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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학점의 추억, 그리고 일제고사 (이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9 21:41
조회
307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학 2학년 어지러운 군부 독재 시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제법 깊은 인생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는 화학과 학생이었지만 앞으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목사가 되겠노라 다짐을 하고는 부전공 제도를 이용해 학업의 방향을 신학과 종교학 쪽으로 선회했다. 그래도 졸업은 해야겠기에 화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고민의 격랑은 지속되었다. 전공에 전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시험에 임할 심리적 여유조차 없던 어느 날 ‘물리화학’이라는 전공과목 기말고사를 한 번 포기한 적이 있었다. 시험 직전까지 필요한 모든 과정은 이수했지만, 당시 기말고사를 볼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그 결과 F학점을 받았다. 일부 시험을 보지 않은데다가 철저한 상대평가가 적용되던 학과였으니 경쟁에서 밀려 그런 학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겨우 F를 모면했던 다른 과목들도 몇 개 있었다.

그런데 그 ‘F’라는 성적은 내게 묘한 인생철학을 갖게 했다. 아무리 시험을 한 번 걸렀기로서니, 나는 기말고사 직전까지의 거의 모든 강의에 참여했고, 좋은 성적은 아니었겠지만 중간고사도 치루며 공부했다. 그렇다면 그 수업을 수강하지 않은 다른 학생보다는 물리화학을 조금은 더 안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F라는 성적은 그 수업을 듣지 않으니만도 훨씬 못한 평가였다. 가만 생각하니 그것은 모순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공부를 했다면 안한 학생보다 무언가 ‘득’이 있다면 있어야지 ‘실’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뒤 나의 F학점 경험은 기존 제도나 관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사람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화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종교학을 공부한 뒤 대학에서 종교 관련 과목을 가르치게 된 나는 학생들의 시험 성적을 최종 평가할 때 수강생에게 가능한 한 F학점은 주지 않으려 했다. 제도가 바뀐 요즘은 해당 과목의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교수에게 일부러 F학점을 요청하고는 다음 학기에 재수강해 성적을 올린 뒤 F라는 기록 자체를 없애려는 학생들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그 과목을 일부라도 수강했으면 안 한 다른 학생보다는 그 분야에 관해서 좀 더 안다고 간주하게 되었다. 그 점에서 나는 거의 모든 교육을 거부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F학점을 주지 않으려는 긍정적인 원칙을 그 뒤로 쭉 이어가고 있다.

요사이 이른바 일제고사를 둘러싸고 대립각이 날카롭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일제고사 긍정이라는 진리와 일제고사 부정이라는 진리의 대립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진리와 비진리의 대립에 가깝다. 대학 시간 강사를 포함해 20여년에 가깝게 지속되어 온 나의 교육 경험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종교교육학회 이사로 여러 해 관계하면서 배운 교육철학의 기본에 비추어보건대도, 학생들에 대한 평가 방법은 다양해야 한다. 학생들의 타고난 재능이 저마다 다른 만큼 모든 학생들을 획일적으로 줄 세워 평가할 수 있는 일방적 잣대란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선생이라면 가능한대로 학생들 하나하나의 재능을 살려줄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제대로 된 학교라면 선생들이 그렇게 교육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제대로 된 교육 당국이라면 그 학교가 그렇게 교육할 수 있도록 정책적이고 재정적으로 후원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 투자의 영순위는 우수한 교원 양성, 그리고 학생들 개개인을 돌볼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마련해주는 데 두어야 한다. 일제고사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을 학생 대 교사 비율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는 데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정신을 가지고 행한 교육이라면 그것이 다소 형식이 다르고 관례에 어긋나더라도 존중하고 때로는 더 잘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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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초등학교 4~6학년과 중학교 1~3학년생들을 대상으로 ‘교과학습 진단평가시험’이 동시에 치러진
지난 3월 31일 오전 서울 중구 만리동 봉래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칸막이를 세운 채 시험을 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런데 일제고사 대신 체험 학습을 선택한 교사에게 징계라니, 그것도 파면이라니, 도무지 교육을 책임진 당국의 처사가 아니다. 교육 정책은 그 정책도 교육적이어야 한다. 교육을 한다면서 정책이 창의성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비교육적인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된다. 물론 이른바 일제고사를 통해 교육 정책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자료들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반영될 교육정책보다 일제고사로 인해 불가피하게 드러날 서열화 과정 및 그로 인한 또 다른 무한 경쟁의 후폭풍을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이른바 능력 있는 학부모들이 자녀들의 학업 능력의 향상이 아니라 그저 석차를 궁금해 하면서 무한 경쟁을 내심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교육당국은 먼저 그러한 상황을 우려하고 학교가 무한 경쟁의 전쟁터가 아니라 자녀들을 잘 돌보고 교육할 수 있는 곳이라는 신뢰를 쌓는데 매진해야 한다.

이 마당에 다른 의도도 아닌, 교육을 걱정하며 일제고사와는 형태가 다른 교육을 행한 교사를 징계하는 것은 교육적이지 않다. 교육 자체를 거부했다면 모를까, 다른 교육 방식을 시도했다고 해서 중징계를 내린다는 것은 정말이지 교육이 아니다. 이제라도 이 나라 교육이 그나마 1%라도 나아지려면 파면된 교사를 복권시키고, 계획하고 있는 징계를 철회하고, 학생들의 능력이 모두 동일하지 않다는 기본적인 사실에 눈뜨게 되면 좋겠다. 왜 그렇게 단순한 사실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일제고사 지지자들 내지 정책 입안자들이 자기들의 자녀는 경쟁에서 앞설 만큼의 우월한 능력을 지녔거나 자기 집안이 경쟁에서 이길 만큼의 여유가 있는 등, 숨어있는 이기적 동기가 작용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