 사찰의 문제점과 동시에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는 지자체와 문광부에도 문제가 있음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전통사찰 국고보조신청 지원 절차 : 출처. 문화관광부 종무실 특히 종교문화시설 지원에 대한 문광부의 정산보고 점검시스템에 문제가 많다. 조계종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및 박물관 공사에서도 국고가 유용될 뻔 한 사건이 일어나더니, 태고종 총무원장 운산스님이 국고보조금을 편법으로 타낸 혐의로 지난 2월 26일 불구속 기소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오광수 부장검사)는 가짜 서류를 꾸며 편법으로 국고보조금 60억 원을 타낸 혐의(보조금의 예산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장 이규범(65.법명 운산)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운산 총무원장은 2004∼2005년 신도와 교단 산하 사찰 주지로부터 잠깐 돈을 빌려 통장에 60억 원이 있는 것처럼 잔고증명서를 만든 뒤 이를 문화관광부에 제출해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건립을 위한 국고보조금 60억 원을 타낸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공사비 102억 원을 123억 원으로 부풀려 보조사업 실적보고서를 작성해 문광부에 제출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태고종총무원의 한 관계자는 “종단의 재정이 열악해 자부담금 60억 원을 다 채우지 못해 생긴 일이나, 횡령 등 개인적인 문제는 없다고 검찰에서도 확인한 것으로 안다”며 “전승관 내 3천불전 조성 불사를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지난해 태고종 내부로부터 제보를 접수해 지난 1월 내사를 마쳤다고 한 종교계 언론은 전하고 있다. 문화관광부 내부의 기준과 엄격한 중간 정산보고 절차가 있었다면, 예방할 수 있었거나 관례적으로 해온 일인데 억울하다고 하소연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종교문화시설 건립사업의 법적근거를 문광부에 질의한 결과, 별도의 직접적인 법적 근거는 없으나 정부예산 편성은 최종적으로 국회 심의를 거쳐 확정되므로 국회 심의 확정 자체가 법률적 효과를 나타내므로 사업의 법적근거가 된다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종교문화시설 건립사업의 지원기준과 지원절차를 보면 아래와 같다. < 종교문화시설 건립사업 지원 절차 > 사업자 국고보조 지원신청 → 사업내용 검토(문화관광부) → 지원필요성 여부 결정(문화관광부) → 예산확보(기획예산처, 국회) → 국고지원(문화관광부)→사업시행(국고보조신청사업자)→사업결과보고(국고보조 신청 사업자) 출처 : 문화관광부 종무실 문화관광부는 조계종의 경우,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등 종교문화시설의 사업결과 보고 당사자인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에게 결과보고를 위임하고 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다는 지적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은 지점이다. 지난 2007년 대한불교 진각문화 전승원 조성에 40억 원, 전통 선 차 문화 체험센터 건립에 5억 원, 국제선체험선터 건립에 7억 원, 한국선교역사기념관 건립에 15억 원을 집행하였다. 태고종 총무원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국고보조금 집행에 대한 엄정한 중간 검증과정이 만들어 져야 할 때이다. 세금을 걷는 것 문제도 엄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하며, 쓰는 일도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검증기준이 필요하다. 문화관광부 지금이라도 국고보조금 지원 및 사업 예산 정산기준에 대한 정비에 적극 나서야 한다. 오늘도 최저생계비는 커녕 인간의 존엄마저 위협당하는 매일 만나는 빈곤층을 만나면서, 종교계의 주는 특혜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관광부의 해명이 궁금하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560 | 추천: 0
이라크 난민 친구들과의 이틀간의 재회 1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이 공간을 통해서 요르단에 있는 이라크난민 아부 아핫메트 가족을 몇 차례 소개 한 적이 있다. 그들은 2003년 말에 전쟁과 죽음의 위협을 피해 무작정 이라크에서 요르단으로 넘어왔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에서 발급되는 난민증으로 6개월마다 자신들의 신분을 재갱신하며 요르단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과 헤어진 지 1년 반이 되었던 올해 초 6일 동안, 정말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났을 때 만남의 기쁨이 더 큰지, 또 다시 헤어졌을 때의 슬픔이 더 큰지 알아보기 위해 그들이 있는 요르단으로 향했다. 중동지역의 허브로 각광받는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공항 면세점 사진 출처 - 필자 한국에서 중동에 있는 국가로 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직항편이 없기에 한번 내지는 두 번 정도 환승을 해야 하고, 환승하는 시간도 만만치 않아서 가는데 에만 꼬박 하루 24시간 이상이 걸린다. 이번에 나의 경우에도 거의 24시간을 비행기와 공항에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그리운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는 설레임과 기쁨, 이런저런 생각은 그 시간이 지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제일 먼저 할까? 내 친구들이 준비한 선물은 좋아할까? 꼬마들(아이들: 아핫메트, 자하라, 디아나, 후세인)은 많이 컸겠지? 아저씨, 아주머니(부모님)는 일을 하고 있을까?......’ 요르단 암만에 도착하였을 때 처음으로 나를 맞이하는 건조하면서 매서운 바람은 가물가물했던 요르단의 겨울을 다시 기억나게 했다. 아마도 많은 한국사람들이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중동이라고 해서 일년내내 더운 것은 아니다. 특히 지중해와 가까운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라크 북부지역은 겨울(그곳에서는 우기(雨期)로 불린다)에는 눈도 내리고, 내복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존재한다. 재밌는 것은 요르단 암만(수도)의 경우 흔치는 않지만 겨울우기에 눈이 많이 와서 도로에 쌓이면, 학교 및 관공서는 차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로 열지 않는다. 실제로 나에게도 재작년쯤에 눈이 많이 왔고 어렵게 버스를 타서 요르단 대학교에 갔는데, 학교 문이 굳건히 잠겨 있어서 허탈하게 돌아왔던 적이 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이후 점령이 지속되고 이라크 내부 사회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이라크 전체인구의 1/7인 420만 명의 이라크인들이 인근 국가 또는 이라크 내부 난민이 되었다. 이 중 요르단에는 약 70만 명의 이라크 난민들이 있으며, 이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그룹은 점령초기 이라크 내의 위험을 피해온 돈 많은 사람들이고 이들은 요르단에서도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낸다. 그리고 나머지 그룹은 아부 아핫메트와 같이 생명의 위협을 피해서 아무것도 없이 요르단으로 넘어온 난민그룹이다. 그들은 대부분 암만 외곽의 캠프에서 지내거나, 해외NGO에서 운영하는 난민캠프, 그리고 암만의 두와르 싸니(‘두번째 서클’이라는 뜻) 불리는 곳에서 집단으로 지내고 있다. 물론 NGO들에 의해 교육과 사회서비스면에서 조금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대다수의 난민들은 요르단 정부의 단속과 추방, 무직으로 인한 빈곤, 난민이라는 사회적 차별 등등 다층적 억압과 차별 속에서 지내고 있다. 암만내 이라크 난민 다수와 요르단 사람 소수가 모여지내는 두와르 싸니 사진 출처 - 필자 아부 아핫메트가 지내고 있는 곳은 두와르 싸니이고, 이 곳은 이라크 난민 다수와 소수의 요르단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곳으로 암만내에서는 고지대에 속한다. 한국으로 치면 1960년대 서울역 부근의 해방촌처럼 높은 고지에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는 곳이다. 깜짝 놀라게 할 생각에 숙소근처에서 택시를 타고 전화한통 없이 아부 아핫메트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면서 해맑게 웃을 그 집 아이들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집 근처에 도착해서 살금살금 그 집 앞에 당도해서는 큰소리로 “아부 아핫메트, 얘들아, 저 셀림(아랍어 이름)이에요. 제가 왔어요!!!”라고 하자 3~4초간 시간이 흐른 후 집안에서는 우당탕탕!! “뭐? 셀림이라고?” “와!! 셀림!!!” 우당탕탕!! 그리고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났고 1년 반 만에 다시 만난 서로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아부아핫메트 가족, 저녁이라 그런지 사진이 어둡다 사진 출처 - 필자 나를 향해 뛰어 오고 있는 막내 후세인 사진 출처 - 필자
2017-07-11 | hrights | 조회: 563 | 추천: 0
장윤미/ 국민대 학생 “추운날씨에 감기조심 밥은 꼭 먹고. 늙어가는 애비” 그렇지 않아도 날씨가 너무 추워져서 몸과 마음이 살얼음처럼 위태로운데 문득 날아온 아빠의 문자에 찬물이 쏟아져 내리는 듯 마음이 아릿하다. 답 문자를 보내본다. “아부지도 추운날씬데 몸조심하세요. 아부진 술안마시면 젊어집니다. 같이 늙어가는 딸내미가” “근데 아부지 이제 안 늙도록 딸내미가 빨리 자리 잡아야 할 텐데...” 이제 25살 대학 휴학생인 나는 올해 시작부터 유난히도 흔들렸다. 지난날에 대한 반성, 현재의 가치관, 미래에 대한 고민 그런 것들은 내 머리를 흐르고 흐르다 결국은 현실적인 문제로 수렴된다. 전파를 타고 흐르는 라디오 뉴스는 나를 더욱 방황하게 한다. “2008학년도 주요 대학들의 1년 평균 등록금이 1000만 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주요 국립대와 사립대들은 올해 등록금을 최저 5%에서 최대 30%까지 인상할 계획인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벌써 네 번의 학자금대출을 받았다. 매달 말 통장에선 몇 번씩 대출이자가 잔액을 깎아 내린다. 한두 번 받던 대출에도 나중에 갚으면 되지 했는데 이젠 불안하다. 예전처럼 졸업 후 다 갚으면 돼 하는 자신감은 사라진다. 졸업의 문턱에 취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취업준비생이라는 말이 당연시 되고 있는 때에 그 기간마저 계획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나 하나쯤 먹고 살 걱정은 안 된다 해도 등록금 빚을 갚기엔 부족할 것이고, 노후대책을 늘 걱정하시는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줄 자신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대출을 갚기 위해 40년 동안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될까봐 서글퍼지기도 하다. 등록금은 오르는데 그만큼 나를 둘러싼 환경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 학비에 부모님들은 늘 걱정 또 미안해하시며 더 늙어 가신다. 그렇다 해도 난 대학을 포기할 순 없다. 초등학교 졸업만큼 당연한 배경이 되어버린 대학을 포기할 만큼 난 뛰어나지도, 용기가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일까? 지구를 떠받치고 우주를 품고 싶었던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중력의 힘보다 약해지며 자꾸만 키가 줄어들고 결국은 바스스 흩어져 버리는 것만 같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나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대학등록금 1000만원시대] 이자 내기도 버거운 취업난 ‘88만원 세대’ “가장 무서운 게 등록금 고지서” 그런데 말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끼는 데도 자꾸만 외롭다. 이건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일 거다. 우리는 그저 옆 사람의 말에 끄덕거리고 토닥거려줄 수 있을 뿐이다. 우린 지독한 생존 문제에서 벗어난 세대지만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을 한다. 변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나아졌고 또 그만큼 나빠졌다. 적어도 굶어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세상이 정해준 기준에 따라가기엔 여전히 숨차다. 그래서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들어’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견고히 쌓인 모형 같지만 어딘가 구조가 틀어진 건 아닐까 하고. 그 사이에 끼어 우리가 신음하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대학생들에게 제 목소리를 내게 하고 공동체를 다시금 활성화 시켜보자고 친구들과 고민하고 기사를 썼다. 등록금 문제에 대해서 본질을 파고들지 않고 기계적 중립성만을 보이거나 성공사례를 보여주며 희망을 고문하는 대학 잡지들이 싫었다. 딛고 있는 현실을 바꾸기보다 빨리 버리고 떠날 수 있기를 바라는, 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발버둥 쳐야하는 우리네 모습이 서글펐다. 하지만 이젠 내가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잖아’ 라는 말을 많이 할수록 나는 어리석은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늘 생각했지만, 이제 나는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가는 만큼 보수화되지 않기를,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라고 칭얼거렸던 내 모습이 철없다 느껴지기도 하다. 차라리 철들지 말아야지 했던 내 바람도 수면의 경계를 넘나들며 허우적거리고 있다. 새해에 내려간 고향에서 엄마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세상 탓 하지마라.’ 그 한마디에 고집스럽게 움켜쥐고 있던 내 나침반을 도둑당한 기분. 대체 어떤 노력을 해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걸까.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명절이 다가오면 친척들 만나기가 괴로운 사회지 않은가. 다시금 나는 거리를 방황하다 중력에 충실한 비를 맞으며 아스팔트 땅에 붙을 만큼 자꾸 작아진다. 아아. 당분간 나는 많이 앓을 것 같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532 | 추천: 0
손상훈/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사무국장 대통령선거도 끝난 마당에 아름다운 성탄절 분위기를 느끼고, 행복한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 글은 조금 결례가 되고 딱딱한 글이다. 그럼에도 충남 태안에서 좋은 일을 해 보겠다고 참여했던 분들의 마음을 모아 용기를 내본다. 함께하지 못해 마음이 개운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면 더 살펴보고 싶다. 인권 영역에서 종교를 이유로 한 차별 문제를 위해 고민했을 때, 여러 번 제시 된 사례이고 대학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강남대 이찬수 교수 문제를 위한 장기적 해결과제도 사립대학의 근본문제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신년을 맞이하는 새로운 각오로 괴롭고 반성하고 싶은 마음에서 연구원의 조사활동에서 제대로 발표하지 못한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찬수 교수 대책위 활동 모습 필자가 활동하는 연구원에서 2007년 상반기에 종교계 설립 사립 대학교 34개를 대상으로 교직원 및 조교 선발 등의 실태조사를 진행한 결과, 확인이 불가능한 일부 몇 학교를 제외하고 15개 학교가 정관으로 특정종교신자여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임용 공고에 특정종교신자로 자격을 제한하는 내용을 명시한 경우는 25건에 이르렀다. 학생 자치기구인 동아리 설립에 있어서, ‘학교의 건학 이념’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규정으로 못 박은 학교도 2곳이나 되었다. 우리나라처럼 사립대학이 80%를 차지하는 대학에서 건학이념이나 종교이념에 의하여 특정 설립자 개인의 교육이념이나 특정 종교에 맞는 사람만을 고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공교육의 목적을 달성하기란 곤란해진다. 종교가 다른 사람은 학내 구성원 진입이 막혀있지만, 이런 대학들이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지원 받고 있다. 심지어 로스쿨 신청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이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못한 것은 ‘종교’에 대한 너그러움, 그리고 ‘대학’이라는 보호 심리가 작동했기 때문은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신규 임용을 신청하는 박사들 또한 인권 차별침해당사자 이면서도 학계 전체에 미운 털이 박힐까봐 주장하기 어렵고, 학교구성원으로 지내기 위해서나 고용불안 등을 이유로 차별 현실에 대해 직접적인 문제 제기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된다. 특정종교인만 대학교수로 사립대학의 인권차별 대부분의 종교사학이 교원인사규정에 자격 요건 중 건학이념과 연관되는 종교에 대한 문구를 언급하고 있고, 정관에 명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채용 공고 등에서 특정종교신자로 자격을 제한하고 신자증명서 등을 제출서류로 공지하고 있다. 특히 동국대, 서울여대 등 일부학교는 정식직원이 아닌 행정조교 등의 채용 시에도 불교도신행증나 교회출석증명서 또는 세례증명서 제출을 요건으로 정해놓고 있었으며, 이것은 명백한 차별행위이다. 학교 내에서 인사문제에 있어 종교로 인한 차별이 없음을 회신한 학교는 조사학교 34개 중 3개 대학 뿐 이었다. 공식적인 답변을 하지 않은 학교들은 종교 강요나 차별이 개인의 종교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하거나,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킬 것을 염려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판단된다. 비록 학교 인사규정상 종교와 관련한 문구가 없다 하더라도, 임용지원자 및 누구나 볼 수 있는 게시물에 특정종교이념에의 실현을 요구하는 것은 타종교인 및 무교인 에게 심리적인 차별로 다가올 수 있다. 또한 직무와 관계없는 항목인 “교수임용지원서”의 ‘종교’란 기재는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종교로 인한 차별행위는 단순한 차별을 넘어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함과 동시에 평등권과 직업선택의 권리도 침해하는 것이다. 교원 차별보다 종교에 따른 동아리 간 차별 현황은 조사하기가 더 쉽지 않았다. 대학에서의 동아리와 관련된 사항은 ‘동아리연합회’와 같은 학생자치기구에 일임하여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운영주체가 학생조직이다 보니 연단위로 구성원이 바뀌어 연속성이 약하고, 정식으로 질의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힘들었다. 각 학교당국의 총무처나 학생처 등의 담당부서 종교동아리 현황과 차별규정이 있는가에 관한 응답을 바라는 공문을 보냈지만, 회신을 취한 곳은 1개 대학뿐이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종교차별로 볼 수 있는 사례를 유형화해보면 첫째, 종교계 학교에서 종교가 다른 학생을 대상으로 한 타종교 교육에서 오는 갈등, 둘째, 종교계 학교에서 타종교인에 대한 채용기회의 박탈 내지 차별, 셋째, 특정종교의 교육을 필수이수과목으로 선정하는데서 오는 갈등 등이 있다. 시민단체 대표들이 2007년 10월 학교에서 종교교육과 의식 활동에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인권 기준을 마련하라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왼쪽부터 류상태(학교종교자유 시민연합 실행위원), 강의석씨(서울대 법대3학년), 박광서(종교자유정책연구원 공동대표), 장은숙(참교육학부모회 부회장), 오창익(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사진 출처 - 필자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주요 쟁점으로 등장하는 것이 종교계 사립학교의 자율권이었다. 특정 종교적 이념에 의하여 설립된 학교의 경우 건학이념에 따른 인사, 교육운영을 할 수 있다는 학교법인의 자율권이 주장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립학교법인의 포괄적 인사권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대학자치의 범주에 학교법인을 포함시켜 종교적 채용차별을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공교육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의 문제가 사안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립학교가 종교계이든 아니든 공교육의 영역 안에 있고, 공교육의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은 국가가 특정 종교에 대해서 교육상의 특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 종교적 설립취지와 무관하게 교육영역은 학생들의 교육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는 것을 더 우선시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 서면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둔 고용은 차별에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고, 종교자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공교육의 영역 외부에 사립대학이 설립된다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대학에서 고용상의 차별이 있는 경우 합리적 차별에 해당하는지 검토가 필요하다. 사립대학에서 현재 발생하고 있는 종교에 의한 차별은 합리성이 없는 위법한 차별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 헌법상의 평등은 주로 법 앞에서의 평등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차별을 금지하는 구체적인 법률이 없는 상황에서 차별행위가 있더라도 문제시되지 않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2007년 정부가 입법예고한 차별금지법, 그런데 이 법의 입법과정에 종교계 주장이 반영되어 크게 수정되고 손질되었다. 다시 국회에서 논의되겠지만, 악의적인 차별 등 벌칙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의문 시 되는 이 법의 제정과정을 지켜보고 또 다시 실천해야 할 일이 과제로 남아있다. 종교를 이유로 한 대표적 차별사례, 특정 종교인만 신임 교수로 채용하는 사례, 이제는 상식적으로 바꿔보자. 2008년에도 인권발전을 위해 더 관심 있게 지원하고 작은 역할이라도 조금씩 맡아 보자. 태안에서 봉사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면서 제대로 변화시켜 보자.
2017-07-11 | hrights | 조회: 631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대선, 삼성 특검, 태안 기름유출, BBK 동영상......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건 소식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피곤하기까지 하다. 피곤한 내 뇌를 위해서 눈과 귀를 닫고 휴식을 취하고 싶지만 연말이라 각종 송년회와 모임이 있고, 또 조금만 있으면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니 당분간 휴식을 취하기는 힘들 듯 하다. 2005년 12월 25일, 당시 요르단 대학에서 아랍어를 공부하고 있던 나는 이슬람 국가이기에 크리스마스 날에도 수업을 하는 줄 알고 학교에 갔다가 학교 정문이 닫혀있는 것에 당황했고, 학교 수위 아저씨에게서 크리스마스 날은 공휴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야 크리스마스 몇 주 전부터 한 동네마다 몇 개씩 있는 교회나 성당의 트리장식을 통해서 크리스마스가 언제인지, 교인도 아닌 나에게 한국에서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의미 있는 날인지 부지불식간에 알게 되지만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요르단에서는 달력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일 년 중 어느 한 날로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한국처럼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지는 않지만 이슬람 국가에서도 크리스마스 날은 공휴일이며, 많은 무슬림들은 예수탄생의 날을 축하하고 서로에게 선물도 주고받는다.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믿고, 예수의 지위를 신(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예언자로 간주한다. 잘은 모르지만 교리 상으로 보면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고 공통적으로 하느님(야훼, God, 알라)을 섬기는 유일신교라고 하니 이는 내가 그때가지 얼마나 이슬람을 모르지 지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시 돌아가서 2005년 12월 25일, 학교를 공친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밀린 빨래와 집안 청소를 한 다음 저녁에 무엇을 할지 고민했었다. 당시 같이 공부하던 외국인 친구들이 크리스마스파티를 계획 중이었고 나는 초대를 받은 상태였지만, 내가 살고 있던 집의 아래층에는 이라크 난민가족이 이사를 와 있었고, 딱히 교인이 아니기에 크리스마스를 축하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었지만 아랫집 난민가족의 아이들이 눈에 많이 밟혔다. 그래서 술과 익숙함이 있는 파티에 갈건 지, 그냥 음식들을 사서 아랫집으로 내려갈지 상당히 고민하다가 그냥 아랫집으로 내려갔다. 그날 그 집 식구들과 술 없는 과자파티를 함께 하면서 찍은 가족사진. 근데 막내 후세인이 없다 사진 출처 - 필자 그 집에 아이들이 총 5명이었는데, 그 녀석들은 나의 갑작스런 방문에 많이 놀라면서도 너무도 반갑게 반겨주었다. 이라크에서 피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였기에 매일 일하러 나가는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집밖에 잘 나가지 못하고 아이들에게는 친구들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 녀석들에게 나는 최초의 친구가 된 셈이었다. 덩달아 나도 흥에 겨워 그들의 부모님의 허락 하에 다시 슈퍼로 가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과자들과 음료수를 잔뜩 사가지고 나름대로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였다. 개인적으로 성인이 되고 난후 처음으로 술이 없는 크리스마스 파티였고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자리였지만 정말로 너무도 따스하고 흥겨운 파티였다. 특히 아이들과 놀 때는 그다지 언어가 필요치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막내 후세인은 먼저 골아 떨어졌다 사진 출처 - 필자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뭐하고 그렇게 재밌게 놀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진도 찍었던 것 같고, 그 집 아빠가 아이들의 얼굴에 그림을 그렸는데, 웃기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왜 한지도 모르겠고......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그날 밤 계속 웃고 떠들었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 억지로 아이들을 재우고 그 집 아빠와 엄마와 함께 차이(아랍차)를 마시고 내 집에 올라와 잤다는 것이다. 그 이후 나는 그 네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요르단을 떠나온 작년 9월까지 참으로 많은 날들을 그들과 함께 했다. 많은 모임과 일정들로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요즈음이지만 2년 전 이맘때를 생각하면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들이 하루빨리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또 한 번 기도해본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95 | 추천: 0
장윤미/ 국민대 학생 으리으리한 서울역을 등지고 높다란 건물사이의 갈라진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동자동 쪽방촌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건물들에 시선을 멈추고 살짝만 건물 안을 들여다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내부가 보인다. 겨울인데도 좀 따뜻하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잔혹하고 차가운 겨울이다. 주머니에서 손을 잠시만 빼도 벌겋게 퉁퉁 붓는 날씨에, 친구와 함께 동자동 쪽방을 찾았다. 취재를 하기 위해 쪽방 건물들 앞을 한참이나 서성거렸다. 일단 쪽방 건물에 있는 낡은 슈퍼로 들어가선 따뜻한 베지밀을 두 개 샀다. 소박하지만 지나치지 않게 우리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찾은 동자동 쪽방엔 대부분이 독거노인이 있었다. 첫 번째 만난 할아버지는 독거노인에 기초생활수급자셨다. 방으로 들어서니 1평 쪽방에 두 명이 앉기도 힘든 공간이다. 그 작은 공간에 텔레비전이며 이런저런 음식거리들이 있었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한기가 느껴진다 싶어 춥진 않으시냐고 물어보니까 전기로 방 금방 데워진다며 괜찮다고 연신 손사래를 저으셨다. 사진 출처 - 필자 “방세는 한 달에 17만원. 내가 기초수급권자라서 한 달에 40만원이 나오는데 방세내고, 반찬사고 하면 별로 남는 게 없어요. 또 공공근로 같은 것도 나이 많다고 시켜주지도 않고. 일 하고 싶어도 못하니까.” 평소에 집에 있으면 뭐하시냐고 물어봤다. “아침 10시쯤 되면 전철타고 나가. 나 같은 노인은 전철비가 공짜라서. 전철타고 강남이나 의정부, 인천 같은 데 내려서 한 5,6층짜리 아파트로 가요. 아파트 가서는 경비아저씨한테 힘들어서 나왔다고 얘기 잘하면 가끔 들여보내주거든요. 그러면 아파트 벨 눌러서 힘들다고 좀 도와달라하면 천원, 이천 원씩 주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돌아다니면 하루에 칠, 팔천 원은 벌어요. 그렇게 나가서 한 오후 3시쯤 다시 집에 와요.” 이 얘기를 듣는데 목이 콱 메었다. 할아버지는 어릴 적에 전쟁으로 어머니를 잃고 젊었을 땐 동대문시장에서 짐 날라주는 일을 하셨단다. 그런데 너무 가난해서 내 운명이 왜 이런가 싶어서 인천행 지하철을 타고 끝까지 가서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도 생각했단다. "젊을 때는 죽을 생각도 많이 했지. 너무 가난하니까. 내 팔자는 왜 이러나하면서. 인천행 지하철타고 끝으로 가면 강이 나와. 거기서 죽으려고 했었는데, 죽지는 못하겠더라고." 험난한 삶의 굴곡을 가진 할아버지는 지금 그러나 아주 긍정적으로 보이신다. 이제 불만도 없단다. 다 내 탓이지 하신단다. 사진 출처 - 필자 두 번째 만난 할아버지도 독거노인이셨다. 이혼을 하시고 아들딸도 있는데 찾으려면 찾을 수 있지만 안 그러시겠단다. 당신이 고생도 많이 시켰고 지금 만나서 마음 불편하게 하긴 싫으시단다. 할아버지는 몸이 아프셔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하시는데 방 주위를 둘러보니 약봉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제 일도 제대로 못해. 저기 저 약 없으면 바로 죽는 거야.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간에 무리가 가면 바로 쓰러져. 고치려면 간 이식을 해야 하는데 수술이 칠천만원이 든다는데, 뭐.” 왜 자식들을 찾진 않는지 궁금했다. 그래도 남은 노년생활 좀 더 행복하게 보내실 수 없는 걸까. "애들... 찾으려면 찾을 수야 있지. 그런데, 뭐 이렇게 되서 찾으면 뭐해. 짐만 되지. 그냥 이대로 있다가 혼자 가면 그만인 거야. 내가 국민연금 탈 게 있는데 나라에서 그걸 안줘. 내가 그 돈 지들 주식하라고 준 돈도 아닌데, 왜 내 돈을 안주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내 꿈은 그거 빨리 받아서 쉼터에 가는 거야. 거기서 그냥 편안히 죽고 싶어" 첫 번째 만났던 할아버지가 그러셨다. "아가씨들 나 도와주러 온 거야?" 그 말에, 저흰 복지사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도와드릴 순 없고 할아버지들 불편하신거 없나 알아보고 기사 쓰려고 해요. 그러니 "에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이제 바라는 것도 없어. 그냥 반찬 넉넉히 사게 돈만 조금 더 나왔으면 하지" 괜한 무력감이 생겼다. 이렇게 취재를 다니는 게 자족감만을 위해서가 아닌 건 분명한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인터뷰를 끝내고 막 일어서려다가 할아버지가 다 낡은 워크맨을 가지고 계시기에 건전지를 갈고 재생시켜 이어폰을 귀에 꽂아 드렸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시며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그 장면이 아직도 머리에 맴돈다. 왜 가난한 게 억울해서 자살을 하려 했나. 왜 나이든 할아버지가 그 조그만 방에서 움츠려 자야 하나. 방 한 구석에 있던 찬 밥 한 덩이가 자꾸 내 목을 메이게 했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노인들이 자신이 죽은 지도 모를까 걱정돼 추운 날에도 문을 열어놓고 잠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건 정말 아니다. 대체 누구의 잘못인건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성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건 정말 아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654 | 추천: 0
윤요왕/ 강원도 춘천의 농사꾼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다. 공부방 앞 도로에서 중학생 아이가 차에 치였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복지농촌 만들기’라는 주제의 교육이 있어 부모님이 공부방에 계셨고, 학교를 마치고 버스에서 내린 아이가 공부방으로 건너오다 벌어진 사고였다. 차에 치이면서 아이의 머리가 자동차의 유리창을 박살냈고 아이의 몸은 하늘로 떴다 떨어졌다. 그 장면을 목격한 초등학생 여자아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숨진 아이의 동생이었다. 사고를 목격한 동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죽었구나’ 생각했단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이는 2주 만에 퇴원했고 목과 허리만 조금 다쳐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긴 한숨이 나온다. 그렇잖아도 공부방 앞마을 도로가 너무 위험해 시의원을 통해 방지턱 또는 무인카메라 설치를 알아보던 중 이었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생각한 우리의 요구는 법과 돈 앞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지방 국도’라 방지턱은 법적으로 안 되고, 무인카메라는 교통량이 적어 비싼 비용으로 설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을 중앙을 관통하는 이 도로는 춘천-화천간 407번 지방 국도로 어디나 그렇듯 농촌마을에서는 농로길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춘천에서 화천으로 출퇴근하는 차량들과 덤프트럭들로 이 농로길은 항상 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올해만 해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동네 아저씨의 사고가 있었고, 추돌사고도 여러 건 있었다. 특별히 인도도 없는 구간이 많아 노인들이나 아이들은 목숨을 걸고 다녀야 한다. 그래서 방지턱이나 무인카메라를 설치해 과속만은 막아야 한다고 하소연해 보지만 법과 비용 때문에 그 또한 힘들다고 한다. 어떡하란 말인가? 법을 바꾸려면 농촌의 농민들이 국회의원을 움직여야 한다. 도대체 농촌출신 국회의원들은 뭘 하고 있는지. 동네아저씨는 트랙터로 길을 막자고도 하고, 시청에 쫒아가서 책상을 한번 뒤엎어야 한다고도 한다. 사고소식에 도로관리사업소, 면에서 나와 사진을 찍고 설명을 듣고 갔다. 이렇게 위험한지 몰랐었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려 하는지.   마을 농로인 춘천-화천 407번 지방 국도 사진 출처 - 필자   독일헌법에는 ‘국가의 전 국토에 걸쳐 단위면적당 인구밀도를 적절히 유지해야 한다’라는 조항이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의 과밀현상을 해소하고 농촌지역의 적절한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다고 강제로 이주정책을 펼 수 없기에 농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득보존은 물론 복지, 문화, 교육, 교통 등 기반시설 확충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독일농민들이 부러운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시민 차량들이 아니라면 한적한 농로 길을 안전하고 편안히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대통령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농촌은 인구수가 갈수록 적어 표도 별로 안 되니 당연히 농촌정책은 부실 할 수밖에 없다. 전국적으로 하루에 교통사고가 얼마나 많이 나는데 웬 호들갑이냐고 말하는 분도 있을 거다. 그러나 우리 동네 한번 와보면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알게 될 거다. 출퇴근시간대에 이 마을길은 꼬리를 문 차량행렬이 도시에 버금간다. 낮에는 100km를 넘는 속도로 달리는 덤프 차량들로 항상 긴장해야 한다. 운전자들에게 이 길은 조심해야 할 농로길이 아니라 신호등 하나 없어 시간을 단축하기 좋은 잘 닦여진 한적한 도로일 뿐이다. 더 이상 농촌의 노인들이 또 아이들이 우리 마을길에서 죽고 다치는 상황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농민들이 트랙터나 경운기를 몰고 마을길을 막는 지경까지 가면 안 되는 거다. 시청에 가서 책상을 엎는 상황이 되어서도 안 되는 거다. ‘사람위해 법이 있고, 사람 나고 돈 났지’ 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되새겨 보게 된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1231 | 추천: 0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간사 “딱딱 딱딱” 시청 앞 아스팔트를 뛰어가는 구두소리가 요란하다. 올 겨울 처음 영하 기온으로 떨어졌던 지난 18일 일요일,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의 버스를 향해 부리나케 뛰어갔다. 결혼식에 갔다 온 후, 한 손에 기타를 들고 추운 날씨에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마구 뛰었다. 예정시간보다 10분 늦은 12시 40분이 되어서야 버스에 올라탔다. “와~ 교육 선생님 오셨다!” 일행들이 박수를 쳐준다. 교육 선생님? 지난 일요일,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좀 더 길게 말하자면 난 서울KYC(한국청년연합회 서울지부) 평화길라잡이 3기 현장교육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평화길라잡이라는 말에 생소할 수 있겠다. 이 곳에 짧게 소개해본다. 평화길라잡이는 서울KYC 회원으로서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서대문형무소, 오두산통일전망대, 전쟁기념관에서 시민들에게 평화의 관점으로 안내를 하는 자원활동가를 말한다. 지워지고 왜곡된 역사가 아닌, 올바르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무뎌진 가슴에 평화감수성을 틔우는 참여와 나눔의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직장인, 학교 교사, 가정 주부, 대학생, NGO 활동가 등의 시민들이 활동하고 있다. 약 8개월 동안 이론 강의, 현장 교육, 현장 실습 등의 과정을 통해 평화길라잡이가 태어난다. 현재 3기 교육 중에 있으며, 2005년부터 교육을 시작하여 1, 2기 길라잡이들이 현장에서 안내 활동을 하고 있다. 난 1기 길라잡이로 활동 중이다. 버스에서 각 자 소개를 했다. 3기 교육생, 교육생 딸, KEY(재일코리언청년연합) 회원, 일본 유학생, 1, 2기 길라잡이 등 20명이 모였다. 교육생 한 분이 추운 날씨임에도 고등학생 딸을 데려왔다. 모두들 기뻐했다. KEY 회원들, 그리고 일본 유학생이 천천히 한국말을 해가며 소개를 했다. 역시 반갑게 큰 박수로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평화길라잡이가 되기 위한 각오를 비장하게(?) 얘기하며 버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자유로에 들어섰다. 비록 날씨는 추웠지만, 우리의 설레임을 실은 버스는 따뜻한 기운을 머금고 쌩쌩 달렸다. 달리는 차 안에서 ‘임진강’, ‘서울에서 평양까지’, ‘경의선’ 노래를 불렀다. 우리들이 처음 찾아간 곳은 파주 금파리 마을이었다. 대인지뢰 피해자이신 이덕준 할아버님을 만나러 갔다. 작년 이 맘 때 흥사단 청소년들과 함께 평화의 종이학을 들고 찾아뵈었는데, 1년 만에 다시 뵈었다. 우리는 거실로 들어섰다. “할아버님~ 할머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추운데 뭘 여기까지 오느라고...” 이덕준 할아버님은 79년도에 민간인 출입통제가 해제된 동네 산에서 서울에 내다 팔 마초를 캐다가 대인지뢰를 밟고 두 다리를 잃으셨다. 수술 후, 의족을 끼운 채 지금까지 살아오셨다. 할머님과 함께 6남매를 키우신 할아버님 얼굴엔 마음의 주름 만큼 주름이 깊이 패여 있었다. “80이 되어 가는데 이제 걷기도 많이 힘들지. 이 근처에 나 말고도 8명이 더 있었는데, 지금은 죽고 절반도 남지 않았어.” 한 숨을 내쉬며 할아버님은 말씀을 이어 가셨다. “미군이 지뢰를 곳곳에 묻어놓고, 나갈 때 지뢰매설도를 한국군에게 주지도 않고 갔지. 우리도 우리지만, 우리 군인들이 더 죽었거나 나처럼 됐을거야.” 현재 한국은 미국의 눈치를 보며 국제대인지뢰금지협약 가입을 보류하고 있다.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에 따르면 민간인, 군인을 포함하여 약 6~7000여 명이 대인지뢰에 의해 사망, 다리를 잃거나 실명을 했다고 한다. “할아버님. 많이 아프셨죠?” 길라잡이 교육생들이 할아버님 얘기에 귀를 떼지 않고 듣다가 질문을 던져본다. “아파서 밤에 잠을 잘 못 잤지. 다리를 잃었을 때 한 동안은 없는 발가락이 계속 가려워 긁었었지. 나도 모르게 손이 가더라구. 그런데 요즘에도 가끔 그래.” “정부 보상은 받으셨나요?” “보상은 무슨... 장애 3등급으로 분류되어 지원을 받을 뿐이야.” “왜 정부가 보상을 안 해주죠?” “정부는 대인지뢰피해자가 없다고 얘기하지. 심지어 당시에 우리는 생계를 위해 책임각서를 쓰고 마초를 캐고 다녔어.” 얘기를 마친 후, 할아버님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대문 밖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해주셨다. “할아버님~ 안녕히 계세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잘 가요.”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는 대인지뢰가 매우 끔찍하고, 이 지역 뿐만 아니라 저기 부산까지 한반도 곳곳에 묻혀있는 현실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리고 이 대인지뢰 피해자들이 개인 피해자로서만이 아닌 분단과 대립이라는 아픈 현실이 낳은 사회적 피해자인 것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고통에 평화길라잡이들이 말하는 평화도 함께 하자고 다짐해 봤다. 다시 자유로를 달렸다. 이번에는 오른쪽에 임진강을 끼고 오두산통일전망대를 향해 달렸다. 수 많은 철새들이 자유롭게 임진강과 남북을 오가고 있다. ‘어쩜 이 자유로는 인간보다는 철새들에게 만남과 행복을 주는 길인지도 모르겠구나.’ 오두산통일전망대에 도착했다. 어느덧 3시다. 망배단과 조만식선생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부터 현장 교육을 했다. 그리고 전망대 내부로 들어가 1층의 북한 미술 전시실, 2층 영상실을 지나 3층 내부 전망대로 들어섰다. “와~ 이쁘다.” 오두산전망대에 처음 와본 3기 교육생, KEY 회원들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한강하구를 보고 외쳐댔다. 난 안내를 이어갔다. "3.2km 전방에 보이는 것이 북녘 땅 황해도 개풍이며, 일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얘기를 계속 이어갔다. 함경남도에서부터 흘러오는 임진강은 오두산전망대 앞에서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흘러간다. 이 한강하구는 서울로 들어오는 물줄기여서 한국전쟁 이전에는 많은 배들이 오고갔던 곳이다. 그러나 정전협정 이후 이 곳에는 사람과 배는 보이지 않고, 은빛 물결만 흐르고 있는 정치적 호수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실제로 군사분계선은 강원도 고성에서부터 파주 장단까지 이어지는 육지에만 그어졌을 뿐, 한강하구와 서해에는 그어지지 않았다. 정전협정 제1조 5항에 따르면 ‘한강하구수역은 쌍방 민간선박의 항해에 이를 개방한다’고 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곳은 닫혀 버렸다. 평화길라잡이 촬영 사진 출처 - 필자 우리는 4층 외부 전망대에 올라섰다. 강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쳤다. 하지만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갔다. 통일, 그리고 평화의 과정에서 눈 앞에 펼쳐져있는 한강하구에 사람과 배들이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했다. 평화길라잡이 안내는 관광 가이드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참가자들에게 평화감수성을 심어줄 수 있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서로서로 주고 받았다. 그리고 한 마디씩 외쳤다. “일산 신도시 아파트보다 북녘 아파트가 훨씬 가깝게 보이네요.” “강이 너무 아름다워요.” “이제 곧 여기에 배들이 다니겠죠?” 참가자들이 찬 바람을 맞아가며 어렵게 입을 떼 본다. “선생님~ 추워요.” 그래도 추운 것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우리는 실내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통일, 북한과 관련된 여러 전시물을 안내하고, 우리는 임진강이 보이는 밖으로 나왔다. 임진강을 바라보며 서로 손을 잡고, 버스에서 배웠던 ‘임진강’ 노래를 불렀다. 비록 추운 날씨였지만, 한강하구의 평화와 남북의 통일을 생각하며 불렀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냐 평화길라잡이 촬영 사진 출처 - 필자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참가자들과 오늘 느낌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할아버님의 모습이 계속 떠오르네요.” “제가 평화길라잡이 안내를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도 생기네요.” “서울과 가까운 곳에서 분단의 현실이 있다는 것에 놀랐어요.” “일본에서 오두산전망대로 수학여행 왔을 때는 그냥 무심코 봤는데, 오늘 와서 새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 추웠어요.” “하하하” 평화길라잡이 3기 교육생들의 소감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이분들이 교육을 마친 후에는 1, 2기 분들과 함께 평화의 안내를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두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물론 나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최근 남북총리회담 때 한강하구 공동이용에 대해 합의를 하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미소와 함께 떠올랐다. ‘앞으로 평화길라잡이 안내 내용이 바뀌겠는걸.’
2017-07-11 | hrights | 조회: 48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