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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 작가도 비정규직이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23 11:23
조회
244

여준민/ 인권연대 회원


 슬픈 여의도에서


 얼마 전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잠시 여의도 천막농성장에 들렀다. 과거사청산, 쌀협상비준안 철회, 사학법 통과,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빈곤철폐, 비정규직 철폐…, 익숙한 문구의 플래카드는 천막농성팀들의 문패가 되어버린 듯 했고,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비록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웃이지만 ‘투쟁’이란 이름 하에서는 든든한 동지였다.


 다급히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아낌없이 빌려주기도 하고, 갑자기 쓱 들어와 “춥지는 않아요?”하는 말 한마디는 가난한 이들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지난 해 12월과 똑같은 올해의 12월에 어김없이 등장한 다닥다닥 어깨를 나란히 한 천막농성장의 모습은 한국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여의도로 출근하는 김지연 씨


 실은 여의도를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히 오가는 거리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풍경과 상황 자체가 뭐라 말할 수 없이 슬프고 슬픈 것들이다. 말과 글이 무색할 정도로 버겁다. 그런데 매일 여의도로 출근 하는 그녀의 마음은 어떨까? 특히 방송사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에 놓여있으면서 시사프로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짓눌려 있는 답답함과 혼란스러움이 점철돼 있을 것 같다. 편치 않은 마음을 내심 숨기고 10년차 방송작가 김지연(33세) 씨를 만났다.


 

 회사와 노동자 관계 아닌 피디와 작가라고?


 “방송사의 배짱이죠.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줄 서 있어요. 매년 각 방송사의 방송아카데미를 비롯해, 작가협회, 영상원, 학원 등을 통해 방송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죠. 협회에 등록된 작가가 1,600여명 정도인데, 메인 경력이 있어야 가입할 수 있으니 아마 가입하지 않은 작가 수를 치면 두 배가 넘을 겁니다. 이런 형편이니 작가들은 노조를 만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사측은 어디 해봐라 하는 거죠.”


 앉자마자 현안 중 하나인 비정규직 문제를 얘기하려니 출발은 당연 그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비정규직 차별을 이야기하면서도 아직 작가노조 하나 결성하지 못한 상황은 그녀역시 답답한 무엇인가 보다.



 “협회는 1년에 한번 있는 원고료 협상만 할 뿐이죠. 2001년 마산 MBC에서 노조를 설립했는데, 그 때 한 가닥 희망을 갖기도 했어요. 물론 반응은 다 달랐죠. 예의 주시하면서 어떤 파장을 갖고 올 것인지, 조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인지 등등이요.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요. 광주지역이 참여하긴 했는데,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이 조용했고, 더 이상의 파장이란 없었던 거죠. 결국 전국노조 건설은 물 건너갔고 여성 노조 산하로 들어갔을 겁니다.”


 당시 CBS [시사자키-오늘과 내일]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는데, 분위기가 남다른 시사자키였기 때문에 “야, 너희도 한 번 해봐”하면서 지지하는 분위기였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충분히 보상받고 있다’는 생각도 한몫을 하고 있다.


 “지역 작가들은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선물포장, 심부름, 섭외, 글쓰기, 차심부름, 청소, 행정일까지. 그나마 서울은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지역은 자기 정체성의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어 문제의식이 보다 심각할 수밖에 없는 거죠.”


 

12th-ji01.jpg

방송 비정규직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지연 회원


 

 말이 좋아 프리랜서, 작가는 비정규직


 가끔 작가들 스스로가 창작의 고통 때문에 ‘자유’를 이야기하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것 또한 고소득 10%의 작가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라고 한다. 정년 없는 프리랜서가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뒤집어 보면 언제 짤릴지 모르는 위험에 놓여있는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개편 때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게 대다수 작가들이 처해진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아는 한 피디는 노조 결성 분위기를 듣더니 “글쎄, 과연 방송사에서 노조 가입한 작가를 쓸까?”라고 말하며, 언제든 자기 말 잘 듣는 사람으로 골라(?) 쓸 수 있지 않겠느냐는 뉘앙스를 풍겼다고 한다. 언론인들이 방송노조에 가입되어 있기도 하고 한국 사회를 이성적이고 진보적으로 이끌어가려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놈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만은 각 방송사간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들도 월급을 받기에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인식해도, 작가와의 관계에서는 고용주라고 생각하죠.”


 방송사가 생각보다 명확한 주종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집단이라며, 회사와 노동자의 관계가 아니라 피디와 작가라는 구조적 관계만이 있을 뿐이라는 그녀의 말은, 도대체 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 해결의 실타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지, 더 복잡하게 만든다. 단순히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말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뒤가 구리다.



 지쳐있으나 주저앉지 않는 그녀


 “글쓰기요? 어렵죠. 그래도 방송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헛된 꿈이란 건 금새 알았지만요.”


 초창기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MC의 입을 빌어 교묘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송작가는 글을 쓴다기 보다 말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약간 허무하고 소모적이란 생각도 든다고 고백한다. 다른 글들에 비해 한번 방송에 나가면 없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부터 작가활동을 해 와 이제는 10년차 베테랑 메인 작가가 되었지만, 그 10년 세월동안 숨가쁘게 여러 곳에 안테나 세우고 달려왔지만, 그래서인지 지금은 위험한 지경에 놓여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12th-ji02.jpg


요즘 그녀의 관심은 강요가 아닌
합의된 가치를 어떻게 찾을까라고 한다


 

 “시사 프로를 하다 보니 매번 비슷한 사안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뭐 색다른 대안책이나 방안이 없을까란 생각을 자주 하는데, 공부할 시간이 없다보니 제 자신만 소진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그녀는 몇 년간 하던 CBS [시사자키-오늘과 내일]을 접고 잠시 여행을 다기기도 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무척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슬며시 여유 있는 웃음도 보인다.


 방송에 복귀하면서 방송사를 옮긴 그녀는 얼마 전까지 한나라당이 취재를 거부하기도 했던 KBS-2TV의 [시사투나잇]에서 일하다, 현재는 아침 6시 25분부터 시작하는 제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김인영입니다]에서 활동하고 있다. 여전히 시사 보도프로그램이다.


 “시사자키를 오래해서인지 라디오에 집중하게 되네요. TV는 검열 장치가 많은데 비해 라디오는 대중을 상대로 한다지만 매니아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고집을 부릴 수도 있죠.” 선택과 집중이 가능한 라디오의 특성은 다부져 보이는 그녀의 근성을 짐작케 한다.


 오창익 국장과 식사를 하다가 은근히 누군가가 “우리가 전부 인권연대 회원으로 가입해야 하지 않을까?”라며 바람 잡는 것을 보고, 제 머리 못 깍는 인권연대에서 제 몫을 다하는 회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회원가입 유도를 했다는 김지연 씨. 월간 [인권연대] 합본호를 보더니 감회가 새롭나 보다. 다른 방송 스탭들에게도 다 돌리고 오 국장의 스승인 박재동 화백에게도 그녀가 가입 권유를 했다며 ‘훌륭한 회원’임을 자랑한다.


 다들 그렇게 자기 자리에서 몫을 하면 되지 않을까? 문제는 내 몫이 무엇인지, 그들의 몫은 무엇인지, 그녀가 말한 대로 강요가 아닌 합의된 가치를 어떻게 찾아갈 것인지 이다.


 12월의 여의도는 겨울 칼바람과 정부의 외면에 더욱 차갑고 슬픈 기운만 흐르고 있다.


 - 지난 1년 동안 [인권연대가 만난 사람] 꼭지를 진행해 주신 여준민 회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해부터는 새로운 꼭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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