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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호] ‘진보’가 ‘자동차’를 팔면 어떠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9-01 10:47
조회
186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전임 간사


“진보를 향한 열정, 서태지 ○○○를 연주하다”
모 자동차 회사의 광고카피다. 자동차의 컨셉을 진보를 향한 열정으로 설정하고, 한국 가요계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던 서태지의 이미지를 차용해 판매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실제로 TV CF에는 서태지가 출연해 열정적인 연주를 선보인다.

“진보적인 실내, 보수적인 외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가장 비싼 자동차로 최초로 1억을 넘었다는 ‘○○맨’에 대해 자동차전문가의 평가를 실은 한겨레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회장님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자동차답게 앞차의 속도에 따라 속도를 알아서 조절하는 크루즈 컨트롤 장치, 노면 상황이나 운전자 특성 등에 따라 차체의 높이와 감쇠력을 조절하는 신기한 서스펜션, 버튼 하나로 조작되는 주차 브레이크, 공기압을 알아서 체크하는 타이어 등 진보적인 장치가 가득한데 외모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서 아쉽다는 평가다.

이렇듯 이제 ‘진보’라는 개념은 자본주의의 또 다른 상징물이자 인간 소유욕의 표출이고, 계급을 구분하는 척도이기도 한 자동차를 판매하는데 차용되기도 한다.(여기서의 진보는 기술의 진보 또는 진일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개념으로써의 진보임을 다들 아시리라 믿는다) 자동차조차 진보하지 않으면 인기를 끌 수 없는 모양이다. 자동차에 진보라는 단어가 옳은 설명인지를 따질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혁신이나 쇄신, 첨단 등의 단어로는 충분하지 않은 어떤 의미를 진보라는 단어를 통해 전달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진보를 향한 열정’이라는 말의 강력한 이미지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 이런 카피와 기사를 봤을 때는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케팅을 위한 도구로 ‘체 게바라’의 이미지가 활용되고 있는 것처럼 불쾌함이 앞섰다.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순수함의 투사 체 게바라도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그저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는 전락을 맛보지 않았던가. 그 결과로 체 게바라의 정신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시대를 풍미했던 어떤 영웅의 이미지, 저항의 상징으로만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자동차를 팔기 위한 진보의 쓰임도 결국에는 마찬가지일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진보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의미는 휘발유처럼 날아가고, 그저 낡은 것과 비교되는 새로운 것, 좋은 것, 좀 더 나은 것이라는 이미지만 남게 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진보라는 말이 그렇게 함부로 쓰이는 것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이 앞섰다. 이를테면 ‘니들이 진보를 알아?’하는 심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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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컨셉을 진보를 향한 열정으로 설정하고, 한국 가요계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던 서태지의 이미지를 차용해 판매하려는 전략을 선보였던 CF     /   사진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얼마 전 끝난 제18대 총선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번 총선의 결과는 그야말로 (넓은 의미의) 진보진영의 참담한 패배였다. ‘그 나물에 그 밥’에 지나지 않는 한나라당, 친박연대, 자유선진당이 과반을 휩쓸었고, 통합민주당을 포함해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은 다 합쳐 89석을 얻는데 그쳤다. 진보신당은 간판으로 내세웠던 노회찬·심상정 후보가 나란히 석패하는 아픔을 겪었고, 비례대표의 당선 또한 0.06%라는 숫자놀음 앞에서 좌절해야 했다. 81석을 얻은 통합민주당이지만 모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게 중 69명이 중도보수이고 대다수가 구 민주당계라고 한다. 더구나 17대 국회에서 나름대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보여주었던 임종석, 최재천, 우상호 등 386세대의 대표주자들도 고배를 마셔야 했다. 사실 정체성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창조한국당까지를 포함하면 18대 총선에서 진보는 완패한 셈이다. 권영길 의원의 재선 성공, 강기갑 의원의 짜릿한 승리, 노회찬·심상정 후보가 보여준 진보정당의 수도권에서의 가능성만으로는 덮을 수 없는 참담함이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결과이기는 했지만 막상 개봉해놓고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정치시계를 정확히 10년 전으로 돌려놓은 이러한 결과가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판인 것인가. 아니면 경제를 최우선으로 내세운 이명박식 개발독재에 대한 적극적인 찬성인 것인가. 혹은 지역주의 망령의 부활인 것인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고, 또 특정한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거기에 결정적 작용을 한 것은 아마도 ‘보수=안정, 진보=불안’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단단히 한몫 했을 것이다. 아주 고전적인 명제이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정권과 의회를 탈환하고자 했던 보수 세력은 사회양극화의 심화와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기회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의 불안 심리를 이용해 효과적으로 이를 활용했다. ‘보수만이 경제를 살릴 수 있고, 집값을 올릴 수 있다. 진보가 경제도 안보도 다 망친다.’ 등의 공세는 총선 내내 계속되었고, 이런 설득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시민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와 겹치면서 상승작용을 하기도 했을 게다. 자동차를 팔기도 하는 진보이지만 정치와 만나는 순간 위험한 모험쯤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세에서 진보는 여전히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래서 생각이 바뀌었다. 진보가 자동차를 팔면 어떻고, 또 아파트를 팔면 어떻겠는가. 오히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이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진보에 대한 이미지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일이 더 시급한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꼭 정치이념으로서의 진보가 아니어도 좋다. 문화코드여도 좋고, 마케팅 전략이어도 좋다. 진보는 불안하고 모험이며 대가를 많이 지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좋은 것이고 나은 것이고 유쾌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확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진보의 이미지가 활개를 칠 때 진보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지고, 그것이 정치와 만나서도 ‘빨갱이, 체제전복 세력, 친북 또는 종북세력’으로만 곧바로 연결되는 어이없는 상황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세대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면서 어차피 이미지를 통한 접근을 외면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구체적인 정책으로 하는 승부도 중요하다. 더불어 이미지를 통한 승부에서도 이기자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서태지가 모델로 나온 그 자동차 CF, 자주 좀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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