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우연의 일상성(박상경)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02-11 11:39
조회
651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12월의 지리산에 눈이 내린다. 새벽녘부터 내리던 눈이 아침 녘으로는 눈발이 굵어지면서 더욱 세차게 흩날린다. 뱀사골산장을 떠나 간신히 연하천산장에 이르러 눈이 좀 진정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디를 돌아봐도 온통 흰색의 침묵이 깊게 내리고 있다. 그 풍경에 넋을 놓아 버린다. 어제 뱀사골산장에서 인사를 한 청년과 우리를 배웅한다고 연하천까지 따라나선 뱀사골 산장지기랑 연하천 산장지기가 그 깊은 침묵에 젖어 든다.


 그치지 않는 눈과 함께 어둠이 내린다. 더 이상 출발은 어려우니 옹기종기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개인의 고민도 있고, 산악인의 전설 같은 무용담도 있고, 세상을 유람하며 도를 닦는 기인의 기행 같은 만담도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이질적이기보다는 묘하게 서로 어우러지면서 우리를 흥겹게 한다. 깜깜한 하늘을 이고 흰 눈으로 덮인 능선이 줄기줄기 서로를 이고 달리는 밤,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또랑또랑한 하늘의 별처럼 우리의 귓전을 울리는데, 어느새 권커니 잣거니 하던 술도 차도 떨어지자 하나둘, 각자의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세상이 하얗다. 그저 하얗다. 그 하얀 능선을 따라 길을 나선다. 우리를 배웅하는 산장지기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벽소령 지나 세석을 거쳐 장터목에서 바로 중산리로 하산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하루를 묵었으니 걸음은 더욱 바쁘다. 그렇게 오름길 내림길 다시 오름길 내림길을 반복하며 세석 지나 장터목으로 돌아드는데 지쳐 퍼진 사람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동안 동행한 청년이 깜짝 놀라며 이름을 부른다. 친구란다. 산에 간 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걱정하자 친구를 찾아서 겨울 산에 오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달리다시피 하산길을 재촉하여 중산리로 내려오니 어느덧 어둠이 끼어들고, 저기 버스 정류장까지는 다시 한 시간쯤 가야 하는데, 진주 가는 막차 시간이 간당간당하다. 한 사람이 배낭 벗고 달려가 버스를 잡아 놓기로 하였다.


 땀으로 흠뻑 젖어 뒤이어 정류장에 도착하니 앞서 달려간 청년이 쫓아와 배낭을 받아 주고, 버스 기사는 웃으며 출발시간 늦었으니 어서 타란다. 몇 명 안 되는 승객들도 버스에 오르는 우리를 보며 오느라 고생했다며 안도하는 표정으로 맞아준다. 자리에 앉으니 긴장이 풀리며 꾸벅꾸벅 조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진주란다.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려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지갑을 찾으니 아차, 배낭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다. 허겁지겁 배낭을 다 헤집어 찾았으나 역시나 없다. 아마도 고마운 마음에 버스요금을 내주고는 지갑을 손에 쥔 채 졸다가 버스 바닥에 떨어뜨린 모양이다. 다시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으나 막차들이 들어온 시외버스 정류장은 문을 닫아 껌껌하다. 순간 하늘이 까매지는 게 이제 어쩌면 좋은가 싶은데 동행한 청년이 “가시죠!” 한다.


 진주고속버스터미널로 와서 서울행 버스표를 구입하려고 하니 이제는 표가 없단다. 다시 막막해하자니 매표소에 있는 분이 혹시나 TMO 예비용 표가 한두 장 있을 수 있으니 사무실로 가보란다. 예전에는 TMO라고 적힌 입간판이 기차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 한쪽에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역시나 남은 표는 없단다. 어쩌나 싶은데 사무실에 있던 분이 혹시 안내양 자리라도 괜찮으냐고 묻는다. 고속버스 안내양 제도는 사라졌지만, 버스에 보조석은 아직 있었다. 동행한 청년이 버스표를 구해 줬다. 청년은 되로 받고 말로 주는 선행을 베풀었다. 강제된(?) 청년의 선행으로 나는 무사히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물론 고마운 마음 한가득 안고서.


 고속버스 보조석은 출입구 계단 위 운전석 조금 아래 있었다. 좌석은 물론 편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뜀박질하듯이 산행하고 내려온 몸은 물먹은 솜이 따로 없었다. 나른하게 처지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또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등받이는 허리까지만 오고 졸다 보면 몸은 흔들거렸다. 자격지심에서인지 기사 아저씨가 자꾸만 흘끔거리는 것만 같다. 운전하는 옆에서 조는 게 안 좋아 보여 그러는가 싶어 정신 차리자 하면서도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버스가 휴게소에 들어섰다. 기사 아저씨가 내리면서 “자꾸만 흘끔거려 신경 쓰이죠! 백미러 보느라 그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하신다. “아휴, 참!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오해하고 말이야~~” 그 말씀에 이제는 아예 대놓고 졸았다. 꾸벅꾸벅, 그러다 몸이 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졸고, 5시간을 넘게 그러면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불편한 자리 앉아 오느라 고생하셨네! 잘 들어가시게!” 기사 아저씨의 인사를 뒤로하고 돌아서는데, 불빛 휘황한 도심 속에서 어제오늘 일을 돌아보니 그 시간이 마치 꿈결 같다.


 새까만 밤하늘, 맑은 종처럼 댕그랑 소리를 낼 것같이 밤하늘을 수놓던 수많은 별들, 그 아래 깊은 바다처럼 내려앉은 하얀 능선, 그 능선을 휘돌아 들던 눈보라, 그곳을 떠돌던 인생 나그네들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 우연의 일상이 빚어낸, 계획되지 않은 그 축복 가득한 시간을 떠나 돌아온 현재가 오히려 낯설기만 하다. 우연의 일상성이 추억으로 들어서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