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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담론에 청년이 없다 (정지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5:10
조회
308

정지혜/ 청년 칼럼니스트




계절 학기를 끝마칠 무렵, 학교 앞 사거리에는 눈에 띄는 노란색 현수막 하나가 걸렸다. ‘반값등록금 민주당은 합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었다. 이 현수막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대학생 표를 얻기 위해 참 애쓰고 있다는 일말의 안도와 민주통합당이 갖고 있는 청년에 관한 문제의식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동시에 밀려왔다. 이는 비단 민주통합당만의 문제가 아니며 공허한 ‘청년 프레임’에 갇힌 모든 이들의 딜레마일 것이다.

현수막의 문구는 최근에 읽은 어느 신문 기사와 오버랩 됐다. 그 기사는 ‘길거리에 폐지 줍는 노인들이 많다. 우리 모두 노인이 된다. 평균연령이 늘어나고 있으니 반값등록금 보다도 노인복지가 더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노인문제를 끌어들여 등록금 문제를 비판하는, 세대갈등을 조장하는 전형적인 기사였다. 이런 식으로 세대갈등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세대를 막론하고 복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질문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반값등록금을 비판하는 주된 관점 중에 하나이다.

민주통합당의 반값등록금 공약과 이 기사에는 공통점 있다. 청년에 대한 시혜적인 인식과 태도이다. 민주통합당의 현수막은 ‘청년 여러분, 많이 힘들죠? 저희가 원하는 거 해드릴게요.’라고 말하고 있고, 문제의 기사는 ‘대학생 너희들은 그렇게까지 힘들어 보이지 않으니 네 힘으로 살아라.’라고 말한다. 두 주장 모두 ‘청년’의 목소리를 싣는 데 실패했다. 그들이 말하는 ‘청년’이 청년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청년’이란 단어가 소비되는 방식을 비판한 주장들은 전부터 있었다. 『88만원 세대』를 쓴 우석훈은 짱돌을 던지라고 말했지만, 애석하게도 그 짱돌은 돌고 돌아서 결국 실체가 없는 ‘청년’들에게로 쏟아지고 있다. 따라서 ‘청년’들은 되돌아온 짱돌을 맞아도 맞았는지 모르고, 그래서 아프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청년들은 시혜적인 정책 정도로 만족해야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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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와 한명숙 전 대표, 우상호 반값등록금특위 위원장 등 의원들이
지난 7월 2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당사 앞에서 '반값 포차 전국투어 발대식'을 갖고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당신들의 청년은 누구인가

‘청년’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데에는 ‘청년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같은 성인인데도 왜 누구는 청년이라 호명되고, 누구는 청년이라 호명되지 못하는가? 반값등록금 문제는 모든 청년들을 담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다. 반값등록금 운동은 대학교 중에서도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 ‘학생’들의 참여로 주목받을 수 있었다. 물론 반값등록금 운동은 전국적이었지만 서울 유명 대학생들의 움직임이 없었더라면 유명 언론에서 몇 차례씩 보도를 하는 등의 관심을 과연 주었을까. 그러므로 반값등록금 운동의 내용과 주체들을 청년이라는 범주에 넣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청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포함될 수 있다. 반값등록금을 찬성하는 학생도 있고, 반대하는 학생도 있다. 대학생 중심의 청년 실업 대책을 비판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학생이 아닌 청년이 있을 수 있다. 당연히 정반대의 사람도 있다. 또한 백혈병으로 죽은 청년노동자도 있고, 반값등록금과는 상관없이 자유로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돈 많은 청년도 있다. 청년이라고 불리는 대상들의 이념과 계급과 직업들은 이렇게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이 누구인지 파고들수록 세대론의 힘은 약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청년이라는 이름표보다, 이념과 계급이 정체성 형성에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청년담론을 위해서

그럼에도 우리가 청년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청년들은 그 꼬리표를 뗀 성인들과는 종종 다른 위치에 놓인다. 청년의 시기를 지난 성인들에게 청년은 젊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미화되는 존재이다. 그 시기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정말 청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 속에 앞으로 청년담론이 나아가야할 방향이 있다.

청년과 청년이 아닌 성인의 차이는 단순히 젊음과 늙음만이 아니다. 그 둘의 차이는 마치 미성년자와 성년의 차이와 같다. 권리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같은 성인임에도 나이를 기준으로 다양한 제한들이 가해진다. 가령 전세자금대출의 경우 35세 이상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대학생의 경우 성인임에도 자퇴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청년이라면, 청년에 속한다는 이유로,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년은 힘들다’라는 문장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또한 ‘청년이기 때문에’ 힘든 것인가, 아니면 ‘어떠한 청년이기 때문에 혹은 청년이 아니더라도’ 힘든 것인지를 따져야 한다. 만약 전자의 대답이 나온다면 이전과는 다른, 제대로 된 청년담론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대답이 나온다면 우리는 청년이라는 단어를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대답에서의 청년은 모든 청년들을 아우르지 못하는, 대표성을 잃은 ‘청년’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반값등록금이 남긴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먼저 반값등록금이 모든 청년들을 대변하지 못했듯이, 우리가 사용하는 ‘청년’ 속에는 특정한 청년만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반값등록금이 시혜적인 정책으로 환원되었듯이, 청년을 위한 정책은 청년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는 방향이 아니라 시혜적인 차원에 갇혀있다. 위의 단계가 선행될 때 제대로 된 청년담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청년들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