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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 버튼, 오룬델리코 그리고 인간 전시(염운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06-23 13:57
조회
1184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제미 버튼(Jemmy Button)이란 아이가 있었다. 남미 파타고니아의 티에라 델 푸에고 섬 사람이다. 스페인어로 ‘불의 땅’이란 뜻인 티에라 델 푸에고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마젤란 해협 남쪽 섬으로 남미대륙의 땅끝이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국경선이 이 섬을 절반으로 가르고 있다. 중심도시 우수아이아는 남극 여행 크루즈가 출발하는 곳이다. 제미 버튼의 본명은 오룬델리코. 푸에고 원주민 야마나(Yamana)인이다. 황량한 남극지방의 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해 푸에고인들은 불을 피우고, 물개 가죽과 과나코 털을 몸에 걸쳤다. 오룬델리코가 태어난 19세기 초반은 이곳에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때였다. 스페인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등 유럽인들이 계속 탐험을 왔지만, 어느 세력도 확고한 지배권을 갖지는 못했다.


 오룬델리코는 어떻게 제미 버튼이 되었을까? 그는 진주 단추 하나와 교환되어 제미 버튼이란 이름을 얻었고 영국으로 끌려가 3년간 머물렀다. 제미 버튼의 여행은 자기 의지로 떠난 길이 아니라 납치로 인한 것이었다. 그를 데려간 사람은 비글호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였다. 비글호는 영국 해군 함정으로 1826년부터 1830년까지 남미 해안선 조사와 경도 확정, 그리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마젤란 해협 일대 탐사를 목적으로 항해를 했다. 티에라 델 푸에고 섬에서 몇 명의 푸에고인이 비글호의 고래잡이 보트를 훔쳐 달아나자 피츠로이 선장은 보트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야마나인 세 명을 인질로 잡고, 또 다른 한 아이를 납치해 비글호에 태워 영국으로 데려갔다. 진주 단추와 맞바꾼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제미 버튼이었다.


 피츠로이가 이들을 영국으로 데려온 명분은 ‘야만인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베풀겠다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통역자로 양성한다는 실용적 목적도 있었다. 일종의 ‘문명화 실험’이었던 것이다. 일행은 1830년 10월 플리머스 항에 도착했다. 한 달 후 한 명은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고, 나머지 셋은 초등학교에 다니며 영어와 찬송가를 배웠다. 영국식 복장과 헤어 스타일을 하고 사교계에 불려 나가 국왕 윌리엄 4세와 애들레이드 왕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야만인’ 푸에고인을 문명사회로 데려와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고, 영어를 가르치고, 상류사회의 예의범절을 몸에 익혀 신사숙녀로 만드는 실험, 이것이 제미 버튼 일행이 강요당한 이상한 여행의 실체였다.


피츠로이 선장이 그린 푸에고인
사진 출처 - Jemmy Button in 1833 from 'Fuegians' in The narrative of the voyages of H.M.
Ships Adventure and Beagle. Vol. 2. by FitzRoy (1839).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신기한 사물을 유럽으로 가져왔다. 사물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사람도 수집 대상이 되었다. 식물은 표본을 채집하거나 씨앗을 가져와 식물원에서 재배했다. 동물은 박제로 만족하지 못하고 산 채로 포획해 동물원에서 사육했다. 유물을 원산지에서 분리하고, 동식물을 원서식지에서 이식하는 이 거대한 흐름의 속에서 식물원, 동물원, 자연사박물관, 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시절 런던에는 다양한 인간 전시가 넘쳐나고 있었다. 사르키 바트만의 ‘호텐토트 비너스’ 쇼가 인기를 끌었고, 이누이트인, 아즈텍인, 산족, 줄루족이 출연하는 인간 전시가 흥행몰이를 했다. 인간을 수집과 전시의 대상으로 삼는 일, 이른바 ‘인간동물원’은 현대의 인권 감수성으로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박물관 발달의 합리적 귀결이었다.



피츠로이 선장이 그린 푸에고인(확대)
사진 출처 - Jemmy Button in 1833 from 'Fuegians' in The narrative of the voyages of H.M.
Ships Adventure and Beagle. Vol. 2. by FitzRoy (1839).


 물론 제미 버튼이 쇼 무대나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건 아니다. 다윈의 관찰에 의하면, 이 젊은이는 멋 부리기를 즐기고 거울 속 자기 모습에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다윈은 이 불쌍한 푸에고인이 적응하는 모습을 보고 ‘미개인’에서 ‘문명인’이 되었다며 감탄했다. 하지만 피츠로이 선장의 비글호 두 번째 항해 때 귀국한 그는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어 던지고 원래 생활방식으로 돌아갔다. 영국에서 보여준 놀라운 적응은 생존전략에 불과했던 것인가? 런던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개방형’ 전시물이 되었을지언정, 피츠로이의 문명화 실험은 대실패였다. 제미 버튼이 어떤 마음으로 지냈는지, 문명을 동경하고 영국 생활을 즐겼는지, 아니면 단지 견뎌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남은 기록이라고는 피츠로이 선장의 보고서와 다윈의 비글호 여행기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둘 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의 시선으로 오염된 텍스트다. 제미 버튼의 이야기는 접촉지대에서 발생하는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만남이 얼마나 비대칭적인지, 나아가 ‘우리’와 ‘그들’ 사이의 평등한 만남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