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학교

생각의 한계를 해체해 준 인권학교 - 장윤미/ 제5기 인권학교 수강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08 13:35
조회
203
지난 9월 21일부터 매주 목요일 저녁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열린 제5기 ‘연대를 위한 인권학교’가 종료됐다. 모두 21명의 수강생이 참여한 이번 인권학교는 형사법, 성적소수자, 언론, 비정규직 문제 등을 중요한 이슈로 다뤘으며, 인권 개론에 대한 이해서부터 한국 인권운동의 현황까지 짚어보는 시간으로 진행됐다. 6기 인권학교는 같은 기간에 춘천에서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내년 봄에 일곱 번째 인권학교가 이어지게 된다. 인권연대의 ‘연대를 위한 인권학교’에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장윤미/ 제5기 인권학교 수강생



그저 작은 ‘관심’에서 시작한 인권학교 수강은 아주 폭넓고 풍성한 ‘관심’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우선, 이 세상에 연결되지 않은 문제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인권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마치 고구마줄기처럼 끝도 없이 내 손에 쥐어지는 것들을 바라보자니, 욕심 같아서는 이젠 사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줄기까지 뽑아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단순히 인권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인권학교가 나에게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문제를 환기시켜 준 것이다.

인권학교가 종강한 이 즈음에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니 조금 알 것 같다. 인권이란 주제가 원래 인간의 삶과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담은 커다란 바다와도 같은 주제라는 것을.

성적소수자, 비정규직, 장애인, 여성, 청소년, 그러다보면 대추리, 새만금, FTA 또 그러다보면 모두가 소수인 듯한 이 사회의 대중들에 대한 관심. 그렇게 그렇게 지평을 넓혀가게 된다.

비록 일주일에 한 번씩 정해진 시간 내에 한 가지 주제를 소화해야 하니 좀 더 깊이 파고들 생각의 여유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에 그 시간을 통해 그 주제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생각과 다짐이 든 것은 오히려 다양한 강좌가 전해주는 또 다른 수확인 것 같다. 인권이 인권피해자나 현장의 전업 활동가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고,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는 일 그 자체도 중요한 인권운동임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내 일상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보고자 인권학교에 참여를 했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세 시간, 목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보낸 그 몇 시간들은 내 일상을 재조직할만큼 나에게 많은 것들을 안겨주었다. 사회의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나의 머리는 더 복잡해졌지만, 눈이 달라졌다고 할까.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한 차례 진통 끝에 얻은 것이 복잡한 머리와 주체하기 어렵게 두근거리는 가슴이라고 하더라도 예전의 나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을 만큼 현재의 내가 좋아졌다. 병도 다 같은 병이 아니다. 시각이 넓어지고 삶의 다양성이 부대껴 들어오는 마찰로 생기는 열병이라면 언제든 즐겁게 웃으며 병상에 누운 나를 축하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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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공부라 하면 모르던 것을 알게 하는 지식 전달의 과정으로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더 큰 공부는 기존에 알던 것을 그 뿌리부터 해체하여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인권학교 수강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과 사유의 한계를 해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큰 수확이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한채윤 대표의 강의에선, 성적소수자에 대해 ‘그래도 나는 이해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던 자기 위안이 그저 표면적인 이해였을 뿐이고, 아주 근본적인 개념의 해체와 재구성 작업을 통하지 않는 이상 진정한 이해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힘들어요.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에요’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차별하지 말라며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지 않은 교육일 것이다. 그러나 한 대표의 말처럼, 비록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렵게 생각하더라도 에둘러서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해체시키고 해체의 지점에서 해방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더 중요한 교육이다. 평생 고기를 잡아 갖다 달라고 요구할 수 없지 않은가.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이 인권이 우리 사회에 제시하는 과제와 방향이 아닌가 한다. 어떤 사회든 삶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이러저러한 기준을 만들고, 또 강요하기 마련이다. 대중은 이런 기준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며, 상식이라는 포장으로 그 기준들을 감싸기 십상이다. 하지만 한 대표의 말대로 존재의 문제에 기준을 갖다 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과연 사람이 사람에게 단정적인 어조로 ‘이건 정상이고 저건 비정상’이라며 평가의 기준을 갖다 댈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제기 없이 ‘잘 안다’ 또는 ‘이해한다’라는 말 한마디는 그 자체로 상식의 한계, 생각의 한계를 보여주는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강원대 도재형 교수의 강의를 통해서도 일상의 나는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취업이 개인간의 경쟁이고, 실업 또한 자신의 못난 탓이라고 ‘자책’을 하곤 했지만, 인권의 프리즘에 비친 노동 현실의 시스템은 온통 ‘못난 인간’, ‘무능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제조공장과 별반 다름없어 보였다. 일자리도 엄연한 인권이라는 것이다.

인권의 매력은 단순히 생각의 전환에만 머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인권은 구체적이다. 개인에게 부여된 사회적 자격이자 요구 가능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왜 인권교육이 필요한지도 알게 됐다. 사회가 정해준 틀 안에서 좁은 사고만 하다보면 내가 가져야만 하는 권리를 찾지 못할뿐더러, 틀 속에서 형성된 편견으로 다른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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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움트기 시작한 인권감수성은 나의 사유를 섬세하게 만들고 그를 통해 나를 아름답게 하고 사회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는 훌륭한 촉진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혁명이다. 무언가 거창한 이념을 목표로 삼고 행동하는 것만이 혁명이 아니라, 내 작은 일상을 새롭게 조직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어쩌면 더 강한 혁명이듯, 인권학교와 함께 한 시간은 나의 의식을 성숙시켜준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