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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주모가 사라졌다(최낙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2-20 11:03
조회
459

최낙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려운 중에도 작은 생맥주집을 유지하고 있던 고교동창 K와 오랜만에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제 그만 장사를 접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앞으로 수년간 ‘주모(酒母)가 소환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면서 애써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삼강주막 : 출처 - 환경운동연합


2005년, 경북 예천 삼강주막을 운영하던 유oo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주막도 주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인데 K의 ‘주모 소환’이라는 말에 순간 멍했다가, 금세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K가 말했던 그 주모는 무언가 뿌듯하게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 불러내던 그 ‘국뽕 주모’를 말하는 거였습니다. 가끔 드나드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걸핏하면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발!”이라는 댓글이 달린 글들을 보아왔기에 그 의미와 언제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습니만 문득 국뽕, 주모 드립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구글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2011년쯤, ‘국뽕’이라는 말은 인터넷 역사 커뮤니티에서 처음 쓰였던 말이라고 합니다. 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로 우리나라를 무조건 찬양하는 행태를 비꼬는 부정적인 말이었던 국뽕은 시간이 지날수록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하자 그해 10월 3일, 미국 국무부 정례브리핑에서 질문의 기회를 얻은 우리나라 기자가 뜬금없이 “두 유 노우 싸이?”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변의 실소에도 미국무부 대변인은 “나는 잘 모르지만 아마 우리 딸은 알지 않을까?”라고 대답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우리나라 언론에서 “美국무부 대변인도 `싸이 팬' 선언(종합)-브리핑서 <강남스타일>에 관심...’이라고 대서특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주모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류현진 선수가 그해 3월 시범 경기에 4이닝 동안 12명의 타자를 단 한 명도 내보내지 않는 퍼펙트 피칭을 선보이자 자부심이 차올랐던 국내 야구팬들이 야구 관련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응원의 구호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히 류현진이 매 이닝 잘할 때마다 주모를 불러서 ‘이러다 주모, 과로사하겠네’ 같은 드립을, 초반에 위기를 맞다가 결국 승리했을 때는 '주모의 판매 전략, 극적이다' 등의 글이 등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주모는 2015년, 영국 프로축구 토트넘으로 이적한 손흥민의 활약으로 해외 진출도 했습니다. 손흥민이 잘할 때마다 토트넘 공식 트위터에 "주모!"를 외치는 한국인들을 보고 현지 팬들이 "Jumo!"라며 함께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출신 프로게이머까지 이 표현을 배워 그가 게임에서 승리할 때마다 "오~ 주모!"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이후에도 서구 무대에서 활약하는 스포츠 스타들 그리고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같은 K팝 스타들의 활약이 이어지고, <기생충> <오징어 게임> 같은 우리 컨텐츠가 위세를 떨치는 일이 많아지자 가슴이 터질 정도로 국뽕이 차오르는 일이 많아지는 만큼 주모를 찾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주모를 불러댔으며 저처럼 무감한 사람까지도 국뽕과 주모라는 말을 이해하게까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단순히 인터넷을 뒤져본 것에 불과하니 확실하게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대략 저간의 내력을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가게를 정리하겠다는 K의 말에 이렇게 구글 선생님께 문의까지 해본 것은 가슴 뿌듯한 느낌을 가진 적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 분노와 우울감을 주는 뉴스들에서 잠시 눈을 돌려보려는 헛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교동창 K의 ”‘앞으로 수년간 주모가 소환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발!”


 

그 말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이 당선 확정되었을 때 K가 저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어, 신이 나서 했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주모를 소환할 일이 언제쯤 있을런지 생각할수록 아득하기만 합니다.


 

 

최낙영 위원은 도서출판 밭 주간에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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