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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언어, 또 다른 차별과 배제의 장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18 17:05
조회
293

최철규/ 인권연대 간사



‘어덜트하게 쉬크한’ ‘새롭고 남다른 Luxury한 여행’ ‘우리 집 second 냉장고’ 등등. 백화점에서 사용되는 한-영 표현의 몇몇 예라고 하는데, 한글과 영어를 자유자재로 섞어 쓰는 ‘탁월한’ 말글 개발 능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세계화 시대’에 ‘국가경쟁력’을 앞세워 공공연하게 불어 닥치는 ‘영어공용화’ 바람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신조어 개발은 애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글도 갓 뗀 아이들을 영어 사용권 국가에 유학 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쟁반에 옥 구르듯’ 유창한 발음을 내기 위해 말짱한 혀를 수술까지 하는 일부 사례도 있으니 단어 몇 개 만든 것 가지고 무얼 탓하랴. 그럼에도 마음속 불편함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국적불명의 소리들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말들이 소통되는 공간, 즉 ‘백화점’이 지닌 사회경제적 함의 때문이다.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소통되는 언어들은 ‘백화점 언어 공동체’를 형성하며, 백화점 이용 고객들을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 짓는 ‘권력’을 행사한다. 물리적으로 막는 것은 없지만, 재래시장에서의 에누리가 몸에 밴 사람들에게 화려한 매장과 고급 물품들 그리고 그것들을 치장하는 다양한 이국적 수식어들은 백화점이라는 공간과 그들의 생활공간 사이에 세워진 묵직한 장벽에 다름 아니다. 언어사용을 통해 규정된 사회적 위치의 차이. 음침한 권력이 흐물흐물 기어 나오기 딱 좋은 곳이 아닌가.


051005saram08.jpg 국내 한 백화점 홈페이지에 게재된 유명 외국 상품 소개글.


‘그들’만의 언어사용은 배제의 장벽


 사실 이런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세계화’의 첨단을 달리는 기업 부문이 가장 심한 것 같고, 외제 가방 끈을 길게 늘어뜨린 학계의 장벽도 만만치 않다. 어지간한 회의에서는 순전한 한글만으로 의사소통을 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 사람만의 회의이고 또한 우리말로 하는 회의인데도 그렇다. 대화 중에 숱하게 섞어 쓰는 영어 단어들 때문이다. 엄연히 우리말 표현이 살아 있는데도 그런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대학 운동권도 마찬가지였다. 뻔한 말인데도 약어를 쓰거나 영어를 썼다. 혁명은 그냥 ‘R’로 부르고, ‘NL’이니 ‘PD’니 하는 표현에다 일상적인 말까지도 두어 번 뒤흔들어 논 다음에 썼다. 그래도 과거에 대학 운동권 학생들이 굳이 영어를 찾아 쓰고 말을 비비꼰 것은 나름의 이유는 있어 보인다. 운동이 곧 구금을 의미하는 상황, 학내에 경찰관이 상주하거나 최소한 누가 프락치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스무 살을 갓 넘긴 대학생들이 자신과 조직을 보위하겠다고 하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누가 붙잡아갈 일도 전혀 없는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멀쩡한 우리말을 두고 영어를 쓰거나, 누구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조어를 만들어 쓰고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유력인사들의 입에서는 매일처럼 기술 혁신 클러스터(cluster; 무리, 떼, 집단, 송이)니, 태스크포스팀(Task Force Team; 과제실시조)이니, R&D(research and development; 연구개발), 허브(hub; 중심, 중추, 중핵), 리더쉽(leadership; 지도력, 통솔력), 로드맵(road map; 지도), 아젠다(agenda; 의제, 협의사항), IT(Information Technology; 정보기술, 지식기술) 등등의 말이 정신없이 쏟아져 나온다.


 도대체 누구를 상대로 쏟아내는 말들인가. ‘허브’라 하면 몸에 좋은 먹거리 정도로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것에 ‘동북아 중심의 어쩌구 저쩌구’라는 원대한 국제정치적 포부가 숨어 있을 줄 어찌 알겠는가. 최소한 영어가 짧은 사람도 배려하고 동등한 대화상대로 인정한다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한글로 전해야 맞지 않는가. 그렇다. 언어 사용에는 대화 상대자에 대한 배려의 문제가 깔려 있다. 뒤집어 말하면, 언어 그 자체가 차별로 이어지기 쉬운 차이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백화점 언어 공동체’의 경우에서 보듯, 언어는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수단이다. 가깝게는 일상의 크고 작은 집단이 그렇고, 멀게는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단어들이 그렇다. 여기에 최첨단 수


식어를 통한 치장이 있어야 집단의 사회적 가치가 올라간다는 심리가 더해진다. 두말 할 것 없이, 그 기저에는 차이 만들기와 이를 통한 노골적인 차별의식이 깔려 있다. 이쪽 편에서야 좋은 말로 ‘공동체 형성’이니 ‘동질감 형성’이니 하지만, 다른 편에서 보자면 ‘악의적인 배타성’에 다름 아니다. 이질적인 언어의 장벽에 가로막혀 접근 자체가 원천 봉쇄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소용돌이에서 영어가 낀 표현이나 능숙한 영어사용자를 우대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그 예이다.



소외와 차별을 없애는 인권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그런데 인권운동진영 내부에도 영어를 반쯤 섞어 쓰거나 널리 통용되지도 않는 용어를 전문어랍시고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젊었을 때 겨우 몇 년 동안 유학한 것이 전부인 사람들조차 그렇다. 얼마 전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불편부당함 없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공간에 가장 먼저 손길을 뻗쳐야 할 국가인권위의 회의에서조차 그러하다고 한다. 그 이유야 들어보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지만, 결과는 능히 짐작할 만 하다.


 영어를 모르는 다수의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우리 사회 인권담론의 틀 밖으로 소외시키고 차별하는 결과 말이다. 그들만의 언어를 쓰면서 뭔가 전문적이라는 걸 과시하려고 안달이 난 의사들이나, 어려운 일본어투의 법률용어 사용을 마치 자격증 대체품쯤으로 생각하는 변호사들이 그런다면야 영업기술이나 일종의 지식 과시욕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살뜰한 관심을 자기 책무로 부여받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그러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언어 사용과 관련한 인권의 문제를 두루 뭉실하게나마 생각하다 보니, 한자를 몰라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취지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051005saram07.jpg


 한글 창제의 이런 취지를 외면한 현재 우리의 언어 사용이 실제로 사회 각 계층간 격차를 반영하고 그 격차를 고착화시키면서 존엄성을 지닌 보편 인간에 대한 차이의 시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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