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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이 말하는 리더십의 교훈 (김대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9 14:04
조회
613
영화 ‘300’이 말하는 리더십의 교훈-지도자 개인의 능력보다 구성원과의 소통이 중요

‘300’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본의 아니게 불법적인 방법으로 보았다. 지적 재산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죄의식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지만 교회 청년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욕 먹어가면서 본 영화지만 억울하게 재미있는 영화도 좋은 영화도 아니었다. 그저 선정적이고 남성적인 영화일 뿐이었다.

전투 장면은 지나치게 잔인했고 벌거벗은 병사들의 근육은 현실 같지 않았다. 이야기의 내용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레오니다스가 의회 원로들의 반대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최정예군 300명을 이끌고 나가 페르시아 군 100만에 맞서 싸우다 전멸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두 인물의 대조(對照)로 전개된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인데, 확연하게 대별되는 두 사람의 리더십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레오니다스는 헌신적이고 수평적인 리더십을 구사한 반면 크세르크세스는 공포와 권위로 조직을 장악하며 군대를 이끌었다.

극중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크세르크세스가 “나는 승리를 위해 내 부하들을 죽일 수도 있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잔혹성과 능력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를 비웃듯이 레오니다스 왕은 “나는 내 부하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 라고 말한다.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드러나는 말이다.

그리고 레오니다스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아들에게 전하는 한 마디, “그들을 존경하면 너 또한 그들로부터 존경받을 것이다.” 아무리 영화지만 참 멋진 말이었다. 결국 이 희생으로 인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조직적으로 연합하여 전쟁에 나서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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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의 포스터
사진 출처 - 영화 '300'




성과지향적 리더십의 위험스러움

‘리더십(leadership)’,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쓰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인데, 요즘 리더십을 운운하는 사람들의 상당 부분은 역시 ‘경영과 관련한 리더십’을 이야기한다.

리더십이 상품화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2천 년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예수로부터 CEO가 갖추어야 할 리더십의 원형을 찾는다는 ‘최고경영자 예수’라는 책까지 나왔다. 예수가 세상과는 다른 질서를 추구했다고 믿는 나로서는 제목부터가 코미디였다.

백과사전에는 리더십이 ‘집단의 목표나 내부 구조의 유지를 위하여 성원(成員)이 자발적으로 집단 활동에 참여하여 이를 달성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즉, 리더십을 집단의 목표 달성을 위한 것, 혹은 내부 구조의 유지를 위한 것, 즉 성과지향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으로는 어떤 리더십이 바람직한 리더십인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목표만 잘 달성하면 폭군이어도 좋고 아무리 민주적인 절차를 중시하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목표를 잘 수행하지 못하면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우리가 ‘리더십’이라는 말을 성과지향적으로만 이해해 왔다. 성과지향적인 리더십은 지도자와 공동체의 구성원을 하나의 자원으로만 치부하게 되면서 모두를 불편하게 만든다. 지도자는 끊임없이 구성원에게 일정한 성과를 요구할 것이고 본인 또한 어떤 성과를 달성하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종류의 리더십은 필연적으로 타인 혹은 다른 집단과의 경쟁이라는 유령 같은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끊임없이 긴장감을 조성한다. 구성원들에게는 그들의 성과에 따라 보상이 주어질 것을 약속하거나 암시한다. 이런 지도자들은 질보다는 양, 내용보다는 형식, 과정보다는 결과, 아래보다는 위를 중시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당연히 그 행동양태는 권위주의적이기 쉬워서 일방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독점하며, 구성원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따라서 의사소통은 하향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성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한 집단에게 성과는 중요하고 계획된 목표는 달성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과정이다. 성과 자체가 최고의 목표가 되어 과정과 관계 등 여타의 요소들이 성과 달성에만 이용당하는 방식은 경계되어야 한다. 이 방식으로 얻어진 성과는 오로지 지도자 개인의 것일 뿐, 구성원은 철저하게 대상화되고 만다.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소통을 통한 관계를 증진하고 구성원 모두의 자발성을 유도하면서 과제를 처리했을 때의 성과야말로 구성원과 동등하게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우리에게 이러한 경험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나 전두환 때가 좋았다고들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이런 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아무리 ‘참여정부’와 ‘절차적 민주주의’를 말한다 해도 구호뿐이었음이 드러났다. 사실 이전 대통령들도 모두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하면서 리더십의 원천을 자기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국가 구성원인 국민에게 두려 했던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떤 차별성이 있다는 말인가. 그저 모두들 권력을 잡은 뒤에는 권위주의적이고 성과지향적인 편리한 방법을 택했을 뿐이다.

 
리더십의 원천은 구성원인 국민

현실이 영화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서 대안을 찾는 구조에 문제가 있기도 하다. 그래서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게으른 국회의원들을 보며 분통이 터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임이 분명하다. 과연 언제쯤이면 그릇된 권위의식에서 비롯된 자의적이고 즉흥적이고 임의적인 정책집행으로 인해 국민들이 상처받는 일이 없을까.

우리에게 국민을 위해서 자신의 욕심과 의지를 포기하고 희생할 줄 아는 포용력과 안목이 있는 참된 리더십은 요원한 일이기만 한 것인가.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서울교구 사회사목담당 신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