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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자유' 대한 자유연상(오인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5-04 09:45
조회
319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1. 윤석열 대통령만큼 ‘자유’라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사용한 대통령은 이제껏 없었지, 싶다. 공식적인 연설이나 축사에서 툭하면 ‘자유’라는 말을 꺼내 든다. 이번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는 ‘자유’가 총 46회 등장했단다. 역대 최대 횟수로. <국군의 날> 행사에서 ‘부대 열중쉬어’라는 간단한 말도 못 했다는 양반이 자유라는 말은 조자룡 헌 칼 쓰듯이 쓴다. 사회생활이라곤 검사 생활을 한 게 거의 전부인 그가 자꾸만 ‘자유, 자유’하는 이유가 뭘까?


좋아하는 사람 만나는 일에 맘 쓰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썩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알려고 힘쓰고 싶지 않으니, 그 이유를 찾아볼 연구 의욕 따위는 없다. (물론 능력도 없다) 그래도 자문(自問)했으니, 주먹구구식이라도 자답(自答)을 해 보자. 우선 개인적-사적인 차원으로의 접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정의’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쓴 건 독재자 전두환이었다. 전두환과 그의 수하들이 ‘정의’라는 말을 남발한 것은, 그들에게 실제의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 불의한 독재 세력이기에 정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자기-부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극악무도함과 불의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말로나마 주야장천 ‘정의, 정의’할 밖에. (당명조차 ‘민주정의당’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 사랑 역시도 비슷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대개 자유를 꿈꾼다. 그렇다면 자유의 결여 혹은 부재가 자유를 욕망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굳이 헤겔을 불러내지 않더라도, 인간은 충족된 것이 아니라 결핍된 것/부재한 것을 욕망한다. 배고플 때 음식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먹고 싶다는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배불리 맛있게 식사한 직후라면, 먹고 싶다는 욕망은 사라진다. 목마른 데 물이 없으면 물을 찾지만, 갈증이 해소되면 물을 욕망하진 않는다. 단정할 순 없어도, 엄격한 가부장적 질서에 오랫동안 얽매인 사람이나 하늘 같은 스승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사람, 요컨대 자기보다 강한-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사람에게 억눌려 온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더 자주 ‘자유’를 찾을 것이다. 불의하기에 -구두선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정의를 찾듯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자유’라는 말을 줄줄, 아니 술술 입버릇처럼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정윤성의 기린대로418 / 출처 - 전북일보


     2.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를 향한 새로운 여정>이라는 제목의 하버드 대학교 연설(4/29) 막바지에서 화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 규정했다. 그는 자유인인가? 물론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다. 당연한 소리지만 자유인은 노예가 아니다. 자유인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니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노예는 그렇지 않다. 그런 자유가 없는 게 노예다. (자유를 상실한) 노예의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주인이다. 노예는 자기 행동에 책임질 수도 없고, 필요도 없다.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인가, 자유인인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말이 거짓말이나 허위 주장이 되지 않으려면 사실의 무게를 지녀야 한다. 대통령이 안 돼도 위안부 문제는 해결하겠다는 대선 전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도 책임감은커녕 미안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인정하긴 어렵다.


한편, 그가 애용하는 ‘자유’는 냉전 시절의 이데올로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냉전 시기의 자유주의는 ‘친미 반공주의’를 뜻하는 편협한 정치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선/악, 흑/백의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젖어서 세계를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 진영을 양분하는 시각 자체가 냉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속성이자 산물이다. 더욱이 세계사의 변화를 자기가 주체적으로 보고 판단하지 않고, 남(미국, 일본)의 눈으로만 보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실리외교를 행하기는커녕, 마치 미국과 일본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시쳇말로, “우리 국민은 그가 사실상 노예근성을 지닌 것으로 느끼지게” 될 것 같다.


 

     3. 자유주의를 ‘친미 반공주의’쯤으로 여기면 큰 오산이다. 그것은 냉전 논리의 수사일 뿐이다. 적극적으로 평가하자면, 자유주의는 진보와 보수를 포용하는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폭이 넓은 이념이다. 자유주의는 폭력을 규제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자 이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국가의 첫 번째 의무를 국민의 생존권(the right of life) 보호에 두고 있다. 자유주의 국가는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삶 그 자체의 보존, 즉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책무를 진다. 이러한 국가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떠받드는 천조국의 「독립선언문」에 있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라는 구절의 오랜 원천이었다. 그가 자유인이라고 느낀다면,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면,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불안한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생명 ․ 인권 ․ 평화의 보호에 주력해야 한다.


끝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최근 연설에서 매우 우려스럽고 분노가 치미는 지점이 있다. 독재와 전체주의 세력이 “민주 세력, 인권운동가 행세”를 해서 자유주의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구라를 치는’ 대목이 그것이다. 증거나 사실로 입증되지도 않았건만, 민주 세력과 인권운동가를 위장한 전체주의 세력이라고 날조 ․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위협하는 거짓 선동이 될 뿐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절제(moderation)를, 자유주의 사회를 위한 최종적 원리로 제시했다. 그는 [자유주의와 그 불만]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때때로 성취는 한계를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차원에서 절제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은, 자유주의 자체의 재부흥, 나아가 사실상 생존의 열쇠가 될 것이다.” 자유의 향유 여부는 완벽한 성과를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는 자기 절제에 달려있다. 시대착오적 편향을 결단인 양 우기거나 제멋대로 인권운동을 매도하는 짓은 자유가 아니라 맹목일 뿐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