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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의 뿌리 (이재성)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9 14:40
조회
299
해외의 한 유명 오케스트라가 내한 공연을 했을 때다. 세종문화회관 앞 넓은 마당에 검은 세단 자동차가 줄지어 늘어섰다. 운전기사인지, 보디가드인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동차 주위에서 웅성거렸다.

“여기도 차를 세울 수 있나?”
처음 보는 광경에 갸웃거리던 내게 옆에 있던 음악평론가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위로 올라가려고 기를 쓰죠.”

누구나 거기다 차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방귀깨나 뀌는 분들에게만 특별히 허용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극장 로비는 서로 인사를 나누는 저명인사들로 붐볐다. 유명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고관대작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자 극장 쪽은 보행자들의 공간을 주차장으로 제공했다. 주차는 주차장에 해야 한다, 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은 보기 좋게 깨졌다.

난생 처음 국회의사당에 처음 갔을 때다. 의원회관에 들어가려고 앞문으로 갔다가 무안을 당했다. ‘민간인’은 뒷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였다. 국회 건물은 무지하게 커서 앞문에서 뒷문으로 돌아가는데 한참 걸린다. 한 여름 땡볕에 노트북을 매고 걸으며 생각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국회야?”

세월이 10년 가량 흘러 지금은 의원회관의 경우 민간인도 앞문으로 드나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국회 본관은 여전히 뒷문 신세를 져야 한다. 본관은 의원회관보다도 훨씬 더 커서 돌아가려면 5분은 너끈히 걸린다.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곳 중의 백미는 국제공항이다. 공항에는 이른바 ‘귀빈 코스’가 따로 있다. 전‧현직 대통령이나 3부요인, 외국공관장 등을 위한 것이다. 복잡한 출입국 수속을 공항공단이 대신 해주니까 본인은 귀빈실에서 앉아 있다가 비행기에 타면 된다. 전문용어로 ‘의전’이라고 한다. 문제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지만, 방귀깨나 뀌는 분들이다. 이들도 특별한 대우를 요구한다. 의전을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며 심심찮게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공항은 하나의 작은 정부라고 할 정도로 거의 모든 정부부처가 공항에 파견 사무실을 갖고 있다. 여기 근무하는 직원들은 출타하시는 윗분의 의전을 맡는다. 오너가 있는 언론사들의 경우 공항 출입 기자가 본인의 출입증을 이용해 ‘가방 모찌’를 하며 회장님을 모신다. 김포공항이 국제공항이던 시절, 어떤 언론사의 경우, 기사는 안 쓰고 가방 심부름만 하는 기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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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에 완전 개방된 김포공항 귀빈실 입구의 모습
사진 출처 - 세계일보




한국의 특권층은 줄 서는 것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대중들 틈에 섞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일은 아랫것들을 시킨다.

그런데 왜 김승연 한화 회장은 맞고 온 아들의 분풀이를 직접 하려고 했을까? 왜 전문가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나섰을까? 짜릿한 ‘손맛’을 느끼고 싶었을까? 조폭 영화 흉내를 내고 싶었을까?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진룸살롱 사건의 당사자-말만 들어도 기가 죽을 만한 ‘센 놈’-들을 데리고 가서 북창동 어깨들을 벌벌 떨게 했을 것이고, 경찰 총수 출신의 그룹 고문이 경찰에 전화도 한 통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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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얻은 특권, 금권은 사상 최고의 자유를 누리고 있고 경제인들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정치권력의 특권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청와대의 설명은 부분적으로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돈으로 얻은 특권, 즉 금권은 사상 최고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면서 내야할 세금을 안 낸 이건희씨는 여전히 존경받는 경제인 1위에 랭크된다. 존경의 기준이 ‘돈’으로 바뀐 것인가. 김승연 회장이 무모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쉽게 용서해주는 착한 국민들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권의 뿌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쉽게 그러려니 하고, 눈감아주고, 잊어버리는….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