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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세상은 정말 험악해진 걸까(이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10-04 09:33
조회
138

이윤 / 경찰관


출처 - 경찰대학


35년 전 수강한 범죄학 수업 중에 지금은 딱 두 개가 기억난다. 당시 교수님께서 늘 흰색 와이셔츠 주머니에 빨간 솔 담배 한 갑을 넣고 계셨던 것과 ‘범죄포화이론’이다. 범죄포화이론이란 20세기 초 ‘페리’라는 범죄학자가 주장한 것으로 ‘범죄유발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회환경이라서 특정 사회환경에서는 일정 수준으로 범죄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경찰이나 국가가 엄청나게 노력해 범죄를 감소시켜도 다시 그 수준으로 돌아오고, 어느 순간 범죄가 증가했다가도 다시 원래 수준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범죄가 현저히 늘거나 줄어들려면 교육, 언론, 정치, 경제, 과학기술 등 사회환경이 변해야 한다고 하였다.



요즘 각종 미디어에서 세상이 흉흉하다고 난리다. 소위 ‘무차별 흉기난동’과 ‘등산로 성폭행’ 사건으로 인해 누구라도 언제든지 예상치 못한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졌다. 한국 사회에 갑자기 흉악범죄가 많아진 느낌이다. 그런데 최근 사회환경이 그렇게 급격히 변한 것 같지는 않고, 따라서 흉악범죄가 갑자기 증가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전과 비교하여 정말 흉악범죄가 많아진 건지 확인을 위해 통계를 찾아봤다. 살인과 강력범죄를 기준으로 10년 전과 현재를 비교했다.



살인사건(기수, 미수 등 포함)은 2011년 1,249건 ➜ 2022년 702건으로 약 절반가량 줄었다. 강도는 2011년 3,994건 ➜ 2022년 516건으로 1/8 수준으로 엄청나게 감소했다. 다만 강력범죄(살인, 강도, 강간, 강제추행, 방화) 전체는 2011년 26,699건 ➜ 2022년 24,954건으로 약간만 줄었다. 살인과 강도에 비해 전체 강력범죄 감소 정도가 미미한 것은 주요 암수범죄였던 성폭력 범죄가 10년간 공식 통계에 많이 반영되어 증가한 영향으로 보인다.


출처 - 노컷뉴스


이렇게 통계상으로는 살인, 강도 범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경찰이 잘한 덕분인 것도 있겠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범죄포화이론에 의하면 과학기술 및 경제 발전 등 범죄 감소 요인을 포함한 여러 사회환경 변화가 주요 원인이다. 과거 공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가정폭력, 아동학대, 스토킹, 학교폭력 등에 경찰이 개입하면서 일부 범죄 발생 건수가 증가하긴 했지만, 과거보다 흉악범죄가 줄어든 것은 명확하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도 요즘보다 옛날이 더 무서웠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중학교 진학하는 것이 무서웠을 정도다. 중학교에는 해골파, 백사파, 녹색파 등 폭력서클이 있어서 얻어맞고 다니기 십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실제로 중학교 2학년 때 녹색파였던 우리 반 아이 하나가 여학생 윤간 사건의 공범이어서 퇴학당했다. 신문 배달하던 내 절친도 수금한 신문 대금을 깡패에게 다 빼앗겼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팔다리에 멍이 들도록 쌍절곤을 부지런히 연습했다.


출처 - 루리웹


70~80년대에는 유괴, 토막살인, 연쇄살인, 인신매매 등 굳이 납량특집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무서운 뉴스가 많았다. 94년에 지존파는 부자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아지트에 사체 소각장과 각종 무기를 준비한 후 알지도 못하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했다. 조직폭력배와 소매치기, 소소한 동네 깡패는 또 얼마나 많았는가. 그때와 비교하면 나는 지금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예전보다 더 불안해하고, 범죄가 더 흉폭해졌다고 느끼는 걸까. 거리마다 많아진 CCTV와 스마트폰에 의해 범죄현장 영상이 여과없이 생산된 후 그대로 미디어에 노출되어 이를 본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심과 분노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문제는 범죄에 대한 불안감이다. 실제 범죄 증감여부와 상관없이 주민의 범죄 불안감이 커지면 치안이 불안한 사회가 된다.


출처 - 경향신문


최근 경찰청은 불필요한 내근인력을 줄여 현장으로 보내겠다는 조직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실제로 세상이 더 흉악해진 것은 아니지만 국민 불안감은 높아졌다. 국민이 안심하려면 경찰이 눈에 더 띄어야 하는데, 활용할 경찰관이 부족하다」는 진단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조직구조 개편 방향성은 부분적으로 바람직하다. 경찰청이나 시도경찰청에서 근무하는 취합⋅정리⋅검토⋅보고⋅지시에 종사하는 인원을 모두 현장으로 보내는 방향성 말이다.



따라서 조직구조 개편을 하려면 경찰청도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단순히 관리 인원 몇 명 줄이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경찰청이나 시도청이 현장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보고받거나, 현장에 너무 많은 것을 지시하는 업무 자체를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는 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현장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일선 현장의 기존 부서에서 마른걸레 쥐어짜듯 인원을 끌어모으려고만 한다면 아랫돌 빼서 윗돌 고이는 격이 되어 조직개편 시늉만 한 꼴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불안감 감소라는 기대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현장 경찰관들만 피곤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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