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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호] 국민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5-18 14:09
조회
441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


 국민은 항상 옳은가? 작금의 국내외 정치 현실이 보여주듯이, 국민의 늘 오락가락하는 요구와 잦은 정치적 배반은 ‘민심이 천심’이라는 통념에 대해 되묻게 만든다. 일반 국민이 독재 정권으로부터 기본권을 유린당할 때, 군부 쿠데타 세력이 광주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갈 때 시민은 태극기를 들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나를 짓밟는 것이 부당함을 대내외에 고발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어느덧 세월이 흘러 “국민 우선”이라는 구호가 유럽에서 갖는 쇼비니즘적 함의가 이 땅에서도 유효하게 된 것 같다. 이제 국민은 자유와 인권이 아니라 오히려 소외와 억압의 표상이다.


기회의 불평등에서 비롯한 불공정 경쟁


 요즘 우리 사회를 사로잡은 화두가 바로 사회적 공정성이다. 정치권도 그렇지만 청년층이 앞서서 ‘불공정 경쟁’의 문제를 제기한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능력도 없으면서, 열심히 노력도 안했으면서 한 몫을 차지하는 것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간과, 아니 은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불공정 경쟁의 기저에는 기회의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형식적으로는 공정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결코 공정하다고 볼 수 없는 많은 사례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대학입시는 가장 손쉽게 거론할 수 있는 사례이다.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는 국민으로서의 성원권 및 형식적, 절차적 공정성만 확보해줄 수 있다면 아무 문제없는 것일까? ‘국민국가’는 과연 공정한가? 밖으로는 ‘주권’이라는 이름의 철벽을 쌓고 안으로는 기득권의 권리를 철저히 수호해주는 나라가 정말로 정의롭다할 수 있는가? 국민은 정말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는가?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역경을 헤쳐나가자”는 식의 해묵은 구호는 이제는 지겹다 못해 심지어 악의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경쟁


 한국인(선주민)과 이주민 간의 노동시장을 둘러싼 ‘경쟁’의 예를 들어보자. 일단은 대한민국 헌법과 유엔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어긋나는 폭력적인 이주노동자 탄압을 시급히 막아야하며 실제로 많이 시정된 상태다. 그러나 좀 더 ‘합리적인’ 법률적 조정이 가능해졌더라도 이로써 진정한 사회적 공정성이 구현될 것 같지는 않다. 이주노동자는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자산과 언어를 위시한 문화 적응력 그리고 인적 연결망에 비추어볼 때 토착 한국인들에 비해 턱없이 불리한 여건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쟁’이라는 시각은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보기에는 적절치 않다. 물론 ‘국민통합’이라는 상투적인 논리로 해결될 일도 전혀 아니다. 이주민과 난민의 시각으로 볼 때 국민이라는 존재는 무소불위의 압제자일 뿐이다.


 인권이란 인간이라는 사실 외에는 어떠한 권리도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권리, 다시 말해 소속 여부와는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출생의 자격을 공유하는 미지의 타자에게 부여된 권리다. 그것은 기존의 정치가 효력을 잃는 한계점이자 그 한계점을 문제 삼고 넘어서려는 새로운 정치의 출발점이 된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에서 국적 박탈자들이 일시에 양산되는 유례없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법 테두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통해 비로소 인권이란 오로지 공동체에 소속될 권리, 즉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라는 점이 분명해졌다고 주장했다.


인권, 인간 모두의 권리


 그의 설명에 따르면,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이 겪는 곤경은 “그들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탄압을 받아서가 아니라 아무도 그들을 탄압하려하지 않다는데 있다.” 20세기 말엽에 등장한 새로운 인권 개념은 이와는 달리 오히려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의 권리’, 말 그대로 ‘인간(모두)의 권리’이다. 그것은 국민의 ‘주권’과 별로 구분이 안 되던 전통적 ‘인권’ 개념으로부터 탈피한 권리이다.


 국민의 주권(sovereignty) 및 이에 기초한 시민권(civil rights)과는 달리 인권(human rights)은 다수 국민의 권리이기보다는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보호되어야할 소수자, 약자, 이방인의 권리이다. 그것은 법질서 ‘외부’에서 서성이는 이질적인 타자의 목소리다.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대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판하며 좀 더 급진적인 권리 운동을 역설하던 말콤 X는 이렇게 말했다. “시민권이란 네가 엉클 샘에게 너를 잘 대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다. 인권은 네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인권은 더 이상 시민권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권리가 아니다. 오히려 국민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리라고? 만약 그렇다면, 그런 정치제도는 폐지되어야한다. 올바름을 숫자에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몸무게가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똑같은 크기의 밥 한 공기씩 주는 것이 결코 평등일 수 없듯이 아무런 공적 책임감도 없이 대부분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국민’ 모두에게 ‘공정하게’ 한 표 씩 행사하게 하여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게 하는 방식이 과연 옳을까? 민주주의란 오히려 그러한 방식에 딴지를 걸고 과감히 이견을 표출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닐까? 소수자의 의견도 묵살되지 않는 체제가 아닐까? 선거의 방식을 바꿀 뿐만 아니라 선거에만 치중하는 정치문화 자체의 변화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의 이름일 수는 없을까?


 국민이라는 조화로운 정치 공동체에 대한 환상은 벌써 깨어진지 오래다. ‘공정한 경쟁’은 아예 처음부터 환상이 되지 못했다. 사회 정의는 소수 권력자들이 다수 국민을 억압해서라기보다는 국민의 ‘주류’가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를 소외시킴으로써 실현 불가능했다. 이제 정치에 대한 아주 새로운 접근이 절실한 때다. 억압받던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아 아우성치는 상태를 민주주의라 한다면, 인권이야말로 바로 그 정치적 본의에 가장 잘 부응하는 원리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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