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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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보라/ 청년 칼럼니스트 “하루아침에 영웅이 돼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제게 교육의 방향과 대안을 물어보시더라고요.” 2012년 2월 고등학교 자퇴를 앞두고 1인 시위를 벌였던 최훈민 씨(21)와 올해 4월 고등학교 자퇴 후 피켓을 든 김다운 양(18)의 말이다. 최 씨와 김 양은 각각 광화문 광장에서 2주간, 경남 진주 시내 한복판과 주요 고교 앞에서 두 달간 홀로 피켓과 대자보를 들었다. 한국의 잘못된 교육을 멈춰달라고, 다시 생각해보자고 주장했다. 고등학생들의 반란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김 양이 '여러분의 학교엔 진정 배움이 있습니까?'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사진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빠르게 확산됐다.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고마운 것이었다. 최 씨와 김양이 시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뜻을 함께 할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다리를 제공했다. 2012년 2월 고등학교 자퇴를 앞두고 1인 시위를 벌인 최훈민씨(21, 오른쪽)와 올해 4월 자퇴 후 피켓을 든 김다운양(18). 사진제공=김다운, 씨투소프트 하지만 집중된 관심만큼 기대도 넘쳤다. 사람들은 점차 최 씨와 김 양을 이상화하기 시작했다. 교육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처럼, 단 칼에 교육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구세주처럼 이들을 대했다. 김 양을 만나는 사람들은 김 양에게 ‘고2라는 나이에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모순을 다 파헤치고 있다’ ‘삶의 주체로 우뚝 선 김다운이 멋있다’며 우러러봤다. 최 씨에게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시선들로 인해 1인 시위는 단지 특출한 인물을 조명하는 쇼로 변질돼갔다. 이 소년, 소녀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온 것은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느꼈던 교육 문제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기 위해서였다. 김 양이 피켓에 ‘여러분의 학교엔 진정 배움이 있습니까?’라고 쓴 것은 자신도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한 것이었다. 최 씨가 피켓에 ‘희망의 우리 학교를 함께 만들어요’라고 적은 것은 변화를 위한 행동을 혼자가 아닌 함께 하자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간과한 채 최 씨와 김 양에게만 일방적으로 정답과 행동을 요구했다. 사람들은 ‘교육의 영웅’에 모든 문제를 맡기려 했다. 자기가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책임지거나 희생할 것도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영웅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약한 본성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이에 나부터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또 그런 ‘나’들이 모인 우리가 함께 대안을 모색해보고 변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최 씨와 김 양이 춥거나 더운 길거리에서 불편을 감내하며 찾고자 했던 것은 바로 변화를 위해 함께하는 ‘우리’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보라씨는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갖고 머니투데이에서 인턴기자로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5년 8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71 | 추천: 0
전세훈/ 청년 칼럼니스트 “1955년.” 미국 정보통신 혁명을 이끈 거물들이 태어난 시기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구글의 에릭 슈미트는 모두 1955년생이다. 다른 미국의 컴퓨터 거물들도 1953년에서 1956년 사이에 태어났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컴퓨터 거물들이 태어난 나이가 비슷하다. 다음 카카오 김범수 사장,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 의장, NXC(넥슨지주회사) 김정주 대표도 모두 1966년에서 1968년 사이에 태어났다. 이렇게 컴퓨터 거물이 태어난 시기가 비슷한 이유는 산업 구조적인 이유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컴퓨터 혁명이 1975년에 일어났다. 이 혁명의 수혜자가 되려면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20대 초반에 이른 사람이 가장 이상적이다. 1950년 이전에 태어났다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새로운 일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10대였다면 학생이란 신분으로 묶여 사회로 진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IT 붐이 일어났던 시기에 컴퓨터를 접하고, 익힐 수 있었던 사람들만이 컴퓨터 분야에서 성공할 수가 있었다. 사진 출처 - 이투뉴스 재능, 노력, 기회 이 세 가지가 적절하게 맞물린 사람들만이 성공을 맛볼 수 있다. 재능과 노력은 개인의 몫이라도, 기회를 만드는 것은 개인이 할 수 없다. 미국의 컴퓨터 거물들이 지금의 그 자리에 있는 이유는 물론 잠자는 시간까지 줄인 그들의 노력과 특별한 재능이 결합됐기 때문이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기회가 그들의 재능과 노력의 바탕이 됐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스티븐 잡스의 경우 그가 살던 도시가 실리콘벨리로 재개발이 되면서 컴퓨터를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빌 게이츠는 시애틀의 엘리트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그 학교의 어머니회에서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했던 ‘시간 공유 컴퓨터 터미널’을 덜컥 설치해주는 행운을 누렸다. 만약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나이가 10살 정도가 많아 1945년에 태어났다면, 이미 안정된 직장과 가정이 있어서 새로운 분야로 진출할 생각을 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 청년 세대(15~29세)의 상황은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 세대들이 노력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나날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현재 청년 고용률은 41.7%에 불과하다. 청년들은 그럴수록 자신에게 투자해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높은 등록금과 물가 때문에 그럴 수만도 없다. WEF(World Economic Forum)가 발표한 우리나라 국민 평균 소득은 2010년 기준 229개국 가운데 49위 정도다. 이에 반해 등록금은 OECD 국가 중 4위 정도다. 등록금을 감당하며 공부하기만도 벅차다. 그렇게 취직하면 끝이 날까. 그나마 구한 일자리도 비정규직이 절반 이상이다. ‘단군 이래의 최고의 스펙’을 달성할 만큼 근면했던 한국의 청년들은 지금도 고시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또 돈을 벌기 위해 일도 하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이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가. 한국의 청년들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1975년 청년 잡스가 잡았던 것과 같은 기회를 한국 청년들도 잡을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 구조를 위해 우리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전세훈씨는 빈곤과 고용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5년 8월 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72 | 추천: 0
신종환/ 청년 칼럼니스트 841년 신라 48대왕인 경문왕은 즉위 후 별안간 귀가 당나귀처럼 길어졌다고 한다.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으나 왕의 감투를 만드는 복두장은 부득이하게 왕의 당나귀 귀를 보고 말았다. 경문왕은 복두장에게 자신의 귀가 당나귀와 같다는 것을 남에게 말하지 않을 것을 명하였다. 복두장은 명에 따라 평생 이를 비밀로 간직하다 죽기 전 도림사지 근처의 대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 지른다. 이후 그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대나무 숲 설화이다. SNS에서는 그 이름을 딴 ‘○○ 대나무 숲’ 이라는 이름의 커뮤니티가 유행처럼 생겨났다. 처음에는 ‘출판사 옆 대나무 숲’ ‘언론사 대나무 숲’ 등 여러 분야의 관계자들이 모이는 대나무 숲들이 열풍을 주도했다. 하지만 지금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페이스북에서 각 대학교의 커뮤니티 사이트 역할을 겸하는 ‘○○ 대학교 대나무 숲’이다. 대학교 커뮤니티의 주된 형태인 페이스북 ‘대나무 숲’은 익명을 보장하는 제보 시스템을 기반으로 글이 게시되고 실명 댓글이 달리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대나무 숲’이란 이름으로 운영되는 커뮤니티가 대학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닐 텐데 유독 대학교의 커뮤니티로 기능하는 ‘대나무 숲’이 눈에 띄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작년 1월 중앙대는 청소 노동자들의 대자보와 이에 동조하는 대자보 일체에 대해 장당 100만 원을 내라는 간접강제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두 달 전 서울여대 학보는 대자보에 관한 동문들의 비판 성명을 싣지 못해 백지학보를 발행했다. 앞서 나열한 사건들과 그 외의 대학 당국이 직·간접적으로 자행한 억압에 의해서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대학교의 페이스북 익명 커뮤니티를 통칭해서 ‘○○ 대학교 대나무 숲’으로 묶었지만 각 커뮤니티의 문화에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다양한 커뮤니티들을 하나의 현상으로 묶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억압’과 ‘욕구’라는 공통된 요인이다. ‘억압’은 어느 곳에서는 대학 당국이 직접 행사하는 억압에서 구성원이 대학의 문화에서 느끼는 일상적인 억압까지 있을 것이다. 그중 아무래도 동성애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제시 등이 자주 눈에 띄게 된다. 그러나 결국 모든 제보들은 털어놓지 않을 수 없는 욕구들이 만든 현상이다. 다만 욕구의 공·사적임과 비중에 따라 달라 보일 따름이다. 최근에 대나무 숲의 새로운 흐름인 ‘어둠의 대나무 숲’ 페이지 또한 좀 더 검열로부터 자유로운 제보를 특징으로 한다. 몸이 없이 목소리만 오가는 대나무숲은 서로 관계를 맺기 쉽지 않은 단편적인 공간이다. 그 단편성이 앞으로는 어떻게 작용할까 사진 출처 - 산림청 앞서 열거한 대나무 숲의 특징들에 대해 무분별한 익명의 폭력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고, 새로운 공론장의 가능성을 점치는 의견도 있다. 대나무 숲마다 차이는 있지만 폭력성과 공격성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자정하려는 노력들이 보이고 비난 보다는 토론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더 눈에 띤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기대를 갖고 지켜봐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긍정성과 부정성을 떠나 그 이름이 말하는 것처럼 대나무 숲은 말의 기회를 박탈당한 욕구들이 모인 곳이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억압이 만들어낸 대안공간에서 발생했다. 대나무 숲이 활발해지는 까닭에는 건강한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의 축적과 대나무 숲만의 장점도 있겠지만, 응어리져 있고 말할 길이 막혀있는 현상이 더 널리 일상화되고 있다는 뜻도 된다. 대나무 숲이 새로운 공론장으로써 자리할 수 있겠냐는 앞의 물음들에, 나는 절반의 동의를 표할 수 있다. 건설적인 의견교환의 가능성도 존재하고, 사적인 고민을 얘기했을 때, 위로와 동감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긍정성들은 오직 허공에의 외침으로서만 긍정적이다. 새로운 공론장이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 닿는 디딤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나무 숲의 긍정성 중에 아직 디딤돌의 역할을 할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대나무 숲에 올라오는 제보들을 ‘외침’이라고 칭한다. ‘외침’들은 외쳐지고, 이내 사라진다. 사회에서 억압받는 일이 없을 수 없고, 그 억압들을 줄이는 것이 대나무 숲의 몫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또한 대나무 숲의 기능 이상으로 기대를 갖고 대나무 숲에 기대와 관심을 표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억압에 대한 물음의 꼬리를 물고 쌓이고 해결의 변증법의 토대로서의 대나무 숲이 가능할까. 구성원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빠르고 유동적이며 다양한 제보들이 수시로 올라오는 구조의 대나무 숲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숙성되지 못하는 짧은 논의와 위로들에 익숙해지고 더 의지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신종환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5년 7월 1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56 | 추천: 0
남소연/ 청년 칼럼니스트 중동의 낙타가 옮긴 질병이 요란하다. 병원은 물론이고 사람이 모일 양 싶은 곳-심지어 명동마저도-은 모조리 기피지역이 되었다. 약국과 편의점 등지에서 파는 손 소독제와 마스크는 이미 동난 지 오래다. 한국이 중동의 여러 나라를 제치고 발병국 2위라고 하니 의미 없는 소란은 아닐 듯싶다.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정부는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다. 한국의 청년들을 중동으로 다 보내라며, 중동으로의 국외 취업을 알선했던 정부는 ‘부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위기에서 한 발짝 물러난 관조자의 모습이다. 한편 치사율이 95%나 된다는 탄저균은 불현듯 한국으로 ‘배송’됐다. 발송지인 미국으로부터 살아있는 채로 날아온 것이다. 이 균을 대도시에 100kg만 살포해도 적게는 100만 명, 많게는 300만 명을 살상할 수 있다고 하니 새삼 섬찟하다. 심지어 한국정부는 미국 당국의 성명서 발표가 있은 후에야 너무나 손쉽게 위험물질이 국경을 넘나든다는 것을 알아챘다니 늑장도 이만하면 고질병이다. 모든 병원성 위험물질이 국내에 들어오면 질병관리본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원칙이나, 미군 측은 표본이 비활성화 상태인 줄 알았기에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한국에 반입되는 물질의 위험성 판단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합리한 협정 탓에 미국은 언제나 당당하고, 한국의 정부는 여전히 ‘부재’한다. 국가는 수차례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모두 배의 침몰을 생중계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서서히 물 밑으로 사라져가는 지점이 늘어날수록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가슴속에 새겨진 낙인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할 주체는 ‘부재’했다. 컨트롤타워인 수장의 행적은 묘연했고, 유가족에게 고개를 숙이는 대신 돈다발을 흔들었다. 더욱 암울한 사실은, 오늘의 한국을 휘어 감고 있는 불안이란 놈이, 지도자의 무능함이나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날선 표현이지만, 국가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국가라는 껍데기(형체)는 존재하고 있지만, 국가를 체감(본질)할 수 없는 시대.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말처럼,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통치하려 드는 이른바 ‘국가 없는 국가주의’다. 국민들에게는 갖가지 의무를 요구하면서도 권리에 대한 요구는 모른 체다. 어쩌면 도둑놈 심보 일는지도 모르겠다. 세금을 거둬들이고,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강제력을 사용해 처벌하지만 정작 국가가 필요한 순간들에서는 어김없이 사라진다. 메르스는 병원 탓이고, 탄저균이 국내에 유입된 사실은 사고일 뿐이고, 세월호는 유병언 탓이다. 이렇게 책임을 덧씌우다 보면 국가의 혐의는 옅어진다. 국가의 유일한 목표이자 존재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비극은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맞잡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국가는 국민과의 약속을 하나둘 외면한다. 국가의 최대 임무인 안전 보장은 이제 더 이상 국가의 수중에 놓여있지 않고, 사회적 가치들은 시장의 숫자로만 존재한다. 시장의 영역에서 안전은 반드시 사수해야 할 가치가 아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에서 (정신적)가치는 환대받지 못한다. 계산기를 두드려가면서 셈할 수 있는 (물질적)이익만이 신자유주의의 본령이다. 메르스 여파로 한산한 명동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메르스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삼성서울병원의 응급실 이송요원은 메르스 증상을 앓고 있었으나 관리대상으로도 파악되지 못했다. 환자의 안전과 직결되는 병원의 업무는 간접고용된 직원에게 맡겨졌다. 병원의 외주화가 메르스를 키운 셈이라는 지적은 일견 타당한 듯하다. 몇 푼 아끼고자 하는 탐욕 속에 소중한 가치들이 소멸된 것이다. 안전 역시 비슷한 모양새다. 어떻게 안전할 수 있느냐 보다는,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안전을 만들어 내자는 무자비한 합리성이다. 우리가 느끼는 공포의 핵심은 위기의 순간, 국가가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세월호가 그랬고, 탄저균이 반입됐을 때도, 메르스가 확산됐을 때도 또다시 되풀이 됐다. 메르스가 사라지고, 박근혜 정권이 막을 내리면 안전할까. 다시금 그 빈자리를 어떤 위험이 차지할지 모르는 일이다. 국가는 자신들의 역할을 시장에 넘겨줬고, 시장은 이를 싼 값에 처리했다. 이들의 짬짜미 속에서 소외된 것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국가는 국민에 대해 책임지는 국가다. 안전과 생명처럼 시장에 휘둘렸을 때 부작용이 심각한 몇몇 영역은 국가의 수중에 남겨두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남시의 공공 의료 확충 정책이 눈에 띈다. 성남시는 적자로 인해 병원들이 철수한 자리에 시립병원을 건립하고, 가정마다 주치의를 두는 의료서비스 정책인 국민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 적어도 의료부분에는 경제적 논리로 판단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들을 책임지고 보장해주자는 것이다. 국가 역시 자신들이 제자리에 있음을, 즉 국민을 책임지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시장에게 넘겨 준 권력을 다시금 찾아와야 하는 곳은 비단 의료영역뿐만이 아니다. 위기는 사고로, 질병으로 이어졌지만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고, 국가의 해결을 필요로 한다. 국민들은 국가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있다. 희망의 시작은 국가가 책임을 지는 순간부터다. 남소연씨는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언론의 문제점을 느끼고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신문 모니터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5년 7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83 | 추천: 0
안상현/ 청년 칼럼니스트 중국 당나라 시대 형법인 <당률>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고독(蠱毒)’을 만들거나 기르는 자는 처벌한다(賊盜律, 造畜蠱毒). 조선시대의 법률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도대체 고독이 뭐 길래 처벌까지 하는 걸까. 고독 자체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독이다. 세 마리 독충(蟲)을 하나의 항아리(皿)에 담아 마지막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싸우게 한다. 살아남은 벌레는 이전보다 더 치명적인 독을 품게 되는데 벌레를 고(蠱)라 하고 그 독을 고독이라 한다. 설화에 가까운 오래된 이야기다. 하지만 상상 속 이야기로만 즐길 순 없다. 지금 이 사회에서 고독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청년들 이야기다. 얼마 전 한 지방대학교 축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축제무대 앞에 총학생회 간부들을 위한 VIP석을 따로 마련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의 특권의식과 일반 학우들에 대한 차별이 문제였다. 하지만 청년들이 바라본 지점은 달랐다. ‘역시 지잡대’,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머리에 X만 차서는...’식의 말이 들려온다. 마치 악폐습의 원인이 입시성적인 것 같았다. 이런 인격비하에 가까운 발언에도 해당 대학 출신이라는 사람들은 그저 부끄러워만 한다. 간혹 여기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노력하지 않는 자들의 불평불만’이나 ‘실패자의 변명’, ‘열등감’ 같은 낙인이다. 한 유명 웹툰에서 모 대학의 ‘VIP석 사건’을 풍자했다. 그에 관한 ‘BEST’ 댓글들 사진 출처 - 네이버 웹툰 (2015년 6월 20일자 캡처) 같은 대학, 같은 전공 내에서도 비슷한 일들은 빈번했다. 처음 대학을 들어갔을 때 동기로부터 받은 질문은 ‘정시 출신이냐?’였다. 당시 정시 출신은 성골에 가까웠다. 지균충, 기균충이라는 말도 있었다. 서울 지역 내 각 대학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지역균형선발전형과 기회균등선발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을 벌레로 묘사했다. 지방캠퍼스, 전과, 편입 등 우리는 같은 대학, 같은 전공 안에서도 출신을 구분하며 서로의 우월감과 열등감을 확인했다. 이런 차별이 어느 순간부터 너무 당당해졌다. “초·중·고 12년 간 악써서 공부했는데 그 정도 차별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실제 보면 능력의 차이가 있어요.” 등 차별의식의 뒷배에는 ‘능력주의’가 있었다. 우리는 차별이 ‘능력과 노력에 따른 정당한 대우’라고 여겼다. 자신보다 못한 조건의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더라도 능력의 우열을 가르는 것만큼은 확고했다. 능력과 노력에 있어 ‘옆’은 없다. 오직 ‘위’, ‘아래’만 있을 뿐. 위에 있는 자는 상위 포식자처럼, 아래에 있는 자는 먹잇감처럼 행동한다. 먹잇감이라 생각되면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상위포식자라 여겨지면 천적을 만난 것처럼 위축된다. 먹이사슬에 순종하는 청년들은 고독을 긍정한다. 되레 독충이 더 강한 독을 갖는 게 뭐가 문제냐며 반문한다. 청년의 실업률과 고용률은 서로 반대되는 추세다. 사진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강해져 가는 능력주의는 정말 정당할까. 노력해서 온전히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능력과 성공의 관계가 1:1에 가깝다면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사회가 능력주의와 가까워 보이진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 보고서(OECD Skills Outlook, 2015)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년들 중 취업자와 무직자 간 능력 차이는 1% 이하로 회원국 중 가장 낮았다. 이대로 낙오자들의 평균능력이 계속 높아진다면 결국 마주하는 건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는 세상, 능력만으론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일 것이다. 그만큼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제약도 선명해지고 있다. 청년들의 교육과 임금수준이 부모의 교육과 임금수준에 비례한다는 연구결과들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성공과 실패에 개인의 몫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개인의 몫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능력이 더 이상 성공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면 왜 우리는 노예 검투사마냥 서로를 공격하면서 살아남아야 하는가. 최후의 승자에게 수여되는 명예와 재물이 얼핏 정당해 보일지 모른다. 관중이 보내는 환호에 중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웅 같던 챔피언마저 결국 노예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겨루는 경쟁이 최고의 노예를 가리는 시합에 불과하다면 고독한 승자가 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상현씨는 다문화 사회에 관심을 갖고 문제점을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5년 7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09 | 추천: 0
이다솜/ 청년 칼럼니스트 5월 24일은 세계 여성 비무장의 날이다. 그런 5월 24일을 기념해, 세계의 여성 평화운동가들이 비무장지대에 모였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라는 목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지구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걷기 퍼포먼스에는 두 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아일랜드 분규를 해결하는 데 공로를 세운 메리어드 매과이어, 라이베리아의 내전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리마 보위가 함께했다. 메리어드 매과이어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평화활동가로, 지난 2009년에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로 향하는 구호선에 탔다가 이스라엘군에 나포되어 국외 추방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리마 보위는 여성평화운동을 조직하여 라이베리아의 인종 문제로 인한 내전을 종식하는 데 애썼으며, 현재는 트라우마 치유 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또 월트 디즈니의 손녀 애비게일 디즈니, 미국의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도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지지하기 위해 이번 프로젝트에 연대한다. 애비게일 디즈니는 라이베리아의 평화활동가 리마 보위를 만난 후 여성, 전쟁, 평화라는 주제에 천착하며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지나친 이상주의라고. 지나친 순수함이라고. 그 여성들이 비무장지대를 걸어온다고 해서 하루아침 사이 과연 무엇이 바뀌겠느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앞장서서 함께한 김반아 박사는 말한다. 그런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의 ‘두려움을 모르는 순수함’이 바로 지금껏 역사의 원동력이 되어온 거라고. 남북의 끊임없는 갈등, 그리고 그 상황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 평화통일은 분명‘골치 아프고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라는 것이 반드시 불가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한 사람으로 이번 걷기에 참여했다. 분단을 넘어서는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5월 24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으로 향했다. 보수 세력의 맞불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흰색 옷을 입는 국제여성평화걷기 팀에 대항하는 의미로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모여 있었다.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국제여성평화걷기가 시작되었고, 다행히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이 행사는 평화롭게 종료되었다. 국제여성평화걷기 사진 출처 - 필자   걷기 행사 뒤 이튿날, 서울시 청사에서 열린 국제여성평화회의에도 역시 보수 세력은 맞불 시위를 하며 자리를 지켰다. 엄마부대봉사단, 어버이연합 등은 “국제여성평화걷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북한 인권을 외면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탈북 여성인 이애란 씨는 국제여성평화회의가 진행되는 도중, “북한의 핵개발이나 수용소 수감자들에 대해서는 여기 있는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예상치 못한 이애란 씨의 항의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라이베리아 평화활동가 리마 보위는 그녀에게 다가가 “당신과 북한 주민들의 고통에 공감한다. 우리 역시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실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또, 인상 깊었던 것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연설이었다. 그녀는 머나먼 미국에서 한반도까지 평화라는 목적을 향해 달려온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다니던 학교에는 한국전쟁에 징집될 뻔한 학생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학생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싸운 참전용사로,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야 말았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고통이 실제 전쟁이 진행되었던 한반도 주민들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지구촌 어떤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상기하며 연설을 끝맺었다. 그녀는 이번 행사를 모두 마치고 난 파티 자리에서, 참여자들에게 ‘We are linked’라고 쓰인 팔찌를 선물로 남기고 갔다. 나는 믿는다. 언젠가 우리는 분단을 넘어, ‘보통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반도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한반도에서 냉전의 망령을 쫓아내는 한바탕 유쾌한 굿판을 벌이기 위해, 분단이라는 굳은살을 슬슬 문질러 풀기 위해 국제여성평화걷기가 일회성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화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우리의 걸음은 분명, 끊어진 남북의 허리를 잇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은 분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과 상상력으로 잔뜩 부풀어 오르는 중이다. 이 꿈을 함께하는 모두에게 우주의 기운을 담아 열렬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이다솜씨는 여성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02 | 추천: 0
박보경/ 청년 칼럼니스트 새터(새내기 배움터)를 떠나는 첫날, 학회장 언니가 말했다. “여자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고, 남자 친구들은 올라와서 짐 나르자.” 그 말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분위기는 내가 끝까지 여대를 고집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여대를 가진 못했지만 대학 생활을 하면서 나는 종종 여성으로서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확실히 정해져 있는 사회의 분위기를 대학은 그대로 흡수했다. 취준생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회 구조도 더 쉽게 보였다. “은행권 준비할 거야? 남자가 여자보다 더 쉬워. 여자는 똑같이 스펙 쌓고도 얼굴이 이뻐야 하거든.” 총학생회 부회장 출신의 여자 친구는 면접을 볼 때마다 학생회 이력에 관한 질문을 꼭 받았고, 다들 부담스럽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결국 친구는 이력서에서 ‘부회장’을 지웠고 지금은 학생회 경력 자체를 지울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은행 인턴인 한 친구는 노골적으로 이쁜 여자를 밝히는 남자 직원들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했다. 술자리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외모와 몸매 이야기를 하며 시시덕 거리는 분위기는 친구에게 상처로 다가왔다. -가부장제 여전히 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 위의 이야기들처럼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차별도 있고, 너무 깊고 당연시되어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차별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제도가 ‘가부장제’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가부장제는 더 깊고 단단한 세월을 보냈다. 가부장제 하에선 육아는 당연히 여자의 역할이고 자연스럽게 남자의 역할은 아내와 아이를 위해 돈 버는 것이 된다. 왜 요즘 유행하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어머님이 누구니~ 어떻게 너를 그렇게 키우셨니~” 이처럼 자식의 육아 몫은 어머니에게 있다. 이런 가부장제 하에 억압받은 여성들은 병이 생긴다. 그게 바로 우울증이다. 우울증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우울증의 종류가 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생리 우울증, 육아 우울증, 출산 우울증, 갱년기 우울증 등.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한 통계에서 2013년 한해 심한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 수가 66만 4600명이었으며 여성 환자의 비중은 약 77%로 남성 환자의 2배 이상 많았다고 한다. 우울증 환자의 치료 과정을 살펴보면 갱년기 여성의 경우 ‘삶의 목표 찾기’가 치료 과정의 주요 과제다. 이런 현실을 본다면 여성의 우울증은 신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의 사회화 과정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런데,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오롯이 여성일까? 어찌 보면 남성이 가부장제의 가장 불쌍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최근 <아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아이들이 한창 클 나이에 아빠들은 제일 바쁘다. 때문에, 남자아이들은 인간적인 아버지보다는 사회적으로 정해져있는 남성의 역할을 습득한다. 그래서 그들은 무조건 강해야 하며, 어깨에 짐을 져야 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재작년(2013년) 우리나라 자살률 중 연령별 자살 분포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집단은 남성 노인이었다. 남성에게 씌워진 책임감, 가정 내에서의 고립감은 가부장 제도의 결과물이다. <아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아빠와 자식들의 관계는 엄마와 자식들의 관계보다 항상 멀다. 외롭다. ‘부성애’라는 단어는 아직 낯설다. 남성의 부성애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빠를 부탁해>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 요즘 티비에 ‘아빠’가 자주 나온다. 특히 배우 엄태웅을 보면 가슴이 찡하다. 사소한 것에 감동하고 쉽게 눈물 흘리는 그의 모습은 남성의 틀을 깨부수고 있다. 이제 슈퍼맨이란 가면을 쓴 아빠를 가정으로 불러야 한다. 가면을 벗은 맨 얼굴의 사회는 분명 따뜻할 것이다. 박보경씨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699 | 추천: 0
정재호/ 청년 칼럼니스트 장애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인과 그의 가족들이 가지는 어려움은 치료비, 교육비, 의료비, 보조기구 구매비 등의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다. 주 양육자의 경우에는 상시적인 돌봄 부담으로 인해 일상적인 사회활동이나 여가활동의 기회가 크게 제한되어 있고, 심한 정신적·신체적 부담과 스트레스를 가지게 된다. 더하여 장애는 장애인과 그 가족의 문제만도 아니다. 세계보건기구 WHO에서는 전 세계 인구의 10% 정도가 장애인이라고 하였다. 즉, 열 명 중 한 명은 장애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며 이미 우리는 생활 속에서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고 그 도움의 주체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러한 도움의 일환으로 정부에서는 기존의 활동보조지원사업을 개선하여 장애인 활동지원제도를 2011년 10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장애인 활동지원제도란 1급에서 3급의 장애등급판정을 받은 만 6세 이상의 장애인들에게 활동보조인, 요양보호사, 방문간호사 등의 인력을 등급에 따라 월 47시간에서 최대 118시간까지 파견지원하는 것이다. 장애인 활동지원제도의 종류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장애인들의 신체활동, 가사활동, 이동보조에 대한 지원을 하는 활동보조지원과 간호, 요양에 관한 상담, 구강 위생 서비스를 지원하는 방문간호지원 그리고 방문목욕지원이 그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장애인은 자립생활과 사회참여에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애인 자녀의 부모님들에게는 양육으로 인한 경제적,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인 활동지원제도가 실제적으로 중증의 장애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활동보조지원을 받는 대상자의 기준이 다양한 장애인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애인 활동지원제도의 활동지원 대상자는 장애등급판정에서 1급에서 3급을 받은 사람들로 지정되어 있지만 장애유형에는 제한이 없다. 즉, 지체장애1급이든 지적장애1급이든 모두 같은 급수의 장애인으로서 활동지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활동보조인이 지체장애인과 지적장애인을 지원하러 파견을 나갔을 경우에 장애의 유형에 따라 그들의 업무는 천지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지체장애인의 경우에는 운동, 목욕, 외출 지원, 가사 등 전반적인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지적장애인의 경우에는 대부분 가사지원에 그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이렇게 대상에 따라 근무의 강도가 달라지다 보니 활동보조인들은 신체적 장애인들 보다는 지적 장애인들을 같은 이유로 장애급수가 높은 장애인들 보다는 급수가 낮은 장애인들을 선호하게 된다. 더하여 이러한 기피경향은 중증장애인이 기존의 지원체계에서 경증장애인보다 의료적 법적, 행정적인 차별을 받게 만든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앞서 이야기 한 장애인 활동지원에 대한 것과 장애인 가족양육지원에 관한 것이다. 중증의 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한 법과 제도가 정교하고 세밀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탓에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서비스가 제대로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이 가진 장애는 그 장애의 유형에 따라 느끼는 어려움이 상이하기 때문에 단순히 장애급수를 기준으로 서비스가 적용되기 보다는 장애정도와 장애유형이 고려되어야 한다. 나아가 장애인이 가진 어려움은 장애인 개인별로 어려움을 느끼는 정도와 부분이 다르고 그에 따라 장애인 가족이 느끼는 어려움도 다르다. 때문에 어떤 표준화된 방식이나 기준으로 일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보다는 장애인과 그 가족의 욕구에 따라 개별적이고도 유연한 맞춤형 서비스 제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장애인들과 그 가족이 느끼는 어려움을 개별화하여 그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애인 활동지원제도가 개선해야 하는 이유는 장애인의 활동권 및 자립생활과 사회참여를 통한 행복추구권, 그 가족들의 행복추구권 등 인권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기준마련을 통하여 장애정도가 심하거나 지원하기 어려운 장애유형이라는 이유로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재호씨는 법과 제도로 인권 보호를 실현하는 데 관심이 있는 법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90 | 추천: 0
박보경/ 청년 칼럼니스트 심심할 때 페이스북을 본다. 타임라인에 뜨는 다른 사람의 글, ‘좋아요’를 누른 글을 읽다 보면 가끔 가다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있다. 요즘 내 경우엔 ‘자유주의’ 페이지에 올라오는 글이 그렇다. 이들은 선별적 복지를 찬성하고, 최저임금 1만원을 반대한다. 친일파 숙청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옹호하고, 대학 등록금은 높아야 한다고 말한다. 볼 때마다 짜증이 밀려온다. 이런 글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더욱 충격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궁금하다. 그래서 다시 들어가서 보고 또 놀란다. 세계를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를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러다 며칠 전, 자유주의 페이지가 일베 ‘산업화’(?)를 위해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안도했다. ‘이런 사람들은 역시 일베야.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어!’ 나는 분노와 함께 댓글 폭탄을 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거 일베가 만든 겁니다! 멋모르고 ‘좋아요’ 누르시는 분들,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그 뒤로 나에게 자유주의 페이지는 ‘일베 사이트’, 댓글을 달거나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은 ‘일베충’이 되었다. 그렇게 이들에게 딱지를 붙이던 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건 이런 글이었다. 참 피곤한 세상이 도래했다. 사회에 만연한 일베 혐오가 시민들의 자유발언을 억압하는 세상이다. 일베가 절대악으로 취급되는 현 사회분위기에서, 보수 성향의 시민들은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행여 보수 의견을 내비쳤다가 일베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렇다고 잠자코 논리 없는 정부비판들을 듣고 있자니 복장이 터져나간다. ……일베에 대한 극단적 혐오, 이른바 ‘일베포비아’는 보수와 일베가 더욱더 음지로 들어가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억압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경상도 출신의 한 연예인이 본인의 SNS에 사투리를 썼다가 일베 말투 논란에 휩싸여 경위 설명에 나섰다. 모 개그 TV 프로그램에서는 부엉이로 분장한 개그맨을 출연시켰다가 일베 의혹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정말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일베포비아가 만들어 낸 각종 사회적 금기들이 시민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행여 본인의 말이 일베의 그것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조심해야 하는 세상이다. -페이스북 ‘자유주의’ 페이지 글- ‘아니, 여성을, 외국인을, 진보주의자를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일베가 일베 혐오를 비판한다니 말이 돼?’라며 어이없어할 수 있겠지만, 잠시 생각해보자. 윗글에서 ‘일베’를 ‘종북’으로 바꾸면 또 나름대로 괜찮은 글이라며 고개를 끄덕일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베를 포용해야 한다거나, 종북은 일베같은 사회악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에 낙인을 찍는 태도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이들 밥 걱정하다 ‘종북’으로 몰린 학부모들 ‘분노’” 3월 30일 JTBC <뉴스룸> 사진 출처 - PD저널 이를 테면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페이스북. 댓글을 보면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좌좀’이니 ‘종북’이니 하며 험한 말을 쓴다. 심지어 홍 지사 자신도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사람을 ‘종북 세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을 보며 난 위기감을 느꼈다. 나도 잘못하면 내 나이 70이 돼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일베’ 낙인을 찍고 무시하겠구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딱지를 붙여 몰아내면 당장은 후련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서로 증오만 쌓일 뿐, 왜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런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비판하기 이전에 그들이 무엇을 원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를 헤아려볼 수 있으면 한다. 설득이나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의 주장이 나온 배경을 알게 되면 최소한 서로 경멸하는 딱지를 붙이며 모욕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물론 그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올바른 일은 대개 쉽지 않은 법이다. 박보경씨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24 | 추천: 0
이다솜/ 청년 칼럼니스트 전쟁이 끔찍한 건 인간성을 말살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죽인다는 건, 한 개인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일상을 망가뜨리며, 그가 정성스레 가꾸어온 관계들마저도 잔혹하게 흩뜨려 놓는 일일 것이다. 지난 2월,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의 작품 <오마르>는 이스라엘 점령하의 팔레스타인에서 날아든 한 통의 편지다. 이 영화는 주인공 오마르가, 전쟁의 광기로 질식된 일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오마르는 빵을 굽는 사람이다. 그는 연인인 나디아를 만나기 위해 분리장벽을 수시로 넘나든다. 이 분리장벽은 이스라엘이 건설한 거대 장벽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제한된 영토 내에서 제한된 생활만을 하도록 만든다. 총 연장이 730km에 달하는 이 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존권과 이동권을 침해하며 그들의 영혼을 옥죈다. 이 장벽 때문에 팔레스타인 주민 수만 명의 삶이 일터와 학교로부터 격리된다. 심지어는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구호물자마저도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벽은 팔레스타인에서 일종의 감옥 역할을 하는 셈이다. 영화에서도, 오마르가 연인인 나디아를 만나기 위해 분리장벽을 넘을 때마다 이스라엘군은 기다렸다는 듯 총을 쏘아댄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연인을 만나는 일상적인 행위를 위해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오마르는 분리장벽을 넘다가 이스라엘군의 검문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저기 보이는 돌 위에 한 발로 서봐”라는 명령을 받는다. 군인들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한 굴욕적인 서커스를 요청받는 셈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렇듯 인간성의 말살, 존엄성의 파괴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에 분노한 오마르는 이스라엘을 향한 복수극에 가담한다. 인간은 ‘희망’이 있어야 인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희망도 꿈꾸기 힘든 절망적인 현실은 계속되는 팔-이 무력분쟁의 원인이다. 좌절과 무력감을 견디지 못하는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하나, 둘 이스라엘을 향한 테러에 가담하기 시작한다. 희망을 볼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한 이들이 자연스레 테러 조직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마침내 오마르는 이스라엘에 붙잡히고, 고문과 회유 끝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오가는 이중첩자가 된다. 지금껏 함께해온 친구들을 배신해야 하고, 연인과도 멀어져야 하며 가족으로부터 내쳐지는 고통이 그를 잠식한다. <오마르>는 냉정하게도, 이런 비참하고 잔인한 현실을 그리면서 절대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감독은 헛된 희망을 줌으로써 성급한 결론을 짓고 싶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점령 현실을 사유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상이야말로 우리의 남루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출구’라고 생각하는 나는, 총칼이 아니라 언어를 나눔으로써 삶을 꾸려가는 세상을 꿈꾼다. 오히려, 이 절망적인 영화를 보면서 인간은 오직 언어를 나눔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가슴속에서 불탄다. “앗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뜻의 팔레스타인 인사)”이나 “샬롬(‘평안하시기를 빕니다’라는 뜻의 이스라엘 인사)” 같은 언어. 우리는 이렇게 타자를 환대하는 자세로 서로의 언어를 교환하며 살아가야 한다. <오마르>는 언뜻 우리와 별 상관없는 머나먼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계속되는 무력대결로 평화의 상상력이 질식되어가는 한반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죽음의 에너지가 지배하는 이 사회를 삶의 에너지,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죽음과 죽임의 세력에 대항해갔으면 좋겠다. 무력대결을 멈추고, 지구촌을 사랑과 평화의 화원으로 가꾸어가야 한다. 마치, 지금의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에서 태어난 예수가 설파했던 인류애의 메시지처럼 말이다. 이 세상은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정원. 그러니 나는 그 정원지기로서 이곳을 지금보다 더 아름답게 가꾸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씨네21 이다솜씨는 여성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3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