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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현진, 박선영, 임영훈, 정석완, 조소연, 주만, 주윤아, 최우식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임아영 (경향신문), 장형우(서울신문), 전진식(한겨레),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인권이란 무엇일까(임영훈)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1-21 11:09
조회
395

임영훈/ 회원 칼럼니스트


 막상 칼럼니스트란 그럴듯한 타이틀을 달다 보니, 인권에 대해 글을 쓰기가 너무나 어렵다. ‘우리시대’의 글들을 보면 꼭 인권에 관련된 것만 있는 것도 아닌데, 단체가 단체인 만큼 머릿  속에 계속 인권이란 단어가 맴돌며 한없이 고민으로 빠진다.


 돌이켜보니 인권연대에 가입하게 된 것은 기자 수업에서 만난 선배(기자)의 권유(?)때문이었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기자를 준비하며 만났던 몇몇이 인권연대 행사에 따라오게 되었다. (당시는 이미 몇은 기자가 되고, 또 나머지는 다른 쪽으로 진로를 바꿨던 이후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친절한 강압인지 권유인지, 선배의 손에 이끌려 후원 회원 가입을 하게 되었다. 어쩌다가 하게 되었으므로 아마도 다들 소액으로 가입을 하였고, 그 때 그 친구들도 아직 회원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 확인해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여전히 회원이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인권연대는 주문한 옷처럼 꼭 맞는 단체는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엠네스티도 후원하고 있는데 (가입 경로가 기억이 안 남), 기본 후원 금액부터 비싼 이 단체는 서구적 시각으로, 영국인지 미국인지 그들만의 입맛으로 세상을 보는 게 느껴져서 왠지 모를 이질감이 들었다.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후원을 끊고도 싶지만, 좋은 일이라고는 변변히 하는 게 없어서 기존에 가입한 몇몇 단체들을 포함해 아직은 후원을 유지하고 있다.
 
 인권연대 같은 경우는 소액이고, 연말연시에 회원들에게 소소한 편지 하나라도 보내주는 마음에 정을 느껴 후원을 그만하고 싶은 적은 없었다. 다만 가끔 어떤 프로그램이나 행사가 눈에 띄어서 가보면, 내가 여기 있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있었다. 시민운동가나 사회 개혁가와 같은 길을 걸을 용기를 내거나 결심은 못했지만, 후원하고 지지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할 의향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고민이 적었어야 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실제는 이랬다. 현실적인 친구들 사이에서 있으면 나는 너무 이상적이라 속 깊은 대화를 꺼낼 수 없었다. 반면 온통 이상적인 논리만 앞세우는 분위기에서는 거꾸로 현실적이 되었다. 마치 어디에도 낄 수 없이 겉도는 느낌이다. 심지어 인권연대 모임에서, 전교조 교사나 기자 등 몇몇 특정 직업이 아닌 일반적인 회사원을 만나서 얘기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아마도 내가 못 만났겠지만, 그만큼 나는 비슷한 부류에서 위안을 얻지 못하는, 왠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듯한 소수자였다. 길거리에서는 발로 채일 정도로 많은 오피스 워커가, 아무나 올 수 있는 어떤 모임에서는 극히 소수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다. (실제로는 아무나 오지는 않긴 하다.)
 
 무언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종종 아주 긴 글도 집중해서 자발적으로 쓰기에, 어느 날 눈에 띈 칼럼니스트 모집에 지원했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글을 썼고, 한 편 밖에 안 썼는데도 합격이 되었다. 그리고 멘토 기자님은 풍납토성에 관한 얘기를 술자리에서 듣더니 글을 써보라고 하셨다. 마음 한 구석은 당시에도 인권의 본질에 가 있었지만, 그런 유의 어마어마한 주제가 부담도 되었던 지라 풍납토성의 복원에 관한 담담한 글로 가뿐히 스타트를 끊었다.


두 달이 금방 지나가고, 지난 여름에 다시 나의 차례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주제가 특정되지 않은 채로 두서없이 두 번째 글을 썼는데, 어찌 된 일인지 사무국에서는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고쳐서 다시 보내 달라는 말도, 주제가 맞지 않으니 바꿔 달라는 말도 없었다. 여러 경로로 글에 대한 회신을 문의해봐도 답을 못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갑자기 연락을 받았는데, 너무 길고 요점이 없으니 글을 줄이고, 기한은 딱히 정해진 것이 없으니 글이 완성이 되면 보내 달라는 전화였다. 기다리다가 받은 답 치고는 맥이 빠졌고, 이런 단순한 답을 주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 후에 글을 다시 써서 보내지 않았다.


 그 후, 막연히 페미니즘을 비판한 글의 기조가 문제였다고 지레 짐작만 한 채로 시간이 흘러갔다. 내가 글을 고쳐서 보내지도 않았고, 혼자서 짐작만 하고 놔 버렸으니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치니 글을 쓸 의지가 생기지 않았고, 6개월 만에 다시 글을 써 달라는 문자를 받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실은 의욕이 상실된 상태다. (연초에 글을 1년간 쓰겠다고 약속했으니 의무가 있고, 그간의 해태에도 책임이 있으니 지금이라도 써보려 한다.)
 
 길고 긴 서론을 끝내고 본론을 얘기하자면, 어쩌다 보니 나와 같이 회원 활동을 하고 있는 ‘보통 사람’이 인권연대에 기고하는 글에 노동 운동이나 페미니즘 등에 관한 비판적 시각을 자유롭게 드러내기는 상당히 어렵다. 미리 짐작하는 것이지만, 덮어놓고 반인권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힌다. 인간의 권리 중 자유롭게 말할 권리(Freedom of speech)는 가장 기본적인, 기본권 중에 기본권인데, 나 스스로 심각하게 검열을 하고 있음을 느낀다. 자체 검열을 감수하고서 글을 시작하더라도, 그런 글이 무턱대고 받을 비난과 비판을 예상하면 차라리 안 쓰는 게 낫다는 생각에 지레 펜을 놓고 싶은 심정이다.
 
 진부하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거래처 중에 비교적 큰 회사가 있는데, 그곳의 70대 사장님은 종종 정치적 얘기를 꺼내며 타 회사 직원인 나의 의견을 물어보시곤 한다. 다른 회사 직원일 뿐인 나의 의견을 강압하거나 하지는 않으시지만, 요새의 젊은이들과 자신의 의견이 전혀 다르다는 점은 명백히 하시는 편이다.


 그런데 한번은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바이어와 동석해서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한국의 미래가 걱정’이라며 어설픈 영어로 바이어에게 말씀하시다가, 그 얘기를 애써 못 들은 체하고 있는 나를 보셨던 건지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시더니 나를 보고 한 번 더 말씀하셨다. (기분이 상하신 것인지 꾸짖는 듯 했음.) 마치 정치적 의견조차 상거래의 갑을 관계에 종속되는 듯한 압박을 받는 듯했다. 당시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 못하고 많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자격지심일 수 있지만, 회원 칼럼니스트가 된 이후에도 스스로 압박을 받는다. 나에게 말할 자격이나 권리는 없는 것 같고, 방향과 정답은 정해져 있으니 그에 따른 지침을 벗어난 글은 쓰면 안 된다는 무언의 분위기를 느낀다. 노동자나 여성이 사용자나 남성을 공격하고 폄하하는 글은 가능해도, 그 반대는 반인권적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만 같은 압박을 느낀다.
 
 이것이 나만의 편견이기를 바란다. 사용자도 사람이며, 남성도 사람이다. 동물 복지까지 운운하는 마당에, 어느 누구도 처한 입장이나 사상이 다르다고 일방적으로 비난 받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가 존중 받아야 하듯 사용자도 존중 받아야 하고, 이슬람이 존중 받아야 하듯 개신교도 존중 받아야 한다. 일례로 심각한 인권 침해를 저질러 대중의 단죄를 받았던 대한항공 조현아 전 사장의 경우, 그 자신이 재벌가로서 특권층이면서 동시에 여성으로서 미디어나 대중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인권 또한 있었다. 하지만 마녀 사냥 당하듯, 이런 측면은 분노의 광풍에 휩쓸려버렸다.


 21세기에 동성애에 대한 포용이 강조되듯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 가치관도 그 반대편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우열이 없다. 어떤 것을 취하고 그 반대편은 버리거나 짓밟아야 한다는 극단적 사고는 사회적으로 합의될 수도 없으며, 폭력적 방법이 아니고서는 쟁취될 수도 없다. 더 크게 보면, 현재의 가치 판단으로 진보적이고 최첨단을 걷는 듯한 사고도, 마치 우리가 구한말을 보듯 한 세기가 지난 사람들이 보면 한참 구식으로 보일 수 있다. 좀 더 멀리서 봤으면 좋겠다. 당신의 생각과 주장은 그토록 절대 진리인가?
 
 해가 지날수록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이 더더욱 와 닿는다. 마치 자신이 정의이고 미래인 것처럼 목소리를 드높이지만, 타자를 공격하고 비난하며 스스로의 입장만을 목소리 높일 뿐 전체 구성원의 조화에 대해서는 이만큼의 배려나 고려도 없는 특정 단체들은 오히려 더 많아지고 점점 과격해지고 있다. 정답이 없이 각기 자기 계층과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투쟁하고 쟁취할 뿐, 암묵적 양보와 신의 같은 것은 가족 사이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 소멸하고 있다. 때로는 인권 단체도 부지불식 간에 단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까지 있다. 인권에 좌와 우가 있는가, 우파는 인권이 없는지, 아니면 우파는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지, 많은 의문과 생각이 꼬리를 문다.
 
 개인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는 각개 전투가 발생하는 사회 현실이 못내 피로하다. 이런 갈등들을 완화시켜줄 수 있는 시민 단체들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 인권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필요하듯, 혼돈의 시대에 대한 자각, 그리고 인권 단체들 스스로의 끊임없는 변화를 바라게 된다. 물론 그 누구라도 답을 찾기 어려운 주문이다.


 전대협 의장이었던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제는 민주노총은 더 이상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오늘의 세상은 결코 어제의 세상과 같지 않다. 오늘의 약자는 어제의 약자가 아니며, 침묵하는 다수가 약자가 되어 속으로 분개하고 있는 현실을 보는 눈도 인권단체에 필요해졌다고 느낀다. 강자와 약자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구분되지 않을 만큼, 세상은 너무나 복잡해졌고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임영훈: 미국에 실을 팔고 있습니다. 가끔 천도 팔지만 어떻게 해야 팔리는지는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