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새로운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상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5:12
조회
276
이상욱/ 청년 칼럼니스트

‘너는 종북이니?’와 두 개의 풍경

큰 선거가 둘이나 있는 2012년, 소용돌이치는 정세 속에서 ‘종북’ 논란이 거세게 달아올랐다. 논란의 내용은 한국 사회에 북한 당국을 추종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주장에 경도되어 그들의 생각을 무조건적으로 따른다는 의미다. 소위 ‘종북’ 세력을 규탄하는 입장에서는, 이들이 대한민국의 적대세력이며 현행법상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추종함으로써 사회의 안전을 교란한다고 보는 듯하다. 나아가 이들이 국회의원이나 다른 중요한 영역에 진출함으로써 북의 ‘지령’을 수행하려고 한다는 주장까지 편다.

‘종북’ 논란은 다시금 역사인식의 문제, 그리고 소위 ‘국가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제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두 개의 서로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그 하나는 보수정당의 독선과 비민주적인 행태를 한목소리로 비판해온 진보세력 안에서의 ‘종북’ 비판이다. ‘종북’ 논란이 점점 높은 파고(波高)로 몰아닥치면서, 진보세력 안에서는 ‘진보 내부의 종북’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진보진영 안에 북한 체제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그런 낡은 사고를 벗어던져야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진보세력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는 북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북한의 권력승계, 인권 문제, 핵개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보수진영뿐만 아니라 진보세력 안에서도 서로에게 던지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사회의 좁디좁은 이념적 지형을 가로지르는 사상검증의 심문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쟁점이 떠올랐다. 한 정당의 유력 대선주자가 ‘5.16은 최선의 선택’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두고 올바른 역사인식이 무엇이냐는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부터 같은 당에 속한 사람들까지 민주화의 땀과 눈물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며 국가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에게 부적합한 역사인식이라고 비판한다. 그러자 발언의 당사자는 ‘내 주장에 동의하는 국민이 전국민의 절반’이라고 맞서고 있다.


20120612_979_A35a.jpg
19대 국회 개원일인 5월 30일 국회 앞에서 열린 반값 등록금 집회에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 뒤로
군복을 입은 한 시민이 1인시위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김 의원을 비롯한 통합진보당 당권파는 ‘종북좌파 세력’으로 지목됐다.
사진 출처 - 뉴스1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권리

핍박과 질곡을 대가로 민주주의의 디딤돌을 놓던 시절, 어두운 감옥에서 그 많은 양심수들이 싸워야 했던 것은 야수와도 같은 독재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고문과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외로운 공간에서, 전향서나 ‘준법서약서’ 한 장만 쓰면 나갈 수 있다는 유혹은 그 자체로 투쟁의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매순간 느껴지는 가석방의 충동과, 투항을 종용하는 폭력 앞에서 그 분들이 끝까지 저항했던 것은 왜였을까.

어떤 생각이라도 행동으로 표현되어 다른 사회구성원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누구도 사람의 머릿속을 검열하고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 사상의 자유가 선언하는 천부의 인권이 아닌가. 고민하고 사유하는 머릿속까지 권력이 들어가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주물러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것이다. 부족함 없이 먹고 잘 권리, 자유로운 정치적 행위의 권리, 그 모든 인권이 박탈된 지엄한 고난 앞에서,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권리는 바로 ‘내면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아니었을까. 양심수들은 ‘종이 한 장’ 쓰고 나와서 다시 열심히 사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수탈하려는 폭력에 맞서는 것이 정의임을 증거했던 것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풍경을 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군사독재가 우리나라의 헌정질서와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세력 내부에 있는 ‘종북’ 세력 또한 헌정과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다시 말한다. 북한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느냐. 수십만 명이 수용소에 갇혀 있고, 3대에 걸쳐 한 집안이 권력을 독점하는 나라를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라고 볼 수 있느냐고. 북한의 인권문제 등을 지적하지 않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묻게 된다. 무엇이 ‘인권’이고 무엇이 ‘진보’인 것일까? 북한인권법에 찬동하면 ‘인권’을 걱정하는 민주시민이 되고, 그들의 인권문제는 그들 스스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민주주의인 걸까?

나는 착종하는 두 개의 풍경과 그것을 둘러싼 몇몇 진보적인 사람들의 주장에서 ‘내면의 주권’을 도둑질하는 기이한 폭력을 본다. 진보 내부의 ‘종북’ 성향을 높은 목소리로 지적하는 그들의 물음은 실상 북한에 대한 입장 따위를 묻고 있지 않다. 북한에 대한 각자의 입장이 정치적으로 얼마만큼의 올바름을 담보하고 있는지를 논쟁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북한의 인권문제 등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유보적인 모든 입장을 취급할 수도 없는 의견으로 대우한다.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유일한 ‘진보’의 기준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면서, 그것에 어긋나는 다른 생각으로부터 ‘진보’의 영예로움을 박탈하는 그 지점에서 그들의 날선 질문은 더 이상 물음이 아니라 추방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친북’이라는 말밖에 모르던 기득권 세력들에게, ‘종북’이라는 더욱 ‘쌈빡한’ 무기를 선물한 것이 바로 몇 해 전 진보정당 안에서 있었던 일임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진보 스스로 반납한 사상의 자유

사회경제적 생존권, 정치적 자유권, 그리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향해 걸어온 이른바 진보인사들의 붓끝에서 ‘너는 북을 추종하는 낡은 진보다’라는 문장이 거침없이 쓰이는 모습은 그래서 슬픈 역설이다. 북한을 추종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열하는 자의적인 질문지를 작성해놓고, 그에 따라 집요하게 물음을 던지며 자신들의 기준에 어긋나는 관점을 거침없이 ‘낡은 진보’, ‘낡은 시대의 사고’로 깎아내린다. 오랜 어둠 속에서 민주주의의 앞길을 힘겹게 밝혀오며 겨우겨우 조금씩 얻어온 자유가, 스스로의 손으로 반납되는 장면은 서글픈 광경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북’ 논란과 ‘5.16은 최선의 선택’이라는 발언은 동일한 사태의 양면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시끌벅적한 ‘종북’ 스캔들은, 인간이 응당 누려야 할 생각의 자유, 마음의 주권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훼손하는 기득권 세력과, 그것을 스스로 반납하면서 자신의 투명성을 시위하려는 일부 진보세력의 위험한 모습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군사반란의 ‘정당성’은 하나의 신기루와 같지만, 한편으로 그 고집스러움은 군사반란이 초래한 민주주의에 대한 모멸과 인간에 대한 무시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최후의 자유로서의 생각의 자유마저 박탈하려고 했던 어두운 폭력의 세기를 자의적인 기준으로 설명해내려고 한다.

두 사태의 똑같은 폭력성을 겨누지 않고, ‘인권’과 ‘진보’를 내세우며 ‘낡은 진보’와 ‘새로운 진보’를 수다스럽게 구별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지가 궁금해진다. 적어도 그 지점에서, 분단을 부당이익의 지렛대로 이용해온 사람들과 그 진보인사들의 입과 손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굽이진 골목에서 길어 올리는 인간다움과 진보

오히려 참된 인간다움과 진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현장 속에 있지 않을까. 대통령이나 유력 대선주자가 시장에 가서 떡볶이를 먹으면 곧장 방송에 나오지만, ‘민주’의 이름으로 당선된 구청장이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를 쓰레기차에 실어 철거한 것은 주목받지 못한다.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는 부모가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한 아이가 참변을 당할 때에야 비로소 국가는 아이의 빈소로 찾아간다. 지켜야 할 삶을 지키지 못하는 국가, 응시해야 할 광경을 응시하지 못하는 사회의 벽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느낀다.

북한의 인권실태를 대놓고 욕해야만 인권을 소중히 하는 것이 아니다. 보수정당과 똑같은 대북인식, 똑같은 역사인식을 가져야만 우리 사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자유는, 진짜 인권은 삶의 땅바닥을 한 걸음 씩 조용히 걷는 평범한 사람들의 힘겨움과 아픔에서부터 길어 올리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너는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은 얼마나 공허하고, 또 쓸모없는 물음인가. 그리고 그 물음이 품고 있는 매서운 폭력의 얼굴은 평범한 이들의 힘겨움을 덜어주는 데 얼마만한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견디기 힘든 폭염이다. 기록적인 열기 속에서 나와 친구들은 ‘대학생 통일행진단’에 참가하여 전국의 아스팔트를 누비고 있다. 무분별한 ‘종북’ 낙인찍기와 민족대결 정책을 반대하고, 남북화해를 외치며 8월의 폭염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용역들에 의해 습격당한 노동자들, 4년째 끝나지 않은 싸움을 이어나가는 쌍용차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참된 인권을 배워가고 있다. 희망은 ‘누구누구는 낡은 진보다’, ‘우리는 새로운 진보다’를 써내려가는 붓끝에서 나오지 않는다. 높은 목소리와 유려한 글솜씨가 다루어주지 않는 사각지대의 사연을 만나는 굽이진 골목에서, 인간다움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쑥스럽게 겨우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