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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민감히 따져보다(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20 17:11
조회
152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70, 67, 45
위는 여성의전화가 각종 보도 자료를 이용해 통계를 잡아 본 숫자다. 앞의 두 숫자는 2009년도, 2010년 10월까지 한 해에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이다. 마지막 45는 간신히 살아남은 여성의 숫자를 의미한다. 지난 1년 동안 남편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총 368만 명이고, 이중 신체적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104만 명. 목을 조이거나 혁대, 칼 등으로 위협당하거나 맞는 등의 심각한 가해를 당한 여성도 50만 명에 달한다(출처- “칼 휘두르는 제 남편, 처벌해 주세요-오마이뉴스”)

‘맨손이나 둔기로 때리기’
‘젓가락이나 칼로 찌르기’
‘불 지르기’
‘공기총으로 쏘기’
‘한겨울에 알몸으로 바깥에 내쫒기’
‘2층 이상 난간에 매달리게 한 뒤 떨어트린다고 위협하기’......

가정폭력, 정확히는 아내에게 행사하는 구타 및 폭력이다. 이러한 구타로 인해 아내들이 겪는 증상은 멍에서 정신질환 자살과 사망까지 다양하다. 아내구타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여성운동진영에서 사회화와 법·제도를 만드는 것 외에 아내구타피해자 지원을 위한 체계까지 마련하고 있다. 문제는 아내구타가 ‘가정폭력방지법’으로 환원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법이 제정됨으로 인해 아내구타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여기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기본권을 가진다는 헌법조문이 일상 속에서의 기본권을 다 보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폭력방지법이 현실에서의 아내구타를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법 앞의 평등이 아내구타 피해자와 가해자를 법정 내에서 법조문의 해석 앞에서의 평등으로 협소화 하고 있을 뿐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 그 달콤한 거짓말

2010년 10월 진도대교에서는 수년 간 지속된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딸아이를 가슴에 품고 다리에서 뛰어내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제적 착취, 언어·신체적 폭력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까지 구타를 서슴지 않고 심지어 내다버리려는 남편을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물론 그 전에 구타로 인한 상해로 기소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고발’이 가해자 남편을 집행 예로 풀려나게 하는 것으로 귀착됐다. 사유는 23장의 유서에 절절히 적혀있는 폭력과 학대 때문이 아니라 2년 전 전치3주의 상해를 증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는 가정폭력의 질적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판결이다. 법치국가에서 인권은 법으로 보장된다. 최소이자, 최후의 수단으로서 이다. 최대의 수단과 장치는 사회적인 문화나 생활양식, 국가의 다양한 보장·보호 장치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들에서 소외된 자들이 기댈 곳은 법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인권의 관점과 원칙을 우선 지켜야 한다. 원칙들은 약자 우선, 충분한 조사와 진단, 여타 다른 장치들과의 상호연계성 고려 등이 있을 것이다. 특히 각각의 인권사안이 가지는 특성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함도 물론이다. 가정폭력은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가해자의 은폐의도에 따라 드러나기가 쉽지 않다. ‘가정’이라는 고립되고 은폐된 영역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이 여성에 가하는 폭력으로 성에 기반한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위법, 인권침해 행위인 것이다. 인권이 약자우선을 하는 배경에는 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권력행사의 대상인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인권은 권력의 존재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권력을 가진 남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을 법조문, 증거, 객관성을 들이대는 ‘평등’으로 대할 것은 애초부터 아닌 것이다. 상황참작은 이런 때 적용되어야 한다.

법의 객관성을 의심하라

그러나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의 실체를 모르고, 그 힘이 남용될 수 있음을 모른다. 그 결과가 진도대교 사건에 대한 판결이다. 객관성이란 이름은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남성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담론일 뿐이다. 그 객관성 안에는 이미 지배층남성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 법의 객관성이란 지배층의 지배담론을 유지하고 강제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포장일 뿐이다. 누가 법을 말하는가? 누가 만들고 누가 판단하는가? 그리고 누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공개적이기 힘들다. 발생하는 장소에서도 그렇고 바라보는 관점, 발생하는 관계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남성들의 인권문제가 발생하는 것과 다른 배경에서 진행되는 여성폭력을 일반화의 시각에서 처리하는 것은 남성의 입장에서 처리하는 것과 같다. 그 일반화는 남성의 입장인 것이다. 그것도 전체가 아닌 극히 일부의 남성들일 뿐이다. 애초에 인권담론이 백인, 중산층, 남성의 담론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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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만 아내폭력으로 67명의 여성이 사망했다. 사진은 제4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2010년 살해된 아내폭력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진행했던 '멈춘 그녀의 신발' 부대행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상황과 처지를 고려한 객관성이어야

여성운동의 ABC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라는 구호는 인권담론에 성(性)의 관점을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획득되어야 할 권리가 아니라 천부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인권의 지평을 넓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장애인의 권리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시민권을 법적으로 보장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적영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상을 사적영역에서 보내고 있는 여성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안전할 권리, 의사결정을 할 권리, 말할 권리, 자율권-등은 지속적으로 침해받고 있다. 때문에 인권과 그 부분으로서의 시민권 개념은 영역이 더 넓어져야 한다. 아내에 대한 폭력이 가정문제로 치부되면서 사생활 침해라는 비난을 사고 성폭력이 순결하지 못한 여성개인의 문제로 치환됨으로서 피해자가 비난을 샀던 것이 이제는 공공영역으로 이동하면서 공적인 처벌을 받는 문제가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법이라는 공공의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과 관점의 문제이다. 공공성에 익숙한 남성들과 똑같은 방식과 관점으로 여성(사적인 성격이 강한)의 문제를 풀어낼 때 공공성이 요구하는 틀에 맞추기 위해 피해자인 여성이 그 성격을 규명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남성 위주의 객관성에 맞게 풀어내야 하는 고통과 책임을 지는 것이다. 대다수 여성들은 그 과정이 힘들어 중간에 포기하기도 한다. 결국 다른 영역과 다른 성격을 갖는 사안은 그 다름의 입장에서 풀어내어야 한다. 그 다름의 영역을 전면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객관성이다. 특성이 반영되지 않는 객관성이란 위험한 일반화이자 전체주의의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문화정책도 빠진 오류

다문화정책에 들어가는 예산은 여성 예산에서 볼 때 엄청난 비율이다. 그러나 이주여성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5%에 불과하다. 왜 이 얘기를 하는가하면 ‘다문화’주의가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름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을 말하기 위해서다.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엄청난 성찰과 맥락이 요구된다. 소위 ‘차이의 정치학’으로 언설되는 다양성, 다문화는 실제로 경계 짓기에 다름 아니다. 다름이 만나기 위한 방법, 다름이 드러나되 상호 수용되기 위한 인식체계는 다양성의 공존이나 인정이 아닌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다문화정책’은 다름의 인정이 아니라 통합성과 동화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얼마나 천박한 인식체계이며 실천현상인가. 실제로 다양성은 개인 안에도 나타난다. 나만해도 여성, 활동가, 엄마, 며느리, 딸, 친구, 이성애기혼자라는 정체성이 혼종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변화한다. 때문에 다양성 보다는 혼종성으로 인식되어야 하고 이 혼종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열려있어야 한다. 포용, 포괄, 포함해야 한다. 객관성도 상황과 처지에 따른 맥락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혼종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일 터이겠지만 ‘다문화’가 사회적으로 재현될 때 그것은 ‘통합성’과 ‘동화’로 나타나는 천박함이나마 극복해봤으면 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사회담론과 인식을 구현하는 방식이자 수단이라면 법은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법은 여전히 한 성(남성)만을, 비장애인을, 인간 이기주의를, 자국민 우선주의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법과 제도의 순환에 참여하고 결정권을 행사하는 이들의 성찰이 필요한 지점이다. 이들이야말로 다양화, 다변화, 혼종성의 강화라도 하는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변화를 따라잡고 때로는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가?
공공성과 내 삶이 만나는 지점에 진정한 주체가

여성주의는 ‘민주주의’이다. 성별에 기반을 둔 차별과 불평등 해소라는 입장에서 그렇다. 차이가 차별로 나타나지 않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모든 운동은 민주주의를 지향하지만 여성운동은 성에 기반을 둔 권력관계의 해체라는 점에서 ‘성민주화’를 지향한다. 정치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말하는 정치는 제도정치로 편협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일상, 언설과 행위들을 정치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성별로 분리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를 제정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생활영역 전반의 문화를 바꾸는 지난한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 시민운동과 차별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정치의제로 만드는 과정이 동반한다. 이러한 과정은 성찰성을 자산으로 하며 성찰적인 개인들의 말이 여론화되는 과정, 즉 공론화의 과정과 공론장의 확장이 필요하다. 또한 삶을 들여다보는 과정, 자기 자신, 타인, 다른 존재들과의 전면적인 만남과 응시를 필요로 한다.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이자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 공존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를 인간의 얼굴로 만드는 과정이다. 공공성이 생활이나 일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해야 하는 것이다. 진도대교 사건을 ‘가정폭력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활자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내 삶과 연결된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것이 진정한 주체성의 발현이다. 이 과정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무한경쟁과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타인과 나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대안공동체를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 참여할 것인가는 주체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과정이다.

가정폭력으로 숨진 여성들, 여전히 진행 중인 폭력상황에 노출된 여성들과 아이들의 절규와 고통, 절망에 귀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하는 것, 그것은 법에게 책임을 떠넘겨 외면하는 행위나, 객관이란 이름으로 법이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의 입장에서 집행이 되는 것이다. 당장 무엇이 선행되어야 할 것인가? 나는, 당신은 자신의 삶과 이 사회의 주체인가? 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