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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호] 제55차 수요대화모임 - 서경식 선생(도쿄게이자이대 법학부 교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31 16:04
조회
158

일본 국민주의의 기원과 재일조선인


서경식/ 도쿄게이자이대 교수


 나는 1951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2세다. 일제시대 때,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가셨고 그 이후로 계속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다. 지금은 대학 교수 재직 중 안식년을 맞아 조국에서 한번 살아보자는 각오로 여기에 있지만, 한국은 그렇게 쉽게 올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언어가 두개여만 하는 사람들


 나는 아직 모국어(한국어)로 말하는 것이 어렵다. 이번 방문에서 두 가지의 목표를 갖고 왔는데 하나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한국어로 에세이나 소설을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정 시대의 악몽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인데 검찰이나 경찰의 심문을 받을 때 적어도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을 만큼은 한국말을 할 줄 알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목표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두 번째도 어려울 것 같다. 이전에 병원에서 진찰을 받을 때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라는 질문에도 대답을 잘 못했는데, 병원에서도 그러니 검찰이나 경찰에서는 오죽하겠는가.


 다소 억지스러운 상황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재일조선인처럼 모국어와 모어(일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체성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다.


 일본에서 60년대까지 금기시되었던 말 중 하나가 ‘조선’이다. 내가 말하는 조선은 북조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조선은 하나다’라는 의미에서의 조선도 아니다. 쉽게 말하면 국적은 다를지언정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며 다양한 국가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의 그 조선이다. 따라서 재일조선인이란, 일본 국적을 받아 국가의 호칭으론 일본인이지만, 민족적 정체성의 측면에서는 조 인인 사람을 가리킨다.


 해방 후, 일본에 거주하던 230만 명 정도의 조선인 중에 60만 명이 일본 땅에 남게 되었고 일본 정부에 의해 이 사람들의 국적은 일본이 됐다. 재일조선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1952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까지는 계속 일본 국적이었다. 물론 일본인들과 국적만 같을 뿐, 결코 똑같은 대우를 받은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소득세나 주민세는 일본 국민과 마찬가지로 부과됐지만, 공무담임권이나 공공주택 입주권 같은 국민(국적보유자)의 기본적인 권리는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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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식 교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재일조선인들은 강한 조직을 유지했다. 대표적인 단체가 ‘조선인연맹’(조련)이다. 자발적인 단체인 ‘조련’은 조국으로부터의 어떠한 재정적 지원 없이도 600개가 넘는 민족학교를 설립했다. 전후에도 여전히 천황제를 유지하는 일본 정부나 미국은 민족학교를 억압했다. 당시 요시다 수상은 미국에 편지를 보내 “재일조선인 대다수가 범죄자이므로 추방해야 미국에게도 유리하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1959년에는 ‘북송운동’(일본에서는 귀국운동이라 한다)이 일어났다. 이때 10만 명 가까운 재일조선인이 북조선으로 갔는데, 대부분 일본에서의 차별과 빈곤을 피하기 위해 귀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정부는 ‘자신들이 원하기 때문에’ 인도적 차원에서 귀국을 마련해주는 것처럼 포장했다. 사실이 아니다. 인도주의를 가장한 추방정책에 불과하다. 최근의 연구에서도 당시 일본적십자사와 일본 정부 사이에 이 사업의 추진이 일본의 국익에 합치한다는 인식을 확인하는 문서가 교환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재일조선인은 통제와 배제의 대상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본질이다. 한편에선, ‘일본 국적을 지닌 일본인이므로 일본법에 복종’ 할 것을 강요하고, 다른 한편에선 ‘범법자이니까 추방해야 하고, 추방 전까지는 외국인이므로 철저히 통제를 받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미국 정부 또한 재일조선인 탄압에 일조했다. ‘일본의 공산화 저지’라는 냉전 전략과 더불어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일본 국적을 가진 재일조선인이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수한 탄압을 받아오던 민족학교는 1948년 즈음엔 일제히 폐쇄됐다. 이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 재일조선인 학생이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


 1947년에 천황의 마지막 칙령으로 ‘외국인 등록령’이 내려졌다. ‘일본 국적이어도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핵심인데, 결국 ‘외국인이므로 일본법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것이다.


 등록 신청서에는 국적을 쓰는 난이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재일조선인들은 자신의 국적을 ‘조선’이라고 기입했다. 아직 남한 정부가 수립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재일조선인들이 자신들의 존재성에 부여하는 자연스러우며 자발적인 호칭이었다.


 반면, 이때부터 일본에서 ‘조선’이란 말은 차별과 조롱의 대명사가 됐다. ‘조선’이란 말은 학교에서의 이지메(왕따)나 폭력을 일으키는 수단이 됐다. ‘나는 조선인이다’라는 말 자체가 하기 힘든 사회가 된 것이다. 내 학생 중에는 ‘저는 재일조선인입니다’라고 말하는 학생이 드물다. 하지만 나는 조선인이라는 말을 하기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조선인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일본 사회가 이렇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재일조선인 문제를 과거 먼 나라의 일로 치부하고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재일조선인은 1960년대 말 전까지는 국민건강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병이 나면 의료비의 전액을 자기가 부담한 것이다. 국민연금에는 1980년대까지 가입이 인정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그랬다. 그 근거는 재일조선인은 ‘국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빈곤층이 많았던 재일조선인은 일본 국민들로부터의 차별에 더해 이러한 법적인 권리 박탈까지 더해져 한층 어려운 생활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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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민족으로서의 호칭이며 국적이 아니다.”


 한국도 일본의 국민주의를 그대로 답습


 현재의 일본 헌법은 전후 연합군사령부(GHQ)가 영문으로 초안을 제시하고, 일본 정부가 수정·번역 한 후에 국회에서 결의한 것이다. 여기에 재일조선인 차별을 정당화하는 일본 국민주의의 기원이 담겨 있다.


 초안에는 일본 국적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자연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자연인’을 ‘국민’으로 번역했다. 이로 인해 인권의 향유가 가능한 주체는 ‘국민’이며, 그 ‘국민’이란 국적법에 의거한 일본 국적 보유자를 의미한다.


 덧붙여,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국적법은 혈통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즉 ‘일본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일본 국적 보유자=일본 국민=인권의 향유자’라는 등식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된다. 혈통에 근거하지 않은 재일조선인들은 ‘국민’의 테두리에서 쫒겨남과 동시에 ‘인권’의 테두리에서도 쫓겨난 것이다. 이러한 등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심성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국민주의의 본질이다.


 이러한 국민주의는 은연중에 차별을 정당화하고 재생산한다. 국민이라고 인정받는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외국인에 대해 ‘그들의 인권은 소중하지만, 우리랑 똑같지는 않다’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한국이 이로부터 자유로운가. 결코 아닌 것 같다.


 정부 수립 후 일본 국적법을 모방한 한국은 ‘조선 민족’이라는 단일 민족을 강조하기 위해 혈통에 근거한 국적법을 만들었다. 재일조선인을 차별하는 일본 사회의 역사적 기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장 주변의 외국인노동자들을 떠올려 보라. 혈통이 다르다고 그들의 인권이 너무나도 쉽게 무시되지 않는가. 한국은 일본 식민 지배를 직접 경험한 역사적 기억이 있다. 한국은 최소한 동아시아에서 제일 개방적인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리: 임혜민/ 인권연대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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