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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가짜 불안, 진짜 불안 (권지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1:56
조회
398

권지은/ 청년 칼럼니스트


 

신문을 들여다본다. 때 아닌 종북논쟁이다. 때가 잘 맞았다. 예상외의 총선 승리로 한숨 크게 돌린 정부와 집권여당에겐 ‘종북’이라는 달콤한 선물이 안겨졌다. 그 덕에 이명박정부의 실책평가와 새 국회에 빨리 요구되는 민생문제들은 보기 좋게 슥 밀렸다. 언론들은 지면과 방송에서 이 칙칙한 이야기에 넓고 긴 시간을 할애하는 중이다. 종북세력이 국회에 들어가는 걸 국민들이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면서.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 하나의 불안이 보인다. 아니, 여러 개가 뒤엉켜 있다. 정적이 찾아오는 시간,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내 마음 속에도 불안이 휘젓고 간 흔적들이 보인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어설프게나마 명상을 한다. 그러면 운 좋게도 가끔은 맑은 정신의 시간이 찾아온다. ‘지금, 이곳’을 느끼면서 천천히 호흡을 하면 불안과 함께 있을 때엔 느끼지 못했던 편안한 기분이 든다. 길을 나선다. 사람들을 만나 세상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다시 불안의 냄새가 베인 채로 집으로 돌아온다. 불안한 마음은 전염 속도가 은근하면서도 쏜살같다. 우리의 불안은 ‘종북’ 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다.

가짜 불안 장사

불안을 부추기는 것들을 들여다본다. 먼 곳 말고. 굳이 휴전선을 넘어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TV 속, 지하철과 버스, 인터넷 사이트 곳곳, 시선을 가로채가는 광고들을 본다. 영어를 잘해야 한다, 더 예뻐지고 날씬해져야만 사랑 받을 수 있어, 더 좋은 재테크를 하지 않으면 바보 같이 살 거야, 보험을 들어, 100살까지 살게 해줄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네 삶은 볼품없어질 걸, 믿어봐, 잘해 줄게.

나이가 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동안이 아니라면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고, 큰일이 난다 속삭인다. “잘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대답했다” “여자의 피부는 권력이다” 같은 카피도 자주 본다. 상품의 품질이나 기능이 아니라, ‘(남 부럽지 않게) 잘 지낸다’, ‘(남을 휘두를 수 있는)권력’ 같은 말로 사람의 감각을 집중시킨다. 짜릿하다. 저게 내가 원하던 거였어!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위의 언어들은 삶 구석구석까지를 이미 이기고 지는 승부의 장으로 설정해버렸다. 멋지게 이기거나, 적어도 뒤처지지 않게 따라나서야 한다. 그래야 ‘불안’이 사라질 것만 같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해소하려던 불안한 감정은 더욱 예민하게 발달한다. 다이어트와 성형으로 충분히 예뻐진 친구는 다이어트와 성형에 ‘점점 더’ 집착했고, 숨 쉴 틈 없이 취업준비를 해 어렵게 손꼽히는 안정적 직장에 취업한 친구는 삶 자체를 불안해하면서 ‘다시’ 자기계발을 시작해야겠다고 말했다. 이것만 끝내고 저것만 성공하면 괜찮을 거라고 배웠는데, 끝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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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개청춘>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공공의 감정

이렇게 불안이 일상의 풍경이 된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이 가져온 극한의 생존 경쟁에 따른 결과가, 오롯이 ‘개인의 몫’이 돼버린 후부터였다. 노동환경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공공의 가치’가 무너졌다. 정리해고를 당하는 것도, 비정규직이나 파견노동자가 되는 것도, 88만원세대로 살아야 하는 것도,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한다. 혼자다. 대안이 있다면 ‘자기계발’을 하는 것. ‘쿨한’ 정서를 가면으로 쓰고 주위에 징징대지 않고 꿀리지도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한테 ‘더, 더, 더’를 주문한다. 하지만 불안한 사람이 어떻게 쿨하다는 것인가? 어쩌면 언제나 불안한 그 감정을 감추고자 하는 노력이 우리시대가 좇는 쿨하고 시크한 태도, 그 자체가 아닌가?

제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공기를 피할 수 없다. 내가 가지는 불안한 마음은 곧 앞에 앉아 있는 친구에게 전이 되고 날아다닌다. 그러면서 불안이 ‘구조화’된다. 이렇게 불안은 이제 우리가 가진 ‘공공의 것’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나타난 불안한 감정 자체가 공적인 것이 된 것이다. 공적인 기운, ‘공기’가 되었다. 생존은 개인의 것으로, 불안은 공공의 것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늘 개인을 강조한다. 그런데 도대체 ‘개인적인 것’이라는 게 무엇일까? 개인을 강조했더니, 그래서 생긴 감정이 공적인 것이 되어 우리에게 들이닥쳤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딱 잘라 나누려는 시도는 해묵은 속임수인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오직 필요한 질문은 “우리의 것으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지 않을까?

취업을 하느냐, 못하느냐. 비정규직이냐, 정규직이냐. 결혼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 그 다음엔 내 아이와 너의 아이로. 끝없이 이어지는 타인과 맺는 관계가 ‘비교 대상’이 된 삶의 패러다임. 이것이 지금 ‘우리의 것’이다. 경쟁하고 비교하는 데에 익숙해지다 보니,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서로 좋아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사치스러워서 드물게 됐다.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을 때에 가장 자연스러운 기쁨을 느끼는 존재인데, 그 본성이라 할 수 있는 ‘마음’이 망가져버렸다. 이기고, 부러움을 사고 싶다는 마음은 ‘사랑 받고 싶다’는 욕구가 변질된 상태다(기본적인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변질되었다). 본성이 억압당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정지된 개인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불안을 마주하기

사람들은 ‘가짜 불안’들의 해소로 실질적인 불안한 상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반대가 오히려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될 것 같다. ‘순서’가 뒤바뀌고 꼬여 있으니 이유 없는 불안(실체를 모른다는 느낌이 드는 불안은 그 얼마나 불안한 불안일까)이 끊임이 없다.

부추겨진 불안으로, 실존하는 불안과 고립을 감추고 못 본 척 하는 삶에서, 실존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대안을 요리조리 짜 맞춰 보는 것이 빠른 방법일 것이다. ‘마음의 공동체(관계)’를 회복하는 것. 몇몇 좋은 이미지의 정치인들에게 삶의 문제를 의탁해버리기 보다, 불안하지 않기 위해 달라져야 하는 삶의 부분을 ’직접‘ 생각해내는 것. 그것을 위해 마음을 기울여야 할 내용과 대상은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는 것.

삶 자체가 아슬아슬 불안해 죽겠다. ‘종북’이 불안하다고? 재테크를 하라고? 너무 오래묵은 장사가 아닌가. 그들을 믿느니 차라리 우리의 이 ‘오래된’ 불안을 믿자. 그리고 못 본 척 말고 그 불안의 끝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파고 들추어 보자. 우리 삶이 불안 그 자체라면, 그래서 밥과 잠과 ‘지금’을 즐길 수 없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면, 그 사정을 헤아려 보는 것이 결국 살아내는 것일 테다. 그 심연에서는 사회와 타인과 내가 부대끼며 내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