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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화 사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4-13 17:25
조회
612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20대 대통령 선거가 민주당에게는 ‘졌잘싸’였는지 모르겠지만, 진보정당들은 사실상 괴멸된 선거다. 심상정(정의당), 김재연(진보당), 오준호(기본소득당), 이백윤(노동당) 후보의 지지율을 모두 합치면 2.55%로, 2007년 17대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혼자 얻었던 3.01%보다도 낮다. 표로 계산하면 86만3356표, 100만이 채 안된다.


졌잘싸가 아니라 괴멸이다


 득표율만 최악이 아니다. 진보적 의제도 사라졌다. 국립대 통폐합 같은 교육개혁 이슈는 화제조차 되지 않았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기본소득을 꺼냈다가 수습하기 바빴다. 기본소득은 로봇의 인간 대체와 정보화의 급속한 진행으로 (고속도로 톨게이트 노동자들처럼) 대량 실업이 발생하는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수요진작(임금이 없으면 소비도 없다!) 차원에서 거론되는 우파적 정책이지만, ‘이념의 갈라파고스’ 대한민국에선 나라를 거덜낼 포퓰리즘으로 매도당한다. 기본소득 도입을 앞장서 주창하는 마크 저커버그나 일론 머스크 같은 미국의 기업인들이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철없는 좌파라고 손가락질 당했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나라마다 상대적인 개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적인 어젠다에 메아리가 생기지 않는다. 콘크리트 벽이 아니라 콘서트홀 수준의 방음벽에 대고 외치는 느낌이다. 진보란 역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므로, 비록 지금은 소수일지라도 결국 우리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다수를 이룰 것이라는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제 그 신념마저 흔들리는 듯하다. 촛불이 광화문을 뒤덮었던 5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퇴행이다. 무엇이 진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시 진보가 화석화되어 보수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많은 사람이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지금, 더욱 집요하게 던져야할 질문이다. 정치적 허무주의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자 역사 앞에 무책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데칼코마니와 허리케인 효과


 한국의 진보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쪼그라든 것은 한국사회 전반의 우경화 결과다. 그 원인은 주체의 역량 부족과 객관적 조건의 변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주체의 역량 부족에 대해 말하자면, 어설픈 개혁으로 실패를 초래한 집권세력의 책임이 가장 크다. 특히 검찰개혁과 부동산에서 참여정부의 데칼코마니 같은 문재인 정부의 두번째 실패는 앞으로 이 분야의 개혁 시도가 불가능할 것 같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박근혜 탄핵이 보수세력에 남겼던 ‘허리케인 효과’처럼 문재인 정부도 진보의 10년치 잠재력을 한꺼번에 휩쓸고간 느낌이다. (집권 초반에는 남북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으나 트럼프의 변덕으로 실패했고, 후반에는 코로나 대응에 여념이 없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에 대한 기민하고도 원칙적인 대처나 주52시간제처럼 박수받지 못하고 우리 삶을 크게 바꾼 업적도 많지만 주제와 관련 없으니 생략한다.)


 정체성 정치에 매몰돼 대중정당으로서의 전망을 상실한 정의당, 북한 문제에 대한 도그마적 태도로 소수 지지자들만의 정당으로 전락한 진보당 등도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진보 내부의 성찰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중들에게는 한없이 무력하고 주눅들어 있으나 스스로는 근거없는 내적 포만감에 취하여,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웅장한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대남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


 실패의 두번째 측면은 객관적 조건의 변화다. ‘가치 전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다. 이대남이 주도하는 온라인 여론은 강자를 숭상하고 약자를 비난하며, 약자를 옹호하는 연민까지 위선이라고 공격한다. 이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던 미국 러스트 벨트의 백인 노동자들처럼 성난 얼굴이 되어 여성과 장애인, 중국과 비정규직을 비난한다. 이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분석하는 일은 진보의 성찰에 필수적인 작업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세대 개념이 계급의 차이를 지우는 부정적 효과가 있다고 말하고, 나도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압축성장에 따른 급격한 사회 변화가 특징인 한국사회에서 세대별 역사적 경험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특히 온라인에서 전투적인 보수주의 여론을 대변하는 20대 남성들에 대해서는 계급적 측면뿐 아니라 세대적 접근을 병행해야 정확한 실체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대적 접근 가운데 가장 손쉬운 해석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기반한 갈등 이론일 것이다. 20대 남성들이 아버지 세대인 86세대의 이념과 정서에 반감을 갖는 건 본능적으로 자연스럽다는 해석이다. 86세대가 자신들의 아버지 세대의 6·25 타령을 지겨워했던 것만큼이나 지금의 20대 남성들은 86세대의 민주화 타령을 지겨워한다. 어느 이대남이 말하기를, 민주화 세대는 눈 앞에 존재하는 꼰대고, 산업화 세대는 교과서에 나오는 할아버지 같다고 했는데, 눈 앞에서 잔소리하는 꼰대가 더 싫은 건 인지상정이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졌는데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의 기준에 맞춰 잔소리를 하는 것은 어느 기성세대나 마찬가지고, 젊은세대의 반발 또한 늘 있어왔던 일이다. 이대남이 홍준표를 좋아하는 현상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기에 약자를 위하는 척하는 이율배반보다는 자기 욕망에 당당하고 거침없는 상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


계급의식에 투철한 중산층 이대남들


 오이디푸스 이론은 다분히 정서적인 접근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경제 구조의 변화와 계급 이론에 기반한다면 좀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86세대가 대학생이던 8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하위 파트너로서 당시 유행했던 신식민지 종속이론 적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서 아류제국주의 이상의 독자적 위상을 갖고 있다. 그만큼 잉여자본이 커졌고 중산층도 두터워졌다. 피착취계급의 해방을 위해 공장과 농촌으로 뛰어들었던 86세대의 브나로드 운동을 이대남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학 진학률과 직업 구성으로도 86세대와 2030세대는 정확히 반대다. 86세대의 대학 진학률이 30%에 불과했다면 2030세대는 70%에 이른다. 86세대는 블루칼라가 많고 2030세대는 화이트칼라가 많다. 86세대 엘리트들이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 계급을 배반했다면, 2030세대의 다수는 화이트칼라로서 계급의식에 충실하다. 2030세대의 여론 주도층이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를 당연시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것은 계급의식의 반영이다. 지금 인터넷 여론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블루칼라의 계급배반(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정당을 지지하는)이 주요 논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부차적인 모순에 불과한 수준이다.


젠더와 일자리, 기표와 기의


 평등하게 가난했던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상대적 결핍이 풍요와 성장의 시대에는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대남의 정치적 공격성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내재해 있다. 이들이 주창하는 반페미니즘의 근저에도 먹고사니즘과 각자도생의 초조감이 배어 있다. 이전 세대에 견줘 일자리 시장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여성을 견제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대남의 성평등 의식이 30대 여성보다도 더 높은 것으로 나온다는 조사는 젠더 갈등이 기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들이 특별히 성차별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측면이 훨씬 크다. 이들이 보기엔 여성들이 어릴 때부터 자신들보다 공부를 잘했고 직업도 좋으니 사회적으로 우대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은 거의 아무런 보상 없이 군대에 다녀와야 한다. 그런데도 86세대와 민주당이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여성우대 정책을 펴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이대남의 인식에는 사실과 오해가 뒤섞여 있다. 86세대에 대한 오해는 주로 시차에서 발생한다. 86세대의 경우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압도적으로 적었고, 그 결과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 공직자 등의 경우 여전히 ‘유리천장’이 존재한다. 메이저로서 남성 사회의 편견과 유교적 인습도 작용했다. 이를 교정하기 위한 방책으로 여성할당제 등의 보완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인데, 이대남이 보기엔 말도 안되는 불공정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이대남이 오십대가 된다면 여성할당제 등의 우대정책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남성 우대정책을 도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2030 남녀 사이의 갈등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생겨난 감정을 다른 곳으로 전이하는 데서 비롯한다. 남성들의 경우 군복무 등에서 생기는 피해의식에 기반해 여성에 대한 부정적 세계관을 구성하고, 여성들은 페미사이드를 비롯한 데이트폭력의 문제나 귀갓길 안전, 디지털 성범죄 등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위험조차 남성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2030 여성과 남성 사이의 의사소통 실패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군복무에 대해서는 모병제 전환이나 월급 현실화 등의 사회적 보상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에 대해서는 그동안 사회적 처벌이 미약했고, 심지어 관대했다는 점에 대해 20대 남성들의 사실 인정이 필요하다.


음탕하고 추잡한 목차요 야릇한 서문


 이렇게 내재적 접근을 해보지만, 이대남의 모순 투성이 신념들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벌들의 혈연에 따른 세습은 쿨하게 인정하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정확히 말하면 중규직화)는 공정에 위배된다며 반대하는 건 ‘을들의 전쟁’을 자초하는 전형적인 노예근성이다. 우리보다 잘 사는 미국을 좋아하고 우리보다 못 사는 중국과 북한을 혐오하는 천박한 물신주의 또한 용인하기 어렵다.(홍콩 민주화 운동 탄압 같은 독재적 행태에 대한 비판은 별개다.) 법앞의 평등이 아니라 성적 앞의 평등이 모토가 되어버린 능력(학력)주의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 실질적 평등 대신 절차적 공정을 절대화하고, 정의와 상식으로 포장하는 언어도단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이나 이준석 같은 정치인들이 앞장서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현상은 더욱 위험천만한 일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서러운데 삼팔선 이남을 동서로 갈라 오랫동안 권력을 누리던 자들이 이제 남녀를 이간질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싸우게 만들고 있다. 이들은 세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과 <오셀로>의 악당 에드먼드와 이아고처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거짓 선동과 분열을 획책했다. 이들이 갈등을 증폭시켜 정권을 잡은 방식은, 세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면, “음탕하고 추잡한 목차요 야릇한 서문”이다. 공동체의 붕괴를 앞당기는 역사적 범죄이자 매국노적 행태로서 <리어왕>과 <오셀로>에서처럼 인과응보가 뒤따를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잃어버린 시대정신을 찾아서


 20대 대학생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안부인사에 세대를 초월한 공감이 넘쳐 흘렀던 게 불과 9년 전이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이 나온 것도 같은 해인 2013년이다. 약자와 연대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과 혐오하고 차별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동시에 존재한다. 비는 골고루 내리지만 골짜기마다 다른 모양으로 흐르고, 개천이 되고 하천이 되어 커다란 강으로 합쳐진다. 시대의 저류에 흐르는 수많은 의식 가운데 호출하고 호응하는 사람이 많은 쪽이 시대정신이 된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사회적 논의의 중심에 섰던 불평등 논의가 지금은 철지난 깃발처럼 지친 표정으로 구석에서 외롭게 나부끼고 있는 것은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뀐 탓도 있지만 우리가 게을렀던 탓이기도 하다.


 혐오는 쉽고 연대는 어렵다. 진보와 좌파는 주류가 되기 위해 보수와 우파보다 열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 억울하지만 그게 역사의 불문율이다. 정치적 허무주의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가 2030세대와 만나자. 잃어버린 시대정신을 찾자. 진보가 살고 우리 공동체가 사는 길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