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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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학교 역사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이찬수(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장발장은행장)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6.1지방선거가 끝났다. 민주당이 참패했고, 국민의힘이 압승했다. 4년 전 치러진 지방선거와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두 당의 입장이 뒤바뀐 채 당시 결과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결과였다.  전국 광역지자체 17곳 중 12곳에서, 전국 기초자치단체 226곳 중 145곳에서 국민의힘 소속 후보가 지자체장으로 당선됐다. 4년 전 충남에서는 도지사(양승조)와 도의회 의석 대부분(비례대표 포함 총 42석 중 33석, 78.6%)을 민주당이 차지했지만, 올해에는 도지사(김태흠)와 도의회 의석 대부분(비례대표 포함 총 48석 중 36석, 75%)을 국민의힘이 차지했다.  당진지역 또한 마찬가지다. 4년 전 당진시장과 충남도의원 모두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던 것에서 이번에는 국민의힘 후보들이 당선됐다. 기초의회 의석을 절반 정도 차지한 것에 만족해야 하는 것도 두 당의 입장만 바뀌었을 뿐 같은 상황이다.  4년 전 지방선거 당시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주년 무렵 한창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높고 민주당 바람이 불던 때였다. 올해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직후 국민의힘 바람이 지방선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민주당은 4년 전 국민의힘 신세가 됐고, 절치부심 했던 국민의힘은 민주당을 상대로 역전에 성공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쏟아지고 있지만, 지역민의 입장에서는 중앙정치의 영향이 지역에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소속 정당을 떠나 아무리 괜찮은 후보가 출마해 열심히 선거운동에 뛰어들어도 중앙정치의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다. 바람이 당락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지방자치는 맥을 못 추고 있다.  후보들은 지역주민들에게 선택받기를 기대하면서도 실상은 정당의 공천에 더 많이 공들인다. 선거에 출마하려는 후보들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 또는 정치 철학과 상관없이 출마 당시에 바람이 부는, 인기 있는 정당을 기웃거린다.  지난 4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기에 힘입어 정치에 입문하려는 정치신인들이 대거 민주당에 입당해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자유한국당은 인물난 속에서 후보 영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올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난해 중순까지만 해도 이번 지방선거에 나설 당진시장 후보로 민주당에서는 예닐곱 명이 출마 의사를 밝혔다. 국민의힘의 후보는 세 명이 전부였다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감소하자 국민의힘 후보가 예닐곱명으로 늘어 공천 과정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중에 한 명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정치활동을 전혀 하지 않다가, 상황을 지켜보다 슬그머니 정치 일선에 다시 등장해 결국 당진시장으로 당선됐다. 심지어 민주당 소속으로 당진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낮은 지지율에 스스로 중도포기한 어느 후보는 판세가 뒤집어지자 국민의힘에 입당해 공개적으로 그 당의 당진시장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바람이 좌우하는 선거에서는 정책도 공약도 무의미하다. 순풍을 타고 당선되느냐, 역풍을 타고 낙선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지방선거조차 지역은 없고 당만 남는다. 지방자치가 얼마나 더 오래 묵어야 ‘정당 바람(風)’이 아닌 ‘시민들의 바람(望)’ 대로 선거를 치를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자치와 분권이 제대로 자리 잡을까. 지난해는 지방의회가 부활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여전히 지역은 중앙의 바람에 따라 휘둘리고 있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부국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2-06-08 | hrights | 조회: 1154 | 추천: 4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간은 내적으로 경험한 것을 외적으로 표현한다. 그 외적 표현이 자신이나 타자의 내적 체험을 자극하고 불러일으키는 등 다시 내면에 영향을 준다. 누군가 좋아하는 감정을 “너를 좋아해~” 라는 언어로 표현하든지, 예쁜 꽃 한 다발 선물하는 행동으로 표현하든지, 어떤 식으로든 외적으로 표현한다. 가령 상대방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의 내면에 공감하면 둘은 친구나 연인이 된다. 그들만의 삶의 질서를 만들어간다.  종교의 원리도 비슷하다. 누군가 현실의 근원 혹은 너머의 세계에 대한 특별한 체험을 외적으로 표현하고, 그 표현에 공감하는 이들이 모이면 집단이 형성된다. 그 집단은 그들만의 약속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해간다.  종교학자 부르스 링컨의 정리에 따르면, 그 외적 표현은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나뉜다. ① 내적 신앙과 관련한 담론, ② 의례와 관련한 실천 행위, ③ 담론과 행위에 공감하는 이들의 공동체, ④ 공동체를 제어하는 제도. 이들 네 영역이 중층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변화 또는 강화시켜나간다. 이것이 종교현상이다.  어떤 신념이 있다거나, 특정 교리체계에 근거한 인간관계에 매여 있다거나,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의식은 종교적 자기 정체성의 일환이다.  이때 종교 현상의 핵심은 내적 체험의 세계이다. 그 내적 체험은 원천적으로는 언어를 넘어서지만, 굳이 언어로 번역하면 사랑, 헌신, 경외, 기쁨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가치와 태도는 자신을 비워 타자를, 특히 약자를 품는 윤리적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종교적 선각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사랑, 경외, 헌신, 이런 가치 지향의 실천이 종교의 핵심이다.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사실에 동의하며 사람들이 모이면서 종교 공동체는 시작된다. 모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직과 제도도 만들어진다. 본래 이 조직과 제도는 사랑이나 자비와 같은 가치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며, 어디까지나 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하지만 점차 조직과 제도 자체가 원래의 체험 혹은 진리와 동일시되어간다. 핵심은 사랑과 자비, 기쁨 등으로 번역 가능한 내적 체험의 세계이지만, 그 내적 체험이 언어화하고, 그 언어 자체가 절대시 되면서 본말이 전도되곤 한다. 종교적 정체성도 이런 외적 표현이 내면화되면서 형성된다. 가령 유대-그리스교, 이슬람에서 견지하는 유일신 사상, 이에 입각한 협의의 우상숭배 금지 조항은 본래 사람이라면 현실에 덜 휘둘리면서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가치에 충실해야 한다는 요청이지만, 그것이 점차 그런 가치에 대한 언어적 표현, 그 교리적 표현에 동의한 이들의 조직 등에 대한 충실로 둔갑한다. 문자적 교리라는 것도 언어로 표현된 신념 체계(beliefs)의 일부이지만, 그것이 하느님 같은 절대 진리 자체와 동일시되고, 그 동일시가 다시 각 지역의 문화적 삶의 방식과 만나면서 강력한 집단적 정체성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집단적 정체성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세력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직·간접적 차별을 한다.  물론 예수나 붓다 같은 종교적 천재들의 일차적 메시지에서는 이러한 집단주의가 발붙일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전승되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제도화되어가는 과정에 제도의 유지와 강화 자체가 선각자들의 메시지 자체인 것처럼 간주되면서, 그 안에 타자를 받아들일 공간은 축소되고 스스로 변화할 가능성은 점차 사라진다.  그 사례 중 하나로 ‘거룩함’의 개념을 볼 수 있다. 가령 기독교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 중 하나가 ‘거룩함’ 또는 ‘성스러움’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기 19:2) 라는 말이 나온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말이 당연한 말처럼 보일 수 있지만, 따져 보면 생각해 볼 것이 많다.  이때 ‘거룩함’이란 거룩하지 않은 어떤 것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거룩하지 않은 것은 부정한 것, 더러운 것이 된다. 그래서 거룩함은 부정한 것과의 분리가 된다. 거룩함을 실천하려면 부정한 것을 버려야 한다. 집단적 관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룩’의 이름으로 차별하고 심지어 처단하는 일까지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본래는 안과 밖이 정결한 삶을 살라는 요청이지만, 정결하지 못하다고 간주되는 세계를 부정하고 배타하고 차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결함을 유지하는 역설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예수는 ‘거룩’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대신 ‘자비’라는 말을 썼다: “아버지가 자비로우시니 여러분도 자비로우시오.(누가복음 6:36) ‘거룩’이 부정한 것과 분리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 반해, ‘자비’는 부정한 것을 포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거룩’을 내세우던 이들은 예수가 부정한 것(가난한 이, 병든 이, 여성...)을 포용해 ‘거룩’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예수를 차별하고 급기야 사형까지 시켰다.  문제는 예수를 따른다는 이들도 예수 메시지의 근간인 사랑과 자비 등은 뒷전으로 밀어내고 현 집단을 유지하는 조직과 제도 등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조직과 제도에 충실한 행위를 거룩함의 실천으로 간주해오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태도가 자기중심적 배타성으로 나타나고, 자기 집단의 관례적 정체성을 훼손한다고 여겨지는 어떤 세력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저항한다.  물론 종교인들 중에도 이러한 근원적 사실을 성찰할 줄 아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기독교(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종교 전반에서 드러나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런 모순적인 현상에 대해 양식 있는 이들의 비판적 목소리들도 커져가고 있는 중이다.  다른 조직이나 집단은 어떤가. 가령 법조계, 즉 법원이나 검찰 분야는 어떤가. 법·률 본연의 의미에 충실한가. 정당은 정치 본연의 정신을 구현하는가. 의료계나 교육계는 얼마나 다른가. 다음 기회에 전술했던 종교의 모순적 현실을 법조계의 현실을 조망하는 거울로 삼아보고자 한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2-05-24 | hrights | 조회: 1283 | 추천: 11
오항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며느라기 시즌1’을 보고 글을 쓴 적이 있다. 몇 달 전인 줄 알았더니 1년이 넘었다. 그사이 나는 ‘며느라기’의 주적(主敵)인 시아버지가 되었다. 선 자리가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는 법이라던가? 며느라기-시즌2를 보면서 시아버지로서 심각한 판단의 변화를 거쳐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즌1에서 희망의 불온함을 느꼈다면, 시즌2에서는 그냥 불온함을 느꼈다. 장면① 딸 : 남은 밥 있어? 배가 고프네. 엄마 : 어, 김치찌개하고 있으니 먹어. (딸이 부엌으로 간 사이 아버지가 나온다. 어머니와 얘기하던 중 밥 먹고 있는 딸을 보며) 아버지 : 에휴, 애 낳고 살다 보면 다 지나갈 일을. 하여간 헛똑똑이라니까. (시즌1에서 딸은 남편과 불화 끝에 폭력까지 당하고 집에 와있다. 아버지의 푸념을 듣고 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밥으로 울음을 막고 있다. 결국 그 밥을 다 먹지 못하고 부엌을 나선다.) 장면② 딸 : 엄마는 나 임신했을 때 어땠어? 엄마 : 한없이 기뻐서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어. 딸 : 나는 나쁜 엄만가 봐. 힘들 때마다 배 속의 아기가 원망스러워.  드라마는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야 하기에 인물의 성격이 조금 과장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 시즌2는 두 가지 점에서 불온하다. 아마 이 불온함 때문에 시즌2는 시청률도 시즌1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첫째, 특정 사람만을 이상한 사람을 만든다는 거다.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대표적이다. 장면①은 그렇지 않아도 명절날 술만 마시고 거드는 거 없던 기존 시아버지의 캐릭터에다가, 이혼하려는 딸에게 모진 말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까지 덧씌웠다. ‘속상하니까 그렇지’라는 탈출구를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그게 탈출구가 되기보다는 올가미가 될 가능성이 크다.  사실 며느리가 임신한 뒤 직장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자기 아들 밥 차려주는지 걱정하는 시어머니 캐릭터도 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이 시어머니는 장면②의 따뜻한 친정어머니와 대비되면서 밉상의 성격을 완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누구를 밉상으로 만드는 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시아버지가 되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왜곡된 감정이나 남자 중심의 사유 중 어떤 부분은 그의 인격이나 도덕성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사회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둘째 불온함이 나온다. 생각 없는 관찰이 통상 그러하듯 문제나 갈등의 원인을 누군가의 품성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원래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달리 생각하는 법이다. 피라밋의 낙서에도, 조선실록 곳곳에도 ‘요즘 젊은 것들’에 대한 불안감이 적혀있다. 그뿐이랴. 《논어》에서부터 ‘나이 먹고 죽지도 않는 늙은이’에 대한 불만도 그만큼 회자되어 왔다. 늙음이 지혜와 연결되지 않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이 골이 더 깊어졌을 뿐이다. 이 때문에 아내 대신 남편이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탁월한 선택조차 드라마에서는 거칠게 묘사되고 말았다. 하지만 왜 새로운 삶의 창조가 상처를 주고 싸워야지만 이룰 수 있는 듯 형상화되어야 하는가.  장면②로 다시 가보자. 직장생활과 미래의 불확실성이 겹치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축복이 아닌 두려움이 된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저건 나쁜 사람이라서 갖는 두려움이 아니다. 요즘 같은 현실에서는 누구나 두려운 것이다.  이 장면과 관련해서 나는 새삼 내 경험이 떠올랐다. 큰아이 혼인날 내가 축사를 하면서 ‘서넛은 낳는 게 좋겠다’고 말한 대목이었다. 언뜻 형제 많은 게 참 좋다는 생각에서 대본에 없이 한 말이었다. 물론 신중한 큰아이와 맏며느리는 내 말에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반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당시 했던 말을 거의 거두어들였다. 이 사안 역시 큰아이와 며느리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판단에는 아이를 낳아야 종족이 보존되던 시절이 아니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인구는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많다. 출생률 저하는 기실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만 아니라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적게 생산하면 적게 쓰고 살면 된다. 아이를 낳을 자신들의 계획, 직장, 인생관에 따라 판단할 문제다. 사진 출처 - 며느라기 웹툰, 신지수 작가의 웹툰 '며느라기'  아직 생각 중인 이슈가 있다. 명절날 처신이다. 며느라기 시즌1, 2에서도 단골주제가 명절, 제사였다. 우선 요즘 사람들은 거처가 가까이 모여 살기보다 떨어져 살고, 그 거처도 자주 바뀐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한 직장에 오래 있어도 본사, 지사 근무에 따라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명절날 만나는 것도 맘 먹고 계획해야 한다. 삶에 지친 몸을 쉬어야 할 시간에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못 할 짓이다. 차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하면 볼 수 있을 거리가 아니면 오지 말라고 할 생각이다. 보고 싶으면 시간 되는 나와 집사람이 가서 볼 요량이다.  사돈댁은 부산인데, 아이들이 명절마다 우리집으로 오면 사돈 내외는 사위와 딸을 명절 내내 쭉 만나지 못하게 된다. 같은 부모인데 서운한 건 마찬가지일 터, 추석과 설을 나누어 아이들이 편한대로 가게 하면 어떨까 싶다. 분명한 거는 어느 부모나 자식 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그나저나 새 식구가 늘어나는 건 흥미로운 일인 듯하다. 5월 8일, 뜻하지 않았는데 큰아이가 선물과 봉투를 내밀었다. 선물은 집사람과 고모 화장품이었다.(내 것은 없었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인간관계는 조국과 민족 때문에 금 가는 게 아니다) 봉투는 며느리가 준비했단다. 적지 않은 용돈이 들어있었다. 직장생활이 고된지 더 야윈 듯한 며느리의 얼굴이 겹쳤다. 문자를 보냈다. 장면③ 시아버지 : 바쁜 중에 용돈까지 챙기니 고맙구나. 담부터는 내가 밥 사는 걸로 하자. 용돈은 우리가 늙어 버는 게 없을 때 많이 다오. ^^ 맏며느리 : 네 아버님. ^^. 제가 더 잘 모셨어야 하는데 경황이 없었습니다. 어버이날이라 식사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다음엔 꼭 함께 만나 뵈어 시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큰아이 답장은 늘 한 문장을 넘거나 이모티콘을 넣는 적이 없다. 맏며느리는 좀 지성적이라 문장이 꽤 길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혼인한 뒤 시어머니가 권하자 바로 인권연대의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내 문자의 방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당할 때 점검해야겠다. 아무튼, 우리의 일상에는 장면①, ②보다 장면③ 쪽이 훨씬 많을 거라고 믿는다.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에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22-05-11 | hrights | 조회: 1404 | 추천: 4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꼴: 사람의 모습이나 행색을 낮추거나 비웃어 이르는 말. 어떤 상황이나 형편 또는 처지를 낮추거나 비웃어 이르는 말. (기본의미) 사물의 모양. -꼬락서니: 사람의 모습이나 행색을 속되게 이르는 말. 유의어-꼴. -꼬라지: ‘꼬락서니’의 방언. '성깔'의 방언. # 못 볼 꼴  지난 대선 이후부터 그러더니, 며칠 뒤에 있을 차기 대통령 취임식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뉴스를 이미 보지 않고 있다는, 보지 않겠다는 주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들어보면, 어떤 이는 뉴스를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대선 결과에 대한 허무감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나아가 앞으로 벌어질 어떤 꼴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좋은 꼴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상관없는 듯했습니다.  조국수호 집회에 나오라고 종용했던 후배도, 86세대 정신 차리게 정권교체가 필요하다던 업계 동료도, 포털뉴스의 헤드라인조차 보지 않겠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일까요? # 꼬락서니  얼마 남지 않은 지방선거. 돌아가는 꼴을 보니 0.76% 포인트 차로 갈린 대선 결과를 놓고 각각 자기 논에 물 대듯 해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당은 여전히 민주당스러운 근자감이 남아 있는 꼬라지고, 반면 국민의힘은 마치 대세가 기운 것처럼 폭주하는 꼬락서니입니다.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습니다만,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놓고 또 어떤 주변 사람들이 더 이상 뉴스를 보지 않게 되었다고 할까요? # 꼬라지  뜬금없이 빚을 진 사람도 빚쟁이고 빚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빚쟁이란 말이, 쌀을 팔러 갈 때도 쌀 팔러 간다고 하고, 쌀을 사러 갈 때도 쌀 팔러 간다 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검찰개혁이면 검찰개혁이지 누가 어떻게 만든지도 잘 모를 ‘검수완박’이란 말이 어지럽게 난무하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언론에서, 이놈 저놈 가릴 것 없이 검수완박, 검수완박 떠들어대는 꼬라지를 볼 때마다 정말 속에서 불같은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저는 왜 쓸데없이 주변 사람들은 보지 않는다는 뉴스를 찾아보고 검수완박 어쩌고 하는 말 때문에 이렇게 또 꼬라지를 내고 있는 걸까요? 사진 출처 - pixabay # 꼴과 주제 파악  지난 설, 저는 어머니로부터 앞으로 더는 어머니 댁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딱 잘라 어떤 이유 때문이라는 것은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정확하게 “더 이상 네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 오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지척에 살면서 두어 달 만에, 그것도 무슨 일이 있어야만 가끔 어머니 얼굴을 뵈러 오는 저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있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공개적으로 저를 파문(?)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며칠째 전화를 드려도 받지 않겠다고 하시니 어떻게 해야 어머니 마음에 드는 꼴이 될 수 있을까요?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에 재직 중입니다.
2022-05-04 | hrights | 조회: 1046 | 추천: 5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통령 선거가 끝난지 두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어째 갈수록 더 피곤하고 답답하다. 5년이라는 시간이 막막하게 느껴지더니 요즘은 두 달도 너무 지겹기만 하다. 그중 압권은 역시 공간에 의식을 지배당하는 차기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간략하게 나름대로 대선을 평가해 본다. 첫 번째, 국민들은 착한 척하고 무능력한 정부에 너무나도 실망한 나머지 안 착하고 능력 있는 체하는 차기 정부를 선택했다. 둘째,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라는 위기 초기 높아졌던 연대감을 빠르게 고갈시킨 빈자리를 채운 건 각자도생과 혐오였다. 셋째, 수사도 하고 기소도 하는 ‘살아있는 권력’인 검찰 총수가 청와대까지 접수했다. 넷째, 양당제를 부추기는 대통령제 속에서 제3정당은 끊임없이 ‘철수’와 ‘비판적 지지’ 혹은 ‘너네 때문에 졌다’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섯째, 실력없으면서 청와대를 탐하는 자 선거 패하고 압수수색 90번 당할 각오를 하라.  어쨌든 선거는 모 아니면 도, 승자는 모든 걸 갖는다. 그렇게 윤석열은 기분 째지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전직 대통령 두 명이 자꾸 머리에 아른거린다. 한 명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을 이끌며 강바닥과 남북관계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던 분이고, 다른 한 분은 대통령 되는 것만 생각하다 소원성취한 뒤로는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분이다. 사실 선거 결과가 나온 뒤 새 정부에 딱 하나 기대했던 건 공약 실천한다고 여기저기 번잡하게 만들지 않는 거였다. 어차피 제대로 된 공약도 없었고, 솔직히 공약 실천하는 걸 기대하고 찍어준 국민이 몇이나 되겠나 싶었다.  그중에서도 광화문청사 공약만은 꼭 파기하길 바랬다. 청와대를 정부서울청사로 옮긴다는 건 2012년 대선 당시 안철수가 공약했고 안철수와 단일화하면서 문재인이 받은 뒤 꽤 진지하게 검토를 했지만 결국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접었던 문제였다. 사실 정부서울청사는 조금만 생각해도 청와대가 들어가기엔 적합할 수가 없는 곳이다. 이미 검토가 다 끝난 걸 모른 척하며 무려 10대 공약 가운데 하나로 꺼내는 발상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지만, 뭐 어차피 흐지부지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나놓고 보니, 내 생각이 짧았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청와대를 정부서울청사로 옮긴다는 건 깨끗하게 포기했다. 매우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용산으로 옮긴단다. 청와대를 국민께 되돌려 준다는, 국민과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한단다. 도대체 어느 국민이 청와대를 되돌려달라고 했단 말인가. 대선 공약집 어디에도 용산 얘긴 없었는데, 어떤 국민들과 언제 무슨 약속을 했다는 것일까. 그럼 국민들이 ‘청와대처럼 용와대도 국민들에게 되돌려달라’고 국민청원이라도 하면 그때는 또 어디로 이사를 가시려고 이러시나.  듣도 보도 못한 용와대 이전 사태가 제대로 될지도 걱정이지만, 그건 어차피 내가 상관할 문제 아니니 알아서 하시라고 하겠다. 그래도 두 가지는 짚고 싶다. 먼저 윤석열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라는 말을 했는데, 처음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는 건 고백해야겠다. 맞다. 공간은 의식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무실 책상 배치만 달라져도 직장문화가 달라진다. 집안 책상 배치를 바꾸고 나서 성적이 올랐다는 얘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정학이란게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산과 들, 강과 바다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살펴보는 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말입니다.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이미 5년 전에 문재인이 집무실을 청와대 본관에서 여민관으로 옮겼다. 대통령과 수석비서관들이 걸어서 1~2분 거리에 모여서 일을 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용산으로 굳이 옮길 필요가 있을까? 인공지능으로 직업 찾아주는 어플을 비롯한 다른 많은 대선공약처럼, 청와대 공간배치도 이미 다 실현됐는데.  청와대가 풍수지리에서 흉지라는 어느 법사 얘기 때문에 청와대를 옮기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단 하루도 청와대에서 잠을 안 잔다는 얘길 듣고 보니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지만,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니까 신앙 문제로 왈가왈부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청와대가 과연 흉지일까 하는 건 따져보고 싶다.  나는 청와대가 흉지가 아니라고, 결코 흉지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청와대 자리에 대통령 집을 지은 뒤로 대한민국이 거쳐온 길을 보자. 말레이시아에 개발원조 받아서 다리를 세우고 필리핀으로 해외 선진문물 견학을 가던 나라가 몇십 년 만에 선진국이 됐다. 경제력은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고, 군사력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한국에서 생산한 드라마와 영화, 음악 심지어 먹거리까지 세계 각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말 그대로 단군 이래 이렇게 국운이 번성한 적이 없다.  이게 다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세운 뒤에 일어난 일인데, 이 정도면 흉지가 아니라 천하의 길지(吉地)가 아닐 수 없다. 어떤 분들은 비명횡사하고 자살하고 감옥 간 전직 대통령 얘길 하는데, 그건 술 덜 먹고 전임자 정치보복 안 하고 돈 욕심 덜 부리면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는 문제다.  국민들에게 하루빨리 되돌려줘야 할 건 청와대가 아니라 코로나19 손실보상금이 아닐까 싶다. 이미 대선 당시 이재명-윤석열 모두 신속하게 50조 원 이상 규모로 손실보상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이명박 정부조차 금융위기 터지자마자 수정예산안을 편성했는데 문재인 정부는 깔짝깔짝 추경만 열심히 했다. 마른 수건 쥐어짠다고 물 나오는 거 아니다. '자린고비 정부'이자 '수전노 정부'로서 최선을 다했을 때 대선 결과는 이미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공간이 의식 지배하는 방법만 따지는 풍수만 쳐다보고 있기엔 국민들이 너무 피곤하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4-26 | hrights | 조회: 1287 | 추천: 12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20대 대통령 선거가 민주당에게는 ‘졌잘싸’였는지 모르겠지만, 진보정당들은 사실상 괴멸된 선거다. 심상정(정의당), 김재연(진보당), 오준호(기본소득당), 이백윤(노동당) 후보의 지지율을 모두 합치면 2.55%로, 2007년 17대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혼자 얻었던 3.01%보다도 낮다. 표로 계산하면 86만3356표, 100만이 채 안된다. 졌잘싸가 아니라 괴멸이다  득표율만 최악이 아니다. 진보적 의제도 사라졌다. 국립대 통폐합 같은 교육개혁 이슈는 화제조차 되지 않았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기본소득을 꺼냈다가 수습하기 바빴다. 기본소득은 로봇의 인간 대체와 정보화의 급속한 진행으로 (고속도로 톨게이트 노동자들처럼) 대량 실업이 발생하는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수요진작(임금이 없으면 소비도 없다!) 차원에서 거론되는 우파적 정책이지만, ‘이념의 갈라파고스’ 대한민국에선 나라를 거덜낼 포퓰리즘으로 매도당한다. 기본소득 도입을 앞장서 주창하는 마크 저커버그나 일론 머스크 같은 미국의 기업인들이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철없는 좌파라고 손가락질 당했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나라마다 상대적인 개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적인 어젠다에 메아리가 생기지 않는다. 콘크리트 벽이 아니라 콘서트홀 수준의 방음벽에 대고 외치는 느낌이다. 진보란 역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므로, 비록 지금은 소수일지라도 결국 우리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다수를 이룰 것이라는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제 그 신념마저 흔들리는 듯하다. 촛불이 광화문을 뒤덮었던 5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퇴행이다. 무엇이 진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시 진보가 화석화되어 보수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많은 사람이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지금, 더욱 집요하게 던져야할 질문이다. 정치적 허무주의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자 역사 앞에 무책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데칼코마니와 허리케인 효과  한국의 진보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쪼그라든 것은 한국사회 전반의 우경화 결과다. 그 원인은 주체의 역량 부족과 객관적 조건의 변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주체의 역량 부족에 대해 말하자면, 어설픈 개혁으로 실패를 초래한 집권세력의 책임이 가장 크다. 특히 검찰개혁과 부동산에서 참여정부의 데칼코마니 같은 문재인 정부의 두번째 실패는 앞으로 이 분야의 개혁 시도가 불가능할 것 같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박근혜 탄핵이 보수세력에 남겼던 ‘허리케인 효과’처럼 문재인 정부도 진보의 10년치 잠재력을 한꺼번에 휩쓸고간 느낌이다. (집권 초반에는 남북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으나 트럼프의 변덕으로 실패했고, 후반에는 코로나 대응에 여념이 없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에 대한 기민하고도 원칙적인 대처나 주52시간제처럼 박수받지 못하고 우리 삶을 크게 바꾼 업적도 많지만 주제와 관련 없으니 생략한다.)  정체성 정치에 매몰돼 대중정당으로서의 전망을 상실한 정의당, 북한 문제에 대한 도그마적 태도로 소수 지지자들만의 정당으로 전락한 진보당 등도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진보 내부의 성찰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중들에게는 한없이 무력하고 주눅들어 있으나 스스로는 근거없는 내적 포만감에 취하여,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웅장한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대남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  실패의 두번째 측면은 객관적 조건의 변화다. ‘가치 전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다. 이대남이 주도하는 온라인 여론은 강자를 숭상하고 약자를 비난하며, 약자를 옹호하는 연민까지 위선이라고 공격한다. 이들은 트럼프를 지지했던 미국 러스트 벨트의 백인 노동자들처럼 성난 얼굴이 되어 여성과 장애인, 중국과 비정규직을 비난한다. 이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분석하는 일은 진보의 성찰에 필수적인 작업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세대 개념이 계급의 차이를 지우는 부정적 효과가 있다고 말하고, 나도 상당부분 동의하지만, 압축성장에 따른 급격한 사회 변화가 특징인 한국사회에서 세대별 역사적 경험의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특히 온라인에서 전투적인 보수주의 여론을 대변하는 20대 남성들에 대해서는 계급적 측면뿐 아니라 세대적 접근을 병행해야 정확한 실체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대적 접근 가운데 가장 손쉬운 해석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기반한 갈등 이론일 것이다. 20대 남성들이 아버지 세대인 86세대의 이념과 정서에 반감을 갖는 건 본능적으로 자연스럽다는 해석이다. 86세대가 자신들의 아버지 세대의 6·25 타령을 지겨워했던 것만큼이나 지금의 20대 남성들은 86세대의 민주화 타령을 지겨워한다. 어느 이대남이 말하기를, 민주화 세대는 눈 앞에 존재하는 꼰대고, 산업화 세대는 교과서에 나오는 할아버지 같다고 했는데, 눈 앞에서 잔소리하는 꼰대가 더 싫은 건 인지상정이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달라졌는데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의 기준에 맞춰 잔소리를 하는 것은 어느 기성세대나 마찬가지고, 젊은세대의 반발 또한 늘 있어왔던 일이다. 이대남이 홍준표를 좋아하는 현상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기에 약자를 위하는 척하는 이율배반보다는 자기 욕망에 당당하고 거침없는 상남자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 계급의식에 투철한 중산층 이대남들  오이디푸스 이론은 다분히 정서적인 접근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경제 구조의 변화와 계급 이론에 기반한다면 좀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86세대가 대학생이던 8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하위 파트너로서 당시 유행했던 신식민지 종속이론 적용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서 아류제국주의 이상의 독자적 위상을 갖고 있다. 그만큼 잉여자본이 커졌고 중산층도 두터워졌다. 피착취계급의 해방을 위해 공장과 농촌으로 뛰어들었던 86세대의 브나로드 운동을 이대남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학 진학률과 직업 구성으로도 86세대와 2030세대는 정확히 반대다. 86세대의 대학 진학률이 30%에 불과했다면 2030세대는 70%에 이른다. 86세대는 블루칼라가 많고 2030세대는 화이트칼라가 많다. 86세대 엘리트들이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 계급을 배반했다면, 2030세대의 다수는 화이트칼라로서 계급의식에 충실하다. 2030세대의 여론 주도층이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를 당연시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것은 계급의식의 반영이다. 지금 인터넷 여론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몇 년전까지만 해도 블루칼라의 계급배반(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정당을 지지하는)이 주요 논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부차적인 모순에 불과한 수준이다. 젠더와 일자리, 기표와 기의  평등하게 가난했던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상대적 결핍이 풍요와 성장의 시대에는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대남의 정치적 공격성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내재해 있다. 이들이 주창하는 반페미니즘의 근저에도 먹고사니즘과 각자도생의 초조감이 배어 있다. 이전 세대에 견줘 일자리 시장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여성을 견제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이대남의 성평등 의식이 30대 여성보다도 더 높은 것으로 나온다는 조사는 젠더 갈등이 기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들이 특별히 성차별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공정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측면이 훨씬 크다. 이들이 보기엔 여성들이 어릴 때부터 자신들보다 공부를 잘했고 직업도 좋으니 사회적으로 우대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은 거의 아무런 보상 없이 군대에 다녀와야 한다. 그런데도 86세대와 민주당이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여성우대 정책을 펴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이대남의 인식에는 사실과 오해가 뒤섞여 있다. 86세대에 대한 오해는 주로 시차에서 발생한다. 86세대의 경우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압도적으로 적었고, 그 결과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 공직자 등의 경우 여전히 ‘유리천장’이 존재한다. 메이저로서 남성 사회의 편견과 유교적 인습도 작용했다. 이를 교정하기 위한 방책으로 여성할당제 등의 보완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인데, 이대남이 보기엔 말도 안되는 불공정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이대남이 오십대가 된다면 여성할당제 등의 우대정책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남성 우대정책을 도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2030 남녀 사이의 갈등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생겨난 감정을 다른 곳으로 전이하는 데서 비롯한다. 남성들의 경우 군복무 등에서 생기는 피해의식에 기반해 여성에 대한 부정적 세계관을 구성하고, 여성들은 페미사이드를 비롯한 데이트폭력의 문제나 귀갓길 안전, 디지털 성범죄 등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위험조차 남성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2030 여성과 남성 사이의 의사소통 실패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군복무에 대해서는 모병제 전환이나 월급 현실화 등의 사회적 보상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에 대해서는 그동안 사회적 처벌이 미약했고, 심지어 관대했다는 점에 대해 20대 남성들의 사실 인정이 필요하다. 음탕하고 추잡한 목차요 야릇한 서문  이렇게 내재적 접근을 해보지만, 이대남의 모순 투성이 신념들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벌들의 혈연에 따른 세습은 쿨하게 인정하면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정확히 말하면 중규직화)는 공정에 위배된다며 반대하는 건 ‘을들의 전쟁’을 자초하는 전형적인 노예근성이다. 우리보다 잘 사는 미국을 좋아하고 우리보다 못 사는 중국과 북한을 혐오하는 천박한 물신주의 또한 용인하기 어렵다.(홍콩 민주화 운동 탄압 같은 독재적 행태에 대한 비판은 별개다.) 법앞의 평등이 아니라 성적 앞의 평등이 모토가 되어버린 능력(학력)주의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 실질적 평등 대신 절차적 공정을 절대화하고, 정의와 상식으로 포장하는 언어도단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이나 이준석 같은 정치인들이 앞장서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현상은 더욱 위험천만한 일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서러운데 삼팔선 이남을 동서로 갈라 오랫동안 권력을 누리던 자들이 이제 남녀를 이간질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싸우게 만들고 있다. 이들은 세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과 <오셀로>의 악당 에드먼드와 이아고처럼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거짓 선동과 분열을 획책했다. 이들이 갈등을 증폭시켜 정권을 잡은 방식은, 세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면, “음탕하고 추잡한 목차요 야릇한 서문”이다. 공동체의 붕괴를 앞당기는 역사적 범죄이자 매국노적 행태로서 <리어왕>과 <오셀로>에서처럼 인과응보가 뒤따를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잃어버린 시대정신을 찾아서  20대 대학생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안부인사에 세대를 초월한 공감이 넘쳐 흘렀던 게 불과 9년 전이다.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이 나온 것도 같은 해인 2013년이다. 약자와 연대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과 혐오하고 차별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동시에 존재한다. 비는 골고루 내리지만 골짜기마다 다른 모양으로 흐르고, 개천이 되고 하천이 되어 커다란 강으로 합쳐진다. 시대의 저류에 흐르는 수많은 의식 가운데 호출하고 호응하는 사람이 많은 쪽이 시대정신이 된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사회적 논의의 중심에 섰던 불평등 논의가 지금은 철지난 깃발처럼 지친 표정으로 구석에서 외롭게 나부끼고 있는 것은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바뀐 탓도 있지만 우리가 게을렀던 탓이기도 하다.  혐오는 쉽고 연대는 어렵다. 진보와 좌파는 주류가 되기 위해 보수와 우파보다 열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 억울하지만 그게 역사의 불문율이다. 정치적 허무주의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가 2030세대와 만나자. 잃어버린 시대정신을 찾자. 진보가 살고 우리 공동체가 사는 길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04-13 | hrights | 조회: 1809 | 추천: 23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남북경협사업가를 향한 국가보안법의 칼날이 서슬 퍼렇다.  2018년 8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2019년 2월 보석으로 석방돼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았지만, 지난 1월 25일 1심에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4년의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어 현재 서울구치소(수용번호 55번)에 수감 중인 김호 대표.  그는 2003년경부터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른 절차를 이행하며 남북교류협력사업을 해왔다. 2007년부터는 중국을 통하여 북 IT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개발하청 사업을 해왔다. 이 사업을 위해 대출까지 받아 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하였을 정도로 전력을 기울였다. 선구적인 IT 남북경제협력 사업이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2010년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제재조치로 인하여 남북경제협력법에서 정한 신고 또는 승인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5.24 조치에도 불구하고 애당초 중국 국적의 재외동포를 중개인으로 한 남북경제협력사업이었기에 다행히 사업은 중단되지 않고 중국을 통해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국가정보원 대북 IT정보수집 부서 소속 국가정보원 직원의 요청에 따라 그는 2011. 12. 7.부터 2013. 10. 24.까지 국가정보원 대북정보 협조자로 활동하였다.  2007년부터 거의 10년에 걸쳐 남북경제협력사업을 진행해 오던 그에게 국가보안법의 광풍이 불어 닥쳤다. 북 IT 개발조직에 개발비를 송금할 경우 위 자금이 대남공작사업 등의 통치자금으로 사용되거나 북 IT 개발조직에서 개발하는 프로그램이 국내 주요 보안시설 등에 설치·납품될 경우, 그 프로그램을 통하여 보안시설 네트워크 해킹, 악성코드 유포, 디도스 공격 등 사이버테러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고, 국내업체들의 내부 보안정보가 북으로 유출되거나 북의 대남공작조직에서 관련 정보 또는 데이터 등을 수집하여 대남침투공작 등에 활용하는 등 대한민국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였다.  북 악마화에 기초한 허구의 논리다. 거짓의 기세가 등등하다. 사이버테러 북 소행은 탈북자 및 사이버 보안업체를 배후에서 지원하고 이용하는 국내외 정보기관의 북 악마화 정보조작과 이에 편승하는 서방 매체의 왜곡보도가 낳은 근거 없는 날조품이다. 불공정한 국제질서에서 유엔조차 미국의 하수인으로 북 사이버 테러 소동에 부화뇌동하고 있다.  북 악마화가 온 세상에 아무런 거리낌조차 없이 저질러지고 있기에 그에게 닥친 국가보안법의 탄압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를 희생양으로 삼은 국가보안법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다. 사진출처 -  정보통신신문  1심 판결은 북의 적화통일노선을 전제하고 북의 대남공작조직이 지속적으로 그가 중국을 통해 진행한 북 IT 프로그램 개발·유통에 관여하였다고 자의적으로 단정한 후 상황에 따라 사이버테러에 악용될 가능성이 상존하였다고 일방적으로 가정하였다. 그를 처벌하기 위해 북과 중국의 상대방인 IT 시스템 및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북의 과학기술자도, 중개 역할을 한 중국 국적의 재외동포도 공작원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사법부마저 그 앞에서는 주눅 들게 하여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인권의 최후보루로서 책임과 사명을 망각하고 회피케 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세를 지녔다. 1심 판결이 북의 사이버테러를 사실로 인정하며 신주단지 모시듯 안전판 증거로 기껏 내세운 것이 탈북자의 증언이다. 그 탈북자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유우성씨에 대한 간첩신고로 국가보안유공자 상금을 받은 자이다. 국가정보원과 연계된 탈북자의 증언은 신빙성이 전혀 없건만,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한국 현실은 국내외 지배세력과 연계된 탈북자들이 언론방송은 물론 한국의 법정과 유엔까지 진출하여 거짓말 경연을 밥 먹듯 하며 생계형 또는 출세형의 반북 망동을 일삼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탄압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김호 대표의 변호인으로 그의 구명을 위해 하소연한다.  1심 판결이 유죄로 인정한 주된 공소사실은 모두 국가정보원의 협조자로서 대북 IT정보수집에 협력하며 남북경제협력사업을 하던 시기와 겹친다. 당시 남북경제협사업은 북의 대남공작조직의 관리 하에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정보원의 승인과 개입 하에 있었다. 그런데, 어찌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를 지원할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남북경제협력사업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미칠 구체적이고 명백한 위험성이 있었다고 한단 말인가?  약 10여년에 걸쳐 중국 국적의 재외동포의 중개를 거쳐 북 과학기술자들과 IT 소프트웨어 개발 하청사업을 진행한 그를 남북교류협력법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한다면, 남북 간 경제적 거래를 목적으로 한 남북경제협력사업도 사후적으로 얼마든지 국가보안법위반 범죄로 처벌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남북교류협력사업은 위험한 것이 될 수밖에 없어 남북교류협력의 활성화, 이를 통한 관계개선은 요원해진다.  국내업체들에 납품한 북 IT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더 이상 판매할 수 없게 되어 심대한 경제적 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법적 책임 또한 모두 지게 될 남북경협사업가에게 북 사이버 테러를 운운하며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다니, 국가보안법 때문에 기막히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10여년의 북 IT 프로그램 납품 과정에서 국내업체 중 단 한 곳의 피해도 없었는데 말이다.  남북경협사업가 김호 대표에 대한 국가보안법 탄압의 현실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지배당한 채로 무기력하게 저항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억울한 옥살이로 고통 받고 있는 김호 대표의 석방을 위한 구명운동에 우리 모두의 관심과 동참을 호소한다. 그가 겪고 있는 시련의 날들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국가보안법 소멸의 그날을 향해 한국 민중 스스로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연대해 싸우며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2-04-06 | hrights | 조회: 1495 | 추천: 4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20년 넘게 석탄화력발전소로 고통받아온 당진이 뜬금없는 핵발전소 건설 대상지로 언급돼 지역주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당진지역에는 현재 한국동서발전(주)에서 운영하는 10기의 대형 석탄화력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1999년 6월부터 500MW 규모의 1호기 가동이 시작된 이후, 같은 해 12월에는 2호기가, 이듬해인 2000년 9월에는 3호기, 그리고 2001년에는 4호기가 차례로 건설됐다. 이렇게 하나씩 늘어난 화력발전소는 2016년, 기존 발전용량의 두 배에 달하는 1020MW 규모의 9·10호기까지 잇따라 건설되면서 현재 총 6040MW를 생산하는 석탄화력 10기가 운영되고 있다. 전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큰 규모다.  대형 석탄화력발전소로 인한 피해는 두말할 나위 없다. 석탄을 떼서 물을 끓이고, 그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하는 화력발전의 원리는 간단하지만, 그 과정에서 받아온 주민들의 일상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외국에서 수입한 석탄 하역 과정에서, 다 태운 석탄재를 야적하는 회처리장에서도 검은 탄가루나 석탄재 등의 물질이 바람을 타고 인근 마을까지 날아와 집과 자동차, 농작물 등에 내려앉는 피해가 종종 발생해왔다. 특히 수확을 앞둔 배추 속 사이사이에 비산먼지나 강하분진이 잔뜩 껴 다 키운 농산물을 팔지 못하는 경우도 잦았다. 사진 출처 - pixabay  석탄을 저장해 놓는 대형 저탄장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길게는 열흘 이상 지속돼 연소 과정에서 발생하는 악취와 가스 등으로 주민들이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석탄화력발전소를 가동함으로서 발생하는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등 대기오염물질은 지역의 환경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지목돼 왔다.  지역사회의 피해가 커지고 계속해서 민원이 발생하면서 당진화력발전소는 지난 2017년부터 대기오염물질 배출량 감축을 추진하며 과거에 비해 상당한 개선을 이뤘다. 또한, 지자체 차원에서도 발전소 인근에 민간환경감시센터를 운영해 환경피해 조사와 사고 발생 대응 등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석탄화력발전소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규모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대도시로 보내기 위해서는 고압송전탑과 같은 송전설비가 필요하고, 고압송전탑으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는 여전하다. 그리고 당진지역에 마지막 남은 생태환경의 보루라고 불리는 지역에 추가적인 송전선로 건설을 추진하면서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개발이익과 피해보상, 각종 이권개입 등 경제적 문제가 얽히면서 발전소 일대 지역공동체는 완전히 와해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선거캠프에서 에너지정책 분야를 주도해온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가 소형모듈원자로(SMR)를 충남 당진 등 기존 석탄화력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에 지으면 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지역주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주 교수는 지난 18일 경향신문 6면에 실린 「‘탈원전’서 ‘원전강국’으로…원자력, 녹색에너지 전환 주목」 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석탄화력발전소에 이미 전력망이 깔려 있기 때문에, 발전기를 석탄 대신 SMR로만 하면 된다”며 “고용승계의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지역주민들이 온갖 피해를 감내하면서 생산한 전기를 그저 편하게 사용하고 있는 대도시 주민 입장에서는 “기존에 있는 발전소를 활용해 소형핵발전소를 지으면 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지만, 20년 넘는 세월 동안 대규모 발전회사와 싸우면서 살아온 주민들에게는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얘기다. 전기를 생산해 내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주민들이 피해를 입어왔는지, 지역주민들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한다면 이렇게 쉽게 내뱉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당진은 전력자립도가 400%가 넘는 지역이다. 지역에서 소비되는 전력보다 4배 이상 전기를 생산해 수도권으로 보내고 있다. 지역주민들은 수도권 시민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당연히 희생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직 시작하지도 않은 윤석열 정부의 정책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들러리도 아니다.  탈석탄·탈원전이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시대를 역행하며 원전 강국으로 나아가겠다는 발상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지역을 배제하고 지역주민을 소외시키는 SMR 추진은 결코 현실화돼서는 안 될 일이다. 조만간 출범할 윤석열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되는 주한규 교수의 발언이 단순한 발언에 그치지 않을까 봐 우려스럽다. 덕분에 지역소멸을 걱정하는 시대에 지역주민들은 “이제는 정말로 지역을 떠나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있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부국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2-03-24 | hrights | 조회: 1100 | 추천: 2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선거일 직전 ‘국민의당’과 전격 합당한 뒤 ‘국민통합’을 내세우며 간발의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운동 중에는 “국민이 키운 윤석열, 내일을 바꾸는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내세웠고, 당선 소감으로 “위대한 국민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오직 국민만 믿고 오직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국립현충원에 참배하면서 “국민과 함께 통합과 번영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그 뒤 “국민통합”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당선인 직속으로 ‘국민통합특위’도 꾸렸다. 선거 전후해서 가장 많이 한 말이 ‘국민’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일견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해야 할 무난한 말들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 국민’이 무엇인지, ‘그 국민’이라는 말이 누구를 지향하고 있는지, 그 실질을 진정성 있게 고민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모든 언어가 그렇지만, ‘국민의 뜻’ 운운하는 말이 워낙 광범위해서 곰곰 따져보면 아무 뜻도 아니거나, 자기에만 유리한 ‘나의 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넘쳐나는 곳에 ‘국민’이 없을 수 있다는 역설을 의식하고 있는지, 그 지점이 잘 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국민의 승리”라는 말에서 ‘위대한 국민’이 자신의 지지자를 지칭하는 것인지, 국민 자체가 위대하다는 말인지 불분명하다. 만일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이 위대하다면 ‘국민통합’이라는 말은 요원한 것일 테고, 국민 자체가 위대하다면 아무 말도 안 한 것이거나 그저 동어반복을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오직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지만, 그때 ‘따르겠다는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어떻게 파악하고 구분한다는 것인지도 마찬가지이다. ‘뜻’만 명백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따르겠다’는 말도 그 범위와 행위의 정도가 애매하다. ‘국민’, ‘뜻’, ‘따르기’ 모두 확정적인 개념들이 아닌 데다, 너무나 원론적이고 거창해서 사실상 아무 뜻도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이현령 비현령’일 수 있는 말들이다.  “국민과 함께” 통합을 이루겠다지만, 그때의 “함께”가 어느 정도인지도 대단히 추상적이다. “국민통합”도 ‘통합’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국민 전체가 아닌, 일부는 소외시키는 ‘분열’일 수도 있다. 국민을 통합하려면 다양성을 존중하며 비판자까지 껴안을 수 있을 심층적 철학과 모범적 실천이 있어야 하는데, 이제까지 국민 전체를 포용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듯해서 미심쩍다. 행여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버리려 들지는 않을지 의구심도 든다. ‘국민’을 둘러싼 이런 문제의식은 “국민의 힘”이나 “국민의당”이라는,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며 딱히 메시지가 분명치 않은 당명을 정할 때부터 노정된 난제들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느 특정인이나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막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으로서 그 정도의 발언을 하게 되는 것은 일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국민’만이 아니라 어떤 언어를 쓰든 언어 자체가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선불교에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指月]과 달을 구분하고 있고, 언어학자 소쉬르가 기표(記表)와 기의(記意)를 구분하고 있지 않던가.  ‘국민’이라는 글자와 그 글자가 연상시키는 이미지나 개념은 애당초 다르다. 글자와 개념이 구분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처한 형편에 따라 연상하는 이미지와 떠올리는 개념도 다양하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 나아가 말하는 이도 자신의 내적 의도대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하고, 표현한다 하더라도 듣는 이에게까지 가는 과정은 더욱이나 멀다. 저마다 기대치가 다르고, 심지어 상반되게 이해하기도 한다. 이 마당에 ‘국민’이 아니라 무슨 언어를 쓴들 본래적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자기 언어의 한계를, 때로는 무의미함까지 의식하고 있는지, 그저 자의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관건이다. 그런 반성적 의식 속에서야 가능한 한 명확하고 전체를 살릴 수 있을 방향성도 나온다. 거기서 진정성도 나온다. ‘사랑하는’, ‘위대한’과 같은 멋져 보이는 표현도 그 내용까지 멋지려면 말 속에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진정성이 있으려면, 어떤 언어든 많은 이가 신뢰할 말을 고민해서 구체적이며 정확하게 써야 한다. 정확하게 쓰려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어디로 가는지, 한 번 더 자신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 기존의 개념을 되묻고, 해체하고, 다시 해체해서 가능한 모든 이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간격을 좁혀야 한다.  사회학자 김홍중이 발터 벤야민의 사상에 힘입어 ‘파상력’(破像力)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파상력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영상들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파괴하는 우상 파괴적 권능을 내포한다... 일체의 가상(Schein)이 가상임을 꿰뚫고 그 가상이 행사하는 환영적 위력을 분쇄함으로써 엄폐되어 있던 진상(眞相)을 간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사용하는 ‘국민’이라는 말이 그저 ‘기호’에 머무는 것은 아닌지, 거기에 허상은 없는지, 가상은 아닌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말에 솔직하고 진지해야 한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국민’이라는 말에 담긴 자기만의 이미지를 분쇄하고 파상해야 한다. 그런 자세를 견지해야만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는 말에서 국민이 솔직함과 진정성을 느낀다.  진정성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말이 아니라, 어떤 실천을 어떻게 하는가에서 확보된다. ‘위대한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말이 맞으려면, 그렇게 말하는 이는 국민 앞에서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국민이 위대하다거나 국민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은 낮추고 국민을 높이는 행동으로만 진정성이 입증된다. 자기만의 신민(臣民)이 아닌, 비판적 국민까지 전체를 높이며 살려야 한다. 남한의 국민만이 아닌 한반도 북쪽의 인민도, 한반도만이 아니라 동아시아까지, 심지어 세계의 상황을 읽고 가능한 인류가 상생할 수 있는 길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 세계 안에서 세계와 엮여 존재하며, 결국 남과 북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처지 아니던가.  물론 누구든 전체를, 그것도 자기의 비판자까지 포용하며 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대로 다름과 차이 간에 상생을 도모하며 전체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크게[大] 거느리고[統] 다스린다[領]’는 어마어마한 역할을 담은 한국식 호칭을 붙이고 있지 않은가.  만에 하나 전체를 동시에 살리기 힘들다면, 더 고통받고 더 힘든 이들을 우선 살리고 높여야 한다. 아래로부터 밀어주면서 전체의 평균치를 높여야 한다. 이것이 평화에의 길이고 통합의 기초이다. 평화를 지킨다며 무력을 강화시키는 위압적 행위보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려는 지난한 노력을 전 세계와 함께 진정성 있게 해야 한다. 그런 마음이라야 인류의 축복 속에서 ‘국민의 뜻’을 반영하며 따르는 길에 서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자리는 간단하지 않다. 그의 영향력 안에는 너무나 많은 눈과 귀와 입이 있다. 그 어설픈 한 마디에 너무나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저와 제 편만 생각하다 행여 통합이라는 이름의 분열로 가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들만의 국민’은 없다.  ‘국민의당’과 합당해 대통령으로 당선된 ‘국민의힘’ 당선인이 ‘국민’을 어떻게 대할지, 앞으로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이어갈지, 그 언·행과 일거수·일투족을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이 ‘위대한 국민’이 할 일이다. ‘국민’으로 포장된 가상을 깨고 진상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이 진짜 ‘국민의 힘’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2-03-14 | hrights | 조회: 1454 | 추천: 12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크라이나의 교사이자 엄마인 올레나 쿠릴로. 그녀의 아파트는 러시아의 미사일 공습으로 파괴됐다. 유리 파편에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그녀는 푸틴에게 의미 없는 전쟁을 멈추라고 호소했다. “전쟁은 엄마들이 아이들을 잃게 만들고 노인, 평범한 사람,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아까운 생명을 잃게 한다.” 그녀는 러시아의 엄마들을 향해 이런 부탁도 했다. “제발 아이들이 전쟁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 이 전쟁은 무의미하다. 이 전쟁으로 행복해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이 전쟁으로 부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전쟁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국 국민 모두에게 비극이고 고통이다. 경제제재로 금리는 20%나 뛰었고 물가도 치솟고 있다. 달러 대비 루블화의 가치는 3분의 1로 떨어졌고 더 떨어질 거라 한다. 구글페이나 애플페이 같은 결재시스템도 러시아중앙은행이 스위프트에서 배제되면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피 흘리는 우크라이나 국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러시아 경제 시스템의 붕괴는 러시아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이번 전쟁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한다. 문명의 시대에 이런 의미 없는 전쟁을 목도하니 참담한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말들은 많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계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신나치즘의 발현을 막겠다.’고 했고 다른 한편에선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리한 나토가입 추진이 러시아의 무력 침공을 자초했다는 분석도 있다. 수만 가지 이유를 댄다 해도 누구도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무고한 생명의 살상, 인권 유린, 일상의 파괴를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전쟁의 원인은 푸틴이다’ 올레나 쿠릴로의 명쾌한 진단이다. 푸틴은 러시아를 다시 소련 시절로 되돌리겠다는 야욕에 사로잡혀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푸틴의 제국주의 야망의 시발점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프랑코 국립대학교 올레흐 오스타퓨크 교수는 ‘푸틴이 전쟁을 일으켜 러시아 시민을 선동해 독재를 계속 유지하려는 속셈’이라고 간파했다. 하지만 이런 푸틴의 야욕은 오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KGB 출신의 푸틴은 2000년 이후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하면서 20년 넘게 장기집권을 해오고 있다. 투표 때마다 부정선거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60~70%의 득표율을 보여줬다. 정보기관 출신답게 정적을 제거하거나 정치적 반대집단을 탄압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비판적인 언론인 살해 의혹 등 언론통제도 일삼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 민주화의 바람이 때로는 혁명으로 몰아쳤지만, 러시아만은 무풍지대였다.  그래도 변화의 기미는 보인다. 전 세계 반전여론이 거센 가운데 러시아에서도 곳곳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푸틴의 전쟁을 지지하는 여론이 50% 정도 된다지만 체포와 처벌을 각오하고 ‘조국이 부끄럽다’며 전쟁반대를 외치는 물결이 번지고 있다. ‘사형제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위협에도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러시아 시민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다. 비록 근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았고 시민사회의 형성도 더디지만 요즘 같이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세상에선 러시아만 외딴 섬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출처 - 우크라이나 현지 매체 HB가 트위터에 게시한 영상 캡처  쉽게 함락될 것 같았던 우크라이나는 결연한 항전 의지로 힘겹게 버티고 있다. 이 가운데 내 눈길을 끄는 장면 하나. 돌진하는 러시아의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아서는 한 시민이 있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장갑차도 그를 피하느라 휘청거렸다. 그의 용기가 철갑전차를 흔든 것이다. 철옹성 같은 권력에 균열을 내는 것은 총과 칼만이 아니라 작은 촛불이었고 가녀린 재스민 꽃잎이었다. 푸틴의 손에 권력을 쥐여준 러시아 국민들의 냉철한 판단과 전 세계 평화세력의 연대만이 이 무의미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에 재직 중입니다.
2022-03-02 | hrights | 조회: 1150 |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