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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을 파는 ‘산 자들’ (서동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1-17 18:29
조회
395

서동기/ 회원 칼럼니스트


 지난해는 유난히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열심히 광장에 나가다 보니 새해가 밝았고, 몰아쳤던 정치적 사건들의 흐름이 일상의 시간에도 영향을 미친 것인지 금세 한해가 지나갔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많은 비정상들이 조금씩 나아져가고 있다. 대통령은 비정규직으로 왜곡된 노동시장의 정상화를 이야기하고, 최저임금 인상이 중요한 문제임을 반복해 강조한다. 일방적 합의로 국가에 의해 다시 폭력을 당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국가는 사과했고, 그녀들을 정성으로 청와대에 모셨다. 남북 고위급 회담을 계기로 얼어붙은 남과 북의 관계 개선도 시작되었다. 촛불로 탄생한 정권은 자신의 책임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지난해 말 개봉한 영화 <1987>도 열풍을 일으키며 4.19 혁명에서 80년의 광주로, 87년의 광장에서 촛불광장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승리했음을 선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그날이 오면>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노래하던 ‘그날’에 이제 한발 다가서있는 것일까? 1980년대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지금의 20대가 영화 <1987>의 주요 관객층이라는 고무적인 현상 이면에는 ‘88만원 세대’를 넘어 ‘77만원 세대’라고 불리기 시작한 N포 세대의 청춘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 정상화를 위한 노력의 이면에는 호시탐탐 ‘성장’과 ‘효율성’을 무기로 반격을 노리는 경제 권력의 저항도 여전하다. OECD 최고의 자살률과 빈곤, 양극화의 문제는 사람들의 일상을 짓누르고, 정당한 노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절벽 앞에서 사람들은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환상의 한탕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국가 권력은 달라졌을까? <1987>로 주목 받은 남영동 대공분실과 같은 보안분실는 여전히 서울에만 5개, 전국적으로 43곳이 운영 중이다. 경찰은 잠시 엎드려 있지만, 대공수사권 이첩 등을 계기로 보안분실의 역할과 기능을 확대할 수 있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검찰 개혁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끈끈한 카르텔을 넘어 검찰에 대한 개혁의 성과를 얼마나 거둘 수 있을지도 요원하다.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가짜 사무실까지 차렸다는 의혹을 받은 변 모 검사의 자살에 검찰이 보여준 모습은 어떠했는가. 한 식구의 죽음에 절절한 애도를 나타내고, 검찰총장은 연말에 맞춰 직접 납골당을 방문하며 검찰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몸소 보여준다.


사진출처 - Francesco Boneri, 성전의 정화(淨化), 1610-1615. 구글


 우리 사회 앞에 놓여있는 과제는 이렇게 잠깐 언급해도 가볍지 않은 것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만 새로운 ‘그날’, 통일의 ‘그날’, 자유와 인권과 평등의 ‘그날’을 관성적으로 외치는 것은 앞선 죽음들과 치열했던 싸움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서준식 선생은 ‘광주인권상’을 제정하여 인권상을 국제적 사교도구로 활용하고, ‘명사님들의 호화판 잔치’가 되어 광주를 세계적인 ‘인권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선자들아. 인권을 앞세운 요란스러운 행사를 꾸미기 전에 먼저 광주 주민의 인권을 걱정하라. 먼저 광주교도소의 재소자에 대한 인권침해를 막아 내고 먼저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발언하라. 거룩한 광주의 이름으로 인권을 팔아먹지 말라!”(인권하루소식, 2000년 5월 20일, <인권의 도시는 없다> 가운데, <서준식의 생각>, 야간비행, 2003, p.96에서 재인용)



 이 말을 촛불 이후 정권을 교체했고 새로운 세계사적 촛불 혁명을 이뤄냈다고 자축하는 정치인들과 진보세력에게, 촛불을 예찬하는 대학의 교수들과 우리 스스로에게 돌려보자. 광주에서 세월호까지, 살아남은 ‘산 자들’이 안전한 ‘그날’, 정의로운 ‘그날’을 단지 팔아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습관적으로 실체도 없는 ‘그날’을 말하면서, ‘그날’을 파는 ‘산 자들’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서동기 :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읽고 묻고 공부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