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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괜찮지 않아, 사랑이야 (박보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1:55
조회
355

박보경/ 청년 칼럼니스트



-괜찮지 않아

희망이 안 보여 우울한 밤, 늦은 저녁을 먹으며 드라마를 시청한다. 어두운 밤 낯선 남자에게 성폭행 당한 아내와 그녀를 발견한 남편. 그 후로 그들은 현실에 없는 바퀴벌레를 보기 시작한다. 정신병에 고통 받는 부부와 그들을 치료하는 정신과 여의사. 텔러비젼 속 남자는 괜찮다고 말한다.

“괜찮았어요. 아내만 괜찮다면 난 정말 괜찮았어요.” 화면 가득 여의사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안 괜찮은 일이에요…. 이건요 아버님, 화낼 일이고 울 일이에요.” 밥을 떠 올리던 숟가락이 멈춘다. 눈이 뜨겁다. 씹고 있던 밥알이 축축해진다.

아! 괜찮지 않다. 나는 괜찮지 않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괜찮아’를 말한다. ‘괜찮지 않다’는 희망을 무너뜨리는 금기어다. 각자의 괜찮음을 토해낼 힘도 받아줄 상대도 없다. 타인의 안부를 걱정하는 건 사치다. 입을 닫고 표정관리를 한다. ‘괜찮다. 이 정도는 괜찮다.’ 스스로 주문을 건다. ‘안녕하십니까.’라고 예쁜 말로 안부를 묻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한 번 상처 입은 사람들은 더 단단히 문을 닫았다. 가정을 넘어 학교, 사회에서 문 닫는 소리가 들린다. 문 닫은 방 안에서 우리는 홀로 시들어간다.

닫은 방문 안, 억눌린 사람들은 욕망을 분출한다. 홀로 여행을 떠나는 친구, 글로써 하고 싶은 말을 담아내는 친구, 운동에 중독되거나 퍼즐 맞추기에 열중하는 친구. 다른 방식으로 분출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괴롭힌다. 미소를 잃어버린 친구, 술에 중독된 남자, 말문을 닫아 버린 어린 아이, 수시로 자해하는 친구. 때론 거대한 분출이 일어나기도 한다. 괴물이 된다. 대구에 사는 장모(25) 씨는 여자 친구의 부모를 살해했다. 김해에 사는 여중생은 친구를 숨지게 하고 시신을 불에 태운 뒤 시멘트를 부어 유기했다. 서울에 사는 이모(39) 씨는 지하철 안에서 8명의 승객에게 커터 칼을 휘둘렀다. 화산 같은 사람들은 범죄자라고 불렸다.

거대한 분출은 사람을 죽이고, 아프게 한다. 분노한 사람들은 괴물의 방문에 나무를 대고 못을 박는다. ‘다시는 나오지 마! 똑같이 죽어버려’ 범죄 기사의 댓글은 피 묻은 못으로 가득하다. 힘차게 못을 박는 사람, 갇혀버린 괴물. 모두의 방문은 굳게 닫혀있다.

확실히 우리는 괜찮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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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서울신문



-사랑이야

드라마 속 어두운 라디오 부스. 주인공인 라디오 DJ가 얘기한다.

“주인공 맥머핀은 처음 정신 병동으로 와서 그들과 자신이 절대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히 무시하고 비웃죠. 영화를 보는 우리 관객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저들은 미쳤고 나는 멀쩡하다 여깁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고 극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혼란스러워집니다. 이상하고 음울하고 기괴하고 미쳤다고 생각했던 등장인물들이 귀엽고 아프고 안쓰럽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정신과 의사들은 말합니다. 우리 모두 환자다. 감기를 앓듯 마음의 병은 수시로 온다. 그걸 인정하고 서로가 아프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못 박혀있는 괴물의 방문을 본다. 닫혀있는 내 방문을 본다. 똑같이 죽으라는 피 묻은 못을 뽑는다.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괜찮지 않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 괜찮다고 속이지 않는다. 희망은 무너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따뜻한 밤하늘,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이 마루에 앉아있다. 여자가 말한다. “정말로 사랑이 저들을 구할까? 그럼 너도 사랑지상주의니? 사랑은 언제나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만을 줄 거라고?” 남자가 대답한다. “고통과 원망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불행도 주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힘도 더불어 주겠지. 그 정도는 돼야 사랑이지.”

박보경씨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