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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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얼마 전 방금 전화를 하나 받았다. 장애인의 학부모가 진학 상담을 하는데 교사가 왜 우리학교에 오려 하느냐? 우리는 가르치기 어렵다고 전화로 장애인 학생의 입학과 지도를 일방적으로 거부했다는 이야기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이런 사건이 2022년 지금도 쏟아 진다. 문제는 이런 교사가 이런 교사의 말들이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1982년에도, 장애인들이 특수교육대상자로서 다른 국민과 마찬가지로 의무교육으로 명시적으로 법으로 규정한 1994년에도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장애인 등 특수교육법이 제정된 2008년에도, 국내법과 동등한 효력을 가진 UN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한 2016년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의무교육 책임이 있는 교육 공무원 교사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여 교육청을 제끼고 특수교육대상자를 자의적으로 임의로 배치여부를 일방적으로 학부모에게 통보하는 이런 악의적인 차별이 버젓이 작금의 교육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출처 : pixabay> 헌법 10조에도 강력하게 보장해 놓은 장애인 교육권 보장이 늘 버거운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장애인 학생을 교육기본법인 초중등교육법에 명확하게 ‘학생’으로 명시하지 않았고 장애인 학생을 위한 관련 법에 다른 교육법에 비하여 처벌 조항을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무원이 예비군 훈련을 방해해도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한국 사회에서 교육 방해가 아니라 교육에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아도 대중들이 인지할 수 있는 실효적인 집행체계가 없다. 또한 장애인 학생의 입장에서는 시간과 타이밍에서 처절하게 약자의 싸움이다. 당장 몇 달 뒤에 학교에 진학을 해야 하는데 인권위 진정하거나 법적으로 고소 고발해서 다퉈보기엔 학생으로서의 시간이 너무 한정적이다. 법원 판결을 받을 즈음이면 이미 졸업을 하거나 다른 학교로 가버려서 개인적으로 소를 제기하는 것은 피해자로서의 법적 소송의 이익이 없다. 또한 그런 학교와 교사를 관리감독하는 교육청을 상대할지 직접적인 그런 차별 발언과 행위를 그 교사를 상대할지, 그 교사의 상급자인 교장을 상대할지도 불분명하다. 지금 현재 차별 피해를 구제받을 가장 빠른 방법은 언론에 공개하거나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 구제를 신청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강도 높은 방법을 택하면 차별을 구제받아 원하는 학교에 들어 가더라도 위계적인 위치에서 장애인 학생들은 늘 불이익과 보복의 두려움을 안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 다른 선진국처럼 평소에 이런 학교와 교사를 모니터링하고 실제적인 차별 행위가 벌어지지 않도록 공익 소송을 진행하는 기구가 아직 없다. 대학을 제외한 그 어느 교육 기관에서 장애인 학생이 차별을 이유로 학교와 교육청을 상대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거나 제대로 승리한 적이 없다. 있다고 해봐야 상징적인 행정소송이나 이미 입학한 이후의 지원 미비와 차별에 대한 것 뿐이다. 이렇듯 아무리 중한 장애라도 이미 교육 현장에 진입한 학생들은 학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많은 장애인 대학생들이 이른바 특수교육대상자 전형으로 대학을 들어오지만 본인 스스로 ‘특수교육’ 대상자임을 거부하거나 오히려 그들이 앞장서서 다른 장애인의 학교 진입을 막고 차별하는 행위가 벌어진다. 자원이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 구조가 우리끼리의 갈등을 부추긴다. 결국 우리들끼리 살아 남는자 만이 교육받을 수 있다는 느낌이 있다. 학교와 학력을 위한 교육을 위한 군사 문화의 잔재로써의 교육은 강하지만 개인과 그 행복을 위한 교육은 없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국가에 대한 경례등이 그러하다. 그래서 장애인 학생의 인권을 보조해야 할 특수교사조차도 장애인 학생들이 비장애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도 하는 경우가 있다. 교육 현장에서의 장애인 차별은 근본적으로 비장애인 학생에 대한 막대한 협박이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차별행위이다. 장애를 이유로 어떤 학생을 배제한다는 것은 비장애인 학생이 장애를 가진 순간 교사가, 학교가 장애인 학생을 퇴출시키겠다는 뜻이고 국가가 장애를 이유로 교육을 의무 교육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비장애인 학생들에게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과 경험을 배울 기회를 의도적으로 박탈하겠다는 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법률과 제도가 버젓이 강력하게 있음에도 지난 반세기 동안 교육현장에서 동일한 차별과 배제가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그 법률이 그런 장애인 교육 차별을 범죄로 규정하고 있지 못할 뿐더러 피해 예방 효과가 없다는 것이고 그 예방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것은 그런 차별 행위에 대하여 의미있게 법의 효능이 수용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상상할 수 없는 전주교대의 장애인 학생 입학 거부를 모의하기 위한 입시 성적 조작도 그래서 벌어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교육 사회의 개인의 저주와 불행이라는 장애의 해석은 모든 정보를 차단한다. 이미 많은 정보와 제도가 있음에도 장애인들은 그 정보를 접한적이 없다고 하고 제공한 측은 알려주었다고 한다.인터넷에서 한번만 검색해보면 당장 내용증명을 보내고 변호사를 선임해서 고소 고발장을 제출할 일이건만 대부분 부모들은 그렇게 대응하지 않는다. 특히 교육차별은 장애인에게 있어 정서적 물리적 학대 행위에 준하지만 교육청 역시 학대처럼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출처 : 매일경제> 법은 존재는 하지만 전달과 입력은 되지 않고 활용되거나 집행되지 않는다. 학생을 고르지 않고 어떤 학생도 만나면 분석하고 존중해서 제대로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것이 교사의 전문성이고 정체성일텐데 왜 자기가 장애인 학생을 맡아야 하냐고 따지고 드는 담임에게 자기는 발달장애밖에 '관리' 하지 않는다는 특수교사에게 우리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가능하다면 장애인 진단을 받는 즉시 각 장애인 가정에 공익 전담 전담 변호사 한명씩 다 붙여 주고 싶다. 가능하다면 함정 모니터링을 통해 기획 소송이나 기획 진정이라도 하고 싶다. 전국에 초중고 학교에 (민족사관고 등과 같은 사립학교 포함 ) 장애인 부모인척 상담 전화해서 입학 차별하는 곳은 죄다 녹취록 풀고 고발해 버리고 싶다. 장애인 학생에 대한 차별이 그 죄질이 나쁜 이유는 장애인 부모에게 그 차별이 통한다는 것을 피의자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비장애인 의무교육 대상자에게는 그런 말 한마디도 못하면서, 바장애인 부모에게는 국민신문고 민원 하나조차 무서워 하면서 장애인 부모는 그런 말 쉬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한마다에 부모와 학생들이 싸우지 못하고 절망하면서 무너지는 걸 아니까 그런 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심지어 올해 유아특수교사 임용선발 시험에서 조차 여성 비장애인 학생이 남성 장애인 학생 당사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교사가 의사소통 기술을 중재하는 것을 올바른 지도라고 정답으로 서술하기를 강요하는 문제를 출제하는 것이 작금의 한국사회이다. 사전에 인권적인 문제를 제기한 전공 교수의 강한 문제제기에도 그런 성역할 고정 차별이며 스토킹을 조장하면서 교사의 감정과 호불호에 따라 통합 교육을 하는 것을 올바른 특수교육이라고 주관식으로 쓰지 않으면 임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나라이다. 억장이 무너지지만 물러서면 안된다 포기하면 된다. 차별을 요령껏 피해면서 교육청 게시판의 문의를 남기시라. 입학 거부 하는 글을 남기면 공식 증거가 남는 것이다. 대부분 대놓고 그런 대답 학교는 못 남긴다. 학교는 장애인 학생에 대해 장애를 이유로 된다 안된다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장애인 부모님들 장애인 학생들,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들을 두 팔로 보호하며 함께 싸워줄 우리가 있다. 우리 동네 친구에게, 우리반 친구에게 왜 딴 학교로 전학가라 그래요? 누군데 그래요? 막 같이 화를 내줄 같은 학생들, 그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장애인이든 아니든 누구든지 걱정하지 말고 순풍순풍 낳아라 길러라 국가가 교육청이 사회가 이웃들이 책임지고 다양한 사람을 위한 교육으로 지원할께 교육할께 하는 세상을 만들자. 우리 이제, 차별 따위에 굴복하지 말자.
2022-11-17 | hrights | 조회: 477 | 추천: 2
정한별 / 사회복지사 둘째가 첫째의 발을 밟았다. "야, 미안해 해야지! 미안해 해!!" "미안...해..."   이번엔 첫째가 둘째의 그림을 망가뜨렸다. "으....언니.....으앙... 언니가 망가뜨렸어" 첫째는 변명을 늘어놓고는 엄마의 핀잔에 결국 사과를 한다.   이번엔 셋째가 둘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너.... 미안해 해... 미안해 해!!" 아직 말을 할 줄 모르는 셋째는 웃으며 도망가 버린다. <출처 : 네이버블로그> 첫째는 둘째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자신이 사과를 요구하는 경우, 둘째는 사과를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이에 반해, 둘째는 자신이 사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첫째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과를 요구할 수 없다. 둘째는 부모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행동을 한다. 첫째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던 둘째는 셋째에게는 사과를 요구한다. 사과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둘째는 셋째를 붙잡고 사과를 요구한다. 묘하다. ‘미안해’라는 사과의 말을 듣고 싶어 사과를 요구하는 아이, 누군가에겐 사과를 요구할 수조차 없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다가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사과를 요구하는 아이. 도대체 '미안해'라는 고작 세글자가 갖는 힘이 무엇일까? 세치 혀 끝에서 나오는 이 세글자가 뭐길래. 누군가는 사과를 요구하고, 어떤 이는 사과를 거부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과를 받고자 다른 사람의 힘까지 빌리려고 하는 것일까? 사과를 하는 일에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인정이다. 자신이 어떤 일을 했고, 자신이 한 일로 인해 발생한 일이 어떤 것인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반성의 마음이다. 자신이 한 일이 가져온 결과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반성. 반성 끝에 다시는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마음. 이 두가지가 사과를 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다. 사과의 진정성은 사과를 하는 사람의 태도에 묻어난다. <출처 : 씨원뉴스> “10.29 참사”가 일어난 직후 정부는 "참사"라는 표현, "희생자"라는 표현 대신, "사고"와 "사망자" 라는 표현을 쓰게 했다. 애도의 의미로 검은색 리본을 사용하되, "근조"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국가적으로 애도기간을 정해 추모를 하되, 참사의 이유는 따지지 말라며 침묵을 강요했다. 국민에게 참사의 이유를 찾지 말라는 동안, 정부는 참사의 이유를 꼬리에서 찾았다. 참사가 일어나기 4시간 전부터 112 신고전화에 참사 우려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내용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침묵을 깨고, 지난 11월 4일 윤석열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10.29 참사에 대해 사과를 했다. 서울 조계사에서 진행된 '이태원 참사 희생영가 추모 위령법회'에서 대통령은 "슬픔과 아픔이 깊은 만큼 책임 있게 사고를 수습하고, 무엇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큰 책임이 저와 정부에 있음을 잘 안다"라고 말했다. 그는 11월 4일까지 5일 연속으로 합동분향소를 찾아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책임 있게 사고를 수습하고, 책임이 대통령과 정부에 있다”며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 대통령은 지난 11월 7일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에서 무려 30분간 경찰을 질타했다. 그는 "엄연히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책임)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하는 것" 이라며 분노했다. 용산경찰서장, 용산경찰서 정보과장·정보계장, 서울경창청 상황관리관, 용산구청장, 용산소방서장은 "10.29 참사"의 피의자로 입건됐다. 서울시의 책임자, 행정안전부의 책임자,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자는 대통령이 말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과는 실제로 힘이 크다. 법적으로 사과는 피고인에게 처해 질 형량을 줄이기도 한다. 어떤 판결문의 양형 이유에는,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있는 점을 참작해 형을 정하였다는 표현이 나오곤 한다. 형사 처벌이 필요한 죄를 저질렀지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있다는 것이 형사 처벌의 정도를 정하는 데 고려가 되는 것이다. 사과에는 사과를 기다리는 이의 인생이 걸려 있기도 하다. 어떤 이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평생을 기다리기도 한다. 10.29 참사의 희생자들은 책임 있는 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사과를 요구할 힘조차 없는 희생자를 위해 깨어있는 시민들이 연대해야 할 때이다. 사과의 부재를 연대의 존재로 메워야 한다.
2022-11-09 | hrights | 조회: 827 | 추천: 7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팔레스타인 올리브 수확 체험활동을 조직한 싸이드(가명)가 일은 하지 않고 자꾸 이야기한다. “이곳 올리브 농장이 이스라엘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팔레스타인)에 와서 현실을 봐야 한다. 이스라엘 어쩌고저쩌고 팔레스타인 어쩌고저쩌고…” 듣기 싫은 건 아니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올리브를 하나라도 더 따고 싶은데 자꾸 싸이드의 설명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다. 설명이 멈추자 다시 사람들이 올리브를 딴다. 따다 보니 재미도 있고 올리브를 담은 통이 차는 모습에 보람도 느낀다. 탄력받아서 나무 위로 올라가 올리브를 따고 있는데 또 싸이드가 “올해에도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농부를 공격해서 어쩌고저쩌고…” 일장 연설을 한다. 아 놔, 그래서 싸이드와 17년 지기인 나는 “싸이드, 이제 그만 이야기하고 일 좀 해. 올리브 따란 말이야!” 싸이드는 나를 보면 씨익 웃으며 “내 입은 말하고 있지만 내 손은 올리브를 따고 있어”라고 말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팔레스타인 올리브 농장 주인 아들은 웃으면서 “한국 사람, 올리브 진짜 잘 딴다. 여기서 계속 있어라”라고 치켜세워준다. 올리브를 수확하는 모습(출처 - 작성자)   팔레스타인은 요즘 한참 올리브 수확 철이다.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첫 비가 내리는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올리브를 수확하여 기름도 짜고 비누도 만들어서 판다. 올리브 수확을 통해 전체 팔레스타인의 10~15%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매년 올리브 수확 철에 팔레스타인 농부는 위기에 직면한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안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한(이를 이스라엘 정착촌이라 명명하고 국제법상 불법임)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인들은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올리브 나무를 공격하고 훼손한다. 특히 수확 철에 공격이 집중된다. 그렇기에 싸이드와 같은 현지 활동가들은 외국 활동가들과 팔레스타인 내 자원활동가들을 불러모아 이스라엘 공격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농부들을 지키고 실재 수확에도 도움이 되는 ‘올리브 수확 체험활동’을 십수 년 전부터 조직하였다. 그리고 3년 만에 다시 팔레스타인에 방문한 나는 지난 10월 10일에 아씨라 마을 올리브 수확 체험활동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 활동에는 나를 포함한 한국인 2명, 영국인 2명, 몬테네그로, 프랑스 출신 여성 활동가 5명, 현지 대학생 6~7명 정도가 함께 했다.   올리브 수확 체험활동에 참여한 국제활동가들과 현지 자원활동가들(출처 - 작성자)   싸이드와의 웃음 섞인 오전 디스전을 여러 차례 하고 나자, 농장 가족들이 노지에서 직접 끓인 ‘샤이’(홍차)와 커피, 짭조름한 양념이 입혀진 동그라한 빵들(호브스), 물과 음료수를 점심으로 내어주셨다. 2시간도 제대로 일하지 않았는데 내어준 음식에 살짝 미안함이 생긴다. 싸이드는 사람들을 삥 둘러앉게 해서 또 연설을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해서 여기에 참석한 국제활동가들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또 어쩌고저쩌고...” 속으로 ‘이야기하는 건 좋은데 나에게 소감 이야기하란 소리만 말아라’ 하고 있는데 싸이드가 “이제부터 각국 활동가들의 소감을 들어봅시다. 먼저 제일 멀리서 온 한국 친구들부터 박수 (짝짝짝)” ‘아 쫌 ㅠㅠ’   괴로운 점심 식사가 끝나고 팔레스타인 자원활동가들과 일부 국제활동가들은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춘다. 나와 농장 주인집 아들들은 계속 올리브를 땄다. 두 시간쯤 지나니 싸이드가 돌아가자고 한다. 아쉬웠다. 해질 때까지 일해야 하는데. 헤어지면서 농장주 아들들과 힘찬 포옹을 하고 서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나는 생존으로 저항하는 이들에게 경의를, 그는 미친 듯이 일(?)만 하는 한국인(물론 다 그렇지는 않지만)에 감탄을 담은 듯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를 태운 버스는 마을 인근의 이스라엘 정착촌이 보이는 곳에 우리를 내려주고, 참가자들은 이스라엘 정착촌을 멀찍이 쳐다보았다. 가까운 듯 먼 듯싶었다. 그다음 날 10월 11일, 나블루스 내 데이 샤라프 (Deir Sharaf)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의해 사망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나블루스로 통하는 모든 도로는 봉쇄됐다고 현지인들이 전했다. 인구 15만 명의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중북부 최대 도시는 하루아침에 고립된 것이다. 나블루스 밖에 거주하던 여성지원센터 활동가는 출근하지 못했고 내부의 사람들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출장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여성지원센터의 교육참가자 졸업식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역 언론은 계속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사망 사건을 보도했다. 긴장감이 높아졌고 봉쇄된 검문소를 전전하다가 이스라엘 군인들이 쏜 최루탄을 몇 번 경험하기도 했다. 10월 16일 출장 일정은 하루 앞당겨 마무리됐고 현지 운전사의 놀라운 기지와 정보력 덕분에 평소보다 2배의 시간이 걸렸지만, 무사히 나블루스를 빠져나와 다음날 이스라엘 공항으로 이동했다. 나블루스 데이 샤라프에서 북부지역으로 연결된 도로, 이스라엘군이 도로를 흙으로 막은 모습(출처 - 작성자)   이후 한국에 돌아온 10월 25일, 나블루스 시내로 이스라엘 군인들이 난입하여 4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 당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외부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과의 충돌이라 보도되지만 애초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나블루스에 난입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을 사건이다. 현실은 이스라엘 군인 1명이 사망하면 1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집단 처벌을 받는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고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2022-10-26 | hrights | 조회: 494 | 추천: 8
신종환 / 공무원  좋은 공직자는 어떤 사람일까? 1차 시험에 합격하고 면접을 준비하면서 공무원 5대 신조에서 국가에 헌신하고 시민에게 정직과 봉사하고 어쩌고 하던 말은 이제 날리다 만 먼지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충성하고 정직하고 창의적이며 적극적이고 청렴하다. 뭐예요 그런 거 한 번에 다 넣지 말아요. 그런 사람은 생텍쥐베리가 어린왕자를 위해 그려준 상자 안에도 없을 거다. 아니면 영영 잠든 모습으로만 보이거나. 민원인들, 그리고 기관과 연관된 사람들이 좋아하던 동료 내지 선배들을 떠올려 보면 좋은 공직자란 공감 능력 있고 융통성 있는 사람 정도로 이해된다. 그럼 공직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배양하기를 지향하고 있나?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주인공을 위해 다방면으로 도와주려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처럼 배척하지는 않아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권장하는 장면은 아직 보지 못했다.  작년 여름 즈음에 적극행정을 권장하기 위한 시청 교육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강사로 오신 분은 고위공직자로 여러 사업을 추진·성공시켰고 그의 대표적 성공 사업으로는 순천만 생태공원과 국제정원박람회가 있었다. 거대한 사업이었던 만큼 그는 전 세계를 종횡하며 순천만을 어떻게 변모시킬지를 고민했고, 세계적인 정원 디자이너인 찰스 젱스에게 생태공원의 전반적 설계를 부탁했다. 수조 원 대의 예산의 증감(나는 2억 원의 야구 보조금 문서의 최종 처리 버튼을 누르며 심장이 멎을 뻔했다), 주요 공사단계에서 급변하는 기후 등의 다사다난함(야구대회 간 악천후로 몽골 텐트 두 동이 날아갔을 때, 나의 의식도 거의 날아갈 뻔했다)을 겪으면서 최종적으로 생태공원 조성과 국제정원박람회는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무용담 같은 그의 교육 중간 즈음부터 나는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생태공원과 박람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저런 얘기 들으면 이 자리 누군가는 업무에 대한 열의가 생길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던 차에 그의 다음 ppt가 눈에 들어왔다. 5년을 넘어가는 사업에 대한 검찰 조사와 조사 후에는 건설업체와의 민사 소송. 그는 조사 결과는 무죄로 끝났고 인건비와 관련된 민간 사업자와의 민사 소송 또한 자신이 승소했노라고 했고 이런 몇 가지 과정을 견뎌낸다면 성공적인 적극행정 공무원이 될 수 있다며 교육을 마무리했다. 이 교육은 뭐지... 거대한 재미없는 농담인가? 적극행정은 타고난 사람들만의 영역임을 강조하는 건가?  물론 그 정도 크기의 정책을 다루지 않아도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추진하라는 그의 메시지 자체는 어느 정도 이해되고 좋은 취지가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직업만 바꾸면 그건 그냥 보상이 없는 대기업 임원이 아닌가.... 공직자로서 우리의 차이점은 뭐지.... 대기업에는 미처 입사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9급 시험 통과하면 우리가 되는건가.... 아니면 태생적으로 존버정신이 강한 사람들이 있어 공무원의 길을 가도록 정해진 것인가...  강사가 말한 자신이 해낸 사업, 퇴직이 임박한 과장님들이 무용담처럼 얘기해줬던 과거의 고충들... 규모의 차이를 생략하고 동일선상에 놓아보면 ‘비록 개고생했지만 마다하지 않고 이 자리까지 와서 퇴임한다네’라는 내용의 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는 그들의 가던 길을 가다가 사망하거나 병가휴직 중이거나 그도 아니면 이런저런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공직에 대한 인식에서 사기업과 차이를 느끼기 어려운 점은 몸담은 노조의 요구사항에서도 느낄 수 있다. 급여인상, 퇴직금 인상, 처우 개선, 점심 여건 보장 등 노조의 요구는 급여 개선과 근무여건 개선이 주를 이룬다. 성과급 폐지 등의 주장도 없지는 않지만 명목상 제안사항에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 그친다. 봉사자로서의 정체성은 주목받지 못하고 임금노동자로서의 비중이 나날이 늘어간다. 봉사자로서의 보람은 어디서 찾아낼 수 있고 어떻게 보존되고 배양될 수 있을까.  임용되어 주민센터 복지 민원대에서 뵈었던 민원인 중 몇 분을 기억한다. 장애인 증빙을 위해 병원에 가야 했지만 병원 방문 및 설명이 어려워 주말에 차로 모시고 갔던 어르신, 배우자의 기초연금을 위해 방문 했지만 배우자의 치매 등으로 인해 결국 신청하지 못한 어르신. 첫 번째 어르신과는 병원 진료 대기시간 동안 얘기를 하면서 이 어르신이 신학교를 갔다가 피치 못한 사정으로 그만두고 일하다 장애를 얻어 혼자 사셨다는 걸 알았고 어르신이 고집스레 사주신 바나나 우유를 받아 마셨다. 두 번째 어르신은 어느 날 선물이라며 비타500처럼 보이는 포장 박스를 주셔서 열어 보았더니 양주가 나와서 짧게 적은 편지와 함께 문 앞에 돌려 드렸다. 그러고 한번 점심을 얻어먹으며 다음에는 술을 마시자는 그 분의 말씀에서 사람에 대한 갈증과 고마움이 섞인 감정을 느꼈다. 그 기억들은 내가 때려치우고 싶을 때마다 그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처럼 ‘내가 때려치우면 당신들은 혼자 남기에 나는 때려치우지 않소’라고 되뇔 마음속 움막이 되었다. 하지만 간혹 술자리에 그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나를 착한 미친놈이라고 했다.  우리가 직장인이고 잘리지는 않지만 박봉이라는 것이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라면 시민을 홀대함으로써 생기는 상황을 어떻게 막을까. 공무원이란 말이 담아야 하는 추상적 온기는 어떻게 보존되고 배양될 수 있을까. 우리는 불가하다는 통보와 소극적이라는 민원으로 서로 맞설 수밖에 없는 것인가. 엊그제 한 것 같은데 다시 돌아온 올해 신규직원들에게 노동조합 교육을 할 생각을 하며 답 없는 고민을 한다. 출처- 작성자
2022-10-19 | hrights | 조회: 889 | 추천: 3
주윤아 / 교사    딸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주문하려고 종업원을 부르려는 순간 망설였다. ‘아줌마’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은데, 그럼 뭐라고 불러야 적절할까?’ 사실 이런 식의 고민을 이번만 한 건 아니어서 얼마 전부턴 ‘사장님’으로 종종 부르기도 했다. 실제 주인이 아니더라도 존중받는 느낌에 기분도 좋아지고 계속 듣다 보면 주인의식? 비슷한 마음도 우러나지 않을까 혼자 오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장님’으로 부를 때도 입에서 겉도는 느낌이고, 종업원 여럿이 돌아다니거나 진짜 사장님이 계산대에 있거나 하는 등의 상황도 있고 어쨌든 이 단어도 썩 내키지는 않는다. 어떤 표현이 더 좋을지 이야기하는데 딸이 이런 질문도 했다. 길거리나 식당 출입문에 ‘주방 이모님 구함’이라는 공고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진짜 구직 조건에 ‘중년(’님‘을 붙인 것을 통해)’ 즈음의 연령대와 ‘여성(이모라는 구체적 단어 적시를 통해)’이라는 성별을 특정한 것인지, 아니면 의례적으로 쓰는 표현인 건지 궁금했단다.   출처 : 27일 신촌역 인근 한 식당에 구인공고가 붙어 있다. 2022.9.27/뉴스1 김예원 기자©news1    요즘의 대학가에서도 ‘이모(라는 단어가 들어간) 식당’이라는 간판도 적지 않고, 단골 학생들이 자연스레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식당에서의 이 호칭은 사전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마치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유구한 전통처럼 보인다.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에게 가족 관계 호칭(이모 외에 고모, 엄마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을 사용하며 그 식당 안의 모두가 갑자기 가족이 되어 버리는 이 풍경을 외국인이 본다면 어쩌면 이모(친족)가 일하시는 걸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물론 친근함을 전하는 익숙한 표현일 뿐이라며 유난스럽다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상대가 원치 않는(손님뿐 아니라 종업원도 불쾌해하는) 종류의 호칭 사용*으로 인해 갈등이 불거진 사건들이 잊을만하면 보도되고 있고, 성 고정관념도 강화하며, 그들의 노동을 제대로 정의(평가)도 하지 못하는 단어라면 분명 개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출처 : 2018.7.9. [이데일리 이동훈 기자]     호칭 논란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또 다른 단어 중 하나로 '아줌마'가 있는데,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결혼한 여성을 의미하는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표현인데다 '나이 든(늙었다는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며) 여자'를 지칭하는 말로 확장되면서 누구든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되어버렸다. 공사 현장 등에서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김 씨’, ‘이 씨’처럼 성으로만 부르거나 ‘삼촌’, ‘아재’ 등으로 무명씨로 뭉뚱그려 하대까지 하는 상황도 비슷한 예일 것이다. 학교에서도 교직원들이 청소 노동자를 공공연하게 ‘여사님’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언젠가 학생들까지 이렇게 부르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마찬가지로 급식 노동자에겐 ‘아줌마’, 경비 노동자는 ‘아저씨’,‘할아버지’로 부르는 경우도 많다 보니, 성 역할 고정관념 없이 직무 특성을 반영한 적절한 호칭이 절실하다.  어휘력이 떨어지는 건지, 창의력이 부족한 건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한 호칭이 생각나지 않아 집에 와서 검색 등으로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다. 십여 년 전부터 국립국어원에서 관련 연구가 있었고, 문제 해결을 위해 식당 노동자 호칭 공모 대회 등을 통해 ‘차림사’라는 새 호칭을 선정하여 발표하고, 국립국어원의 한 관계자는 직원의 지위나 성별과 상관없이 ‘종업원님’이라고 부르자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강산이 한번 바뀌도록 사용하는 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실효성은 없어 보인다. 차라리 일부 식당들처럼 종업원들의 명찰(이름이나 닉네임)을 보고 부르거나, 적잖이 사용하는 ‘여기요, 저기요(서양의 ‘excuse me’의 의미와 유사한)‘ 등을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말의 힘은 매우 강하며 대중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 새 언어로 선택되어 바뀌기도 한다. 욕설을 일상으로 사용하는 무리와 자주 어울리거나 혐오를 목적으로 조직된 모임에 속해 있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 저도 모르게 차별과 혐오의 언행이 반복되어 일상이 되다가 곧 나의 정체성이 돼버린다. 수년 혹은 수십 년간 사용하던 말이나 습관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결심한다고 하루아침에 존중과 배려의 언어가 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내가 차별과 혐오로부터 보호받길 원하듯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인식이 갖추어져야 지혜로운 단어를 선택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능력도 생길 것이다. 요즘 ‘미망인’이나 ‘정상인’이라는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이가 부쩍 줄어든 것처럼 식당에서 ‘아줌마’라고 부르는 풍경이 기묘해질 그날을 위해 익숙한 단어와 헤어질 결심을 하자!  에필로그 : 이 글을 작성한 후에도 중년 남성이 식당 아르바이트생에게 ‘아가씨’라 불러 갈등을 겪은 사건 보도와 ‘사실 식당 (여)종업원들은 호칭보다 반말과 성추행 등이 더 괴롭다’라는 내용을 다룬 기사들을 연이어 접하며 고구마 백 개 먹은 듯한 또 다른 답답함이 밀려온다. *대민 업무를 주로 하는 관공서와 식당과 같은 서비스·판매직 종사자를 대상으로 손님의 호칭에 대한 불쾌감을 묻는 질문에는 ‘아저씨·아주머니(아줌마)’ 등으로 부르는 경우 절반 가까이(46.6%) ‘불쾌하다’고 응답했다. ‘아가씨·총각’으로 부르는 경우 역시 불쾌하다는 응답이 35.4%였다.  출처 : 화성시여성가족청소년재단 양성평등 이슈레터(2021년 11월 셋째주)
2022-10-12 | hrights | 조회: 675 | 추천: 6
이회림 / 경찰관 당신은 멋진 어른인가요? #멋진어른되기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학교전담경찰관이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이하 '학폭위‘)에 ’경찰위원‘으로 출석하여 가해·피해 학생 대상 조치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가해자, 피해자, 선생님, 목격자, 심리전문가 등,, 학폭위 사안 심의를 하다 보면 이렇게 많은 사람의 진술을 모두 듣고 즉석에서 질문을 해야 하기에 저녁 6시를 훌쩍 넘겨 심의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아무래도 수사가 아닌지라 객관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가 · 피해 학생이 서로의 상반된 진술만을 주장하거나 당사자인 학생들보다 학부형들끼리 감정의 골이 깊어 양측의 화해가 극심히 힘든 경우에 심의는 이렇게 무한정 길어지기도 합니다. 어느 사안이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심한 경우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였다는 학생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개선을 해야 근본적인 대책이 되고 치유가 되는 것인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았고 말입니다.  학교폭력이 근본적으로 사라지고 나아가서 아동·청소년 대상 범죄가 근절될 수 있는 뭔가 새로운 예방책이 없을까? 기존의 예방 활동 이외에 뭔가 근본적인, 즉 작금의 분위기를 점진적으로 혹은 확 바꿔버릴 수 있는 그런 묘책이 과연 뭘까 하는 생각을 줄곧 하면서 학생들을 만나고 또 학폭위에 참석하는 날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청소년참여정책자문단  각 경찰서 여성청소년계 학교전담경찰관들은 관내 청소년들의 신청을 받아 청소년참여정책자문단(이하 '청참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21년에 1기로 시작하여 현재 2기에 접어든 파릇파릇한 조직인데 아직은 뇌가 말랑말랑한 초, 중, 고 청소년들과 학교전담경찰관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아동, 청소년 대상 이슈에 대해 토의, 토론하거나 범죄예방 홍보 활동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하루는 2021년 청참단 단원이었던 A고 여학생 ‘지민(가명)’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작년에 함께 찍은 학교폭력예방 홍보 유투브 영상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지민이가 저를 가리켜 '멋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 이르러, 무언가 잊고 있었던 것이 갑자기 생각난 듯이 반가웠습니다.  ‘맞아, '멋있다'는 표현, 나는 내 직업 덕분에 지민이에게 '멋진 사람.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었지.. 내가 학생들에게 했던 말과 행동은 굳이 경찰이 아니어도 응당 어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이었음에도 지민이는 멋있다고 감탄했었고…’  결국 누구든 청소년들에게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자 하는 어른이라면, 이렇게 '멋'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찬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즉 경찰이 아니어도 아이들에게 멋진 사람이 되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른들 모두 그냥 어른 말고 '멋진 어른' 한번 되어 봅시다~ 하는 마음으로 '멋진어른되기프로젝트 캠페인‘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출처-pixabay  멋진어른되기프로젝트 캠페인  '멋프 캠페인'의 중심 플랫폼은 카카오 채널 '멋진 어른되기프로젝트' 입니다. 카카오톡에서 돋보기 아이콘을 누르고 '멋진 어른'을 치면 바로 입장 할 수 있습니다. '멋프' 카카오채널에 들어가면, 캠페인 1호 영상을 만날 수 있는데 넷플릭스 인기드라마 '지금우리학교'에서 학교폭력 피해 학생으로 등장한 철수와 은지를 전면에 내세운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 둘은 '지금우리학교'의 주변 인물일 뿐이지만 '멋프' 캠페인에서는 주인공으로 등극했습니다. 캐리 커쳐 작가에게 콘티를 보내고 작품을 기다리는 동안 뒤에 이어 붙일 타이포그라피에 들어갈 문구를 만들고 최종 편집 작업은 제가 직접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찰청 성별영향평가를 거쳐 '수정권고사항없음'으로 최종 통지를 받아 마음 편히 SNS등을 통해 전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멋프 캠페인'은 '청참단' 회원들과 함께 계속해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것이고 누구나 멋진 어른이 되고자 하는 이는 멋프 채널을 통해 배달되는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잘 들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혹시 주변에 힘들어 보이는 아이들이 보이면 모른척 하지 않고 '멋진어른수칙'대로 한번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자~이 글을 읽으신 어른 여러분들, 이제 카카오톡을 열고 돋보기 아이콘을 눌러 ‘멋진어른’ 네 글자를 넣어주십시오. 온갖 쇼핑채널이 난무하는 카카오톡채널 생태계에서 유일무이한 신선한 채널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멋진 어른들의 관심 하나하나가 모여 커다란 힘을 발휘하고 내 주변을 변화시키는 데 분명한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채널추가를 하신 후에는 반드시 청참단 청소년들이 직접 출연한 캠페인 영상들을 끝까지 보아 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신비스러워하는 MZ세대 청소년들이 용기 내서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까요. 부디 관심을 보여주세요. 멋진 어른님들!!
2022-10-05 | hrights | 조회: 474 | 추천: 4
홍세화 / 직장인  기록적인 장마와 우려하던 태풍이 지나간 요즘,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몸을 감싸는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완연한 가을이 다가옴을 알려주고, 2022년을 마무리해야 하는 때도 머지않았음을 함께 상기시킨다. 시간의 흐름이 야속한 것은 당연지사지만, 이번엔 약간 불안하기까지 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서울에서 현재 내가 머무는 전셋집의 계약이 내년 1월에 만료되기 때문. 연장할 수야 있겠지만,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운 시대에 집주인께서 전세금 인상 얘기를 꺼내시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새로운 집을 알아봐야 하나, 이 가격에 이만한 조건의 집은 이제 찾기도 어려울 텐데... 전세자금 대출은 같은 조건으로 계속 지원받을 수 있을까, 월세를 알아봐야 하나...’ 와 같은 걱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마음은 조급해져만 갔다.  얼마 전, 현 정권의 주요 공약 중 하나였던 종합부동산세 기준 완화가 발표된 것을 보고 조금 들여다보았다. 자세한 내용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 ‘종부세 내는 사람들 부럽다.’였다. 적어도 그들은 당장 살 집을 어떻게 마련할지 걱정하는 사람들은 아닐 텐데, 그 와중에 세제 개편으로 인해 부를 더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니 그저 부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순간, 이러한 나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예전 농촌에 살던 고등학생 시절에는 적어도 ‘빈익빈 부익부를 가속하는 세제개편이다!’와 같은 비판적인 사고로 현 사안을 바라봤을 텐데, 이제는 그런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현재 나의 초라한 처지와 대비되는 듯한 그들의 삶을 부러워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 걸 보고는 당장의 삶을 살아나가는 데 급급해질 뿐이었다. 이대로 사고하고 사유하는 능력이 마비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까지 생각하게 됐다.  일전에도 밝힌 적 있지만 지금 서울에서 내가 사는 집은 반지하이다. 8월의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침수피해로 인명사고가 잇따라 발생하자 정부는 주거목적용 반지하를 없애겠다고 발표한 적 있다. 그때도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서울에서의 다음 거처는 어디로, 어떻게 구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서울에 집이 없는 지방 출신 대학 동기들도 저마다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양질의 일자리 대부분이 서울에 있다 보니 어떻게든 서울에 머물려고 하지만 나날이 치솟는 임대료에 다들 근심이 가득했다. 방 한 칸, 햇빛 한 줌에 임대료가 껑충 뛰어오르니 삶의 질은 잠시 뒤로 미루고 나처럼 반지하나, 매우 비좁은 원룸에서 사는 친구들도 꽤 많았다.   사진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0.75명으로 인구절벽 가속화가 점차 심화하는 상황 속에서, 마지막 희망은 1990년대생들이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막상 이러한 이야기를 접하는 90년대생들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건국 이래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고 불리는 우리와 같은 세대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둘 셋씩 낳으며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감히 할 수나 있을까? 라는 생각인 것이다. 인터넷상에서도 이러한 기사를 두고 ‘둥지 없는 새들이 어디에 알을 낳을 수 있느냐’와 같은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괴산에 있는 나의 본가에는 엄마 아빠께서 어딘가에 구해오신 새집들이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처음 새집을 둘 때만 하더라도 과연 새들이 올까 생각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제비, 곤줄박이 등과 같은 새들이 찾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들을 낳아 기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현재의 청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정적인 주거환경을 마련해준다면 그 이후엔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는 것까지의 과정이 훨씬 수월해지지 않을까.
2022-09-28 | hrights | 조회: 519 | 추천: 2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아버지는 20년이 넘는 연남동 회사 택시 운전사이다. 벌이가 좋은 야간 운행도 못 하는 70대 고령이시다. 손님 호출을 받는 각종 앱을 쓰기는 하지만 초기화라도 되면 주변 젊은 기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필자는 아버지로부터 그 흔한 카카오톡 한 줄도 받은 적이 없다. 당연히 기본 PC 사용은 아예 근처에 오지도 않으신다. 그런데 젊은 기사님들이 우리 아버지를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할 만큼 부러워하고 존중한다. 회사 새 차가 나오면 제일 빨리 받는 사람이기에 구성원들의 부러움을 받으시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회사에서 수동 변속기로 택시 운행이 가능한 유일한 분이셔서 존경을 받으신다. 수동 변속기 자동차는 자동 변속기 자동차에 비해 잔고장이 적고 연비도 좋고 가격조차 착하다는 장점이 있다. 요즘 아버지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주로 하는 유튜브의 세계에는 입문하셨으나 줌이나 메타버스는 여전히 생경하시다. 그리고 변속기가 필요 없는 자율주행 전기 자동차 시대가 되면 지금처럼 주변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두려움이 크시다. 2030년쯤이면 내연 기관 생산이 전면 중단되니 수동 변속기가 달린 차도 멸종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희귀한 기술과 경험도 사라지고 타인의 부러움과 존경도 사그라질 것이다. 전기차가 내연 기관차만큼 싸지거나 아버지께서 회사를 떠나시면, 하루하루 바쁘게 변화하는 새 문물을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필요할 때 손쉽게 그 사용법을 익히거나 배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균적인 사람들에 비하여 지적 발달이 느리거나 신체의 운용이 어려운 사람들을 이른바 장애인이라 일컫는다. 그들의 발달의 문제가 그들의 장애 때문인가? 사회와 기술이 인간의 발달과 상관없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달하기 때문인가?  이제 우리는 평균 수명이 백 세를 넘어가는 사회에 직면했으니 이 세상의 모든 비장애인은 반드시 장애를 경험하고 장애인의 삶을 누려보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인구 소멸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비장애인 인구수는 줄겠으나 장애인 인구는 상대적으로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고, 모든 비장애인 가구에서 장애를 가진 가족을 만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지금처럼 장애와 장애인에 대하여 존중과 인권을 필수적으로 교육하고 구체화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불안해지고 서로를 혐오하는 게 일상인 삶을 살지도 모른다. 타인의 소수성을 공격하고 차별하여 나의 그림자로 삼지 않으면 내가 먼저 쬘 수 있는 햇빛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번져갈지 모르는 것이다.  이른바 장애인 시민권 확보를 위한 이동권 투쟁에서 유례없이 정치권에서 터져 나온 장애인 관련 ‘민폐이론’ 이나 그로 말미암아 촉발된 지하철 대중들의 장애인 당사자의 공격은 단순한 혐오나 차별을 넘어 혐오 범죄, 증오 범죄로 확산할 여지를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그간의 인권교육의 한계를 보여 준 동시에 희망을 보여 준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간의 장애인에 대한 인권을 ‘배려와 사랑’이나 ‘이해나 인식 개선’이란 이름을 붙여 도덕 교육과 사회 교육 시간에 교육한 것이 과연 어떤 효과가 있었는가? 지금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장애인 인권교육을 통해서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중간에 장애인 가지는 것이, 내 손자녀가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가치 있고 의미 있고 중요하다는 생각을 학생들에게 만들어 주고 있는가? 우리 사회가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장애인과 한마을에서 이웃과 친구로서 살아야 하고 장애인의 삶의 경험이 비장애인들이 누리고 있는 삶의 경험과 별반 차이가 없도록 우리 사회 자원을 공유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정말 그렇다면 왜 학교에서는 아니 왜 유독 장애인 인권에만 사랑과 배려 이해 인식 개선이란 말 따위를 붙이는가? 그런 감정과 개인의 가치관을 투영하는 말들과 표현들 장애인 인권 보장을 위한 구체적 실천의 책임과 검증을 은폐할 뿐이다.  학교에서 장애인 인권 교육을 진행했으면 학교 교장이 특수학급을 유치하는 실천을 해야 하며 담임이 보다 다양한 중증 장애인 학생을 위한 통합 교육을 하려고 서로 담임을 맡으려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비장애인 학생들이 어렵고 힘들어도 장애인 학생과 같은 반, 같은 학교 학생으로서 같이 공부하려는 모습으로 누구나 특수교육이 필요하면 특수학급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학교 현장의 인권교육이 이런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연습과 훈련을 하게 하고 있는가? 세상에 어느 학교도 장애인 학생을 배려해서 입학을 시키거나 담임을 맡지 않는다.  우리가 장애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불안해하며 장애인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이유가 이런 변화와 방향을 개인의 책임과 문제로 돌리도록 ‘선택 압력’을 받기 때문은 아닌가? 이 왜곡된 ‘선택 압력’을 줄여서 안전과 안정을 확보하고 각 개인 고유의 경험과 기술을 실시간 바뀌는 기술과 환경에 서로 연결하여 상호 간의 존경과 존중을 만드는 것이 바로 ‘교육’일 것이다. 이미지 출처- pixabay  과거 누군가의 삶을 고리타분한 꼰대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레트로’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 ‘평생 교육’ 일 것이다. 우리가 장애인의 삶과 문제를 지역사회와 함께 공유하는 이유는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알 수 없는 사회 변화와 발전의 ‘선택 압력’으로부터 각 개인들을 상호 보호하는 사회 보험이자, 공동체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이에 평생 교육도 장애인과 같은 다양한 사람들과 소수자들이 다 함께 어울려 소통하면서 각자가 존경과 존중을 받을 만한 필요한 교육을, 공공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순식간에 변하는 사회와 기술에 같이 가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어느 누가 한순간에 어느 위치에서 어느 관계에서 소수자로 되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란 말도 소수자란 존재도 시의적절한 지원을 제대로 잘하기 위한 분류일 뿐이다. 아버지에게도 메타버스를 즐겁게 배울 수 있는 평생 교육이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수동 변속기 운전 방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것을 가르칠 수 있는 평생 교육도 역시 중요하다. 자동 변속기의 개발과 확산이 소아마비를 가진 장애인 때문에 촉발되었고 발달장애인을 위해 초기 개발되었던 운영체계가 윈도우 개발의 계기가 되었으며 스마트폰 영상 통화의 발명이 수어를 쓰는 농아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처럼, 평생 교육은 우월한 사람들이 모자란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삶들을 존경과 존중으로 연결하고 소통하기 위함이다. 전기나 인터넷을 어떤 사람을 선택해서 공급하거나 따로 주거나 하면 차별이라고 하듯이 어떤 교육 기관이나 교육 전문가 담당자들이 장애를 이유로 어떤 사람을 선택하지 않거나 따로 대우한다면 차별이자 사회적 보험 사기이며 우리 공동의 인프라를 스스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 언론들은 특히 장애인 문제에 대하여 가족들에게 온정주의가 가득하다. 감동과 극복의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장애인의 출생과 양육까지 온통 혈연 가족들의 책임으로 세뇌하니, 세뇌된 책임은 가족의, 부모의 권리로 착각한다. 과연 이런 세뇌로부터 학교는 자유로운가? 장애인의 죽음도 다른 사람과 동등하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적어도 학교라면, 교육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학교를 결석하고 수술을 자행하는 부모에게 그것은 아동 학대, 장애인 학대에 해당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자가 교육도 학교에서 배우는 또래문화도 중요하다고 말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수업시간에 장애가 차이이자 다양성이라고 가르쳐봐야 그게 설득이 되겠는가?  아무리 국가지원이 늘어도 같은 아동과 당사자의 살해사건에 장애가 있든 없든 동등하게 포함하지 않으면 절대 이런 사건은 줄지 않을 것이다. 인권이 이런 억울한 차별에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 이제 학교 교육도 ‘장애인을 죽이지 마라, 부끄러워하지 말라, 우리가 함께 하겠다’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2022-09-22 | hrights | 조회: 476 | 추천: 3
정한별/ 사회복지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최근 종영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라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80년 전만 해도 자폐는 살 가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80년 전만 해도 나와 김정훈 씨는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지금도 수백 명의 사람이 '의대생이 죽고 자폐인이 살면 국가적 손실' 이란 글에 '좋아요'를 누릅니다. 그게 우리가 짊어진 이 장애의 무게입니다.”  드라마는 이상하리만치 인기가 많았다. 여기저기서 드라마 속의 ‘우영우’ 캐릭터가 사랑스럽다느니, 귀엽다느니, 자폐성 장애를 알게 되었다느니... 그런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다. ‘우영우 신드롬’이라는 이야기까지 들려오니, 뒤늦게 드라마를 본 나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성 장애가 있는 우영우라는 변호사가 다양한 사건을 변호하고, 해결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자폐가 있는 딸을 혼자서 기른 아빠, 우영우와 학창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친구, 있는 그대로의 우영우를 사랑하는 같은 로펌의 송무팀 직원, 우영우를 이해하고 챙겨주는 봄날의 햇살 같은 직장동료, 편견을 걷어내고 우영우의 능력을 본 직장상사까지. 드라마는 제목을 잘 못 지었다. 정작 이상한 것은 ‘우영우’가 아니라, ‘우영우’ 주변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폐성 장애는 매우 독특한 장애 유형이다. 대한민국에서 통용되는 장애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장애인복지법」을 따른다. 이 법에 정의된 자폐성 장애인은 “소아기 자폐증, 비전형적 자폐증에 따른 언어·신체표현·자기조절·사회적응 기능 및 능력의 장애로 인하여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의미한다. 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정의 규정처럼 자폐성 장애로 인한 모습 역시 매우 다양하다. 적어도 현실에서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운영 우’와 비슷한 자폐성 장애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옆집의 자폐성 장애인  은미(가명)씨는 자신의 아이를 외딴 섬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아이가 가진 장애를 먼저 알렸고, 새 학기가 되면 같은 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파티를 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교우관계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지만, 아이는 그런대로 학교에 잘 다녔다.  그러나, 아이가 중학교에 진학하자 괴롭힘은 시작되었다. 초등학교에서는 이해의 대상이었던 자폐가, 중학교에선 놀림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엄마가 지켜줄 수 없는 사회, 낯선 사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폐를 가진 아이가 당당히 살 수 있도록 십 수년간 지속했던 노력들이 손에 쥔 모래처럼 빠져 나가버렸다. 아이를 지켜줄 거라 생각했던 학교 역시 학교의 안위만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자폐성장애가 있음에도 교내의 다양한 행사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역량이 있다고 인정되었던 아이는, 그 어떤 말도 믿을 수 없는 그저 자폐성 장애인이 되었다. 아이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다.  형진(가명)씨의 손끝엔 굳은살이 많이 있었다. 손등과 팔, 그리고 다리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다. 불안할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고, 손과 팔다리를 긁어대는 통에,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가 생겨나곤 했다. 형진씨는 세탁기를 잘 돌렸다. 집에 돌아오면, 세탁기에 자신이 입었던 옷을 모두 넣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사람을 쳐다보고, 맨살을 쓰다듬는 일 자체를 좋아했다. 처음 나와 만난 날에도, 갑자기 내 손목을 쓰다듬고는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초등학생 여자아이의 다리에 아주 잠깐 손을 댔다(만졌다고 할 수 없을 정도). 피해자의 부모는 형진씨를 신고했고 경찰 조사에서 수사관이 물었다. 수사관: “다리 만졌죠?” 형 진: “다리 만졌죠” 수사관: “모두 인정 하시는 거죠?” 형 진: “모두 인정 하시는 거죠”  수사관에게 형진씨의 반향어 1) 에 대해 설명했다. 수사관은 어차피 CCTV에 모두 찍혀 있어, 그런 건 상관없다고 했다. 경찰은 사건을 송치했고, 검사는 형진씨를 기소했다.  재판과정 중에 피해자와 피해자의 부모는 형진씨를 이해해주었다. 법원 역시 형진씨의 의사무능력을 인정했다. 다만, 법원은 치료감호 처분을 통해, 자폐성 장애가 있는 형진씨를 사회로부터 격리한 후 치료할 것을 제안했다. 법원은 ‘자폐증은 사회와 격리가 필요하며, 치료를 해야 하는 질병’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형진씨를 진료한 정신과 전문의의 소견과 발달장애인지원센터 2) 등 다양한 발달 장애 관련 기관의 지원 덕에 형진씨는 치료감호 처분 대신 지역사회에서 전문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 - pixabay 우영우 변호사의 이상한 지인들  드라마 속 우영우 변호사가 직장 생활을 하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우영우 변호사의 능력이나, 우영우 개인의 특성 덕분만은 아니다. 초점화된 ‘우영우’라는 캐릭터 옆에 존재하고 있던 현실에서 보기 드문 ‘이상한 지인들’의 공이 크다. ‘장애’라는 인식을 넘어 우영우라는 사람을 바라보던, 아버지, 친구, 직장동료 그리고 직장상사가 자폐성 장애인 우영우가 사회에서 함께 살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흔히 발달장애인(한국에선 지적장애인과 자폐성 장애인을 합쳐 발달장애인이라 부른다)은 혼자서 살 수 없다고 한다. 자립해서 살 수 없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누구도 혼자서만은 살 수 없다. 혼자서 살 필요도 없다. 내 옆에 있는 사람, 우리 동네에 있는 사람, 우리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살고 있고, 함께 살아야만 한다. 서로 돕고 이해하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발달장애인을 조금만 더 이해하고, 양보하며, 돕는다면 발달장애인도 시설이 아닌 동네에서 함께 살 수 있지 않을까.  나 자신도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은데, 남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을까. 드라마 속 우영우의 지인들처럼... 1) 타인의 말을 의미를 알지 못한 채로 그대로 메아리처럼 되받아서 따라 하는 말이다. 언어발달 과정에서 생후 9개월경부터 영아는 주변 사람의 말을 의식적으로 그대로 모방한다. 반향어는 영아의 어휘발달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반향어는 자폐증(autism)의 전형적인 한 증후이기도 하다.(교육심리학용어사전) 2) 2015년 시행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하여, 발달장애인에 대한 권리보장 및 통합적인 지원을 위하여 설치된 발달장애인 전문기관
2022-09-14 | hrights | 조회: 640 | 추천: 6
신종환 / 공무원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은 고용인들에게 당신들 피고용인은 사람이 아니라 숫자라고 말한다. 토요일 퇴근 후 헬스장에서 마주친 주민센터 동료는 내게 다음 주부터 힘들어질 예정이라며 푸념을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는 다음 주부터 주민센터에 지역 코로나지원금 현금 지급 대상인 거지새끼들이 온다고 했다.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진 공무원이 적지 않아서 그의 단어 선정과 기분 자체는 놀랍지 않지만 당연히 내가 그 어조에 동조할 거라 생각하는 그의 생각은 조금 놀라웠다. 몇 년 전이었다면 그래도 거지새끼라는 말은 그렇다고 타박을 했을까 싶지만 나는 순간 당황했다가 고생하시라며 너스레를 떨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저 친구 처음에는 안 저랬는데? 나는 왜 뭐라고 안했지? 어떤 기분이었더라? 전에는 어땠지? 해소되지 못할 퇴사 욕구만 남고 질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쉽게 이해하는 나를 문득 느꼈다. 수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떻게 저 직장인들은 한결같은 고충과 퇴사 욕구와 퇴근이라는 한정적인 주제만을 외칠 수 있는지. 시간의 풍화작용을 버티지 못한 내 모습. 이를테면 나를 둘러싼 것들은 모두 작거나 큰 고통이고 머릿속은 그에 대한 회피방안 뿐이었다. 죽을 만큼 우울하지는 않지만 협소해진 생각을 보며 자살하는 사람들은 현실에 상상력이 완전히 포섭되었을 때 죽는다던 문구가 생각났다.(<철학 듣는 밤>, 김준산, 김형섭 지음. 프리렉 출판사) 과 서무 회계 담당자의 일상은 절반 정도는 짱구의 하루와 같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는 가고 사람들은 나를 못 말려 하니 과반은 맞지만 나는 짱구처럼 대단하지도 않고 천재도 아니고 다음엔 무엇을 할지 염두 하지 않으니 나머지는 틀렸다. 출처: 저작권 없음. 변수를 줄이고자 초과근무가 허용하는 가장 이른 시간 04시에 쏟아지는 졸음 반과 조용한 사무실을 만끽하며 일을 한다. 대여섯 건의 지출과 서너건의 제출문서, 그리고 승진을 위한 교육...교육.... 갑자기 이 모든 게 쏟아지는 까닭은 쉬이 지휘부가 회식을 잡는 까닭이요, 제출기한이 다가온 까닭이요, 아직 나의 업무가 완료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로또 번호 하나에 퇴직과 로또 번호 하나에 주식과 로또 번호 하나에 아른거리는 자취방과 로또 번호 하나에 남은 대학 졸업과 로또 번호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나는 번호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명예퇴직, 의원 면직, 정년퇴직 공로연수, 이런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정시출퇴근이 멀 듯이. 라는 잡념을 두르고하며 일을 하다 해가 뜰 것 같아 사무실 블라인드를 열고 창문을 열고 뭉텅이로 온 일간지를 정리하고 있자니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고 내 동공도 활짝 열린다. 의원 의전을 위해 수원으로 가는 계장님은 이렇게 일찍 나올 일이 무엇이 있냐는 말을 멋있게 던지고는 수원을 향해 당당히 간다. 음....그에게 화가 나는 자 그에게 돌을 던지자는 생각으로 실제 투석을 갈음하고 업무의 마무리와 아침을 맞이한다. 앞서 말했듯 하루 업무는 짱구가 운전하는 타임머신 같아서 정신 차려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 있다. 오늘은 노조에서 내가 담당하는 영화모임이 있는 날이라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극장으로 가서 좌석을 예매하고 동료들을 기다린다. 보기로 한 영화는 이정재 배우의 입봉작인 ‘헌트’이고 상영시간은 18:22. 모이기로 한 시간은 18:15 지금은 18:13... 공무원에게 기한과 정시란 대체로 허용되는 가장 늦은 시간이거나 자기가 정한 시간이다. 18:15이 되니 사람 대신 카톡이 답지한다. “주사님 죄송해요 을지연습 때문에 일이 늦어서 오늘은 초근해야 할 것 같아요”와 이와 유사한 카톡이 일곱. 을지연습이 국가의 안보에 이바지하는 목적을 이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임의 목표치인 12명은 덕분에 이루지 못했다. 영화를 보며 이정재와 정우성도 나처럼 하루가 정신없고 자기 시간 없어서 어리둥절한가 싶은 생각이 들게 영화는 내 하루처럼 복잡미묘하게 끝났다. 복잡하게 꼬인 승진심사의 소식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내 속을 치킨에 돌돌 말아 먹어가며 뒤풀이를 시작하려는 순간, 처음 온 주사님이 이번 영화의 이런 점이 재미있었고 다음에는 이런 영화를 보고 싶다고 묻지 않았는데도 말을 한다. 어떤 제안을 해도 침묵을 일관하는 윌슨같은 회원들의 태도를 긍정이라 해석하던 나날에 자발적 의견을 들으니 약간의 울음을 삼키며 속으로 ‘이 사람을 보라!’를 연발했다. 마침 9월에 같이 볼 영화가 마땅치 않던 차에 그는 예전에 개봉한 ‘위대한 쇼맨’을 같이 보고 얘기를 나눴으면 한다고 했다. 가만있던 동기는 돌연 자기는 이런 영화를 보고 싶다며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가뭄 끝에 비를 보는 농민은 이슬비에 울었을까. 내가 내적으로 오열했으니 그도 울었을 것이다. 새로운 멤버 덕인지 영화에 대한 의견도 전보다 활발하게 오갔고 다음 달 고정 참석 다섯 명을 확보하고 귀갓길에 한동안 잊었던 생산적이라고 기억되던 감각들을 새삼 느꼈다. 퇴행을 간신히 막는 날을 넘어서 모두 다시 이것저것 해볼 날은 올까? 그런 생각을 하기에 지금이 최적은 아니지만 하다 보면 다시 실마리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사람들은 폐허에서 울지만 거기서 다시 밥을 먹는다지. 들뢰즈 선생님, 여기가 로도스인지는 이제 까먹었지만 뛰어는 보겠습니다. 누군가 뛰고 있는 저를 기다릴지도 모를테지요.
2022-09-02 | hrights | 조회: 507 | 추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