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대통령은 국가의 수반으로서 대외적으로 국민 모두를 대표한다. 어떤 사안에 대한 그의 대외적인 발언은 추상적으로는 국가 공동체 전체를 보편적으로 대변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체적으로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대변하기도 한다. 국민 중 누군가가 그의 발언은 나의 의사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사적으로는 주장할 수 있을지라도 공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정은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에게도 적용되고,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적용된다.   2.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가 이란을 불법적으로 침략해 전쟁을 일으킨 것은 공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당연히 미국이 이란에 대해 불법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고, 굳이 따지자면 미국 국민이 이란 국민을 불법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그렇기에 모르긴 해도 트럼프의 대이란 침략 전쟁에 대해 미국민 중에 그 불법성과 반인권성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인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미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저는 양심상 현재 진행 중인 이란과의 전쟁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직한 미국의 ‘국가 대테러 센터장’인 조 켄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같이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전쟁을 일으키고 그것에 관련해서 자기로서는 위장 전술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거짓말인 수 없는 말 바꿈을 했다. 그래서 전쟁 초기에 트럼프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국제적으로는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불평과 불만이 자자할 정도였다. 심지어 트럼프 본인도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거 아니냐, 하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다. 급기야 미국 내에서 트럼프의 치매 논란마저 등장했다. 결국에는 세계 경제를 위기에 몰아넣은 것 역시 크게 문제가 되거니와 무엇보다 미사일과 드론에 의한 공격과 반격이 수없이 이루어지면서 중동 전역에서 군인들은 물론이고 아무 잘못 없는 수많은 민간인이 살상되었고, 도시 주거지들을 여지없이 파괴됨으로써 셀 수 없는 피난민들을 만들어냈다. 국제적으로 전혀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전쟁이었고, 이에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관련해 트럼프가 파병 제안을 했을 때 나토 동맹국들, 특히 그동안 미국의 거의 어떤 국제적인 행위이건 찬동하고 동참했던 영국마저도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일본과 호주 그리고 한국도 거부했다. 그 와중에 트럼프는 주한미군의 수를 2배 가까이 부풀려 말하면서 한국의 불참을 콕 짚어 기억하겠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동안 미국의 패권주의가 억지로라도 통용되었던 건 적어도 외관으로나마 자유와 인권을 기반으로 한 합리적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번 이란 전쟁의 배경에는 이란의 신정 체제의 독재 정부가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으로 이란 국민을 살육하면서 잔인하게 진압한 게 포함된다. 물론 이란의 반정부 시위에 미국의 CIA와 이스라엘의 모사드 요원들이 가담해 특히 이들의 지원을 받은 쿠르드 밀집 지역에서 유혈 충돌이 일어나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보도도 있다. 그런데 어쨌거나 트럼프-네타냐후가 이란에 대해 선전포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게다가 협상 중에 이란 지도부 40여 명을 표적으로 삼아 살해한 행위가, 얼마 전에 있었던 베네수엘라의 주권 침해가 명확한 미국 특공대에 의한 경호원들의 대량 살상을 수반한 마두로 대통령의 불법적인 체포와 겹쳐, 국제적으로 워낙 불법성이 크다 보니, 저 이란의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가혹한 진압에 대해 ‘잔인한 반인권적인 조치’라고 비판할 수 있는데도 아예 문제조차 되지 않을 지경이 된 것이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우크라이나 침략에 책임을 져야 마땅한 것으로 이야기되던 러시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할 정도로 그 책임이 희석되는 형편이다. 더군다나 세계 원유 시장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미국의 트럼프가 러시아의 원유 수출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게 되니, 더욱 그러한 상황이다.   3. 이 와중에 대한민국의 이재명 대통령이 비록 ‘X’라는 SNS를 통해서이긴 하나, 심지어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 아동을 고문하여 지붕에서 내던졌다는 팔레스타인인의 글을 리트윗하면서(나중에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조금 다행이라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시신이었다는 점이지만, 시신이라도 이와 같은 처우는 국제법 위반입니다.”라고 수정해서 다시 비판함) 이스라엘에의 반인권적이고 반국제법적인 전쟁 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제인도법은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의 존엄성 역시 타협할 수 없는 최우선 가치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 지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비극은 인권의 소중함이 무엇보다 최고이자 최선의 가치임을 배워야 한다는 것, 홀로코스트와 같은 뼈아픈 상처 위에 남겨진 교훈을 반복된 참혹극으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래야만 인류 모두가 상생하는 화해와 협력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제인도법은 준수되어야 하며, 인권 즉 인간의 존엄성 역시 타협할 수 없는 최우선 가치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그야말로 ‘인간의 씨를 말리는 식’으로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비인간적인 살육을 벌여온 데다 미국의 트럼프를 ‘꼬드겨’ 일방적으로 이란을 공격한 이스라엘의 총리 네타냐후가 종전이고 휴전이고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확전을 기하면서 중동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 있다. 더군다나 그 네타냐후는 부정부패 혐의로 재판받아야 할 때마다 전쟁을 일으키는 정말이지 악마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이러한 네타냐후의 전쟁광 놀음을 이스라엘 국민 70% 가까이가 찬성한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제 나름 선진국으로서 발돋움함으로써 세계의 참극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지 않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재명 대통령이 이러한 악행을 보다 못해 비판의 발언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 외무부에서 이러한 이재명 대통령의 비판에 대해 반성 없는 반박 성명을 했고,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끊임없는 반인권적 반국제법적 행동으로 고통받고 힘들어하는 전 세계인들의 지적을 한번쯤은 되돌아볼 만도 한데 실망입니다. 내가 아프면 타인도 그만큼 아픕니다. 나의 필요 때문에 누군가 고통받으면 미안한 것이 인지상정입니다.”라고 전혀 물러섬이 없이 어쩌면 상식이라고 할 수도 있는, 외교적인 수사를 동원한 영국, 독일, 프랑스, 유럽연합(EU) 등의 온건한 비판과는 전혀 결이 다른 비판을 이어갔다.   MBC 뉴스데스크 영상 갈무리   4. 한때 1973년 12월쯤에 박정희 정부가 팔레스타인 난민 존중과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요구했고,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이에 대한 항의로 주한이스라엘대사관을 철수하고 주일이스라엘대사관이 대한민국 업무를 겸임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보편적 인권을 기조로 한 이재명 대통령의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은 그 맥락이 전혀 다르다. 그것은 그저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을 겨냥한 게 아니라, 암암리에 트럼프의 미국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4월 15일 자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4월 14일에 <조선일보>의 워싱턴 특파원이 이재명 대통령의 이스라엘 관련 X 발언에 대해 이를 어떻게 보느냐고 미국 국무부에 입장을 질의했는데, 미국 국무부가 이란 정권의 대미 적대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이스라엘의 자국 방어권을 지지한다고만 했을 뿐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이른바 동문서답을 했다고 한다. 이는 미국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을 미국 내지는 트럼프 대통령을 염두에 둔 게 아닌 쪽으로 굳이 해석하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거기에 함의되어 있음이 분명한, 트럼프 내지는 미국을 향한 이재명 대통령의 항의를 짐짓 삭제하고자 한 것이라 할 것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파병을 거절한 한국을 기억하겠다고 짐짓 엄포를 놓은 트럼프가 이재명 대통령의 저 발언을 무심코 넘길 일은 만무하고, 모르긴 해도 ‘이걸 어찌 그냥 두고 볼 것인가?’ 하고서 내심 분노의 염을 삼키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거의 80년 동안 미국 패권주의를 자동으로 맹종하던 대한민국이 독자 노선을 걷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자기에게 ‘신라의 면류관’을 선물로 주길래 윤석열과는 다르긴 해도 뭐 크게 차이가 나겠어, 하고서 생각했는데, 이렇게 나의 뒤통수를 치다니! 하고서 ‘속에 열불이 날’ 것이다: ‘주한미군을 철수한다고 해 버릴까? 철수할 테면 하라. 말리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잖아, 하면 어쩌지?’ ― ‘관세를 50%로 올린다고 해 버릴까? 그러면 메모리 반도체를 비롯해 미국 경제에만 손해가 날 텐데 알아서 하라, 하면 어쩌지?’ ― ‘핵잠수함 허용 없던 일로 해 버릴까?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함부로 간섭하지 말라, 하면 어쩌지?’ ― ‘북한처럼 미국 은행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아예 금융 제재를 가해 버릴까? 우리가 잘못한 게 전혀 없는데 그게 국제적으로 과연 합법하다고 인정될까? 오히려 미국이 고립되지 않을까? 하면서 버티면 어쩌지?’ ― ‘첨단 무기를 팔지 않는다고 하려니 그럴 것도 별달리 없고, 아 어쩌지?’ 하는 등의 각종 심보를 꺼냈다가 넣었다가 하지 않을까?   5.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번 이재명 대통령의 이스라엘 비판을 통한 트럼프 미국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그동안 오랜 세월 습관으로 굳어온 우리 국민의 미국에의 심리적인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몇 년 동안 K-팝, K-영화 및 드라마, K-뷰티, K-푸드 그리고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등을 통해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미국에의 심리적인 예속에서부터 많이 탈피했다. 그리고 최근 AI의 대대적인 확산에 따른 메모리 반도체의 급격한 수요 증가를 비롯한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도 그렇고, K-방산의 국제적 위상의 제고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알게 모르게 충분히 유의미할 정도로 미국에의 심리적인 예속에서 많이 탈피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혀 유혈 사태 없이 불법한 현직 대통령을 두 번이나 탄핵함으로써 K-민주주의의 명실상부한 모범적인 위업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정치 체제 면에서도 미국에의 심리적 예속에서부터 많이 탈피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전시작전 통제권, 주한미군 문제 등을 볼 때, 군사 외교적으로는 미국에 실질적으로 상당 부분 예속해 있어 진정 자주적으로 완성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이번 보편적 인권과 인류 평화 공존의 원칙을 앞세운 이재명 대통령의 이스라엘 비판을 통해 군사 외교적으로도 미국에의 예속으로부터 적어도 심리적인 차원에서만큼은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해방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것이다. 1948년 정부를 수립한 이후 80년 가까이, 21세기도 사반세기를 지난 이때 이같이 기묘한 방식으로나마 또 한 번의 ‘독립 선언’을 한 건 처음이라 할 것이다.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 100년도 더 지닌 <3·1 독립선언서>의 첫 번째 두 문장이 급하게 떠오른다. 더욱더 우리 모두 지혜로운 대한 국민으로서 집단지성을 모아야 할 때다.    
2026-04-21 | hrights | 조회: 54 | 추천: 4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기본사회’가 이재명 정부의 간판 정책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해 7월 국정운영 5개년 계획 수립을 위한 10개의 TF 중 기본사회TF를 구성했다. 같은 해 11월 행정안전부는 범부처 기본사회 추진체계 마련, 기본사회위원회 지원 업무를 담당할 ‘기본사회정책과’를 신설했다. 올해 1월에는 대통령령으로 「기본사회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이 공포되었고, 마침내 지난 4월 15일 대통령 직속 기본사회위원회가 공식 출범하여 정책은 실행 단계에 들어섰다.   사실 대통령의 기본사회 정책 구상은 갑작스럽지 않다. 2010년대 중반 성남시장 시절 ‘청년 배당’을 통해 기본사회의 앞선 버전인 ‘기본소득’ 실험을 시작했고, 2020년 9월 경기도지사 시절에는 ‘기본소득 지방정부협의회’를 출범시킨 바 있다. 대선 후보 시절인 2022년 3월에는 기본소득보다 포괄적인 개념인 ‘기본사회’를 공식 정치의제로 전면에 내세웠다. 당내에 기본사회 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직접 위원장을 맡으면서 기본사회가 대통령 당선 이후 향후 핵심 국정 철학임을 예고한 것이다. 그 철학의 뿌리는 헌법에 닿아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과 제34조제1항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바탕으로 기본소득, 기본사회로 이어지는 대통령의 생각을 간명하게 정리하자면 ‘국민의 기본적 삶을 국가가 보장하는 사회’이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우리의 미래는 최소한의 삶을 지원받는 사회가 아니라 기본적 삶을 보장받는 기본사회여야 한다’(2022.9.28.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중)라는 것이다. 기본사회의 시대정신과 마스터플랜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을 넘어 기본사회 30년을 준비할 때’이며 ‘소득, 주거, 금융, 의료, 복지, 에너지, 통신 등 모든 영역에서 국민의 삶이 보장되도록 사회시스템을 바꿔가야 한다’(2022.9.28.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중)라고 강조한다.   기본사회의 필요성은 인간의 업무를 대신하는 AI가 우리 삶 곳곳에 급격히 자리 잡으며 취업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서서히 인정받고 있다. 한 연예인이 글로벌 기업의 광고 출연 제안을 받고 촬영 일정을 기다렸으나 실제 촬영을 대신한 것은 연기자도 촬영팀, 편집팀도 아닌 AI였고, 본인은 초상권만 제공했다는 현실이 한 사례이다. 인간의 노동력이 AI로 급격히 대체되는 상황은 일자리 상실, 소득의 부재, 소비의 하락, 돈이 돌지 않음에 따른 경제 전반의 위기로 이어진다. 이 같은 기술의 진보에 따른 시대 변화에 국가가 대응하여 위기를 극복한 사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복지국가’ 정책이다. 지난 20세기 초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전쟁 국면에서 급속히 진행된 노동시장의 변화와 경제위기에 직면한 영국과 독일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내세우며 실업급여, 건강보험, 기초연금 등 오늘날 사회복지의 근간이 되는 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했다. 대통령 직속 기본사회위원회 강남훈 부위원장은 ‘기본사회는 복지국가의 이념을 현대적 상황에 맞게 구현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복지국가는 기초연금, 실업급여 등 소득 재분배와 사회보험 중심의 ‘위험이 발생한 이후의 지원 정책’이었다면 기본사회는 ‘위험 발생 이전부터 구조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선제적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기본사회위원회가 갓 출범한 상황에서 아직 구체적인 로드맵과 실행계획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추진 방향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이다. 우선 ‘기본소득’이다. 모든 시민 또는 청년, 농민, 노동 등 일부에게 정기적으로 현금 또는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방향이다. 다음은 ‘기본서비스’이다. 모든 시민 또는 일부에게 교육, 돌봄, 금융, 의료, 주거, 교통, 환경, 통신, 에너지, 문화 등 시민들이 최소한의 서비스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방향이다. 마지막으로 ‘지속가능경제’이다.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가 잘 정착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역 내 순환 시스템을 지원하는 경제 정책, 사회적 경제 사업, 경제 거버넌스, 일자리 사업 등이다. 지속가능경제는 ‘복지국가를 뛰어넘는 기본사회의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란 질문의 답을 마련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기본사회위원회 강남훈 부위원장은 공유부(공유재)를 재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사회와 자연이 만들어 낸 부를 일부가 과점하지 않고 공유하여 이를 기본사회를 만드는 데 써야 한다는 설명이다. 사회적 공유부(공유재)에 기초한 기본소득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부의 재분배, 사회 환원의 방법으로 떠오르는 탄소세(탄소배당), 금융거래세 등이 손꼽힌다. ‘인공지능의 아버지’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의 ‘조세형 기본소득’ 아이디어이다. 정부가 모든 회사의 지분 50%를 소유하고 배당받아 기본소득으로 분배하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미드의 ‘배당형 기본소득’도 있다(강남훈 기본사회위원회 부위원장 강연 자료 참조). 태양과 지구가 만들어 준 자연 공유부(공유재)를 활용하는 방법은 국내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전남 신안군은 군민의 직접 투자, 협동조합 방식의 사업으로 해상풍력, 태양광 사업을 펼쳐 현재 군민 28%에게 1인당 연간 40만원~240만원을 주고 있다. 2030년에는 전체 군민에게 매월 50만원~100만원을 지급할 예정이다. 이처럼 기본사회를 떠받치는 지속가능경제의 방향성과 구체 정책은 사회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담대하게 실천할 때 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20여 년 전 복지국가 정책 전환기 당시 용기 있는 실천으로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했듯 말이다.   기본사회의 또 다른 축인 기본서비스는 기본사회 실천 전략의 중심에 있다. 교육, 돌봄, 금융, 의료, 주거, 교통, 에너지, 통신, 문화 등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혁신을 담고 있다. 사회적 합의와 정부의 의지가 핵심인 부분이다. 30년 후를 기약하며 지금부터 차근차근 각근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시흥시정연구원 보도자료 갈무리   기본사회의 가장 가까운 실천 방향은 기본소득이 될 것 같다. 그중에서도 지역화폐를 활용하는 정책들이다. 기본사회의 전신 격인 기본소득은 이미 다양하게 구현되고 있다. 농어민 기본소득, 청년기본소득, 경기도 기후행동 기회소득 등 시흥시 지역화폐인 ‘시흥화폐 시루’로 지급되는 각종 복지비 또는 정책 참여 보상비 종류만 60여 건이 넘는다. 당장 정부가 추진하는 고유가피해지원금 역시 지역화폐로 지급된다.   사회 및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한 재정정책을 지역화폐 지급으로 풀어가는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돈을 풀되(재정정책) 지역에서만 쓸 수 있는 돈(지역화폐)으로 소비의 부가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지역에서 머물며 지역경제 활성화로 돌아오는(지역순환경제) 방식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검증을 마친 상태이다.   경기 시흥시의 구체 사례 결과를 들어보자면, 올해 2월 시흥시정연구원이 발표한 ‘시흥화폐 시루 성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사용자 52.6%가 ‘시루 사용 후 소비 증가’, 87.2%가 ’대형마트·온라인 대신 관내 가맹점 이용‘, 19.8%가 ‘관외 소비를 시흥시로 전환’, 가맹점 평균 매출 25.6% 추가 증가, 슈퍼마켓 등 유통업 매출 37.8% 증가 등 확실한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를 증명했다. 지역화폐는 기본사회 정책의 세 가지 축인 기본소득, 기본서비스, 지속가능경제 모든 영역에서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사회의 근본 지향은 결국 기술혁신 등에 따른 부의 극심한 집중으로부터 사회·경제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국민의 삶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순환’의 역할을 지역화폐가 담당할 수 있다. 국민의 삶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재정이 다시 지역과 공동체 안에서 순환하는 구조. 기본사회가 거대한 국가 비전이라면 지역화폐는 비전을 현장에서 구현하고 시너지 효과를 가져오는, 이미 작동하여 성과를 증명한 가장 현실적 도구가 될 것이다.  
2026-04-20 | hrights | 조회: 41 | 추천: 1
이동우/ 변호사   원래도 다양한 일이 쉴새없이 일어나는 대한민국이지만, 근래에는 세계적인 사건들까지 겹치면서 정말 하루하루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벅차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만 4년을 넘어 5년 차에 접어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한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이 전 국민의 입에 오르내리고, 초등학생들도 유가에 관해 이야기하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큰 파급력을 갖는 사건들이 반짝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가 금방 사라져갔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이 허용된 것과 검찰개혁의 일환인 공소청과 중수청 설립을 위한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 허용은 재판도 수사와 기소처럼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는 공권력의 행사이므로 헌법에 부합하는지를 판단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검찰개혁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국민적 관심은 작게 받았으나,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 헌법소원이 허용된 것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에 비추어볼 때 엄청난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칼럼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상 헌법재판소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 헌법재판이 도입된 큰 이유 중 하나는 법원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법원의 강력한 반대로 헌법재판소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법원의 재판에 대해서는 헌법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심사할 수 있는 헌법소원을 허용하지 않았다. 도입하려는 제도의 가장 큰 목적을 배제하고 도입하는 실로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랬던 우리나라에서 여러 상황이 맞물리면서 재판에 대해서도 헌법위반 여부를 심사할 수 있는 헌법소원이 허용된 것이다. 헌법재판소 제도의 가장 큰 도입 목적이 제도 도입 약 38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니 실로 큰 의미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 도입이 실질적인 4심제로 기능해 국민에게 불편만을 가중할 것이란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앞서 언급한 대로 법원이 내린 재판이라고 해서 감시와 통제의 대상에서 제외될 순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원칙을 현실화했다는 점에 있다.   사진: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재판소원’시행 관련 안내 페이지) 갈무리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격언처럼 어떤 통제도 받지 않는 제도적 권력은 그 자체로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법원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확정 짓는 판결에 대한 권리를 독점한 채 그 어떤 외부적 감시와 통제도 받지 않았다. 그 결과 법원은 스스로 국민주권주의를 규정한 헌법 위에 군림하면서 법원의 결정이 곧 이 사회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절대적 철칙이라는 독선적 모습이 점차 강해졌다. 중간중간 독재정권 시절 내려진 판결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도 보이며 국민의 법원으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러한 변화는 큰 흐름이 되지 못했다. 법원이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변모하지 못했다는 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은 바로 대통령선거를 불과 33일 앞둔 2025년 5월 1일 대법원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서울고등법원의 결정을 뒤집은 판결이다. 국민의 대표는 국민이 선출한다는 민주주의 원리와 국민주권이라는 헌법 제1조의 규정을 철저하고 무시하고, 내가 인정하지 않는 후보는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독선과 오만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실로 엄청난 사법 권력의 독점이자 남용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재판도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이 제기됐고, 급기야 재판에 대해 헌법소원이 허용된 것이다.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 허용은 국민을 위한 법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법원은 과거사 사과와 같이 검찰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적 요구와 눈높이에 부합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법원이 스스로 천명하는 국민의 인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되기 위해서도 더 많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법원의 변화가 곧 법원 구성원을 포함한 국민 모두의 행복과 소중한 인권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2026-04-07 | hrights | 조회: 253 | 추천: 5
장은주/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지방선거가 얼마 안 남았다. 언론과 정치권의 관심은 온통 서울, 부산, 대구같이 지금 국민의힘이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서 과연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쏠려 있다. 확실히 지역 사회의 정권교체는 정말 중요한 과제다. 서울, 부산은 물론이고 한 번도 민주당이 정권을 차지해 본 적이 없는 대구에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할 수 있다면, 민주화 이후 고착된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 정치 구도가 크게 흔들리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여론 흐름만 보면, 선거 결과가 좋을 것 같아 기대가 크다. 그러나 그동안의 지역 정치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최선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과연 우리 지역 사회의 현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지에 대해 쉽게 낙관하지 못한다. 우리 지역 정치가 중앙의 적대적 양당제에 일방적으로 지배되고 있어서다. 지역 차원의 정권교체가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 일이 중앙 정치 차원을 넘어 정말 우리 지역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낼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민주당조차 수도권 중심 정당이 된 지 오래인데, 호남을 넘어 영남 지역에서도 민주당이 정치적 주류가 된다고 해서 그 자체만으로 지역민들의 삶이 얼마나 많이 개선될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정당정치의 의미를 폄훼하거나 민주당의 정치적 역량을 회의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는 우리 정치의 본원적 ‘수도권 중심주의’가 심지어 지방선거에서도 압도적으로 관철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현실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지금의 선거 중심의 양당제에서는, 설사 얼마간 지역주의 구도가 완화된다고 하더라도, 중앙 정치에 의한 지역의 내부 식민화는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어 보인다는 게 문제다. 지역 차원의 정치에서는 실제로 지역 사회에 사는 지역 주민들의 실질적 주권이 제대로 실현되도록 하는 게 정말 중요해 보이는데, 지금과 같은 제도적 틀 안에서는 본원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물론 시민주권의 실현은 중앙 정치에서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지금 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스스로 현안들에 대한 답을 찾을 기회를 가지는 건 사활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생성 이미지   단순히 지방 정치에서는 무슨 직접민주주의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정당정치와 대의정치를 존중하되, 그래서 지역주의 정치가 극복되어야 하는 건 너무도 마땅하지만, 지역 사회 차원에서는 더 절실하게 시민들이 더 깊고 체계적으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게 요점이다. 여기 우리가 참조할 만한 좋은 사례가 있다. 바로 동벨기에(Ostbelgien) 지역의 ‘영구 시민 대화’ 제도다. 이 지역은 인구 7만7천 명 정도의 독일어권 사용 인구 지역인데, 2019년부터 상설 ‘시민의회’를 도입하여 지역 사회의 다양한 지역 사회 현안들을 두고 시민들의 숙의를 끌어내고 이를 지역 의회가 수용하여 정책화하는 실험을 해 왔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단순히 직접민주주의의 강화가 아니라 정당정치와 시민정치의 생산적 거버넌스를 체계적으로 제도화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의 상설대화 제도는 다음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시민평의회(Citizens’ Council): 추첨으로 선발된 24명으로 구성된 상설기구로, 매년 1~3개의 시민의회 주제·범위·구성을 결정하고 전체 과정을 감독한다. 시민의회(Citizens’ Assemblies): 주제별로 25~50명을 연령별, 계층별, 성별 균형을 맞추어 무작위로 추출해 숙의와 권고안을 작성하는 일시적 기구로, 합의 또는 4/5 다수로 권고를 채택한다. 상설 사무처(Permanent Secretary): 의회사무국 소속 공무원으로, 추첨·예산·행정·홍보·후속 모니터링 등 실무 전반을 담당한다.   이 시민 대화 실험은 말하자면 새로운 방식의 민관협동 모델을 추구한다. 시민의회에서 도출된 권고안은 관련 상임위원회에 제출되고, 세 번의 연속된 ‘공동위원회’ 절차를 거친다. 1차로 시민 대표단이 권고를 발표하고, 의원·담당 장관·전체 시민참가자가 공개 토론을 진행한다. 그 후 의원·장관이 각 권고에 대해 수용 여부와 이행 방식, 미이행 시 구체적인 거부 이유를 포함한 의견서를 작성한다. 이 의견서는 시민참가자와 함께 2차로 공개적으로 검토·토론된다. 1년 후 마지막 3차 회의를 통해 모든 사안을 점검한다. 법적으로는 의회·정부가 시민 권고를 반드시 채택할 의무는 없지만, 공식화·상설화된 공개 절차와 명시적 “거부 사유 설명 의무”가 정치적 압력을 만들어 사실상 상당한 실질적 이행을 유도한다. 이 동벨기에 시민의회 모델은 단발성·자문적 시민참여가 민주주의 위기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진단에서 출발해, 상설·제도화된 시민 숙의를 대안으로 추구한다. 이 실험에서는 무엇보다도 시민의회의 권고안에 대해 공개적·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거부 사유 설명 의무”를 둠으로써, 대의제 민주주의 체계 안에 제도화된 “제2의 숙의 채널”을 구축한 점이 새롭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시민의회 실험은 단발적으로 계속 시도됐으나 주로 중앙 정치 차원에서 기후 위기 같은 비교적 정치적으로 덜 민감한 의제들 중심이었다. 동벨기에는 그런 시민의회 실험이 정말 필요하고 또 가장 잘 안착할 기회가 다름 아닌 지역 사회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실험을 한국의 지역 사회에서 해 볼 수는 없을까? 추첨을 기반으로 세대별, 계층별, 성별 등에 따라 통계적으로 가장 근사하게 시민들의 구성 양상을 반영하는(여론 조사 표본처럼 선발된) 대표자들이 깊이 있는 숙의를 통해 지역 정치의 현안들에 대해 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게 하는 제도를 정착시킨다면? 광역시도 수준에서는 물론이고 기초지자체 수준에서(또는 읍면동 수준도 좋다) 이런 식으로 상설화된 시민의회가 여러 현안에 대해 시민들의 숙고를 담은 권고안을 만들어 선거로 선출된 의회나 단체장이 이를 어떤 식으로든 수용하게끔 하는 식의 제도적 틀이 마련된다면? 만약 이런 ‘지역 시민의회’가 일상화된다면, 여전히 지역주의라는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나라 많은 지역의 정치적 삶은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실험은 아래로부터 제기되는 압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단체장들이나 지방 의회가 앞장서 나서고 수용할 때 더 확실하게 성공이 보장될 수 있다. 정당들, 특히 집권 가능성이 큰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이번 선거를 통해 지역 정치도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일 것임을 약속하는 차원에서 지역 시민의회 상설화라는 혁신적 실험을 공약으로 내걸고 과감히 시도해 볼 것을 제안해 본다.  
2026-03-31 | hrights | 조회: 730 | 추천: 9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이른바 ‘4세 고시’를 금지하는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학원법)’ 개정안이 3월 1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올해 9월부터는 학원 운영자가 유아를 대상으로 모집이나 수준별 반 배정을 목적으로 시험·평가를 실시하면, 영업정지나 과태료 처분할 수 있게 됐다. 유치원식 영어학원에서 치르는 레벨 테스트, 그걸 준비하는 학원에 들어가려고 치르는 시험을 지칭하는 4세 고시를 입법으로 규제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험을 금지한다고 선발이 사라지지 않는 데 있다. 지난 1월에는 ‘대치동 캠핑카’가 화제가 됐었다. 겨울방학 동안 대치동 학원 특강을 듣는 아이를 실어 나르는 부모가 도로변에 캠핑카를 주정차해둔 모습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아이가 학원과 학원 사이 틈나는 시간에 캠핑카 침대에서 눈을 붙이고, 부모는 부모대로 캠핑카에서 일도 보고 쉬기도 한다는 것이다. 주정차 위반으로 적발되어 과태료를 내더라도 인근에 오피스텔을 빌리는 것보다 캠핑카가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캠핑카 이용은 과잉 경쟁의 한 풍경이면서도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합리적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4세 고시나 대치동 캠핑카는 일부 중상류층이 시간과 자원을 총동원해 계층 재생산에 나서는 병리적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정 학교와 학과, 전공 졸업장이 안정적인 직업 진입의 보증 수표가 되면서, 그 선발의 진입구를 점유하는 데에 유리한 전략적 행위의 목록에 이제 캠핑카까지 한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입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 목록에는 다른 것도 많다. 한동안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에서 위장전입이 단골 메뉴처럼 등장했었다. 위장전입은 불법이었으나 부동산 투기가 아니라 자녀 교육 목적이라면 관대하게 보자는 일종이 타협이 이뤄지기도 했다. 과외 금지 시절의 비밀과외나 학생부종합전형 비율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부모 찬스 스펙 쌓기도 어쩌면 그런 관대함으로 용인됐던 전략적 행위가 아니었을까.   사진 출처   반드시 정답이 있어야만 하는 시험과 실수하지 않는 것도 실력으로 간주하는 경쟁의 포로가 된 입시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동원하는 이 전략들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신호로 작동하고 있다. 상류층이 주도해서 “이 경쟁은 빠를수록 유리하다”거나 “늦으면 따라잡기 어렵다”라는 불안 신호를 증폭한다. 불안 신호는 디지털 시대의 촘촘한 네트워크를 타고 중산층과 서민에게로 빠르게 전달된다. 자녀가 계층 사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중산층의 심리를 사로잡고 자극한다. 사교육 시장에서는 그 불안을 원료로 다양한 채널로 차별화한 가격의 새로운 상품을 끊임없이 공급한다. 구매력이 낮은 서민 계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도 그 상품 공급에 참여해 왔다. 교육부가 재정을 투자하는 EBS 수능방송과 문제집은 대입 준비 필수 서비스로 확고한 입지를 다진 지 오래다. 일부 학교에서는 수능방송을 시청하고, EBS 문제집을 교과서처럼 활용하기도 한다. 서울시청 외벽에 ‘서울런’ 수강생의 명문대 입시 성공 현수막이 걸리기 한참 전에 이른바 ‘강남인강’이 유행했었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자치단체들이 서울의 유명 학원 강사와 입시 컨설턴트를 초빙해 특강을 개최하는 일도 이제는 낯익은 풍경이다. 공공이 제공하는 이런 서비스는 불안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됐겠지만, 오히려 제도화된 형태로 불안을 재생산하는 데에 일정 부분 기여도 했을 것이다. 자녀를 4세 고시로 내몰고, 캠핑카에 태워 대치동 학원을 오가는 부모는 우리 사회 전체로 보면 어쩌면 극소수일 것이다. 4세 고시를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상품화된 시험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도록 해서는 안 된다. 4세 고시를 금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입시 경쟁의 불안 신호가 증폭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불안 신호는 금지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불안 신호가 생겨나고 증폭되는 조건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조건을 바꾸는 해법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사회의 신호를 바꾸는 것이다. “일찍 경쟁을 시작해야 살아남는다”가 아니라 “너에게는 너에게 맞는 때와 속도가 있다” “사다리 아래에는 아주 단단한 그물이 있다”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아야 한다” “입시는 교육의 아주 작은 부분이며, 교육의 더 큰 목적은 더불어 살아가는 인격과 소양을 갖추는 것이다”와 같은 신호를 학교를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더 많이 생산하고 발신하는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가 그 신호를 신뢰하여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고 지속하는데 누구보다도 정치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결국 사회의 신호는 우리가 모두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2026-03-25 | hrights | 조회: 421 | 추천: 10
도재형/ 이화여자대학교 법전원 교수   2025년 12월 고용노동부의 업무보고에서 장관은 “모두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나라”라는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 존중 입법 패키지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세부 과제로서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이하 ‘일하는 사람 기본법’ 또는 ‘기본법’이라 한다) 제정을 통해 공정한 계약을 체결할 권리,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 등을 법률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권리 행사 과정에서 갈등 발생 시 국가가 조정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고용노동부의 계획대로라면, 올해 5월경 일하는 사람 기본법 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후속 사업이 시행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22대 국회에선 김주영 의원, 장철민 의원, 이용우 의원, 김태선 의원, 박홍배 의원, 임이자 의원 등이 대표 발의한 여러 법률안이 계류되어 있다. 고용노동부의 설명에 따르면, 기본법 제정안은 일하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인격을 존중받고 평등하게 대우받을 권리,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 공정한 계약 체결 및 적정 보수 등을 보장받을 권리, 사회보장 제도를 향유할 권리, 일과 양육․돌봄․휴식․여가 등 개인 생활과의 조화를 향유할 권리, 직업능력 개발 관련 교육․훈련을 받을 권리, 본인의 일 또는 경력 정보에 관한 권리, 노무 제공 조건 및 지위 개선 등을 위해 단체를 결성하거나 이에 가입할 권리 등(고용노동부, 2026. 1. 19.자 「권리 밖 노동 보호를 위한 패키지 입법 설명자료」). 기본법의 보호 대상인 ‘일하는 사람’은 노동법상 근로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지위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즉 기본법은 근로기준법이나 노동조합법 등 노동관계 법령이 정한 근로자인지를 따지지 않고, 모든 일하는 사람에게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플랫폼 종사자, 특고, 프리랜서 등 많은 일하는 사람이 노동법의 문턱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24년 현재 자신의 소득 가운데 3.3%(사업소득세)가 원청징수되는 1인 자영업자의 규모가 약 870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보호 범위로 포섭될 것으로 예상된다(2026. 2. 17.자 시사인). 정부와 여당의 기본법 제정 움직임에 대해 노동계 일부는 반대한다. 그 이유로선 ‘별도의 기본법 제정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의 확대 적용을 통해 근로자성을 인정해야 한다’거나 ‘권고나 노력 의무만 열거해선 안 되고 더 많은 금지 규정과 처벌 조항이 필요하다’는 이유 등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제정 취지와 내용을 오해하거나 그 효과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고용노동부 홈페이지 갈무리   먼저, 그 주장처럼 근로기준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여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모든 일하는 사람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포함하여 근로기준법상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노동 과정의 현실에 맞지 않다. 예컨대 배달 플랫폼 종사자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하더라도 이들에게 1일 8시간, 1주 40시간의 근로시간제를 적용하는 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앞에서 설명한 870만 명의 일하는 사람의 노무 제공 모습이 다양하다는 점도 무시해선 안 된다. 이들 중 배달 플랫폼 종사자나 보험설계사, 대리기사 등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은 1, 200만 명 내외이다. 나머지 6, 700만 명의 사람들은 SNS, 숨고, 크몽 등과 같은 플랫폼이나 전통적인 일감 알선 과정을 통해 일하고 있다. 기본법은 이러한 대다수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이다.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제정을 근로기준법의 적용 확대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사안을 연결하려는 무리한 시도이다. 다음으로, 일하는 사람 기본법이 권고 및 노력 규정만 있어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은 그 제정의 의미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기본법 제정의 첫 번째 의의는 일하는 사람에게 ‘노동자’란 이름을 붙여 이들의 권익을 노동법적 시각에서 보호함을 명문화한다는 것이다. 과거 특고, 프리랜서 등 새로운 고용에 관한 보호 정책을 논의할 때 항상 걸림돌이 된 것이 주무 부처를 정하는 문제였다. 이들을 자영업자로 볼 경우 경제부처가 담당해 경제법을 적용하고, 노동자로 보면 고용노동부가 관장하며 노동법을 살펴보게 되기 때문이다. 즉 관할 부처를 어디로 할 것인지는 일하는 사람이 노동자로 보호받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기본법의 제정 취지는 일하는 사람의 권익 보호 책무를 고용노동부와 노동위원회에 맡김으로써 일하는 사람들이 첫 관문을 통과할 열쇠를 제공하려는 것이다(이 점이 경영계가 기본법 제정을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아가 비록 일부 조항이 권고 규정으로 되어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성문법 국가에서 일하는 사람의 권리가 실정 법규에 명시된다는 점은, 비록 그 내용이 근로기준법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결코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비가 오던 2026년 2월 10일, 서울 은행회관에서 노동법학회와 고용노동부의 공동 주최로 “「일하는 사람의 권리에 관한 기본법」 및 「근로자 추정 제도」 입법 토론회”가 열린 바 있다. 그런데 그 회의실엔 입법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들이나 노동계의 대표자 중 누구도 있지 않았다. 870만 명의 일하는 사람들의 처지가 그러한 듯하다. 조직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엔 찬성하지만, 실제 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첫 번째 실마리를 풀기 위해 나서는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일하는 방식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모습의 일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는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입법안은 늘 당위론과 원칙에 막혀 연구자들의 토론회에서 맴돌고 있다. 때때로 나는 산업혁명 이후 봉건제가 끝나고 새로운 생산 체제가 등장할 무렵, 그 시대의 사람들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와 비슷한 고민 속에서 가지 않은 길을 모색했을 거라고 상상하곤 한다. 그때도 지금처럼 새로운 정책과 법제를 마련하는 데 주저했을 수 있으나, 결국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용기 덕분에 ‘노동법’이란 사회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하는 사람 기본법의 제정 역시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이지만, 그 방향이 옳은 이상 지금 용기를 내어 일하는 사람들에게 노동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첫걸음을 떼야 할 것이다.  
2026-03-17 | hrights | 조회: 144 | 추천: 4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촉법소년이 현 정부에서 또 소환됐다. 법무부가 촉법소년 연령의 상한을 13세에서 12세로 낮추겠다는 정책을 세웠다. 지난 정부에서도 법무부 업무보고 때 담겼던 내용인데, 당시 대통령은 비상계엄으로 탄핵당했고, 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현 정부에서는 국무회의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대통령도 “압도적 다수 국민이 찬성한다”라면서 실천 의지를 드러냈다. 대통령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지금 정부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크다. 촉법소년(觸法少年)이란 ‘형벌 법령에 저촉(抵觸)되는 행위를 한 10세-13세 소년’을 말한다. 범죄를 저지른 소년을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형사미성년자에 해당하여 형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범죄는 예컨대 절도, 강도, 강간 등을 말한다. 형벌은 예컨대 사형, 징역, 벌금 등을 말한다. 형법이 범죄와 형벌을 규정한 대표적인 법률이지만, 이 밖에도 형벌 법령은 많다. 촉법소년은 형벌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소년법이 정한 예컨대 소년원 수용, 사회봉사명령, 수강명령, 보호관찰 등을 받을 수 있다. 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처분이라는 점을 주목하여 흔히 보호처분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회의 안전을 위한 처분이다. 보안처분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본질에 부합한다. 보호처분이라고 부르니 촉법소년의 범죄로 피해를 본 사람은 물론 촉법소년 자신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것 같다. 보호처분이 아니라 보안처분으로 부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서 형사미성년자가 아닌 소년도 보호처분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을 흔히 범죄소년이라고 부른다. 범죄를 지은 14세 이상 19세 미만 소년을 말한다. 범죄소년은 보호처분을 받을 수도 있지만,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 촉법소년 연령의 상한을 12세로 낮추자는 것은 범죄를 저지른 13세 소년은 보호처분만 받을 수 있는 촉법소년이 아니라 형벌도 받을 수 있는 범죄소년으로 변경하자는 것이다. 형법과 소년법을 개정하여 13세 촉법소년에게도 형벌을 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촉법소년의 급증과 흉포화이다. 형법(1953년)과 소년법(1958년)이 제정될 때 13세와 현재의 13세는 다르다는 것이다. 지적‧신체적 능력이 훨씬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극소수의 살인, 강도를 두고 촉법소년의 흉포화를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 1963년에 소년법을 개정할 때도 소년범죄의 저연령화·흉포화와 함께 강경책이 제시됐다. 그런 소년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된 것인데, 같은 말을 우리 아이들에게 하는 것이다. 소년과 그 소년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떠나서 행위만 놓고 이를 본보기로 삼아 손쉬운 엄벌을 주장하기에 앞서 촉법소년 급증의 원인 분석과 이에 맞춘 정책이 우선이다. 형벌과 보호처분 모두 형사제재이다. 다만 형벌은 행위에 비중을 두는 것인 반면, 보호처분은 행위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보호처분 중 소년원 수용은 최대 2년까지 가능하다. 소년원은 징역형을 받아서 수용되는 소년교도소와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왜 13세 촉법소년에게도 형벌을 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일까. 그 이유는 2년 이상 징역을 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범죄소년 중 과연 몇 명이나 징역형을 실제로 받을까. 2024년에 범죄소년 61,729명 중 약 1%인 649명이 징역의 실형을 받았다. 2024년에 촉법소년이 20,814명이었는데, 이 중 13세는 나머지 인원의 4배 정도로 추정되므로 13세는 약 16,600명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촉법소년 연령의 상한을 12세로 낮추면 13세 촉법소년 약 16,600명 중 약 1%인 166명이 징역의 실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2024년에 소년원 처분을 받은 13세 촉법소년은 83명이었다. 징역의 실형을 받을 13세 촉법소년은 83명보다 적게 나타날 수 있다. 촉법소년 연령 상한 13세로 인하 정책은 고작 100여 명을 겨냥하고 있다. 촉법소년 연령 인하 정책의 숨은 의도는 형벌은 전과기록으로 남으나, 소년원은 전과로 남지 않아 아이들이 크게 두려워하지 않으니, 낙인이 되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아이들에게 줘서 범죄를 억제해 보려는 것이다. 일종의 겁주기다. 그러나 겁주기의 범죄예방 효과는 검증되지 않았다. 전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효력이 없어지고, 더욱이 소년법은 형벌로 인한 공무담임권 등의 자격에 불이익을 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무부의 촉법소년 연령 인하 정책은 검찰권 강화를 의미한다. 형벌은 형사법원이 주고, 보호처분은 소년법원이 주는 것인데, 범죄소년을 형사법원으로 보낼지, 아니면 소년법원으로 보낼지 판단을 검사가 한다. 반면에 촉법소년은 검사가 개입할 수 없고, 경찰서장이 소년법원에 보낼 수 있다. 따라서 촉법소년이 범죄소년으로 바뀌면, 검사가 개입해서 소년법원에 보낼지, 형사법원에 보낼지, 아니면 아예 기소유예하거나 불기소할지 등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검찰권 강화는 현 정부의 정책 기조에 어긋난다.   EBS 뉴스 갈무리   현재 촉법소년과 범죄소년을 구별해서 처리하고 있다. 촉법소년은 경찰과 소년법원의 이원적 체계지만, 범죄소년은 경찰과 검찰 및 법원의 3원적 체계이다. 단순히 촉법소년 연령 인하 논의를 앵무새처럼 반복할 것이 아니라 법원 중심으로 소년범죄 처리 체계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 촉법소년과 범죄소년을 구별하지 않고, 경찰이 조사한 후 모두 법원으로 송치하고 법원이 소년보호사건으로 처리할지, 아니면 소년형사사건으로 처리할지 판단하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이를 흔히 법원선의(先議)주의라고 한다. 소년은 어른이 설계한 환경에 종속되어 있다. 소년의 범행은 어른의 범행과 다르지 않지만, 소년은 어른과 다르다. 불공정한 교육 환경 아래 디지털시대 불법·유해 정보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대학 서열화를 배경으로 한 입시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이 오롯이 범죄의 책임지도록 하는 것은 어른답지 않다. 촉법소년에게 의미 있고 합리적인 환경을 제공하지 못한 어른의 책임이 더 크다. 소년범죄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사람보다 돈(자본)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선택의 순간에 돈을 추구하는 가정과 사회의 탐욕이 아닐까. 그러니 교육도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됐고, 아이는 인간 중심, 과정 중심, 본질 탐구형 교육이 아니라 자본 중심, 결과 중심, 보여주기식 교육에 길들었다. 타인을 존중하며 협력하기보다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물적 대상화하고, 자기 이외의 사람은 마치 물건처럼 취급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른이 아이에게 야단치고 벌주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범죄를 저지른 소년의 마음에 상처가 있다. 가정이 없거나 해체되어 공감과 지지를 받고 칭찬을 들어본 일이 없을 것이다. 겁이 나지만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런 소년을 처벌하고 야단치는 건 쉽지만, 설득하고 교육을 하는 것은 어렵다. 일단 시간에 쫓기지 않고 그들의 얘기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소년범죄 처리는 그랬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 어른이 문제인가 따져보지 않고 힘없는 아이들만 겁주고 야단치고 비난하지 말자. 어리다고 함부로 하지 말자.   ※ 촉법소년 연령 인하 정책은 검찰권 강화로서 현 정부의 기조에 반함 법원 중심으로 소년범죄 처리 체계 전환 필요 소년에게는 비난과 처벌이 아니라 공감과 지지가 필요  
2026-03-10 | hrights | 조회: 451 | 추천: 5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1. 아주 오래전에 중풍으로 쓰러진 시모를 모시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시어머니의 성정이 괄괄했던지라 시집살이가 몹시도 모질었단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으니, 어려운 시모를 모시며 그러려니 하면서 참는 게 며느리의 도리인가 하며 살았단다. 돌아보면 눈물로 살아낸 시절이기도 하였단다. 그 무섭기만 하던 시어머니가 어느 날 쓰러졌다. 시어머니는 쓰러져서도 기세등등하였다. 아들은 어머니한테 극진했으나 자리보전한 시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오롯이 며느리인 그이의 몫이었다. 심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몸을 쓰며 돌보는 일은 그이를 지치게 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어머니를 이리저리 눕히며 기저귀를 갈자니 손목이 시큰거렸다. 똥 기저귀라도 갈려고 한쪽으로 눕힌 시어머니를 그대로 확 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욱하고 치밀기도 하였다. 그렇게 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을 때 딸과 남편이 주말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시간을 내주었다. “엄마, 주말에는 내가 할머니를 돌볼 테니 엄마 하고 싶은 거 해!” 힘들어하는 아내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남편도 딸의 말을 거들었다. “산에라도 가서 바람 좀 쐬고 그래~.” “다른 자녀는 없었나요?” 내가 묻는 말에 그이는 “왜 없어! 시누이가 와서 나 대신 돌봐준다고 해도 시어머니가 몸에 손도 못 대게 그래!” 한다. “왜 그러시죠?” “왜 그러겠어. 자기 딸이 귀하니까 힘들고 지저분한 일 시키고 싶지 않은 거지, 그러니 내가 더 화가 나는 거야!” “정말 힘들겠네요!”     2. 돌발성난청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 입원하는 며칠 동안 병실의 환자는 계속 바뀌었으나 어르신 한 분은 나보다 먼저 입원해서 내가 퇴원하고 나서도 계셨다. 침대에서 꼼짝달싹 못 하는 할머니를 낮 동안에는 며느리가 와서 돌보다가 저녁 시간이면 퇴근길에 들른 아들이 잠시 지켜보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할머니는 아들은 자랑스러웠고, 며느리는 못마땅했다. 며느리가 잠시라도 자리를 뜨면 나한테 이 얘기 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잠깐의 이야기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만큼. 내가 입원하고 이틀째인가, 낮에 약속이 있는 며느리 대신 아들이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환자를 돌아보던 간호사들이 헉, 하고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기저귀 갈아드리지 않았어요?” 간호사들의 말에 아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네~~.” 하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변을 본 지 오래되셨네요!” 할머니는 눈을 꼭 감고 있었고 아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 당장 갈아드리지 않으면 큰일 나요!” “내가 어떻게 해요! 이따 아내가 오면 하라고 할게요!” “아내가 언제 오는데요?” “저녁때 올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리면 똥독 올라 큰일 나요!” “어휴, 난 못해, 난 못해요!” 아들은 그러면서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 일을 어쩐다, 비닐 가져오고 수건 가져오고 빨리빨리 해요~.” 세 명의 간호사가 할머니를 들어 올리고 비닐을 깔고 기저귀를 빼내고 씻기고 새 기저귀 채우고…. 그러는 동안 할머니는 간호사들과 아들이 하는 말을 두 눈 꼭 감은 채 귀로 듣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침 녘에 똥을 눴으나 차마 아들한테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할머니가 느낄 수치심에 대한 배려보다는 빨리 치워야 한다는 생각과 불감한 아들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민망해진 나는 슬그머니 병실을 나왔다. 3.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누군가에게 나를 의탁한다는 것은 그저 아픈 몸만 맡기는 게 아니라 체면과 기억과 수치심까지도 맡긴다는 것을. 지인의 시어머니가 딸에게 자신의 뒤처리를 시키지 않은 것은 귀한 딸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나의 몸을 의탁하기에는 딸이 먼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의 내밀한 곳을 의탁하기에는 딸보다는 며느리가 가깝고 임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지인에게 위로의 말을 달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면 지인은 억울해했을까, “왜 그럴 때만 내가 임의로운 사람이냐고” 하고. 더없이 자랑스러운 아들보다는 못마땅한 며느리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는 게 자연스러운 시어머니는 수치심으로 눈을 꼭 감아버렸다.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자신이 돌보기 민망하면 간호사들한테 간곡히 부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저 난색을 보이며 펄쩍 뛰었으니 말이다. 저녁에 간호사들한테 그 이야기를 들은 며느리는 혀를 찼다. 그래도 어머니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말없이 곁에 있었다.   몸을 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약한 순간을 내어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돌봄이란, 한 사람이 가장 연약해진 그 순간에, 가장 낮아진 자리에서조차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2026-03-03 | hrights | 조회: 211 | 추천: 9
한영선/ 경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전 서울소년원장   “촉법소년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을 엄벌해야 한다.” 연일 쏟아지는 뉴스 헤드라인만 보면 대한민국은 무법천지의 소년 범죄 공화국이 된 것만 같다. 실제로 통계 수치는 이러한 공포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법원행정처의 사법연감에 따르면 소년법원에 접수된 사건은 2015년 34,075건에서 2024년 50,848건으로 많이 증가했다. 특히 경찰서장이 송치하는 촉법소년 사건은 2015년 6,756명에서 2024년 21,887명으로 3배 이상 폭증했다. 이 숫자 앞에서 대중은 분노하고, 정치권은 연령 하향이라는 칼을 빼 들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통계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싶다. 과연 아이들이 더 악해진 것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더 많이 법정으로 내던지고 있는 것일까?   통계의 착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찰서장이 촉법소년으로 송치하였다는 사실만으로 소년이 촉법소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경찰은 14세 미만의 촉법소년에 대해서는 수사할 수 있는 권한도 없고, 사법적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법제상 촉법소년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소년법원 판사뿐이다. 소년법원 판사는 사건을 조사한 후에 사안을 따져서 심리불개시, 불처분 또는 보호처분 등의 결정을 하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소년부 판사가 내린 결정의 내용이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4년 심리불개시와 불처분 결정은 18,206건으로 35.7%에 이른다. 심리 불개시 또는 불처분이란 사안이 경미하거나, 굳이 보호처분을 할 필요조차 없다고 판사가 판단한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과거 같으면 학교나 가정, 혹은 지역사회에서 훈육하고 타이르며 해결했을 사소한 다툼이나 일탈 행위들이 지금은 무차별적으로 법원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다. 경찰은 규정에 따라 기계적으로 아이들을 송치하고, 학교와 피해자는 교육적 해결보다는 “법대로 하자”며 아이들을 사법 절차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놓는다. 통계적으로 범죄가 폭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이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처벌의 외주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나는 이 현상을 화가 난 어른들의 ‘처벌의 외주화’라고 부르고 싶다. 갈등은 우리 사회 어디에나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건강한 공동체라면 갈등 발생 초기 단계에서 대화와 화해, 협상과 같은 자율적인 해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갈등 해결 기술을 이미 잃어버렸고, 갈등 상황이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른다. 갈등을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승패(Win-Lose)’의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아이 간의 사소한 다툼이나 비행을 목격했을 때, 어른들은 교육적 지도를 포기하고 가장 손쉽고 강력한 수단인 ‘경찰 신고’와 ‘법적 처벌’을 선택한다. 이는 갈등 해결에 드는 시간과 감정적 비용을 지급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이자, 훈육의 책임을 국가라는 공권력에 떠넘기는 비겁한 태도다. 아이를 가르치고 길러야 할 어른들이, 화가 난다는 이유로 그 역할을 판사에게 외주를 주고 있는 셈이다.   EBS 뉴스 갈무리   ‘즉각적인 처벌’이 망치는 미래 이러한 ‘엄벌주의’와 ‘즉각적인 사법 처리’는 공동체의 사회적 자본을 파괴한다. 갈등 해결의 스펙트럼에서 대화와 조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물리적 강제력이나 사법적 결정에 의존할수록 공동체는 해체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아이들을 망친다는 점이다. 발달범죄학적으로 전체 범죄 소년의 93.2%는 청소년기에 일시적으로 비행을 저지르다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범죄를 중단하는 ‘청소년기 한정형 범죄자’이다.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과자’라는 낙인이 아니라,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수 있게 하는 ‘회복의 기회’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이들을 무조건 사회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들이 감정적으로 소년원 또는 소년교도소와 같은 격리 시설로 보내진다면, 10년 후에는 진짜 범죄자가 되어서 사회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반항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의 호소 갓난아이가 울 때, 우리는 아이가 부모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배고픔이나 불편함을 호소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욕구를 해결해 준다. 비행을 저지르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도와주세요”라는 말 대신에 반항을 선택한다. 그들의 행동은 결핍된 환경과 사랑의 부재를 알리는 신호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시끄럽다”라며 처벌의 재갈을 물리려 하고 있다.   어른의 품격 통계의 숫자에 속지 말자. 아이들이 흉포해진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관용이 사라진 것이다. 촉법소년 연령 하향은 국가와 사회가 져야 할 ‘교육과 보호’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전가하는 가장 나쁜 선택이다. 진정한 어른의 행위는 아이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회복을 돕고 가해 소년에게 ‘범죄 중단’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화가 난다고 해서 아이들을 법정으로 내몰지 말자. 차가운 수갑 대신 따뜻한 관심으로, 판사의 판결문 대신 어른의 지혜로운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진짜 어른의 품격이다.  
2026-02-26 | hrights | 조회: 678 | 추천: 12
이윤/ 경찰관   2025년 11월  3일  국가경찰위원회는 경찰공무원 계급정년 제도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라고 경찰청에 요구했다. 경찰 아닌 분들은 “이게 무슨 말이지?” 싶으셨을 것이다. 계급정년이란 경찰, 소방, 군, 국정원 등 일부 특정직 공무원 조직에서 일정 기간 상위 계급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연령정년에 도달하지 않았더라도 퇴직하게 하는 제도다. 쉽게 말해 “나이는 아직 젊은데 계급이 멈추면 퇴장”하는 구조다. 현재 경찰 계급은 순경-경장-경사-경위-경감-경정-총경-경무관-치안감-치안정감-치안총감 순이다. 보수체계상 경정은 일반직 5급 상당으로 경찰서 과장급이고, 총경의 대표적 보직은 경찰서장이다. 현행 법률상 계급정년은 경정 14년, 총경 11년, 경무관 6년, 치안감 4년이다. 예컨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경정으로 승진한 사람이 14년 안에 총경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연령정년(60세)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50대 초반 또는 그 이전에 강제로 퇴직하게 된다. 이 틀은 1998년 개정 이후 30년 가까이 변하지 않았다.   <경찰 계급정년 변화과정>   계급정년이 만들어진 이유 계급정년 도입 취지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군사정권 시절 상명하복이 필수인 계급 조직 특성상 하위 계급자가 상위 계급자보다 나이가 많은 상황에서 생길 수 있는 조직 운영상 부담을 줄이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둘째, 상층으로 갈수록 정원이 급격히 줄어드는 ‘압정형’ 구조에서 승진 적체를 완화하고, 인사 흐름을 예측할 수 있게 만들려는 행정적 고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계급정년은 행정학 교과서적으로 보면 꽤 합리적인 장치다. 상위직 자리가 자동으로 비워지니 인사 숨통이 트인다. 다만, 제도는 언제나 ‘의도된 효과’와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함께 낳는다.   계급정년의 압박 이제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가령 2026년 현재 48세, 경정 10년 차인 경찰관이 있다고 하자. 어느 날 상사로부터 위법 또는 부당한 지시를 받았다. 이 사람은 그 지시를 단호히 거부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가 정답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계산기가 먼저 켜질 가능성이 크다. 경정은 14년 안에 총경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퇴직한다. 이미 10년을 근무했다면 남은 시간은 4년. 이때 상사에게 미운털이 박혀 승진에서 배제되면, 53세에는 전직 경찰관이 된다. 53세면 자녀 교육비는 한창이고, 대출은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공무원연금은 65세에나 받을 수 있어서 소득 공백이 생긴다. 50대 초반 나이에는 새로운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다. 만일 승진하면 60세까지 근무할 수 있고, 그사이 추가 승진 기회도 생긴다. 승진 실패는 단순한 ‘체면 문제’가 아니라 ‘생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쯤 되면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비판은 공허하다. 영혼이 문제가 아니라 생계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럴 걸 알고 들어간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웬 불만이냐!”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계급정년을 알고 입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역시 임용 전 교육 중에 이에 대해 듣고 많이 놀라서 ‘아차!’ 싶었다. 그때 튀어야 했는데… 튀지는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승진을 너무 빨리 하는 것도 위험하겠구나. 가늘고 길게 가자.’ 지금까지는 그 작전대로 가고 있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앞으로는 경찰관 채용 공고에 작은 글씨 말고 굵고 빨간 글씨로 “※ 주의: 계급정년 있음” 이렇게 써놓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 문제를 두고 그냥 그러려니 할 뿐, 헌법소원이나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되지 않은 것을 보면 경찰관들은 또 얼마나 순종적이란 말인가!   인재 유출의 또 다른 배경 계급정년의 압박은 조직 외부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2010년 말 운전면허시험 관리 업무가 경찰청에서 도로교통공단으로 이관될 당시, 상당수 경찰관이 신분 전환을 신청했다. 특히 계급정년의 압박을 받는 경정, 총경급 중 많은 사람이 전직을 선택했다. 최근 로스쿨에 진학하는 경찰관이 적지 않은 현상도 장기적 직업 안정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이 나오는 이유다. 경찰 계급정년은 이렇게 인재 유출의 배경 요인이 되기도 한다. 중대범죄수사청이 생기면 그쪽으로 전직하길 원하는 경찰관도 아마 꽤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중립성과의 관계 문제의 핵심은 여기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은 선언만으로 지켜지지 않으며, 인사 제도는 중립성의 토대가 된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승진해야 하는 구조 속에 놓인 사람에게 “양심을 지켜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수영장에 빠뜨려 놓고 “젖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사의 평가가 생존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시민과 법보다 조직과 상사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간적으로도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중립성은 흔들린다. 군부독재가 심하던 83년 경위·경감 계급정년이 짧아진 이유도(위 표 참조) 시키는 대로 하는 충성조직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한다.   이제는 재검토할 때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하려면, 경정 이상 계급에 과도한 압박으로 작용하는 계급정년 제도를 폐지하거나, 연장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국가경찰위원회의 재검토 요구는 매우 다행한 일이나 재검토-연구용역-법률 개정안 마련-국회 심사… 이 긴 여정을 생각하면 숨이 헐떡여진다. 그래도 늦었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국가정보원의 경우 최근 계급정년 연장법이 정보위 법안소위를 통과하여 3급은 7년→8년, 4급 12년→14년, 5급 18년→21년으로 길어질 전망이란다(26. 2. 3. 파이낸셜뉴스 기사 참고). 부러운 뉴스다. 경험 많은 경찰관이 불이익을 걱정하지 않고 원칙을 말할 수 있는 구조. 그것이야말로 시민 신뢰의 출발점이다. “철밥통”은 공무원에게 쉽게 붙는 접두어지만, 50대 초반에 짐을 싸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다. 중립성은 개인의 덕목이라기보다 제도가 만들어 내는 구조의 문제다. 이제는 그 구조를 손볼 때다.      
2026-02-23 | hrights | 조회: 335 | 추천: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