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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과 아날로그 (김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1 11:17
조회
433
디지털과 아날로그라는 말은 이제 시대의 키워드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아날로그 세대는 물러가야 할 세대이며, 디지털 세대만이 미래를 창조하고 바꾸어갈 위대한 힘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는 황우석이 그동안 전 세계, 온 국민, 과학계, 대한민국을 기만하면서 사기극을 연출하였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한동안 이 땅을 들끓게 했던 황우석과 그의 찬란한 연구 성과들이 사회적·윤리적 측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과학적 측면에서도 거짓이며, 결국 황우석은 희대의 사기꾼에 불과했다는 내용이다. 거짓이냐 참이냐라는 단순 편리한 이분법으로 한국 사회와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나온 발표를 들으면서, 나의 머릿속에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라는 말이 빙빙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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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우석 파문 최종 발표. 서울대학교 조사위원회 정명희 위원장이 10일 서울대 문화관에서 황우석교수의 연구에 대한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백승렬/사회/과학/ 2006.1.10 (서울=연합뉴스) srbaek@yna.co.kr



  디지털 시대가 인류의 현실에 펼쳐진 것은 분명하다. 인터넷상에서 무수한 사람들의 만남이 이어지고 의견을 개진하는 시대가 되었기에 황우석의 문제를 두고도 수많은 네티즌들이 서로 입장을 달리하면서 물고 물리는 사이버 소리 전쟁이 가능하였다. ‘아이러브 황우석’이라는 카페에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회원으로 가입하고, 진실을 국익의 이름으로 호도하며 황우석을 옹호하는데 앞장 설 수 있었던 것도 디지털 시대를 증명하는 현상이다. 다른 한편, 그동안 수없이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은폐된 진실을 추구하였던 소중한 프로그램이었던 MBC 방송의 PD 수첩을 초토화시키고, 광고 중단과 방송 중단이라는 참으로 어이없는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도 역시 디지털 시대의 엄청난 힘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인간 사회에서 이중적인 위상을 지닌다는 것, 즉 누가 무슨 목적으로 과학기술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과학기술에 대한 평가가 좋고 나쁨의 극단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번 사태에서도 또 한번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인간 줄기세포 논문 조작 여부에 대하여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던 것도 어찌 보면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젊은 과학자들의 인터넷 공간인 BRIC이란 온라인 모임에 논문 조작 사진과 DNA 지문 데이터 내용이 올라왔기 때문에 맹목적인 황우석 신화가 덮고 있던 ‘단순한 사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 결국 황우석 사태를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디지털의 어둠과 밝음의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황우석 사태와 디지털 세대를 화두로 좀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보자. 황우석의 난자 매매, 연구원 난자 제공의 강제성 문제도 어떻게 보면 황우석이라는 정신피폐아가 빚어낸, 속도를 중시하고 속도를 생명으로 아는 디지털 사고방식으로부터 빚어진 일은 아니었을까. 단순히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빠른 속도로 무엇을 전달할 것이며, 빠른 속도로 도달하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가라는 것이 인간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 아닌가.

나는 인간이 숨쉬고, 냄새 맡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위대한 감성과 힘은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가능하며, 그런 위대한 힘을 나눌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생명의 소중함이고, 인간의 소중함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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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아날로그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황우석의 디지털 사고방식 때문에 아날로그적 인간성과 동떨어진 일련의 사태들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조지 오웰이 소설의 힘을 빌려 상상한 ‘1984년’이 이미 손에 잡히는 현실로 되고, 온갖 다양한 명분을 들이대며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제한하는데 이용하는 감시 체제인 CC-TV와 첨단의 기술을 이용한 도청 등이 가능한 것도 디지털 시대에서 우리들의 소중한 ‘아날로그’를 무시하기에 가능한 처사이다.

인권을 외치고, 인권의 소중함을 말하면서도 막상 우리 주위에 수없이 늘어선 CC-TV의 문제점을 제기하면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별다른 반응이나 지지를 보이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과학 제일주의의 가치를 필두로 하는 디지털 만능의 사고방식이 뇌를 지배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고, 소중한 아날로그의 감수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싶다.

내가 자라고 성장했던 시대는 분명히 아날로그 시대였다.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사회의 구조와 문화가 디지털로 돌입하면서 우리 세대들은 분명히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정체성마저도 흔들렸었다. 그러나 이제 디지털의 명암을 보면서 나는 어느 정도 안도를 하게 됐다. 디지털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는 영원하다는 믿음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더 위대하다는 생각을 한다.

분명히 카세트테이프의 음질보다 CD의 음질이 뛰어나고, 디지털 TV가 아날로그 TV보다 선명한 화질을 제공해주는 과학의 시대, 디지털 우수성의 시대가 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기계와 문명 속에 담겨있는 내용은 여전히 우리 인간의 문제이고, 인간의 감수성에 자리 잡은 소리와 빛, 맛, 감정 등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디지털이라는 외형이 전적으로 결정하거나 조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그래서도 안된다.

디지털의 세계 속에서 아날로그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아날로그의 내용을 구현하는 것이 어찌 보면 현 디지털 세대를 자임하는 세대들이 완수해야 할 미래상으로 보인다. 현재 내가 일하고 있는 자그마한 인터넷 신문인 코리아포커스 역시 디지털 시대이기에 가능한 언론 매체이다. 하지만 그 내용물은 철저하게 아날로그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며, 어떻게 아날로그 감성을 디지털 속에서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남아 있는 과제이다.

디지털이 결코 만능일 수 없는 세상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날로그여 이제 힘을 내라. 아자! 아자!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