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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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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여섯 아재들의 수다 (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3-07 17:31
조회
1684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미투 이야기가 한창입니다. 별 다른 목적 없이 만난 사소한 술자리에서도, 일 때문에 만난 사람들도 한마디씩 합니다. 어떤 친구는 제가 출판 쪽 일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화로 시인 아무개가 어떤 사람이었나를 물어보기도 합니다.


 문단이나 영화, 공연 쪽에서 일해 왔던 사람들을 만나면 사뭇 심각한 이야기가 오갑니다. 한 번쯤 들어봤거나 만났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심심찮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견해들은 제각각입니다.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어떤 문화계 인사를 두고 A는 그럴 줄 알았다고 얘기하고, B는 과장되었다고 하고, C는 ‘그 개XX!’ 라고 욕설을 합니다.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80년대에 대학들을 다녔으니 이른바 ‘아재’들입니다. 역시 화제는 #미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가해자로 지목받고 있는 유명인들의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펼쳐집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친구가 정리를 합니다. 항상 우쭐대기를 좋아하는 그 아재는 할리우드 미투운동의 시작부터 작금의 우리나라 상황을 네이버 지식인 답변만큼이나 사태의 추이를 잘 정리해서 브리핑합니다.


 그동안의 사건과 사실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음에도 아재들은 개념이 잘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또 뒤섞입니다.


 ‘OOO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면 ‘근거를 대라’ 하는 둥 가해자의 이미지에 따라 이편저편이 나뉘는가 하면 진짜 이야기는 연예계 정치계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거쳐, 남자와 여자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까지 옮겨 갑니다. 결국 연예인 가십거리에 다름없는 수다가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말 그대로 ‘아재 개그’가 휙 지나갑니다.


 “사장님, 여기 오백 한 잔이요!”
 “미 투!”
 “미 쓰리!”
 그런 분위기를 타고, 자신의 마초 기질을 자랑스러워하던 아재가 이야기를 정리하려 합니다.
 “좌우간 이제는 여자를 만나려면 녹음기가 필요하다는 거야, 오늘 얘기 끝!”
 그러자 맞은편에 앉았던 샌님 같은 아재가 벌컥 화를 냈습니다.
 “네놈들 머릿속엔 똥만 들었냐?”
 마초와 샌님은 그동안 번번이 의견이 갈렸었습니다. 그 둘은 어떤 자리에서도 서로 대립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샌님은 오늘 ‘마초, 네놈’이라고 하지 않고 ‘네놈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초만이 아닌 ‘마초를 포함한 이 자리의 아재들 전부’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한마디는 이전까지의 분위기를 단번에 바꾸어버렸습니다. 이미 여섯 아재들은,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미투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주었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재가 되기까지 겪었던 일상 속 기억 한편에는 나 역시 가해자였을 수도, 최소한 방관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번쯤 해보지 않았을까요?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아무튼 그때부터 남들 이야기가 아닌 자기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해와 피해의 근본적인 문제와 정도의 차이 그리고 남자의 입장과 여자의 입장. 취지는 인정하나 또 다른 피해의 위험이 있고 그래서 혼란이 계속될 거라는 의견, 다소의 혼란이 있어도 한번은 뒤집어져야 할 문제라는 의견 등등 나름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투에 대해 여섯 명 아재들의 견해는 조금씩 달라도 이야기는 점점 진지해졌습니다. 적어도 아재들에게는 자기 자신과 주변의 환경 그리고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고 있었음은 틀림없었습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모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딱히 특출난 게 없는 평범한 아재들이니 명료한 결론은 없었습니다. 진지해질수록 또 다시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혼란은 더해만 갔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말이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상황이 되었을 때, 비교적 말을 아꼈던 한 아재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어쨌든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한때는 빛나는 청춘이었을지도 모를 여섯 아재의 #미투 이야기 자리는 그렇게 정리되었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