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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위대영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4 10:32
조회
208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에 깔려서, 이어 닥친 쓰나미에 쓸려가 죽었다. 곧이어 원자력 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많은 사람이 방사능에 피폭되고, 인근 주민들은 생활터전을 버려두고 대피했다. 방사능 물질에 대한 걱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빠져나갔다. 한국도 위험하다며 한국을 떠나는 외국인도 있다. 한국 상공으로는 날아들지 않을 것이라던 방사능 물질들이 전국에서 검출되고 있다. 일본인들이 직접적인 방사능 위험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도 이래나 저래나 한국에서 떠나기 어렵다. 한국의 원전은 지금도 계속 건설 중이고, 해외로도 수출하고 있다.
구제역으로 전국에서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살처분을 받았고, 산채로 땅에 매장됐다. 버스에서는 구제역 종식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구제역은 인체에 무해하므로 육류 소비에 안심해도 된다는 광고가 흐른다. 침출수는 언제 누출될지 모르고 우리가 먹는 식수와 지하수에 언제 침출수가 흘러 들어갈지 모르며 돈을 내고 받아든 생수병의 물이 과연 안전한지 걱정한다. 오래 전 조류인플루엔자가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았듯 지금 구제역도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과 조류가 같은 공간에 있다 보면 사람에게 옮겨지지 않을 것 같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겨지기도 하는 것처럼, 구제역은 정말 사람에게 옮겨지지 않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살처분 된 가축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기간만 더 길 뿐 실은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육류를 위해 도살되는 가축과 살처분 된 가축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겠나.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 3차 정신건강실태 조사보고에 의하면 응답자의 80%가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을, 52.3%가 외상후 스트레스성장애를 겪고 있다고 했다. 전체인력의 36%인 2,646명을 감원하겠다는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 계획에 반대하며 시작한 파업 과정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경찰의 폭압적인 진압으로 피를 흘리고, 파업이 끝난 지 1년 8개월이 지난 현재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노동자와 가족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월요일 한겨레신문 ‘쌍용차 해고 노동자 짙어진 죽음의 그늘’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지난 2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청 앞뜰. 또래와 함께 뛰어놀던 6살배기 아이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자원봉사자가 “위험해. 어서 내려와”라고 외치자 아이가 말했다. “싫어. 자살할거야.”, 라고 쌍용자동차 노동자 가족들의 모습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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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전국금속산업노조 쌍용차지부 한 조합원이 지난 5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 3차 정신건강 실태조사 보고서’ 발표회 도중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얼마 전 대법원은 합법적인 파업이라도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사용자의 사업운영에 심대한 혼란 내지 막대한 손해를 초래하는 경우에는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합법적인 파업에 대해서는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적용해선 안 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로써 무력화됐다.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도 천정부지로 뛰어 오른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든 학생들, 학비 대출을 받아 어렵게 손에 졸업장을 받아들어도 자신을 받아줄 직장이 없는 현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는 언제 현실이 될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위험. 치솟는 물가, 늘어가는 빚,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조용하고 말이 없다.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못 하지만 몸과 마음에 체화되어 있다. 고통이 내게 현실이 되는 때, 내가 저항하기 힘든 상황이 눈앞에 닥쳤을 때 비로소 공포는 육체를 얻는다. 가장 무서운 공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대하는 영화다. 주위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언제 어떤 방식일지는 몰라도 나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부지불식간에 자신도 옆 사람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절망으로 바뀌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구제역과 침출수의 공포, 방사능 공포,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미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로부터 내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공포다. 너무 익숙해서, 항상 그래왔으니까, 나만 아니면 어떻든지... 이미 제한되고 제한된 파업이지만, 그나마 제한된 절차에 따라 인간답게 살자며 시작하는 파업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엄혹한 현실. 하지만 모른다. 나만 아니면 되고, 우리 사회는 항상 그 정도였고, 법원이 자본의 편인 것은 너무 익숙하니까.
꽃이 피는 봄이 왔는데, 나무에 핀 꽃을 쫓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살이 뭔지도 모를 나이에 자살을 떠올리며 나무를 오르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