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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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서동기/ 회원 칼럼니스트 매일 전철을 탄다. 출근 시간, 사람들 틈에 끼어 철로 위에 몸을 맡긴다. 출퇴근길 전철에는 몇 가지 암묵적 규칙이 있다. 환승 통로와 연결되는 출입문 근처에서 서성대지 않을 것. 에스컬레이터에서 길을 막으며 서있지 않을 것. 등등. 매일 출퇴근 시간, 거대한 물결이 땅 위와 아래로 만들어진다. 혹시 낯선 지하철역에서 그 흐름을 거슬러본 적이 있는가? 출근길의 규칙을 어기는 자에게는 어김없이 수많은 ‘어깨빵’과 따가운 눈총이 돌아온다. 가끔 첫차도 탄다. 첫차에는 평소에 존재하지 않던 사람들이 나타난다. 가방을 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조금 피곤한 듯 꾸벅 졸기도 하며 새벽부터 분주하게 어디론가, 어디론가 간다. 밤새 술에 취했다 돌아오는 아침 첫차 안에서는 그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면 묻게 된다. 저 노인들은 왜 아직도 부지런해야하나? 우리는 왜 이렇게 더럽게 피곤하고 바쁘게 살아야만 하는가? 철로 위에는 승객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쁨과 피곤함은 수많은 철도 관련 노동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 5월 27일 광운대 역에서 철도 노동자 조영량 씨가 열차를 분리하고, 연결하는 입환 작업을 진행하다 사고로 숨졌다. 입환 작업은 본래 일곱 명이 한 조로 진행하던 것인데 인건비 절감의 명목으로 한 조의 정원이 다섯 명으로 줄어들었고, 사고 당일에는 네 명이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사고 며칠 뒤 사고가 발생한 광운대역(옛 성북역) 육교에서 바라본 승강장과 철로 사진 출처 - 필자 2016년 구의역에서 19살 김 군이 죽었다. 몇 달 뒤, 지진으로 지연 운영되던 KTX 경부선 철로를 보수 중이던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 두 명이 죽었다. 1년이 지난 올해 숨진 조 씨는 인력감축을 견디고, 격무에 시달리던 정규직 노동자였다. 1년 사이 철로 위의 죽음은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번졌다. 오늘도 전철을 탄다. 미어터지는 사람들 속에서 팔을 살짝 움직거리기도 조심스러운 ‘지옥철’ 안에서 우리는 매일 각자의 지옥을 통과한다. 이것은 그저 주어진 일상의 풍경일 뿐일까. 누군가 그랬다. 혁명이란 ‘달리는 열차를 멈춰 세우는 비상브레이크’ 같은 것이라고. 오늘도 바쁜 사람들 속에서 문득 상상한다. 바삐 달리는 열차 안에서 우리의 브레이크란 무엇일까? 하지만 상상이 오래 지속되기는 쉽지 않다. 어느새 우리는 다시 바쁘게 흘러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휩쓸린다.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복잡한 생각과 분노에 대해서만 은근 슬쩍 브레이크를 당겨오지는 않았던가. 오늘도 열차는 지옥을 싣고 지옥 위를 쉼 없이 달리는 중이다.   주: 글을 마무리 하던 중 노량진역에서 철로를 보수하던 노동자 김창수 씨가 또 숨졌다. 관계자에 따르면 13명이 정원이던 영등포 시설사업소의 정원은 9명으로 축소되었다. 6월 28일 자정, 사고 당시에는 7명이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김창수 씨는 철도노조 지부장과 시설부장까지 역임했고 안전한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던 베테랑 현장 노동자였다. 서동기 :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읽고 묻고 공부하는 중입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719 | 추천: 4
조예진/ 회원 칼럼니스트 “쌤, 엄마가 기숙사 다시 들어가래요.” 우리 반 여학생 하나가 청소 시간에 슬쩍 와서 말한다. 기숙사 생활이 힘들다며 기숙사를 나와 편도 40km 거리의 대중교통 통학을 선택한 아이였다. 농담으로 집에서 불효(?)하지 말고 효도하라고 몇 마디 던졌다. 우리 학교는 98%의 학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특수목적고등학교다. 소위 ‘특목고’라고 하면 아주아주 똑똑한 학생들이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특목고에도 계급(?)이 있다. 우리 학교는 성실한 학생이 주로 온다. 성적은 조금 떨어지지만, 기숙사 생활을 버티고 대학 입시의 성공을 위해 3년간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아이들이다. 어른들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아이들이 많다. 나중에 커서 사장님의 말에도 순종할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많은 인문계 고등학교가 그렇겠지만, 학교는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정글이다. 대입에서 수시가 강화되면서 학교생활은 더욱 중요해졌다. 9등급으로 나눠지는 교과 성적뿐만이 아니다. 수시의 학생부 종합 전형에 필요한 스펙을 쌓기 위해 수많은 교내 대회와 동아리 봉사활동, 독서까지 학생들은 쉴 틈이 없다. 여기에 인성까지 갖추어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착하고, 창의적인 인재로 기록되어야 한다. 학교는 언제 어디서 표범이 뛰쳐나올지 모르는 세렝게티이다. 게다가 기숙사가 있는 학교는 잠깐의 쉼을 위한 집으로의 귀환이 불가능하다. 4년 전 우리 학교에 발령받았을 때 학교 옆 작은 5층 건물에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사는 줄 몰랐다. 적게는 10분, 많게는 5시간 거리의 집을 떠나 기숙사에 산다. 월 2회 의무 귀가를 제외하면 한 달에 20일 이상을 머문다. 하루 종일 정글에서 목숨을 걸고 뛰어다닌 그들에게는 학교가 곧 집이다. 체육대회 사진 출처 - 필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되었다. 우리 학교에 오겠다고 결심한 아이들은 기숙사가 있기 때문에 온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 학교의 학부모님은 상당수가 맞벌이시다. 부모들은 회사에서 야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한다. 야근으로 돌볼 수 없는 아이의 삶은 학교에 맡겨진다. 부모님이 일하시는 동안 아이들을 맡아 밥 먹이고 재우는 공간, 그곳이 학교다. 요즘에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가 인기가 많아 기숙사 신축을 하는 학교가 늘어난다고 한다. 학교의 목적은 교육이 아니라 보육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학교가 싫었다. 고3 때에는 하루에 한 번씩 자퇴를 꿈꾸었다. 실행은 못했고, 야간자율학습(야자)를 꼬박꼬박했으며 졸업식에서 개근상을 받았다. 하지만 난 학교가 정말 싫었다. 그래서인지 너무 성실한 우리 아이들을 볼 때 가끔 울컥한다.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나중에 우리나라 어디선가 맡은 일을 묵묵히 성실하게 노동할 아이들, 부당한 일을 당해도 ‘내 탓’을 하며 눈물 흘릴 아이들, 이래도 괜찮을까? 의식적으로 말한다. 괜찮다고. 지금 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안 해도 되고 못해도 된다고. 부모님께 말한다. 안아주고 격려해주시라고. 집에서 멍 때릴 때 공부하라고 하지 말고 잠깐의 휴식을 허락하라고. 꿈꾼다. 저녁에는, 휴일에는 집에 좀 가고, 놀고 쉬자고.   조에진 :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는 좋아하지만 수능 필수 한국사는 싫어합니다. 이 글은 2017년 6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86 | 추천: 1
정석완/ 회원 칼럼니스트 오늘도 흔히 보게 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은 바로 ‘여성 전용 주차장, 장애인 지정 주차 공간, 노약자석, 어린이 보호 구역’ 등으로 불리는 ‘지정석, 지정 공간’입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곳곳에 ‘지정석’과 ‘지정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노약자석에 대한 뉴스 검색을 해 보면, 노약자석이 생긴 것은 1979년 10월 26일 보건사회부장관에 취임한 진의종 장관의 제안으로 시작되어, 1980년부터 지하철과 버스에 ‘경로석’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생겼다고 합니다. 그럼 이 공간을 왜 만들었을까요? 당시 진의종 장관이 내세운 이유는 경노효친 즉, 노인에 대한 공경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배려한다, 편의를 제공한다’입니다.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그들을 배려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인가?’입니다. 물론, 그런 이유도 무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모두가 하나하나 배려하면서 살아가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생겨나는 ‘지정석’을 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무엇을 보호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노약자석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이를 담은 기사들은 많이 있습니다. 1982년 경향신문 ‘노약자석 얌체승객 없길’이라는 기사나 1999년 동아일보 ‘서있는 노인-앉은 젊은이 지하철 노약자석 이름뿐’이라는 기사 등을 보면 노약자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필요성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2016년 12월 14일자 아시아경제 ‘[카드뉴스]노약자석 폐지하면 어떻게 되나 봤더니..’제목의 기사를 보면 최근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일본 지하철 내의 청년과 노인 간의 노약자석 말다툼 영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철에서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젊은 남성에게 노인분이 손가락질을 하며 말다툼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기사에서는 일본에서 1999년 한큐전철과 노세·고베전철에서 노약자석을 폐지하는 실험적 시도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 이유는 ‘노인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의 결론은 노약자석은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보고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과 고생한 이들에 대한 ‘존경’, 고생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한해 출생아 수가 줄고 있다’는 언론기사와 함께 이런 추세라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없어질 나라’라는 암울한 전망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임산부에 대한 지원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부터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임산부 지정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임산부 지정석’에 대한 찬반 의견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2015년 8월 23일자 ‘더 팩트’의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기사를 보면, ‘디자인이 화려해 알아보기도 쉽고,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여성이면 앉아 있는 사람이 비켜주는 효과가 있을 것 같다’라는 긍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초기 임산부일 경우는 태가 안나 양보하고 싶어도 못할 것 같다. 특별히 임산부석을 마련하지 않아도 일반 시민들이 노인이나 임산부를 보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우리나라 문화다. 초기 임산부는 임신 사실을 잘 알 수 없으며, 임산부 자신이 임신 사실을 알리는 것이 난처하여 실효성에 의문을 가지는 시민들도 있다’라는 부정적인 의견들도 있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서울시 제공 무언가를 강요한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의견에는 일정부분 동의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만 이런 의견을 수용해도 지정석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안에서 그만큼 보호받지 못하는 분들이 많고, 이들을 우선적으로 보호해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들을 배려하고 편의를 제공하는 공간으로써 ‘지정석, 지정 공간’은 좋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해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는 그들을 배려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인가?’ 저의 답은 이렇습니다. ‘예 맞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배려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피곤하다, 내 문제가 아니라고’ 눈 돌리고 고개 숙였던 것에 반성하게 만듭니다.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지정석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언젠가 우리도 ‘아이를 가질 것이고, 노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고로 인해 장애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정석은 특정 사람들의 공간이 아닌 미래의 나를 위한 배려 공간인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지정석을 만듦으로써 그분들을 특별하게 만들고, 지정석 이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노약자 분들에 대한 배려나 양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정석은 우리 사회가 보호하고 배려해야 할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공간일 뿐이고, 이러한 배려는 모든 좌석에 적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생각합니다. ‘지정석에는 우리 사회의 배려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말입니다.   정석완 : 민주 사회를 위해 사회 문제를 시민사회와 정치에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7년 6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982 | 추천: 1
박용석/ 회원 칼럼니스트 목숨의 값은 얼마일까. 세상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니 이런 물음을 불경하다 탓하지 마시라. 진정 불경한 것은 목숨에 정당한 가격이 책정되지 않음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나라에서는 목숨 값을 놓고 한해 1,777번 넘게 흥정이 벌어진다. 1년에 1,777명, 하루에 4명 꼴, 한국에서 2016년 한해 일하다 죽은 ‘노동자’의 수다. 정부 공식 통계다. 2015년 1,815명, 2014년 1,850명이었다. 인구 10만명 당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OECD 1위를 지키고 있는 수치 중 하나다. 그 중 사연 없는,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 어느 하나라도 있겠는가. 얼마 전 1주기를 맞은 구의역 김 군처럼 말이다. 굳이 그의 죽음을 예로 드는 것은 하나의 전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다. 일을 하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어떤 전형 말이다. 지난 약 20년 동안, 고용의 안정성과 근로계약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층위의 비정규직이 생겨났다. 연봉계약제 정규직(무기계약직, 또는 중규직으로 불린다), 기간제 계약직, 일용직, 법적으론 노동자로서 보호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까지. 여기에 기업 간의 하청, 도급관계 어느 지점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다시 1차 하청(1차 밴드), 2차 하청(2차 밴드)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건설업이나 물류운송업, 유통서비스업, 제조업 일부의 경우 도급 단계가 적게는 3단계, 많게는 7~8단계까지 된다하니, 얼마나 많은 종류의 비정규직이 있는 것인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사진 출처 -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구의역 김 군의 경우 이중에 사내하청 기간제 계약직에 해당된다. 앞서 언급한 비정규직의 분류 중 생각보다 높은 층위의 비정규직인 셈이다. 7차, 혹은 8차까지 내려간 마지막 단계의 하도급사에서 일하는 일용직, 혹은 특수고용직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목숨을 걸고 일해야 했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위험한, 그래서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일은 보다 낮은 층위의 비정규직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볼 때, 김 군보다 더 낮은 층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얼마나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런 전형은 사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신분제 사회가 그랬고, 그만큼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 이후 지독히 사라지지 않는 ‘노가다’란 말에 내포된 전형이 그랬다. 이렇게 차별이 신분제처럼 굳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면, 그것은 비약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층적 차별이 고착화되며 노동자들 간에도 차별적 의식이 움트고 있다는 우려를 비약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단적으로 건설노동자를 낮추어 부르는 ‘노가다’란 말이 지독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노동자들의 처지가 ‘노가다’의 언저리로 추락하고 있는데, 우리의 인식도 그 말이 내재하고 있는 경멸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직까지도 1,777명의 노동자 중 절반가량이 건설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있고, 또 목숨을 잃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 숫자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특수고용직’이나 일용직 노동의 특성상 근로계약이 불분명해 산업재해 사망자 통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이 산업재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적당한 목숨 값’을 선 지불하고, 사고를 은폐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체 노동자 중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겠다’는 헌법 전문을 가진 나라에서 지속적으로 노동유연성을 강제한 결과다. 지난 20년간 개혁정권, 보수정권을 막론하고 일관되게 ‘강성귀족노조’가 문제라며 유연한 노동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유연한 노동은 기업의 수익은 극대화 시켜주었지만, 노동자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했다. 이제는 그 허리띠를 목에 걸고 있다고 한다. 비정규직과 실업을 반복하는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희망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이다. 이 나라는 자살률도 세계 최고다. 노동자 중 절반이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든 제1의 책임은 정부에 있을 것이다. 출범한지 겨우 2달째인 ‘새정부’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절반은 책임져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묻는다. 우리의 목숨 값은 대체 얼마인가.   박용석 : 전국건설노동조합에서 일했었고, 지금은 서울시 노사정 협의 기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7년 6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49 | 추천: 1
김시형/ 회원 칼럼니스트 30대 중반이 넘어서 20대와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나는 내가 행운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내가 주로 있는 자리는 여학교의 학교도서관이다. 여성 혐오 발언이 난무하는 요즘 이 또한 행운인지도 모른다. 20대 내내 돈을 못 벌면 죽는다는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30대 초반에 겨우 자리가 생겨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내 자리는 오직 업무를 위해서 존재했다.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새로운 탐색이 시작되었다.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로서 살아갈 수 없는 자리에서 벗어나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게 어떨까. 이러한 바람으로 학교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학교생활은 20대와는 달라졌다. 우선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굳이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자리는 이런 눈에 보이는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학교도서관에서도 선호하는 자리가 있으면 앉고 없으면 다른 자리에 앉는다.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은 20대가 놓인 각박한 경쟁상황이 예나 지금이나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비인간적인 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현실을 경험했다. 그 날은 사람들이 별로 없는 일요일 오전이었다. 30대 학생 한 명이 먼저 좌석발급기에서 자리를 발급받아 앉아 있었다. 그런데 늦게 온 20대 학생이 그 옆자리에 바싹 붙어 앉았다. 30대는 20대에게 좌석을 발급 받을 때 먼저 온 사람 바로 옆 자리에 앉지 말아달라고 말한 것 같다. 그런데 그 20대는 “전 좌석발급기로 자리 발급 받았는데요”라고 말했다. 이 대답에 기가 막힌, 30대 학생은 “사람이 공부를 잘하면 뭐해. 먼저 인간이 되어야지!”라고 말하면서 내 옆옆 자리로 옮겼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 20대 학생의 인성에 의문을 가졌었다. 그런데, 나도 학교도서관에서 종종 내가 먼저 앉아있는 데도 늦게 와서 내 옆에 바싹 앉는 여러 20대 학생들을 목격했다. 시험 때라 학교도서관에 사람이 많으면 옆에 바싹 붙어 앉는 것을 이해하겠다. 이럴 때에는 ‘한 사람당 한 자리’라는 기본 원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휴일에 도서관에 나와서 옆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가 앉고 싶은 자리에 무턱대고 앉는 학생들을 만날 때,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 다툼도 눈여겨보게 된 것 같다. 학교 도서관의 매점 자리 사진 출처 - 필자 무엇이 내 연령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20대 학생들의 심리를 조장하고 있는지 그 배경이 마침 궁금했다. 그리고 이 배경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나는 많은 이유 중에서 지나친 경쟁을 조장하는 사회분위기가 이와 같이 자기 자신만 챙기기 급급한 20대를 낳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고 싶다. 이런 분위기라면 좌석발급기는 먼저 온 사람을 배려해서 자신의 자리를 결정하는 기계가 아닌, 늦게 오더라도 먼저 자리 잡은 사람에 대한 고려 없이 오로지 자기가 앉고 싶은 자리를 결정할 수 있는 기계가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서, 이기적인 사람이 기계를 이용해서 대다수 사람의 편리를 해치는, 효율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있겠구나 싶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좌석발급기로 발급받았어요.” 생기발랄한 20대를 기대했다가 뜻하지 않은 광경에 슬프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 시간이 흘러서 학교에 시험 때가 다가왔다. 학교도서관은 터질 듯이 사람이 많아지고 당연히 매점에도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밥 먹을 자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식사를 할까’하며 자리를 찾다가 4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비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운이 좋았다. 사람이 꽉 들어찬 매점에서 혼자서 4명 테이블에 앉기가 불편했다. 일단 나도 식사를 해야 하니 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1인 테이블에 자리가 생겼는데, 3명의 학생이 그 1인석이라도 잡자는 식으로 빠르게 그 자리를 잡았다. 나는 원래 소심한 성격이라서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잘 건네지 못한다. 나이가 낯짝을 두껍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지, 그 20대 학생들 3명에게 조심히 말을 건넸다. “우리 자리 바꿀까요?” 그러자 그 20대 학생들의 반응이 어찌나 감사해 하는지, 일제히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인사를 깍듯이 한다. 몇 달 전일로 20대 학생들의 인성을 걱정하다가 뜻밖의 감사인사로 이 걱정이 쓸데없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었다. 자리 바꾼 것이 감사 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매점에도 좌석발급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난 20대 학생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체험하는 기회는 고사하고 매사에 기계에 근거하여 사고하는 비인간적인 삶의 태도를 또 한 번 몸에 익혀야 했을 것이다. 김시형 : “생명윤리의 한 분야인 ‘인간대상 연구 윤리’를 성찰하고 있는 연구원” 이 글은 2017년 6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32 | 추천: 1
서진석/ 회원 칼럼니스트 2011년, 크로스핏(Cross-Fit)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로스핏을 하고 있던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게 무슨 운동이야?”라는 질문을 종종 받아왔다. 그럴 때면 ‘단기간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는 운동’으로 설명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쾌한 설명을 들었다. 크로스핏은 ‘아령 들고 달리기’라는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신체 능력을 골고루 향상시키는 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었다. 예를 들어 크로스핏은 턱걸이 세 개, 100미터 달리기, 팔굽혀 펴기 열 개를 3회 반복하는 식이다. 한 사람은 다양한 정체성을 갖는다. 나는 남성, 학생, 이성애자, 노동자 따위의 정체성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런 정체성을 느끼며 달려오던 내가, 정당을 만나 선거를 치르게 됐다. 아령을 들게 된 것이다. 아령을 드는 것은 무거웠지만 중독성이 있었다.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민으로서의 하루를 사는 것 같았다. 사진 출처 - ‘The Identity Issue, 2017’, <WINDMILL> 청년정당을 표방하는 정당이었기에 기존의 춤, 연설 위주의 선거운동을 지양했다. 촛불이 만든 대선인 만큼, 촛불정국에서 등장했던 적폐 내용을 피켓에 담고 물풍선을 던져서 맞추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내가 속한 경기도의 부천, 의정부, 평택, 수원 등을 돌아다니며 청년 당원들과 ‘물풍선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어린 아이들이 관심을 보였고, 덩달아 따라온 부모들에게 우리의 정책을 홍보할 수 있었다. 언론사의 취재 요청이 들어올 만큼 반응도 좋았다. 그러나 장미대선을 향해 뜨겁게 달렸던 열정의 순간들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 맡아보는 대표 역할에 좌충우돌하기도 했다. 대표로서 ‘역할’을 배분했어야 했는데 무턱대고 내가 맡아서 모든 걸 하려했던 점이나, 대표로서 처음으로 정당 체계에 적응하고 소통하는 모습이나, 대표성을 가진 기구의 장으로서 감당해야하는 최소한의 희생 등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다. 학생으로서, 연인으로서의 모습에서도 충실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렇게 생애 첫 선거가 끝났다. 다시, 일상이다. 돌이키면 부족했던 나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아령을 들고 오랫동안 달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나의 사회적, 경제적 정체성이 ‘진보’를 추구하기에 부족했음에도, 진보를 추구하는 집단에서 활동했던 것이 내겐 ‘아령’이었던 것도 같다. 아령을 내려놓고 짧지만, 격렬했던 ‘아령 들고 달리기’를 천천히 돌이켜볼 때가 왔음을 느꼈다. 크로스핏에는 ‘테스트 데이(Test Day)’가 있다. 한 달 전 나의 기록과 비교하는 날을 말한다. 부족했던 모습을 부여잡고 있는 대신, 맨몸이 아닌 아령을 들고 달리려했다는 사실을 느끼며 하루를 살아간다면, 다음 테스트 데이에 나는 더 성장해 있지 않을까? 서진석 : 반 제도권적 제도권 수용자. 항상 자퇴와 탈당을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7년 5월 3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878 | 추천: 1
서동기/ 회원 칼럼니스트 촛불의 파도를 떠올린다. 청각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해 함께 손으로 이야기 나누던 광장. 나이, 성별, 지역 등 우리를 가르던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어둠에 대항하던 작은 불빛들.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각자의 꿈을 나누던 광장. 하지만 과연 촛불이 이겼나? 지난 대선의 장면들을 복기해본다. 대선기간 한 신문사에서 비극적 죽음이 있었다. 우리시대의 상식파를 자처하는 ‘합리적’ 시민들이 죽음을 비웃고 신문사를 증오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자신의 지지후보에 비판적인 논조를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들의 광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죽음에 익숙해진 탓일까. 비극 앞에 내뱉어진 그들의 발언들은 끔찍했다. ‘동성애가 싫다,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1등 후보의 실언에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복잡다단한 정치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공상적인 ‘입진보’가 되었다. 시민들의 사과 요구는 지지후보를 흠집 내고 자기 몸집을 키우려는 어떤 세력의 정치 음모가 되었다. 우리시대의 합리적 시민들은 당사자들에게 ‘적폐 혁파의 대의’ 앞에 함부로 끼어든 ‘얼치기’들에게 현실정치의 냉혹함을 가르치고 증오를 퍼부었다. 잠시 상상을 해보자. 성주에서 진행 중인 굴욕에 작은 소설을 하나 더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경찰이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시민의 차량 창문을 깨트리고 미군에게 길을 터준다. 그 모습을 트럭에서 비웃으며 촬영하던 미군이 ‘젠틀’하게 대화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하, 동양인들은 참 싫지만, 우리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은 반대한다고. 동양인 차별은 반대하지만 동양인과 혼인 합법화는 좀 더 생각해봐야지.” 당시 문제의 발언에 동양인을 대입하여 생각해보면 당사자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그들은 분노의 항의에 대꾸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 필자 촛불의 핵심 정신은 단순히 박근혜 따위의 탄핵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광장의 함성은 누군가 눈앞의 문제들을 대신 해결해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요구를 말했고 시민들은 서로 귀 기울였다. 하지만 광장의 목소리는 인물들의 정치와 선거에 지워졌다. 촛불의 목소리는 구세주에 과도하게 몰입한 광신도들의 부흥회 소리에 가려졌다. 지난 10년의 적폐에 대항해 ‘대의’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데 실없는 소리를 던지고 있다고? 그렇다면 감히 말한다. 당신들의 대의 때문에 촛불혁명이 망한 것은 아닐까. 다시 시작이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다른 차원의 어둠에 다시 새로운 촛불을 들어야 한다. 서동기 :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읽고 묻고 공부하는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5월 2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36 | 추천: 2
방효신/ 회원 칼럼니스트 # 일동 침묵. 내년에 사표 쓰고 캐나다로 갈 거예요. 젠더이론을 더 공부하고 싶어요. 교사하는 거 재밌는데, 학교 문화를 버티기 어려워요. 교장의 부당한 지시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튀는 행동 하지 말라며 제 팔을 붙잡아요. 학교 운영 계획이나 실행 절차가 불합리한 거 당신들도 아는데, 관행이고 말 해봤자 안 바뀐다며 동료 교사에게 단속당하는 일상을 못 견디겠어요. 생각의 방향이 같은 선배들은 좀 더 싸우면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켜보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왜, 혼자, 그래야 돼요? 그러고 나서 후폭풍도 오롯이 혼자 겪고요? 어떤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요. 문제라고 느끼는 제가 문제인 것처럼 취급하죠. '탈조선'하는 게 상황을 회피하는 건가요? 행복하게 사는 길이 보이는데,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 왜요? 초등학교 여교사라고 소개하면, 결혼정보회사 신붓감 1위라던데 하며 피드백을 받곤 해요, 아직도. 제 나이가 결혼하기 딱 좋은 20대 후반이라며 소개팅 자주 하냐고 물어보고, "치마도 자주 입고, 예쁘게 하고 다녀." 하면서 외모 평가를 칭찬으로 하는 교사들의 시선이 불쾌합니다. 학교 업무와 전혀 관계없는 제 사생활에 대한 조언과 "딸 같아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하는 잔소리. 이런 문제에서 50대 전교조 선배들과 교장, 교감 같은 관리자의 다른 점이 뭐죠? 학급 운영, 학교 내 의사 결정 구조의 민주화, 동료 간 감정 소통에 대한 관점과 실천이 다릅니까? 글쎄요. 요새 관리자들은 대화 기술이나 통제 수법이 세련되었어요. 교사 개인의 상황과 성향에 따라 적절히 위로하고 상담해가며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냅니다. 전 내년에 외국으로 어학연수부터 다녀오려고요. 거기서 내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다른 방식의 사람들을 만나야겠어요. # 진짜요? 아니, 그러고 싶은데 다른 직장 잡기는 어려울테고. 교사 때려 쳐도 무엇을 하던지 밥은 먹고 살겠죠? 아유, 모르겠다. 일단 연수휴직을 신청합니다. 요즘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학교가 재밌었는데, 이제는…. 교사 15년 했는데, 출산휴가 3개월 빼고 한 해도 안 쉬었어요. 임계치에 다다른 느낌이에요. 할 일이 하루 종일 들이닥치고, 끝없이 무엇인가 하고 있고, 애들은 말 안 듣고, 학부모들은 아침저녁으로 근무시간 아니어도 연락합니다. 지쳤어요. 사진 출처 - 범페미네트워크 # 그런 말 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요. 7080 운동권 선배들은 감수성과 갈등해결 방법이 그 시절에 머물러 있어요. 일을 하는 방식이나 인간관계를 맺는 경우에도 일방적입니다. 의견을 제시하면 당신 말만 해요. 제 의견에 대응하고 소통하셔야죠. 대화라는 게 말을 주고받는 건데, 이 분들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하니까 젊은이 생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물어본 적도 없는 자기 경험을 한 시간 내내 말씀하시면 저는 언제 끼어듭니까? 당신 말씀에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실은 재미없어요. '나이주의'라는 거 들어보셨습니까? # 2 사회생활을 하면, 직장을 그만 두고 싶은 다양한 이유가 수시로, 혹은 때때로 찾아온다. 교사는 그만 두기 아까운 직업이라고들 한다. 정년이 보장되고, 퇴직하면 매달 연금도 나오고, 평소에도 지시에 순응하고 살면 다른 직장에 비하면 '잘릴' 위험이 적다. 정해진 시간에 눈치 안 보고 퇴근할 수 있고, 아침에 눈뜨기 어려운 지경의 체력이 남았을 때 방학이 온다. 학벌에 비해 월급은 적지만 건강관리를 잘하면 평생 벌 수 있다고 계산해보면, 30대에 그만 두기 아깝다. 8~13살 아이들 수업, 학부모 상담, 선후배 교사 및 부장, 교감, 교장과의 인간관계와 업무 지시, 그리고 동시에 벌어지는 감정적, 이성적인 종합 사안을 처리하고 컴퓨터에 입력하고 다음 날 수업할 재료를 준비하다 보면, 내 안의 가치관들이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순간의 답답함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착각해도 괜찮다. 그런데, 지난 두 달 동안 만난 2,30대 선생님들의 대화 소재는 '사표', '휴직', 그도 아니면 '병가'였다. # 3 성차별이 만연한 이 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받는 교육 공무원인 초등학교 여교사는, 눈치 없이 퇴근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저녁이 되면 집으로 다시 출근해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한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성이 교사생활 하는 목표가 자아실현이 아니라, 생계유지가 맞는데도, 아이에게 신경 써 주지 못할 때 "내가 얼마나 벌려고 내 자식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하나" 싶은 현실. 가사노동을 부부가 철저히 분담하거나 남성이 더 하는 경우는 '없다'. 평등하다고 보이는 당신 친구의 사례 말고 객관적인 통계를 보라. 맞벌이 한국 여성은 남편보다 무급가사노동을 4배 이상 하고 있다.(3시간 13분 vs 41분) 불행하게도, 여교사들이 공적인 자신의 직장 생활에 충실할 수 없는 상태로 매일을 견디는 장면을 보았다. 집에 가는 길에 유치원 오후반에서 아이를 픽업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치우고, 밤 11시에 컴퓨터를 켜서 학교에서 가져온 업무를 한다. 다음 날 아침에 아이를 깨워서 먹이고 입혀서 같이 집을 나서는데, '집안일과 육아를 매일 해도 보람찬 것'은 '모성 본능이라는 게 엄마가 되면 자동으로 생기기' 때문인가? 결혼을 해도 아이는 낳지 말라는 40대 여교사들의 진심어린 충고를 들었다. 아니, 결혼 같은 거 하지 말고 편하게 살라는 기혼과 미혼의 50대 여교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은 30살 안팎의 여교사들이 직장을 그만 두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을 본다. 자기가 생각했던 직업 생활은 이런 게 아니다. 그들은 고통을 더 겪고 싶지 않다. 지금이 행복하지 않다. # 4 오늘 아침, 결혼했고, 3살 아이가 있고 뱃속에 둘째를 가진 같은 학교 교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제 몸이 너무 안 좋아서요. 일주일 병가를 썼어요. 전에 말씀하신 학급 운영 공부를 같이 하고 싶은데, 그 모임에 '이름'만 올려놓아도 돼요? 저는 학교를 퇴근하고 나서 저녁에 사람들을 만날 상황이 안돼요. 주변에 애를 봐줄 데가 없거든요. 혼자 '이걸' 감당해야 돼요." 방효신 : 초등학교 교사, 전교조 조합원, 페미니스트. 세상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이 글은 2017년 5월 1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1253 | 추천: 2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한 할아버님이 카페로 들어섰다. 눌러 쓴 옛스러운 모자 사이로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님은 등장부터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낯선 듯 주변을 한참을 둘러보시다가 머뭇머뭇 카운터로 다가가 짧은 한마디를 툭 꺼내놓으셨다. “커피.. 있소?” 바로 옆에 커피 종류가 수두룩하게 적혀 있는 메뉴판이 무색해지는 말이었지만 젊은 매니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커피 있습니다.” 주시오. 고맙소. 짧은 말과 함께 할아버지는 카페의 한 구석으로 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내 시선은 매니저에게로 향했다. 아직 카운터 앞에 선 그의 표정에 잠시 고민이 어렸다. 포스에 무슨 커피를 찍어야 할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주문이 아닌 주문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젊은 매니저는 할아버지에게 무슨 커피를 원하시냐고 다시 묻지 않았다. 그저 난처하게 한 번 웃고는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따뜻하게, 설탕 넣어드릴까요?”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대답하셨다. 매니저는 커피를 들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커피 값을 받았다. 이천오백원입니다.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하나씩 세는 동안, 그는 옆에 서서 기다렸다. 매니저는 돈을 받아들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할아버지가 카페에 들어서서 낯설게 두리번거리는 것을 처음부터 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나는, 괜스레 고마웠다. 언젠가의 기억이 떠오른 때문이다. 사진 출처 - 필자 나의 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신 편이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시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어느 날 함께 궁궐 구경을 하자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초여름 뜨거운 햇볕에 궁궐을 다 돌아보고, 잠시 쉴 곳을 찾아 한적한 카페로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카페로 들어오는데, 카운터 앞에 서신 아버지가 보였고 그 너머로 카페 아르바이트생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러니까 커피 뭘로 드리냐구요. 똑바로 말씀을 하셔야죠.” 의아한 마음으로 아버지 옆에 다가서자, 짧은 순간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머쓱한 표정과 주문대 앞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신경질적으로 흔드는 아르바이트생. 상황이 이해가 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카라멜 마끼아또. 카페라떼. 스트로베리스무디. 넘쳐나는 영어 이름 속에서 딸에게 음료 한잔이라도 사주고 싶었던 나이든 아버지는 그저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낯선 것을 어려워하는 것이 타박할 일이란 말인가. 온갖 억울함이 스쳐지나갔지만, 그냥 아버지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우리 나가요. 여기는 마실 걸 안파네요. 돌아가는 길, 아버지는 알바생이 내밀었다는 그 메뉴판에는 종류가 너무 많았다고만 하셨다. 매니저가 묵묵히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건넨 커피가, 그 모습이 나에게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쌀쌀한 가을 날씨에도 카페의 공기가 어딘가 모르게 따뜻해졌다. 아버지와 함께 쫓기듯 나왔던 기억 속의 카페와, 낯선 할아버지가 커피를 홀짝이는 카페 모두 ‘카페’였지만, 달랐다. 이곳에는 소통이 있었다. 매니저가 할아버지에게 전해준 것은 따뜻한 커피이면서, 한잔의 소통이었다. 아버지에게 딱딱한 메뉴판을 내밀었던 알바생에게도 소통하려는 의지만 있었다면, 하나의 주문거리가 아니라, 마른 목을 축일 마실 것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쉬다 나가시는 낯선 할아버지를 보며, 지난 기억이 떠올라 그저 고마웠고, 마음이 따듯해졌다. 의지만 있다면 소통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친절은 복잡한 것이 아니고, 배려 역시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 카페에는 ‘커피’가, 커피가 있었다.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7년 3월 29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31 | 추천: 2
박서현/ 청년 칼럼니스트 학창시절 조례 때 태극기 앞에서 한 맹세를 기억할 것이다.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고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라고 외쳤다. 오랜 시간 태극기 앞에서 한 맹세와 같이 애국은 모두에게 있어 중요한 가치이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안전과 자유를 보장한다. 또 우리는 조국, 고향이라는 단어 앞에서 따뜻한 정서와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최근 태극기를 들고 국가수호라는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애국이 무엇인지, 그 이전에 애국을 위해 지켜야 할 국가란 무엇인지는 깊게 고민해 봐야할 문제이다. 현대 사회정치이론의 근간이 되는 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 공동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맺는 계약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 역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한다. 즉 국가는 특정지도층이나 기존의 사회체계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국가의 본질은 국민이라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블로그 그러나 어떤 이들은 단순히 국가 체제 자체를 국가의 본질로 착각하곤 한다. 그리고 체제유지와 지도층의 편익을 위해 국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진짜 애국이라 믿는다. 안중근은 그의 자서전에서 ‘만일 백성이 없다면 나라가 어디 있겠소? 더구나 국가란 몇몇 고관들의 것이 아니라 당당한 2000만 민족의 것입니다’라고 했다. 애국이라는 말을 외칠 때, 우리가 국민들을 지키려고 하는 것인지, 혹은 국가라는 허상을 지키려고 하는 것인지 주의해야만 한다. 여러 논란 끝에 2013년 국기에 대한 맹세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로 바뀌었다. 태극기 앞에서 우리가 충성을 다해야 하는 대상은 조국이나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할 국가도 아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애국임을 기억하자. 박서현씨는 노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7년 3월 2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15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