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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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회림/ 경찰관  A, B 두 중학생들 사이에 1대 16의 학교폭력 사건이 일어났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인 ‘기훈이(가명)’는 아파트 복도에 몰려온 16명의 아이들이 현관문을 발로 차며 위협하는 소리에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다. 직접 경찰에 신고할 용기를 내지 못해 다급히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를 알렸고 친구가 대신 112로 신고했다. 출동 경찰이 작성한 112신고처리표의 사건개요란에는 “친구 집 앞에 10명 이상이 찾아와 벨을 계속 누른다. 친구를 대신해 신고한다”라고만 간단히 적혀 있었다.  반면에 종결란은 16명 아이들의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그들의 부모님 전화번호로 꽉 차 있었다. 도합 서른명 넘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니만큼 A4사이즈의 보고서 한 장이 매우 무겁게 느껴졌다.  먼저 피해자 기훈이의 학교폭력 담당교사에게 전화를 건다. 수업중이라 받지 않아 문자로 자초지종을 보내 놓고 학생부장 교사에게도 전화한다.  역시 받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교감선생님에게 연락하니 다행히 바로 받으신다. 신고 내용에 대해 알리고 학생과 면담이 가능한지 학부형과 학생에게 의사를 물어달라고 요청한다. 학교측에서 면담 준비를 하는 동안 제복을 챙겨들고 학교 정문에 들어섰다. 곧 점심시간이 시작이라 점심을 먹고 바로 상담실로 오겠다는 기훈이를 기다렸다. (*기훈이는 제복 경찰과 만나는 모습을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해서 사복차림으로 만나기로 하였다.)  기훈이를 기다리는 동안 B학교 담당 SPO(학교전담경찰관)에게 전화를 건다. 나의 좋은 동료인 김경사는 이미 주동자인 ‘덕수’ 학부형과의 면담을 통해 신고처리표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저간의 사정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다. 김경사를 통해 기훈이가 초등학교 시절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피해자이고 덕수는 그런 기훈이를 보호해주던 유일한 친구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덕수조차 기훈이를 따돌리는 식으로 상처를 준 일이 한 번 있었다고 한다. 이때 덕수 어머니의 주선으로 여러번 사과를 받긴 했으나 기훈이의 마음속은 배신감과 피해의식으로 단단히 응어리졌고 서로 다른 중학교로 배정을 받은 후로는 어쩌다가 한번씩 안부를 묻는 정도로만 연락을 하였다고 한다.  기훈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112신고사건처리표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덕수가 기훈이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며 하소연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화 도중, “너는 내 편이냐? 그쪽(여자친구)편이냐?” 라고 캐묻고 “줄을 서라” 고 말하며 무리하게 선택을 강요하는 일이 일어났다. 애초에 덕수에 대한 신뢰가 없던 기훈이는 이를 오랜만에 전화 온 동네친구의 한심한 넋두리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한다.  그래서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켜 녹취를 하였고 통화가 끝난 후, 둘 간의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유튜브에 업로딩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덕수의 어머니를 겨냥한 욕설을 해당 유튜브에 댓글로 단 후 주변 친구들에게 링크를 전달해버렸다. 이런 행위를 한 이유에 대해 물으니 “다른 아이들이 덕수의 실체를 알았으면 해서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덕수의 친구들인 15명의 아이들은 애초에 기훈이가 먼저 학교폭력에 해당하는 행위를 저질렀기때문에 응징받아 마땅하고 자신들의 분노는 순수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친구의 명예가 훼손되고 친구의 어머니까지 모욕당한 것이 사실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16명이 1명에게 집단으로 몰려가 고함치며 문을 발로 차고 위협하는 행위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진심을 담아 자발적으로 하는 사과는 장려되어야 함에 틀림없지만, 사과를 하지 않는 경우라도, 당사자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 단죄하듯 우루르 몰려가 위력을 과시하며 사과를 강요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보복심에 기인하고 또한 인격권 침해에 해당되는 행위일뿐이다.  이제는 양쪽 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상황. 이대로 학폭위나 형사고소 절차로 들어가면 각자의 위법행위에 책임지는 조치를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 즉,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로 남을 결과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김경사와 나는 여기서부터 고민이 깊어졌다. 그래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깊이 들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양쪽 다 서로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있고 사과를 통해 해결하고 싶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더이상 학폭위나 형사 고소등의 절차를 밟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비치셨다.  우리는 경찰서에서 주관하는 ‘회복적경찰활동’ 제도를 활용하여 공식적인 ‘사과와 화해의 절차를 가지는 것을 제안하였고 양쪽 아이들과 부모님들 모두 이에 동의하였다. ‘회복적경찰활동’이란, 상담전문기관, 경찰, 그리고 가·피해자 학부형, 학생들이 경찰서의 상담실 등에 모여 사전모임, 본모임, 모니터링의 3단계를 거쳐 ‘약속이행문’을 작성하는 절차로 끝나는 회복적 대화 모임을 말하는데 피해자의 피해회복과 관계 개선을 가장 큰 목적으로 한다.  3시간 동안의 회복적 대화모임이 끝난 후, 아이들과 학부형들을 경찰서 정문 앞까지 배웅하면서 기훈이의 심하게 말린 어깨를 보게 되었다.  ‘서로 사과하고 잘 끝났으니 그만 어깨 좀 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기훈이의 등을 한 번 탁! 치며 말했다. 곁에 있던 어머니께서 살며시 웃으시지만 기훈이는 약간 놀라며 멋쩍어 할 뿐이다. 곧 다시 위축된 어깨로 걸어가는 기훈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초등학교때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내 마음이 씁쓸해졌다.
2022-08-12 | hrights | 조회: 789 | 추천: 6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활동가 김형수  어느 학교에서 장애인 학생이 학급에서 놀림을 받아 학교를 나오지 않으니 인권교육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처음에는 늘상 일어나는 장애인 차별이나 혐오로 생각하고 학교를 방문했으나 교사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장애인 학생은 부모가 학급 내 사건을 빌미로 이미 한달 넘게 장기 결석 중이란 것을 알게되었다. 비장애인 학생은 3일만 연속 결석해도 결석 사유를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것인데 장애인 학생의 경우는 왜 그러지 않고 인권교육부터 의뢰했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학기초에 학생에게서 부모로부터 받은 학대 정황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과 특수교사는 왜 이 사안을 장애인 학대와 아동 학대로 즉시 신고하지 않았을까? 왜 교장 교감은 왜 인권교육만 하라고 닦달했을까? 학대 경험이 있는 학생이 한달 넘게 결석해서 특수교육대상자가 적절한 의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왜 해당 교육청의 장애인 학생 인권지원단은 왜 움직이지 않고 나에게 개인적으로 인권교육을 의뢰했을까?  최근 부모와 함께 사망한 조유나씨(10세) 관련 기사와 몇 년간 폭증한 부모에 의한 장애인 살인 사건을 다루는 우리나라 사회 시각과 언론의 태도를 보면 같은 ‘사람’의 죽음에도 차별과 경중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조유나 피해자 죽음 원인이 그게 무엇이든 존비속의 살인 사건은 도덕적 윤리적 법적 비판을 피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언론과 대중들은 동기가 무엇이든,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은 부모를 연일 비판하고 심지어 체험학습을 보낸 학교와 교사들에게까지 행정 당국은 책임과 각성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허나, 코로나 시대의 수십건 부모의 장애인 살해 사건을 대하는 언론과 사회의 피드백은 같은 가족 간의 살인 사건임에도 위와 같은 극악한 학대 사건으로 다루지 않는다. 출처-픽사베이  미디어는 아무도 부모의 가난과 고통과 양육의 어려움이 크더라도 ‘오죽했으면’이라 말하지 않는다. 비장애인을 키우는 부모가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그런 살의를 잠시 떠올리거나 입밖으로 드러내거나 SNS에 개인적으로 넋두리 하는 것조차 비난받음을 넘어 당장 신고하라며 고민없이 단호하다. 그런데 장애인 죽음에는 가해자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하여 TV와 기사들은 너무나도 공공연히 공개적으로 실행하지 못한 가해자 경험과 서사를 대중들에게 표현하고 공감한다. 장애인 자녀가 당신들보다 하루만 먼저 사망하길 바란다는 비장애인 당사자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문장도 제목으로 뽑고 많은 장애인 부모들의 인터뷰에서도 가해자 입장과 같은 경험에 공명했음도 가감없이 실어준다. 아니 가해자의 가치와 가해자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부모로부터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장애인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다. 피해자를 대변해야 할 인권 활동가나 장애인 당사자도 가해자들이 부모들이면 명확하게 ‘범죄’로 정의하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채감을 가진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하는 추모제까지 열면서 정치인과 교사, 사회복지사, 치료사와 같은 전문가들이 그 곳에 모여 연일 국가의 책임을 성토한다. 물론 정부의 정책과 지원은 이런 살인을 막기 위해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그 사회 안전망의 구축만으로는 이런 살인 사건을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장애인의 죽음에 가해자의 입장만을 대변하면 그것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방조를 계속해서 사회에 퍼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언론과 대중들, 장애인을 키우는 장애인 부모와 장애인 단체들의 입장과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과연 이런 죽음을 막을지는 회의적이다. 무엇보다 이런 인권유린에 민감해야 할 인권 단체와 활동가들의 어쩔 수 없는 침묵은 오싹하기까지 하다. 다른 나라들도 정책과 지원이 충분해도 장애가 있는 가족 살해 후 자살이라는 범죄는 일어난다. 우리 언론들은 특히 장애인 문제에 대하여 가족들에게 온정주의가 가득하다. 감동과 극복의 이데올로기와 맞닿아 장애인의 출생과 양육까지 온통 혈연 가족들의 책임으로 세뇌하니, 세뇌된 책임은 가족의, 부모의 권리로 착각한다.  장애인 등록과 치료, 교육, 취업, 결혼, 시설입소까지도 부모가 결정하는 법적 권한이 어느 나라보다 강한 나라다. 그만큼 부모의 권력이 세다는 뜻이다. 장애인을 양육하는 부모가 인권적이거나 정답이라서가 아니라 그동안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정치 작업의 결과이다. 장애인을 힘모아서 잘 키워보자는 기사의 분석과 대안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죄다 장애인을 키우기 두렵고 어렵고 힘들다는 구체화된 낙인된 이야기 뿐이다. SNS에 넘쳐나는 장애인 부모들의 슬픔과 가해자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말들이 장애인을 가족으로 맞이할 후대 부모들에게 세상의 어떤 역경과 차별도 견딜 힘을 줄지, 종국에는 장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절망을 전염시킬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다 못해 지역 공동체가 인권단체들이 장애인부모들을 상대로 생명의 전화라도 열어보면 어떨까? 잘못된 권력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학대와 폭력을 감시하고 장애인 가정의 고립을 막을 수 있는 활동과 정책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 아무리 국가지원이 늘어도 같은 아동과 당사자의 살해사건에 장애가 있든 없든 동등하게 포함시키지 않으면 절대 이런 사건은 줄지 않을 것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온전히 자유로운 상주가 되는 장례식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든 대한 민국에는 죽음에도 장애인 차별이 있다. 인권이 이런 억울한 차별에 더 이상 침묵 해서는 아니된다. - 본 원고는 은평시민신문에 기고된 원고를 대폭 수정 보완 했음을 밝힙니다.
2022-07-27 | hrights | 조회: 671 | 추천: 1
정한별/ 사회복지사  부모란 무엇인가?  최근의 다양한 논의는 차치하고 단순하게 사전적 의미는 아이를 낳아준 남자인 아버지, 여자인 어머니를 이르는 말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고민했던 날은 사실 없었다. 오랜 기간 연애를 했고, 그냥 자연스레 결혼을 했다. 결혼이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했던 것도 아니었다. 직업은 있었지만, 모아놓은 돈은 없었다. 부모는 있었지만, 집을 사줄 부모는 없었다.  그냥 결혼을 했던 만큼, 부모의 의미나 역할을 고민해보지도 않았다. 좋은 부모란 무엇인가, 양육은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고민해 본 일도 없었다. 막연히 신혼 생활을 6개월 정도 하고 난 뒤, 준비를 해서 1년 내로 아이를 갖자는 계획을 세웠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될 거라 생각했다. 아이를 갖기 위한 준비를 하자고 이야길 하자마자 아이가 생겼다. 그렇게 부부는 부모가 되었다.  아이는 다소 작았지만, 건강했다. 여느 아이들만큼만 자주 아프고, 잠투정이 심하고, 예민하였다. 딱 그 정도였다. 부부는 넉넉지 않았지만, 일정한 소득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싼 분유, 조금이라도 더 싼 기저귀가 어디에 있는지 찾느라 전화길 손에 놓기 힘든 정도, 기저귀에 붙어 있는 마일리지 쿠폰 하나를 잃어버리면 하루가 찝찝한 정도의 평범한 부모였다.  부모의 역할, 부모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결혼 전의 일상을 포기했고, 포기한 일상만큼 아이로 인한 기쁨과 행복이 보상으로 채워지는 지극히 보통의 가족이었다. 일상의 변화로 아이의 엄마는 10년 가까이 일했던 직장을 관뒀다. 그냥 딱 그 정도였다. 부침이 있어도 그 부침이 부모의 역할과 부모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진 않았다. 나아가 부모 이전의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지도 않았다.  고민은 각자가 마주한 삶의 위치에서 일어난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3에게 고민은 대학입시가 되고, 직장을 구하는 일이 어려운 실업자에겐 취업이, 몸이 아픈 부모를 부양하는 자식에겐 부모가, 아이를 양육하는 일이 어려운 부모에겐 아이가 고민이 된다. 저마다 고민의 깊이는 삶의 무게에 비례한다고 했던가. 사진 출처 -  freepik  2019년 8월, 발달장애가 있는 9살짜리 여자아이가 죽었다.  아이는 말이 늦었고, 3세 이전부터 자폐증상이 보였다. 어려서부터 치료시설과 전문병원을 두루 다녔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반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특수학교에 다녀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이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아이의 몸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상처가 늘어갔다.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집을 뛰쳐나가는 등의 행동으로 경찰서에서 인계되는 일도 잦았다.  아이의 아빠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2019년 초 불의의 사고로 가족이 죽었고, 그 충격에 아빠에게 공황장애가 생겼다. 공황장애로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가정 형편은 점점 어려워졌다.  아이의 엄마는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아이의 자폐증을 알고 난 이후부터 엄마는 그 누구도 만나는 일 없이 아이를 돌봤다. 아이에 대한 양육 부담과 경제적 부담으로 엄마는 우울증에 걸렸다.  2019년 8월 아이의 엄마는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없으면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고 아이의 아빠에게도 부담이 되겠다는 생각에 아이를 먼저 보낸 뒤 자신은 아이의 뒤를 따르고자 했다. 그날 오후, 먼저 떠난 아이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이의 엄마에겐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피고인 아이의 진료를 맡아왔던 정신과 의사입니다.  아이에 대한 엄마의 정성과 애정으로만 아이를 키우기에 너무 벅찬 현실입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보면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따라다녔고, 제대로 된 시설이나 훈련 프로그램을 갖춘 교육기관은 손에 꼽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발달장애 아동을 위한 학교를 짓는다고 하면 동네 땅값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주민의 반대가 거세고, 그런 자녀를 둔 부모만이 고스란히 그 짐을 지고 가야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임을 이런 아동을 치료하면서 늘 안타깝께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이의 죽음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비극일지 모릅니다. 한 부모에게, 한 가족에게만 발달장애 자녀를 책임지우는 것은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1)   2022년 6월 3일 경기, 두 명의 발달장애 자녀를 홀로 돌보던 아버지 극단적 선택 2022년 5월 30일 경남, 발달장애자녀의 어머니 투신 2022년 5월 23일 서울, 6세 발달장애 아들을 안고 어머니 투신. 2022년 5월 23일 인천, 어머니가 중증장애 딸 살해 후 극단적 선택. 2022년 5월 17일 전남, 조카에게 폭행당한 발달장애인 사망. 2022년 3월 2일 시흥, 발달장애 자녀 살해 후 극단적 선택. 2022년 3월 2일 수원, 어머니 8세 발달장애 아들, 입학식 날 살해 2021년 11월 전남, 아버지가 발달장애 자녀와 노모를 살해 2021년 5월 충북,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의 극단적 선택 2021년 2월과 4월 서울,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의 극단적 선택 2020년 6월 광주, 발달장애 자녀와 어머니가 극단적 선택 2020년 4월 서울, 4개월 된 발달장애 자녀 살해 2020년 3월 제주, 어머니가 발달장애 자녀 살해 후 극단적 선택 <발달장애인가정 사건 관련 언론 보도>  많다.  너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정말 너무너무 많다.  과연 이들의 죽음 앞에서, 감히 온전히 부모의 책임만을 물을 수 있는가! 부모는 죗값을 받겠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한 아이를 살해한, 결코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죗값을 받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우리 사회는 죗값을 받겠는가!  부모란 무엇인가? 부모의 역할과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이 질문에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은 자신의 존재를 던져 답을 하고 있다.    이젠 국가의 차례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역할과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국가는 답하라. 제발, 제발, 답해 달라.    국가는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를 마련하라!  국가는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를 마련하라! 1) 위의 ‘발달장애 자녀 살해 후 극단적 선택 사건(2019고합365)‘ 피해아동 담당 의사의 피고인을 위한 탄원서 중 발췌
2022-07-13 | hrights | 조회: 1094 | 추천: 13
신종환/ 공무원  인권연대에 기고하는 글은 전반적으로 나의 직업 혹은 직업에서 파생된 감정에 대한 글들이었다. 처음 칼럼을 권유 받았을 때 ‘공무원’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이 비춰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몇 년간의 공직생활 이후 나의 정체성에서 공직에서의 책무와 책무에서 비롯된 부정적 감정 이외에는 전부 소거되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소거, 유능하고 책임감 있고 지향점이 있는 동료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소거’라는 말이 공직을 표현할 수 있는 정확한 말이었던 것 같다. 말의 테두리를 상사와 동료와 민원인에 맞게 절지하고 언급할 수 있는 생활의 범위와 권하고픈 도서와 그 묘사를 지자체의 테두리 안에서 통용되는 범위 안에서 제한하다보니, 정착하고 나면 자신의 뇌를 용해한다던 멍게와 어떤 점에서는 비슷해졌다. 새로 생긴 가게, 편의점에 출시된 신메뉴는 읊어도 어느 순간 글은 어렵게도 나왔고 나온 글도 부끄러웠다. 어떤 글인지 알 수 없기에.  소거의 나날에 제동을 걸은 건 고통이었다.  마감에 임박해 글거리를 생각하자니 소거되지 않은 나날이 떠오른다. 머리에는 남아있어도 글로 옮기기 다소 어려운 순간들도.  한 부서의 예산과 회계를 맡고 나서 머리 속에 있던 철학자들과 그 구절들을 잊었다. 정신과 약을 먹고부터는 어느때보다 제2차대전 5년간의 수용소 생활에서 포로들의 고통을 목도한 루이 알튀세르의 고통만이 학문의 진리라는 말이 늘 머리에서 맴돌았다.(<철학 듣는 밤>, 김준산, 김형섭 지음. 프리렉 출판사)  정신과에 가기까지는 누구의 아픔도 생각 할 수 없었다. 듣고 보더라도 그 아픔은 얼마나 하찮고 가소로워 보였는지. 나는 자기 전에 죽고 싶었고 눈을 뜨기 전에 죽었으면 했고 전화벨 소리와 메일 수신 알림, 누군가 나를 부를 때는 심장이 쳐맞는 것 같았다.  결혼한 계기가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인생이 어디까지 떨어질지 궁금했다는 그로테스크한 선배의 대답이 바로 이해가 되고 소행성과 충돌한다는 멜랑콜리아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부정맥이 멎고 잘 때도 일어날 때도 덜 죽고 싶을 때, 숨을 몇 차례 돌리고 나면 맘 속에서 나간 사람들이 다시 들어왔다. 작은 연대도 아쉬웠기에 그들의 겪은 상상 이상의 시간들보다는 도와준 손길이 부각된 글. 추앙받아 마땅하기에 당신들의 잃은 동료들에 대한 묘사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다시 형언키 어려운 일터로 가야 했던 글. 그 간극이 이랬다는 건 겪지 않고서는 알 수 없었다. 말은 경험의 재구성인데 나는 그만큼 아프지 않았으니.  나무는 외연을 확장할 때마다 테가 생긴다고 했던가. 그 동안 느꼈던 감정들 중 고통들은 다소 자기 회귀적이었고 발원지를 향할 때조차 이를 연대하는 스스로의 비중이 높았으니 테의 확장이라고 하긴 어렵겠다. 그럼 테의 확장은 무엇일까. 알 수 없지만 어느새 부끄러움보다는 말의 모습을 띠지 못해 짐작만 할 수 있는 당신들의 모습에 닿기 위해 먼저 나를 드러내려는 태도를 그렇게 불러도 될까. 좀더 자세히는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의 비명과 불면, 그리고 그 흔한 고통을 먼저 드러내보려는 나의 태도를 그렇게 불러도 될까.  먼저 나의 부끄러운 테두리를 드러내본다. 고통이 잦아든 뒤에 들리지도 보이지 않던 당신들의 고통에 나를 비춰볼 수 있었으니. 이 꾸진 고백이 ‘같이 비를 맞는다’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과 비슷한 맥락에 있기를 바라고 또 그런 태도에 당분간 불어올 험한 세월을 서로 견딜 마중이 되기를 바라며.
2022-07-06 | hrights | 조회: 630 | 추천: 2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미얀마에서 군부쿠데타가 발발한지 1년 4개월이 지난 지금, 2016년부터 6년째 미얀마 중부도시 메이크틸라에서 ‘평화도서관’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사단법인 아디는 쿠데타 이후 변화된 삶에 대해 미얀마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먼저 대학생인 코코툰(가명)은 쿠데타 이후 ‘온라인 교육’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그는 “쿠데타 이후 미얀마내 대부분의 물가가 올랐고 특히 모바일 데이터 비용이 두배로 올랐다. 비싼 통신요금때문에 온라인 교육을 듣지 못하고 있다”고 하며 “하지만 군부세력이 운영하는 마이텔 통신사(Mytel Telecommunication Company)는 데이터 요금을 그대로 유지하며 돈을 벌고 있죠”라며 분노했다. 또한 그는 “쿠데타 이후 유능한 미얀마 젊은 브레인들은 업종에 상관없이 외국으로 나가려고 계획하고 있죠. 미얀마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라고 하며 인재유출을 우려했다. 7살 남아를 키우고 있는 엄마 묘이(가명)는 “쿠데타 이후 은행이 문을 닫아 생활비를 인출할 수 없었고, 높은 수수료(7%)를 내며 중국상인들에게 돈을 빌렸어요. 그리고 외국기업들이 미얀마를 떠나면서 미얀마 화폐가 폭락했어요. 사람들의 수입은 줄고 물가는 계속 올라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어요. 쿠데타 이전에 기름값이 400~450 짯(미얀마 화폐)였는데 지금은 거의 2700~2800 짯으로 7배이상 뛰어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라고 이야기 하며 악화된 미얀마 경제에 대해 증언했다. 사진. 메이크틸라 학교의 선생님들, 등교거부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군인들에게 연행된 모습. 출처: 아디  최근들어 한국의 시골 면단위에 해당하는 미얀마의 타운쉽(Township)에는 도둑과 절도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메이크틸라 타운쉽에 거주하는 민 라잉(가명)은 “내가 거주하는 타운쉽뿐만 아니라 인근 타운쉽에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절도 사건이 발생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굶주리고 일이 없기 때문이죠. 주변사람들도 쿠데타 이후 내부치안이 엉망진창되었다고 이야기해요. 하지만 우리는 군부세력이 야간 군사작전을 했다는 소식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어요. 군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죠”라고 하며 불안한 치안상황을 걱정했다.  쿠데타 발생이후 미얀마 전역에서 벌어졌던 반대 시위는 한층 수그러 들었다. 이에 대해 도서관 매니저는 “미얀마 내부에는 오랫동안 활동해온 군부 끄나플과 정보요원이 많고 그들은 끊임없이 군부에 저항세력의 정보를 넘겨 군부는 밤시간을 이용해서 체포하고 공격하고 있어요. 그리고 1년 넘게 지속해온 군부의 무차별 체포와 잔혹한 고문, 살해때문에 쿠데타 초기처럼 비폭력평화시위를 이어가기는 불가능하죠. 그래서 지금은 양곤이나 만달레이와 같은 대도시에서 산발적 게릴라 시위를 하거나 미얀마 소수민족과 국경쪽의 무장세력에 합류하여 직접 저항을 하고 있어요.”라고 전했다. 도서관의 매니저 역시 지난 2021년 10월 도서관에 난입한 군인들에 의해 8일간 군사시설에서 조사를 받고 구금된 적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는 아웅린(가명)은 “여전히 20~30%의 학부모와 교사들은 CDM(시민불복종운동)차원으로 등교를 거부하고 있지요. 그리고 군부에서는 2021년 등교거부에 참가한 학생들의 학교등록을 막고 있어요. 등록이 거부된 아이들은 배울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못하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하며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전해온 모든 미얀마 사람들은 미얀마 쿠데타 이후, 지금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라고 입을 모았다. 쿠데타 이후 붕괴된 정치와 경제, 삶의 기반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며 미얀마 사람들은 높은 물가와 불안한 치안속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군부의 총칼을 피해 국경으로 피신하거나 사람들의 삶속으로 스며들었다. 일부 미얀마 사람들은 내부의 갈등(친군부세력과 저항세력)과 내전도 우려하고 있다. 독재의 어둠속에서 미얀마 사람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고된 삶을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명확한 것은 다수의 미얀마 인들의 가슴속에 군부쿠데타와 독재세력에 대한 분노가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았고, 언젠가는 한국이 그랬듯이 군부독재에서 해방되는 삶을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내일이 올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 날을 얻어내기 위해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22-06-22 | hrights | 조회: 577 | 추천: 4
홍세화/ 대학생  [죽음] :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을 이르는 말.  그저 현생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나는, 최근 단편 단편의 경험들로 죽음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 전, 나 또한 ‘손석구 신드롬’을 피해 가지 못하고 한 드라마를 접하게 되었다.  바로, [나의 해방일지]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해방’, ‘추앙’ 등 평소에 잘 활용하지 않던 단어들을 이 드라마에서는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그 의미를 조금 더 명확히 알고자 처음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국어사전도 함께 들여다보게 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여주인공의 대사 중 ‘나를 사랑해줘요’라는 상투적 표현이 아닌, ‘나를 추앙해요’라고 표현한 부분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적이고 신선한 표현이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총 네 명의 주요 인물이 나오는데, 주된 주인공으로 비치는 인물은 배우 손석구(극중 ‘구씨’)와 김지원(극중 ‘염미정’)이지만, 내게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끔 하고,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 인물은 배우 이민기가 연기한 ‘염창희’이다.  극중 창희는 살면서 뜻하지 않게 자꾸만 가까운 사람들의 임종을 지키게 된다. 자신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줄 계약까지 포기해가며 홀로 여자사람친구의 전 남자친구 임종까지 지키다 뱉는 대사가 나의 마음을 울렸다. 사진 출처 - JTBC  “형, 내가 세 명 보내봐서 아는 데 갈 때 엄청 편해진다. 얼굴들이 그래... 그러니까 형, 겁먹지 말고 편하게 가. 가볍게... 나 여기 있어.”  한 사람 인생의 마지막을 창희는 손을 꼭 잡아주며 추앙한다. 이 장면에서 문득 죽음이란 뭘까 생각이 들었다. 정말 눈을 감으면 편안해지는 것일까.  지난 4월, 우리 가족 귀촌 생활의 시작부터 오랜 세월 함께했던 강아지 은비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몇 달 전 골수암 선고를 받고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지 않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해 힘겹게 살아가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서울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며칠간 펑펑 울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함께 산책하던 은비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마냥 슬퍼하던 중 이제는 고통받지 않고, 죽음으로써 無의 상태로 돌아갔으니 오히려 은비에게는 편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겨우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앞선 두 가지의 경험을 하고 나니 작년 11월에 아빠가 해주신 말씀도 떠올랐다.  연희동 우리 집 건널목 너머에 살던, 한때 대통령을 역임한 주민이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듣고 저녁에 나와 술 한잔하시던 아빠는 내게 언젠가 자신에게도 죽음이 닥칠 것을 깨닫는 인간은 탐욕을 부리지 않고 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맞는 말씀이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일깨우는 자는 아등바등하며 부와 권력, 명예 등에 탐욕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은 일련의 경험을 통한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떠다니다가 깨우친 사실은 ‘죽음을 두려워할 것 없다.’ 와 ‘내게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편히 즐기자’이다.  그동안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들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던 내게 이와 같은 깨우침은 삶을 조금은 초연히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2022-06-08 | hrights | 조회: 613 | 추천: 4
박용석/ 책팔이  얼마 전 소속된 노동조합 지부장 선거에 후보로 출마했다 떨어졌다. 그간 낙선을 사례한다는 어색한 표현만큼이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몰라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해주었던 옛이야기가 생각났다. 1985년, 내가 태어나던 해의 이야기다.  내가 아직 어머니 배 속에 있을 적, 출판인들의 연이은 구속과 수배에 항의하기 위해 뜻있는 출판사와 서점들이 함께 동맹휴업하고 시위에 나서자 결의했었단다. 그러나 결사 당일, 시위 현장에는 갓 돌 지난 첫째아들을 미리 시댁으로 보내놓고 나온 임산부인 어머니와 몇 명뿐, 함께 결의했던 사람 중에 이름난 사람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제대로 해본 것도 없이 체포되어 며칠의 구류를 살고 나왔다 했다. 그조차도 임산부를 가둔 것에 항의하고자 외신기자들을 이끌고 온 아버지의 기자회견 직후였다고 한다. 이미 수배 중이었던 아버지였지만 다행히 잘 도망쳐 그 자리에서 체포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석방된 다음 날 어머니는 청계 상가에서 예리한 제단 가위를 사 정성스레 포장해 그 자리에 오지 않은 유명한 이들에게 선물로 보냈다고 했다.  이 사건이 역사에는 조금 달리 적혀있다고 했다. 그날 그 자리에 오지도 않은 출판사와 서점 대표들 여럿이 결의하여 시위하였고 그 자리에서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했다. 있지도 않았던 시위와 있지도 않았던 성명이 날조되었다 한다. 그중에 누구는 꽤 높은 관직에 올랐고 유명해진 정치인이 여럿이며, 여전히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출판사들이 끼어있었다. 사오정의 뿅망치1) 같은 거라 했다. 죽을 각오로 9번을 열심히 때렸던 지난 사람들을 기억하지는 않는다고, 마지막 열 번째 망치질로, 어쩌면 운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염치들이 없다고 말이다.  그러면 왜 사실을 바로잡지 않느냐 물었다. 그들에 대한 비난은 제 얼굴에 침 뱉기라 우스운 꼴밖에 되지 않는다 했다. 그리고 의리라 했다. 그날 그 자리에 오지 않았음에도 온 척하는 이들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 꾸며진 영광이라도 있어야 힘을 낼 사람들에 대한. 그래서 반박하지 않는다 했다. 그러며 당부했다. 염치도 의리도 바닥에 떨어진 지 너무도 오래이니 너무 열심히 하려다 상처받지 말고 적당히 눈치껏 실속도 차릴 줄 알라고.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의리도 지키고 실속도 챙기는 법을. 눈치껏 적당히 하면서 염치도 차리는 법을. 입은 무겁게 지갑은 가볍게 해야 한다는 나이가 되어가면서도 여전히 가벼운 입과 쉽게 열기에는 욕심 많은 지갑밖에 없어서.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역설에 대리만족하기도 하지만 백마 탄 왕자(혹은 공주)님이 데리러 올 날을 고대하며 깃털을 가꾸는 것이 능한 처세라 백화점 명품 매장에 새벽부터 번호표 뽑고 대기하고,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같은 상상력에 갈채하면서도 임대아파트 사는 아이와 같은 학교에 우리 아이를 보내는 끔찍한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하고, 점점 더워지는 지구에 숙주마저 죽이는 고장 난 바이러스의 창궐로 전 인류가 고통받고 있는 와중에도 전쟁을 벌이는 현실 속에 대체 누구에게 의리를 지키고 누구에게 염치를 차려야 할지, 누구에겐 적당히 눈치껏 실속을 챙겨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사진 출처 - 구글  특권적 관계에 있노라 주장하는 사람들과 역사를 부정당했던 사람들은 결국 공동의 운명과 마주친다2)지만, 그 비어 있는 거대한 행간이 대체 무엇으로 채워질지 여전히 궁금하다. 여전히 그날이 올 때까지 잘 참지를 못해 실수투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넋두리하듯 아무 짝에 쓸모없을지 모를 푸념을 꾸역꾸역 써낸다.  나 역시 알량한 뿅망치질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기 때문이고, 내 손톱 및 가시만 아프다며 헐뜯고 상처 주기에만 바빴던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눈 밝은 이가 이 글과 현실 사이에 공간을 읽어내어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주길 바라면서 재미없는 옛날얘기는 이만하고 염치와 의리와 눈치와 실속의 관계와 균형에 대해 좀 더 고민해야겠다. 죽을 힘을 다해 9번 때린 뿅망치를 넘겨주고 조용히 입 다물고 있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법을, 그러면서도 더 많은 뿅망치를 만들 방법을. 언제가 제대로 10번째 망치질을 해낼 방법을. 덧: 어머니에게 받은 가위를 아직 보관하고 계신 분이 혹여 이 글을 보신다면 제게 그 가위를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치욕을 주기 위해 보냈던 물건을 제 나이만큼 보관하신 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은 마음에 감사하여 저 또한 삿된 마음이 들 때면 바라보며 행실을 다잡고자 합니다. 1) <날아라 슈퍼보드_허영만 원작_KBS 방영>의 사오정 캐릭터는 ‘뿅망치’를 무기로 사용하고, 10번째 공격에만 가공할 폭발 공격이 가해진다는 설정이다. 귀가 잘 들리지 않고 기억력이 좋지 않은 어리숙한 설정의 캐릭터 사오정은 힘겹게 몇 번을 때리고 나자빠지고 또다시 힘겹게 몇 번을 때리고는 몇 번을 때렸는지조차 잊어버려 만화의 재미와 긴장감을 주는 캐릭터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생소한 캐릭터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따로 주석을 남깁니다.)  2)  Eric Wolf, 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 2nd Edi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0. 박광식 역, 『유럽과 역사없는 사람들: 인류학과 정치경제학으로 본 세계사 1400~1980_뿌리와이파리』
2022-05-25 | hrights | 조회: 1025 | 추천: 5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  작업실이자 사무실 겸 나 홀로 얹혀사는 집은 서울 은평구 구산동 언덕길 끝자락에 인현왕후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새로 지어진 곳이다. 맑은 날 북동향 족두리봉을 시작으로 향로봉까지 북한산 자락 응봉능선 전부가 손에 잡힐 정도로 높은 17층 아파트다. 이사 온 것은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5월이다.  신촌 마포구 연남동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연희 교차로 좁디좁은 복층 원룸 사무실 건물에서 두어 번의 화재와 소방차 출동을 겪으니 반드시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가위 눌렀다. 연남동 기차길 택시 회사에서 운전을 하는 아버지는 출퇴근 찻삯도 아끼신다면서 이사를 원하지 않으셨다. 바깥에서 햇빛을 보지 않아 대상포진마저 걸렸다. 허나, 지금은 여기를 벗어나야 했다. 연남동을 떠나니 이순희 어머니는 초등학교 그림일기, 개근상 마지막 한 장까지 모두 이사하기 일주일부터 상자에 담아 목록까지 적어 두셨다.  단체 사무실로 쓰는 입구 쪽 작은 방 2개를 하나로 텄다. 온 방을 모두 책들에게 내주었다. 그 작은 책 ‘방’을 위해 더 좋은 대단지도 버렸다. 결국, 200세대도 안 되어 주차조차 부족한 이곳으로 왔다. 예로부터 왕릉 주변은 화재, 지진, 수해 위험도 적고 군부대에 숨어있는 경찰부서도 있으니 내 몸 주위의 불안한 중력 같은 기운들이 조금 가벼워졌다. 새내기 생애 첫 아파트 생활은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일부 주민들은 주차장이 부족하다며 지상 일층의 휠체어 표식이 있는 5개 주차구역 일부를 지우고 일반 주차장으로 쓰자고 주장했다. 관리실 앞 CCTV 모니터 옆에 층간 소음 분쟁 대응법이란 종이 한 장이 붙었다. 17층 거실과 모든 방에 다리를 뻗은 모든 가구에 테니스공과 양말을 신겼다. 고관절이 벌어져서 수각류 공룡처럼 특히 쿵쿵거리는 걷는 소리를 줄이려고 수중 트레킹화를 실내에서 양말까지 신고 다닌다. 왼쪽으로 기울어진 피사의 탑처럼 기울어진 걸음 걸이다.  시골길에서 할매할배들도 타고 다니는 덩치만 큰 네 바퀴 전동 스쿠터가 좁디좁은 아파트 입구를 아슬하게 들락거리고 떡 하니 집 앞 공용 복도를 가로막을 때도 많으니 행여나 소방법 위반으로 신고당할지도 모른다.  한 달 뒤에 들어온 옆집 부부는 아이들의 자전거로 햇빛 드는 공용 공간을 많이 차지해서 미안하다면서 비싼 과일을 주었다. 재활용품과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일층에 내려갈 때마다 본적도 까무룩 한 저층의 신혼부부들과 어린이들은 껌벅껌벅 인사를 건넨다. 대신 버려주겠다는 동네 어린이들에게서 냄새 가득 찬 음식 쓰레기를 지키느라 진땀을 뺀다.  바로 18층 어르신은 뜬금없이 내려오셔서 초인종도 없이 과일과 야채, 시루떡을 문고리에 걸어 두고 가셨다. 자동차 두기가 너무 어렵다는 수십개의 단체 문자에도 아파트 관리소장은 불법이라며 장애인 주차구역을 지우는 것은 절대 불가라는 전체 공지를 올렸다.  그 일층의 장애인 주차구역에서 1995년에 재건했다는 수국사 황금사찰 대웅보전의 삐친 머리 자락이 보인다. 말 그대로 대웅전을 영원히 보전한다고 몽땅 금박을 입혔단다. 가끔 저층까지 들리는 목탁과 불경 소리는 시끄럽다고 민원이 되었다. 접근성이 좋아서 장차 일본의 황금 절인 금각사보다 유명해 지리라 자랑한다. 전동 스쿠터 충전지를 새것으로 갈고 나서야 아파트 후문에서 사찰로 올라간다. 대웅전에서 아파트의 전신이 다 훑어 보인다. 이렇게 사무실 등 뒤 직선거리로 법당까지 거리 222미터. 그 거리를 오는데 석 달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수국사는 대웅전 사찰마당 앞까지는 구르는 바퀴를 막는 돌계단이나 문지방 높은 산문(山門)이 없다. 은평구 육아종합지원센터 위쪽의 주택가 뒷길 골목보다 더 야트막하다. 그러나 일본의 금각사처럼 휠체어를 이용해서 대웅전에 들어가서 부처님을 바로 직면할 수는 없다.  이렇게 나 홀로 내 걸음으로 자력으로 갈 수 있는 사찰은 25년 전쯤의 부산 범어사가 있었다. 지옥같이 지겨운 연산동 학원가 로터리의 한샘 학원을 벗어나 가출하듯이 목발 짚고 혼자 재수생은 세속을 떠났다. 당시 지하철 범어사역에 승강기는 없었지만 사찰 셔틀버스 90번이 항상 멈춰서 손님들이 다 찰 때까지 기다렸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엎어지거나 구르지 않았다. 월간 고사를 마치고 대학별 대응반을 옮길 때마다 갔지만 정작 본 것은 범어사의 겹겹이 겹쳐진 처마뿐이었다. 치솟은 산문 앞 두터운 계단에 닿기도 전에 나는 작은 오솔길로 빠졌다. 그렇게 50미터가량을 옆으로 빠지면 여러 개 큰 바위들이 눈에 많이 띄는데 고승께서 수행했을 법한 작은 암자 바위에 목발을 던져놓고 저녁 짓는 내음이 솔솔 날 때까지 걸터앉아 있었다. 수국사도 데자뷔처럼 바투 한 6호선 구산역과 버스 종점이 있어 지금 방황하는 목발잡이 재수생이 있다면, 수국사 법당 옆 북한산 둘레길이 또 다른 시작하는 높다란 나무계단에 기대고 앉아 깨달음을 갈구할 수도 있겠다. 전동 스쿠터의 가벼운 굴림도 둘레길 앞 나무계단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절 마당에 있는 보살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222미터 속세로 돌아왔다. 왕할머니는 가끔 몰래 커피를 맛보여주시면서도 내 뻣뻣한 다리를 어루만지며 알 수 없는 불경을 읋조리시며 ‘내 업보다, 내 업보다 하셨다.’ 내 몸의 뻣뻣함이 왜 왕할머니의 업보가 되었을까? 이 뻣뻣함을 통해 매일같이 하나하나 작업의 해탈과 부드러움과 유연함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훌륭한 고행은 왜 되지 못했을까? 사진 출처 - 승가원  위세 높은 계단을 올라야만 성불하고 불끈불끈한 턱을 넘어 서야만 해탈할 수 있으며 꼭 신발을 벗고 문지방을 넘어 한껏 엎드려야 네게 자비를 베풀겠다고 할 만큼 잔인하고 중생들을 차별하는 우리 법당에 들어앉은 우리 부처는 부디 편안하실까? 나는 추앙해 마지않는 목발을 짚고서 석가모니를 대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일생에 딱 한 번 부처님을 1:1로 얼굴을 맞대고 만난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경주로 갔던 수학여행 때였다. 호리호리한 키다리 아저씨처럼 키가 기다랗던 우리 교감 선생님께서 나를 업고 반 시간 넘게 계단을 올라 석굴암에 도착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교감 선생님 등에서 바로 본 석굴암의 석가 여래불보다 온통 진흙으로 범벅이 된 교감샘의 하이얀 교직원 체육복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부처의 길이 있다시던 우리 부처는 어디서 오시는 중이실까? 승강기 없는 구산역에서 20분~30분 리프트를 타면서 매일같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 곁에는 이미 오시지 않았을까? 오다가는 풍경 소리를 불경처럼 안으며 사찰마당에서 휘휘 몇 바퀴 도는 것으로 명상과 수행을 마치고 222미터 떨어진 사무실 아파트 장애인 주차 구역에 가부좌 하시고 누가 함부로 지우지 않도록 지키고 계시지 않을까? ● 본 원고는 은평시민신문에 기고한 글을 추가 첨삭 수정한 것입니다.
2022-05-20 | hrights | 조회: 779 | 추천: 5
이회림/ 경찰관  저는 저희 관내 50개 학교 중 25개를 담당하는 학교전담경찰관입니다. 여학생이 피해자인 경우는 여성 경찰인 제가 맡게 되어 있어서 사실상 50개 학교 전부가 제 담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022년 4월, 2명의 아이들로 부터 자살 관련 신고가 있었습니다. 여중생 A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자살 시도 직전에 1388로 전화를 해서 가까스로 구조되었고 여중생 B는 가정불화로 인해 죽고 싶다는 문자를 선생님에게 남기고 소재 불명이 되었다가 스스로 마음을 돌리고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여중생 A는 3학년이 되면서부터 친했던 친구 두 명과 반이 나누어졌습니다. 두 명은 같은 반이고 A 혼자 다른 반이 되다 보니, 쉬는 시간만 되면 그 친구들이 있는 반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3월이 지나고 4월 초에 이르니 둘 사이에 A가 들어갈 틈을 더이상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개학한 지 2개월 차에 들어서면서 셋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공유했던 관계에 그만 단절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 어른들은 “반이 나뉘었으니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네가 이해를 하렴..새로운 친구를 사귀도록 노력해 보렴.” 하고 쉽게 조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는 ‘친구들과 싸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지? 그럼 앞으로도 새 학기마다 계속 이런 식일 텐데..나는 이런 식으로는 살기가 힘들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A는 친했던 여학생 무리에서 느낀 이같은 소외감에 학업 스트레스가 더해져 등굣길 아침에 학교 대신 아파트 옥상으로 향하였던 것입니다.  3~4월은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계절.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 한편으로 긴장이 공존하는 시기입니다. 낯선 선생님과 급우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구요. 그러나 여중생 A처럼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쉬는 시간만 되면 친했던 친구의 교실로 찾아가 새로운 친구와 친해지지 못하는 현상이 생깁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새 학기 증후군(new semester blues)”이라고 부릅니다. 사진 출처 - pixtastock 새 학기 증후군을 극복하려면?  부모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새로 배정받은 반 분위기는 어떤지,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 담임 선생님은 어떤 분이고, 학교생활에서 답답한 점은 무엇인지. 학교 이외에 다른 활동을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아이의 새로운 흥밋거리나 어려움에 대해 편안하게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합니다. 부모의 유사한 경험이 있다면 요즘 말로 ‘격하게’ 공감대를 형성해주면서 자신의 청소년 시절의 마음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잘 이야기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여중생 A는 그 일 이후로 잠시 학교를 쉬었다가 다시 등교하였고, 요즘은 중간고사 공부를 하느라 바쁩니다. 관내 청소년 문화센터에도 등록하여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친구를 못 사귀어도 여기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시시 웃으면서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문화센터에 잘 등록하였고 시설이 좋더라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약간은 안도하게 됩니다. 문화센터에서 집으로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BTS의 노래 ‘Magic Shop’을 틀었더니, 반가워하며 “선생님도,,혹시 아미.세요?”라고 묻습니다. 이어 자연스럽게 함께 BTS의 노래를 들으며 이어진 대화는 이렇습니다. “선생님 최애 누구예요” “7명 다 최애지..하하. 딱 한명 꼽으라면,,누구게~? 맞춰볼래?” “뷔? 진?” “아니...아니...난 ,,,, 지민님~~” “악~~저도 지민님이 최애예요.” “악~~그래?? 넘 반갑다~~~” ‘내가 나인 게 싫은 날, 영영 사라지고 싶은 날 문을 하나 만들자 너의 맘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곳이 기다릴 거야 믿어도 괜찮아 널 위로해 줄 Magic Shop’  A에게 유난히 잔인했던 2022년 4월이 BTS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새 학기 증후군은 아이의 적응력과 면역력 상태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조금씩 호전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일부 증상이 심한 아이들의 경우에는 다음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학교생활 내내 학업 부진을 포함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기 때문에 부모님들의 주의 깊은 관찰과 격려가 필요하다.  이 시기는 아이의 마음을 다독여 주고 긍정적인 정서를 가지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부모의 역할과 태도가 학교에 대한 아이의 인식을 바꿀 수 있다. 아이와 산책을 하거나 아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함께 하면서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는 것이 좋다.
2022-05-16 | hrights | 조회: 676 | 추천: 5
사람은 못 되더라도, 우리 괴물은 되지 맙시다 1) 정한별/ 사회복지사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적 인식으로 구설에 올랐던 이씨가 비문명을 운운하는 요즘 시대. “뉴스 보셨어요? 저는 이씨가 합리적인 이야길 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장애가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라고 이씨를 두둔하는 문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글을 쓰려고 생각을 가다듬는데 전화기 진동이 울렸다. “집 계약 써야 해요”  매일 같이 실없는 이야길 문자메시지로 보내는 남자가 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메시지를 보내는 통에 “아침 일찍 이랑 저녁 늦게, 그리고 휴일에는 문자메시지 보내지 마요. 어차피 문자메시지 보지도 않고, 답문도 안해요” 라고 경고 아닌 경고를 한다. 말해 놓고 나니, 걱정이 돼서, 그래도 중요한 일은 꼭 연락을 달라고 다시 당부를 한다.  혼자 살고 있는 그에게 연락이 왔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공주택의 재계약을 해야 한단다. 계약 갱신을 위한 서류를 같이 준비하고, 서울에서 계약서를 쓰고 경기도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를 처음 만난 날을 생각했다.  엄마는 할머니랑 같이 시골에 살고 있다고 했다. 스물이 넘어 나온 도시는 그다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삼촌의 주먹을 피해 도망가다 잡히면 정신병원으로 가길 반복하는 것보단 할 일 없고, 친구도 없는 도시가 나았다. 사실 맞는 일은 이골이 나 있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살며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맞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고 맞고, 말을 알아들으면서 모르는 척한다고 맞다 보면 맞는 건 그래도 견딜만했는데, 그 자그마한 방에 갇혀 마음대로 걷지 못하게 하는 일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걷는 일을 좋아했다.  도시에는 식당을 하는 친척이 살았다. 친척 집에 얹혀살면서 식당 일을 도왔다. 친척은 그의 이름으로 원룸을 구해 줬다. 싱크대 밑 축축한 곳이 그의 방이었다. 친척은 방안 침대에서 잠을 잤고, 그는 싱크대 밑에서 잠을 잤다.  친척은 그에게 천사였다. 그가 심심할까 봐 내내 일을 하게 해줬다. 식당 문을 열기 전에는 장사 준비를, 영업이 시작되면 서빙을 했다. 휴일 없이 내내 일을 하다가 추석과 설이면 하루씩이나 쉴 수 있게 해줬다. 그를 때리지도 않았다. 그가 말을 잘 안 들을 때마다 병원에 입원시키겠다고 따뜻하게 말해 줬을 뿐이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동주민센터에서 돈을 받았다. 돈을 본 일은 없지만, 친척은 돈을 저축하고 있다고 했다. 소처럼 일만 했던 그는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뭘 할지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식당 일을 해서 버는 돈과 동주민센터에서 나오는 돈을 친척이 잘 저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친척은 일자리도 주고,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잠을 잘 수 있는 곳도 마련해 준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사람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이용해도, 친척만은 그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국,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친척은 「장애인복지법」 위반,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수년 전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싱크대 밑이 아닌 싱크대가 딸린 집을 구해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 - freepik  계약 갱신을 위한 서류를 모두 준비하고, 그를 데리러 가기 전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점심 먹고 은성씨(가명) 집으로 갈게요. 은성씨도 밥 먹고 준비하고 기다리세요” “음...바빠요?”  가족도 친구도, 마땅히 만날 사람도 없는 그를 만날 때면 항상 식사 시간 전에 만나서 밥을 같이 먹었다. 그의 바쁘냐는 질문이, 단순히 밥을 같이 먹자는 의미가 아닌 것을 알기에 아주 잠깐 고민했다. “안 바빠요, 12시까지 갈게요. 밥 같이 먹어요”  그와 같이 서울로 올라가서 계약서를 쓰고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 서둘러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물었다. “바빠요? 라면 같이 먹어요” “아니요, 안 바빠요. 라면 끓여 주세요”  외롭다는 말, 궁금한 게 있다는 말 대신 하루에 수십 개가 넘는 ‘실없는 문자메시지’를 시도 때도 없이 보내는 남자가 있다. 조금 더 이야기 하고 싶다는 말을 “바빠요?”라고 표현하는 남자가 있다. 자신의 집에서 밥을 같이 먹었으니, 이제는 ‘형’이라고 부르겠다는 남자가 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 냈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의 말과 행동의 행간을 알아챌 길이 없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나라는 존재로 실존할 뿐이다. 아무리 타인을 생각한들 내가 타인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조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과거를 거쳐 오늘을 마주하고 있고, 어떤 내일을 꿈꾸고자 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쉽게 그 사람의 현재를 재단해선 안 된다.  복잡한 일을 쉽게 생각하라고 간단한 문제라고 원칙은 오히려 명료하다고 치부해버려선 안 된다. “그러니까 시민들에게 피해를 줬어요, 안 줬어요?”라고 맥락을 거세한 채 답변을 강요해선 안 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쭙잖은 참견은 안 된다.  문명의 시대를 살아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비문명을 운운해선 안 된다. 내내 양보만 해왔던 사람이 자신을 빼고 모든 사람이 당연히 누리는 권리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세상에 분명 존재하고 있는 그의 존재를 부정해선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은, 말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한나 아렌트)” 1) 영화 “생활의 발견” 중에서
2022-05-11 | hrights | 조회: 840 | 추천: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