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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소리 (한은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1:21
조회
288
한은석/ 청년 칼럼니스트

소크라테스가 자기 자신을 알라고 말했지만, 사실 철학은 이미 주제 파악할 자기 자신이 있던 사람들이 하던 것이었다. 어떤 철학자도 자신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헤겔의 말처럼 철학은 시대의 아들이기 마련이었고,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권력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 폴리스의 명문가 자제였던 플라톤은 직접 권력을 쟁취하려 했던 경우였다. 그는 진리를 모르는 대중들의 정치인 민주주의를 경멸하고 진리를 따르는 철인들의 통치를 꿈꾸었다. 반면 이방인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에 대해서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야심가였던 스승과 달리 제자는 시대에 묻어가려는 소시민에 가까웠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에 열광했지만, 봉건적이고 억압적인 독일의 학자로서 평생을 살아왔던 칸트와 헤겔은 권력과의 관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자 여론은 칸트를 신성모독으로 처형해야 한다는 교회의 목소리로 들끓었다. 그러나 칸트는 이미 너무 유명해진 학자였다. 결정적으로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프로이센의 국왕은 독일의 자랑을 보호하면서도, 교회를 달랠 능력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학창시절 프랑스혁명에 열광해 학내 신문을 만들었던 왕년의 운동권 헤겔은 베를린 대학 총장이 되어서도 수많은 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헤겔은 약혼녀와 철학적 논쟁을 벌여서 약혼녀를 울린 눈치 없는 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사교계에서 카드게임으로 사람을 사귀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후학들을 좌절하게 했던 변증법은 그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사례는 철학이 시대의 아들을 넘어서, 시대 그 자체가 되려고 한 경우들이다. 자기 자신이 권력 그 자체가 되려는 것, 철학이 권력과 결합하는 것이다. 죽은 철학자의 철학을 권력이 오용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철학자가 권력을 위해서 목소리 내는 것이다. 마치 자기 자신이 권력이라도 되는 것 마냥 말이다.

냉전 시기 소련에서 레닌과 스탈린이 남긴 철학적 작업들은 절대 틀릴 수 없는 불변의 진리였다. 맑스-레닌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이고 변증법적인 철학과 그 이름이 붙은 것들은 무엇이든지 옳았고, 또한 옳았어야 했다. 언어학에서부터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맑스-레닌주의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름이 붙은 것은 무엇이든 옳았어야 했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당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절대 틀릴 수 없는 존재여야 했고, 당에 대한 비판은 곧 공산주의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케인즈의 숙적을 자처하던 하이에크가 케인즈의 동료 경제학자인 피에로 스라파와의 논쟁에서 완전히 논파 당한 뒤에도 학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자본가들이 계속 그를 후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이에크는 더 많은 자본의 자유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로 이에 보답했다.

마찬가지로 록펠러가 시카고 대학을 만들고 후원한 이유가 단순한 사회 환원 때문만은 아니었다. 록펠러 대학은 오랜 시간 동안 미국 보수주의 정치사상의 교두보 역할을 했고, 오늘날에도 신자유주의 정치사상을 옹호하고 보급하는데 시카고대 경제학과 출신 인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현상을 두고, 철학은 지배자의 담화로, 궁정광인의 담화라고 말한다. 지배자의 권위를 위해서, 지배자의 권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없는 미친 말을 늘어놓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철학은 아무리 체계적이라 한들, 정신착란이며 치료해야 할 존재다.

이렇게 철학이 권력과 결합할 때, 철학은 사람들의 주제와 수준을 구분한다. 철학을 알고 있으며, 동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인 사람이다. 그리고 철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짜이며, 자기 주제도 모르는 수준 낮은 사람들이 된다. 철학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그것은 무의미하다. 애초에 철학을 모르는 주제도 모르는 사람들이 설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은 어휘와 문장은 난해하고 화려할수록 더 가치가 높다. 아무나 논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주제가 되는 자신들만이 논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에나 적용하고 써먹을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내용 역시 모호해야 한다. 내용은 단지 그럴 듯하게 느껴지기만 하면 된다. 철학을 말하는 사람이 이 모호한 내용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철학의 진리성은 그 내용이 아니라 철학을 말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통해서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이 요즘 세상 어디에 있냐고?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창조경제가 그러한 사례다. 창조경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부 부처의 담당자들은 물론이고, 지난 대선 당시 정책을 내걸었던 정당의 당직자와 연구자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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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201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토머스 사전트 뉴욕대 석좌교수·서울대 겸임교수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런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화려한 말을 그럴 듯하게 이어 붙어놓은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석학인 토마스 사전트가 한마디로 표현한 것처럼, 그냥 헛소리(bullshit!!) 1) 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 뭘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창조경제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모든 답은 창조경제로 정해져 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무식하거나 국론을 분열시킬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경제를 비난하는 것은 민생에 역행하는 것이고, 북한에 동조하는 종북 행위다.

창조경제가 학문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다뤄질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상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친 학적 노동과 교류를 통해서 이뤄진다. 즉 토마스 사전트의 말처럼 창조경제를 헛소리(bullshit!!)라고, 딱 한마디로 평가하고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는 창조경제를 권력과 철학이 결합한 가장 적나라한 사례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1) 경향신문, 노벨경제학상 사전트 서울대 교수, 창조경제 설명 듣더니 “불쉿(허튼소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141032531

한은석씨는 사회 내 불평등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