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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호]잘 모르겠지만, 글을 써야겠다.(박용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4-21 11:18
조회
150

박용석/ 출판인


 

 국내 최대 서점이 43년 만에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받는다고 한다. 전체 재직자의 약 40%정도가 그 대상이다. 어떻게 바꾸어 말해도 기존 사업방식의 수익이 줄었으니 인원을 줄이겠다는 게다. 이유야 분명하다. 책이 잘 팔리지 않아서다. 이제는 군사독재 치하에서도 꾸역꾸역 책을 냈다는 출판사도, 마르지 않고 샘솟는 29만원을 기반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미래를 열어간다는 복합미디어기업’도 어쩌면 ‘chatGPT’에 미래를 점치고 ‘AI’에게 원고를 의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좋은 글을 고민하기 전에 잘 팔릴 글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인데, 책이라는 물건이 앞으로 잘 팔리기는커녕 존재하기는 할지조차 걱정스러운 세상이 되고 있다.


 

선 자리는 그대로인데 처지가 바뀌었다. 풍경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말인지 여러 번 생각하게 된다. 대통령의 최우선 국정과제 중 하나가 옛 동료와 선후배들을 잡아 가두는 것인데 되레 지지율이 오른다니 할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다가도 꾸역꾸역 삼켜졌다. 밥줄이 걸리면 비겁해지기도 하지만, 그 밥줄이 위협받으면 그 어느 때보다 용감해지기도 하는 게 사람일 텐데, 그 어딘가에 어중간하게 걸려있는 처지의 입은 한동안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꽃들마저 어지러웠다. 매화가 아직 지기도 전에, 목련이 피어오르기도 전에, 온갖 꽃이 앞다퉈 피어버렸는데 벚꽃은 벌써 지고 있다. 봄 농사를 서둘러야만 할 것 같은 날씨여서 서둘러 심었던 어린잎들은 늦은 서리가 괴롭혔다. 농사를 짓기에 어느 때보다 더 덥고, 그래서 더 추운 봄이다. 어느 높으신 분의 권유처럼 밥 한 공기 더 꾸역꾸역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속이 덜 상할까 싶어서. 대통령께서 역사적인 거부권을 행사하던 날 순천만 국가 정원의 봄은 참 예뻤나 보더라. 그날, 아름답도록 연출된 몇 장의 사진은 길이길이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밥 한 공기 더 먹어 더부룩한 배로 담배나 한 대 피울까 싶어 거리로 나가보면, 담배를 피우면 과태료를 낸다는 거리 한복판에서 교복 입은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누구 하나 말리는 어른이 없다. 텔레비전 화면에 담배 피우는 장면조차 모자이크를 하는 시절인데, 그 아이들의 담뱃불에는 모자이크가 되어 있지 않다. 피우려던 담배를 슬그머니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피한다. 혹시나 그 아이들 아버지가 검사라면 큰일이 날 테니까.



학교폭력에 관한 기억


생각해보니 언제였던가, 이제는 사라진 학교폭력자치위원회 회의 자리에서 왜 그 아이를 때렸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었다. 아버지가 없다고 자기를 따돌리고 괴롭혔던 아이들 중에 친했던 친구 녀석이 끼어있는 게 분했을 아이였다.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긴 어렵지만, 최대한 사건을 무마시키는 것이 내가 자처한 역할이었다. 그 아이가 맞아서 온 것이 아니라 때려서 온 자리인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아이 생활기록부에 좋지 못한 기록이 남을까 봐 벌벌 떠는 건 변호사를 대동하여 위풍 당당히 온 아비 어미와 연신 머리를 조아리던 홀어미가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텐데, 이 나라의 법치가 두 어미를 공평히 대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요즘 것들’이 불평등에는 둔감하고 불공정에만 민감하다며 혀를 찰 일이었던가 싶다. 나 역시 사람이 희망이라고 힘주어 말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세상이 누구에게나 공평할 수 없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진실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최소한 인간이기에 지키도록 정해놓은 규칙들이 있는데, 그마저도 공정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진실이 되어가고 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던 시의 구절처럼 창녀들은 이제 더이상 역전을 서성이지 않아도 된다.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아이들’(이성복 시 ‘그날’ 중에서)을 위해 거리를 휘황한 빛으로 밝혀두었으니 말이다. 그마저도 옛 이야기가 되어간다. 클릭 몇 번으로 터치 몇 번으로 쉽고 빠르고 안전하게 신선한 식품이, 깨끗이 세탁된 옷이 날이 밝기 전 집 앞으로 배달되고, 사람도 배달되는 세상인데, 그런 세상이기 위해서 누군가의 삶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 지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 세상이 ‘4차 산업혁명’이란 아름다운 말로 포장되고 있다.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한 글쓰기


무엇을 위한 혁명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혁명에서 사람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영민하지 못한 후각 탓만은 아닌 것 같다. ‘AI’가 인류를 지배한다거나 멸망시킬지도 모른다는 식의 우려까지는 아니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하던 무언가가 실종되고 있는 것만큼은 단지 우려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게 ‘AI’때문만은 아닌 것도 같아, 괜한 'AI‘ 핑계를 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무엇을 지켜내겠다는 것인지조차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담아 글을 써 볼 수밖에 없다. 여전히 이런 세상이어선 안 되니까. 어쩌면 누군가의 우려처럼 이제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세상인 게 ‘AI' 핑계 댄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으니까. 원인도 해결 방법도 사실은 여전히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아 뭐라도 해봐야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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