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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에겐 ‘빨간 알약’도 필요하다. (김종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1:57
조회
346

김종현/ 청년 칼럼니스트



비싼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 휴학을 선택한지 5년 만에 친구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동기들은 이미 졸업했거나 학교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때, 그는 겨우 2학년으로 새 학기를 시작했다. 그가 학교로 돌아온 이유는 딱 하나다. 휴학 중에 일하던 직장에서 대학 졸업장의 유무가 차별로 이어지는 현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다시 학교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친구는 늦은 복학과 취업 문제로 불안해했다. 그래서였을까. 학기 말이 다가올 때, 그는 불현듯 편입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친구의 전공은 정치학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라 했다. 소수의 직업 정치인이 좌지우지하는 사회에서 정치를 공부한다는 건 시간낭비라는 말이었다. 졸업 후 취업도 문제라 했다. 이를테면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더러 서열화 된 대학사회에서 지방대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의 즐거움도 미래의 보장도 없는 학교를 자퇴하고 다른 학교에 편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얘기였다.

맞는 말이었다. 투자할 가치가 적다면 선택지에서 지워지는 게 오늘날의 상식 아니던가. 친구의 선택은 효율성을 따지는 경쟁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친구의 결정을 듣는 내내 침울했다. 그건 정치에 대한 청년의 무관심 때문도 아니었고, 교육을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하는 상업화된 대학 문화 때문도 아니었다. 편입으로 신분상승을 꿈꾸는 그의 세속적 욕망 때문도 아니었다. 내가 진정으로 우울했던 것은 사회구조 앞에서 한 인간의 ‘무력한’모습이었다.

친구의 휴학과 복학, 자퇴와 편입을 결정하는 주요한 열쇠는 아마도 ‘생존’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민일 것이다. 이에 실용적인 방법을 제공해주는 자기계발서의 ‘인기’는 그래서 이해가 간다. 최근 몇 년 새 서점가를 점령한 자기계발서의 인기는 친구의 무력함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나에게도 먹고 사는 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적이 있다. 전역을 앞두고는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였다. 그때 인생의 매뉴얼처럼 집어든 게 자기계발서였다. 자기계발서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마법처럼 보였다. 내가 못 살고 있는 것은 잘 살 수 있는 비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조금 더 성실하지 못했거나. 수십 권의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나도 경쟁에서 우위에 서고, 남들과 차별성을 가질 수 있길 기대했다. 자기계발서만 읽는 청년 세대를 비판하는 언론 보도에 울컥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법의 매뉴얼을 아무리 읽어도 그 놈의 ‘불안’은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마법을 의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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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만부 가까이 팔린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
사진 출처 - 교보문고



자기계발서의 특징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생존에 대한 불안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다. 이는 나의 문제를 나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이 점이 바로 자기계발서 열풍의 핵심 요인이다. 그런데 이 희망에서 역설이 일어난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능동적 욕망이 사회 구조에 대한 수동적 적응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려면 휴학을 하고 돈을 벌면 되고, 학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편입을 선택하고, 취업난을 뚫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찾게 되는 일들 말이다.


자기계발서는 겉으로는 개인의 힘과 능력을 키워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가진 정치적 능력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모든 문제는 내 탓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인이 정치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사회 제도의 개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무너진다. 불안이 권리가 돼버린 사회에서 자기계발서의 인기가 달갑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진정한 자기계발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자기계발이 성찰이라는 의미를 조금이라도 담고 있다면, 개인을 성찰하는 동시에 요구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성찰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기계발이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이뤄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응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이해하고, 사회구조를 냉정하게 인식할 때 가능해진다. 개인의 ‘책임’이라는 말로 그동안 교묘히 가려져 있던 우리의 불안정한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을 건네는 장면을 보며 우리의 현실을 떠올린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파란 약을 선택하면 진실을 잊을 수 있고, 빨간 약을 선택하면 진실을 볼 수 있다는 섬뜩한 제안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사회는 청년에게 눈높이를 낮추라며 파란 약만을 권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청년 세대가 파란 약과 빨간 약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는 ‘의심’에 한 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