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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애국자가 없는 세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9-01 10:15
조회
379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른바 국민교육헌장이란 게 제정된 1968년에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어느 날인가 수업이 끝난 후 담임 선생은 국민교육헌장을 큰 소리로 다 외운 학생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먼저 할 사람부터 손을 들라고 했다. 나는 세 번째로 손을 들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부러워하는 친구들의 시선을 뒤로 하며 자랑스럽게 교실 밖으로 나왔다. 첫 번째 두 번째 손을 들었던 학생들이 중간에 틀려 다시 해야 했으니 틀리지 않고 제대로 외운 건 내가 처음이었다. ‘민족중흥’이니 ‘인류 공영’이니 ‘상부상조’니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단어들을 앵무새처럼 외워댄 게 뭐 그리 자랑스러울 게 있을까마는 초등학교 3학년 꼬마에게야 남보다 빠른 암기력을 과시하고 남보다 먼저 집에 가는 게 일단 기분 좋은 일이었을 터다. 게다가 하나가 더 있었다. 내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국민교육헌장을 낭송했을 때 담임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잘 했어. 넌 애국자다.”


 애국자라니... 드디어 나도 안중근 의사나 이순신 장군 같은 애국자 반열에 오른 거다.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었을까. 국민교육헌장이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던 일제의 교육칙어를 본뜬 것이고 군국주의의 잔재이며 온 나라를 병영사회로 만들고자 했던 박정희 통치 이념의 산물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이나 지나 대학생이 된 후다. 적어도 그 이전까지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남보다 빨리 외운 애국자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았다. 자긍심을 가지고 뭘 했냐고? 이를테면 이런 거다.


 그 시절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 애국가가 울려나왔고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어야 했다. 그럴 때 나는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아서 개긴 적이 없다. 늘 다른 사람들을 따라 자리에 일어나 다소곳이 가슴에 손을 얹곤 했다. 속으로 딴 생각을 할지언정 그 경건한 애국 의식을 거부한 적은 없다. 또 있다. 매일 저녁 여섯시가 되면 국기하강식이란 게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국기를 보며 가슴에 손을 얹어야 했을 때 난 한 번도 이를 무시하고 그냥 간 적이 없다. 내 눈길이야 앞에 있는 아가씨 뒤태에 머물지언정 손은 늘 가슴에 가 있었다. 그 뿐인가. 뻑 하면 열렸던 반공궐기대회에 전교생이 동원될 때도 몸이 아프다든가 바쁘다든가 핑계를 대며 빠진 적이 한 번도 없다. 뒷줄에 서서 친구들하고 장난질을 칠망정 나는 늘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의’ 현장에 함께 했다. 그런 대회에는 늘 머리에 띠를 두르고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던 아저씨들이 있었다. 그 아저씨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쓰는 글씨가 무슨 내용인지 저 공설운동장 뒤편에 서 있던 나로서야 알 수가 없었지만 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고통을 감수하는 그 아저씨들의 절절한 애국심이야 모를 리가 없었다. “정말 대단한 애국자들이야.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다니...” 나는 마치 내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기라도 하듯 슬그머니 감싸 쥐며 그 아저씨들처럼 애국적이지 못한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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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국기하강식에 맞쳐 발걸음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시민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 시절에는 또한 애국애족의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들에게 가차 없는 제재가 가해지곤 했다. 온 나라가 조국 근대화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싸우는 마당에 서양 사람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기타를 퉁겨대고 춤이나 추는 젊은이들도 당연히 제재 대상이 됐다. 역시 퇴폐적인 서양 풍조에 물들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아가씨들도 즉심에 걸려 유치장에 갇히곤 했다. 맹세하건대 그 시절 나는 길 가던 청년의 장발을 자르고 아가씨들의 미니스커트 길이를 재던 국가 권력에 대해 단 한 번도 불만을 표한 적이 없다. 그런 게 다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 믿을 만큼 애국자였던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사람들의 애국심을 일깨우는 노래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방송을 타곤 했다. 아침마다 들리는 ‘새마을노래’, 6월이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던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하는 6.25 노래, ‘싸우며 일하고 일하며 싸우는’ ‘향토예비군의 노래’, 그리고 ‘백두산의 푸른 정기’가 ‘이 땅을 수호하’던 ‘나의 조국’ 같은 노래들은 달리 배운 적도 없건만 어느 틈엔가 내 입에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늘 하루에 몇 번씩은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극장에서 애국가가 사라지고 국민교육헌장도 잊혀가고 국기하강식도 없어졌고 그 흔하던 궐기대회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새마을노래나 ‘나의 조국’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경우도 없다. 툭 하면 사람들을 불러내 애국자로 만들어내던 강제 사항들이 사라졌으니 요즘 사람들은 도무지 애국자 노릇할 기회도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애국자 행세를 할 수 있는 기회만 생기면 난리를 치는 모양이다. 월드컵 때가 되면 매일 원수처럼 싸우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함께 어깨를 걸고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고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 너나없이 독도를 사수하는 애국자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는가.


 한때 담임선생이 인정한 애국자였던 나지만 언제부터인가 애국이란 말이 조금도 나를 감동시키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린 시절 애국이라 믿었던 게 애국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된 까닭도 있고, 그 시절부터 누구보다 앞장서서 애국을 설파하고 국가관을 강조하던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 자식 군대 빼내고 이중 국적 얻기 위해 원정출산하고 부동산투기로 돈을 벌어온, 누구보다 반애국적 반국가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게 된 때문이기도 하다.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이제 국가라는 존재보다 나라는 존재, 혹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훨씬 더 가치 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란 걸 깨닫게 된 까닭이다. 권정생 선생의 시 ‘애국자가 없는 세상’에 깊이 감동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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