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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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일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놀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사치고 일과 싸움과 놀이의 성격을 동시에 갖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그 비중이 어떻게 다른가에 따라 중심이 되는 성격과 주변이 되는 성격이 다를 뿐이다. 회사에서의 일도 싸움과 놀이의 성격을 아예 결여할 수 없다. 퇴근한 뒤 이루어지는 회사의 회식은 기본적으로는 놀이지만, 암암리에 일과 싸움의 성격을 수반한다. 정치적인 투쟁의 일환인 대대적인 시위는 한편으로 축제와 같은 놀이의 성격을 지니기 일쑤다.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놀이의 성격은 한껏 줄어들고 싸움의 성격이 전격적으로 강화될 것이다.  일 즉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 기초다. 싸움 즉 투쟁은 궁극적으로 노동을 통해 생겨난 가치 생산물을 과연 정당하게 배분하는가를 둘러싸고서 일어난다. 놀이 즉 유희는 노동과 투쟁이 결합하여 일군 최종적인 가치 생산물을 다수건 소수건 함께 소비하면서 살아있음을 즐기고 향유 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드높이는 최종의 행위다.  이를 사회적 삶의 영역에 비추어 보면, 노동은 경제 영역에, 투쟁은 정치 영역에, 유희는 문화 영역에 각각 할당된다. 인간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드높일 수 있는 계기는 문화 영역에서의 유희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은 대상적인 가치를 지닌 재화를 생산해 문화 영역에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투쟁은 노동을 통해 생산된 대상적인 가치를 가능하면 최대 다수가 공정하고 평등하게 고루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경제가 발전하면 그만큼 유희할 수 있는 사회 전체의 가치 생산물의 양이 늘어나고, 정치가 발전하면 그만큼 모두가 함께 유희함으로써 각자가 더 넓고 깊은 환경에서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향유 하는 문화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통한 유희의 폭과 깊이가 인간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고, 그래서 유희 즉 놀이는 인간 됨의 출발이자 완성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노동을 통해 경제 활동과 투쟁을 통한 정치 활동은 유희를 통한 문화 활동을 위한 수단이고, 문화 활동은 경제 활동과 정치 활동의 목적이다.  한 사회의 경제력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정치의 수준이 낮으면 양극화의 폭이 커지면서 소수의 유희를 위해 다수가 노동에 집중하는 일이 강화된다. 정치의 수준을 가늠하는 데는 모두가 열심히 일해 사회적 가치의 총생산량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사회적 가치의 총생산량을 최대 다수가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이는 그저 사람들이 협력함으로써 노동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각자의 존재 가치가 공동의 활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공동의 활동에 얼마나 더 넓게 더 깊게 참여하는가에 따라 각자의 존재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 존재에 관련한 이 원칙에서 공동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문화 활동이다. 문화의 향유야말로 인간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이를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제반 영역에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른 정치가 요구되고,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자의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이른바 비(非)지배의 자유에 바탕을 둔 공화주의의 원칙에 따른 정치가 요구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이 다름 아니라 국민의 최대 다수가 참여할수록 더욱 역동적으로 활성화되고, 그럼으로써 모두가 모두를 통해 인간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실현하는 것을 나라의 기초로 삼는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이 헌법 조항은 그 실내용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은 문화의 민주공화국이다.”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특히 통치자인 대통령과 국민을 대신해 입법행위를 하는 국회의원 그리고 검찰 일을 하는 검사들과 재판 일을 하는 법원의 판사들 등, 정치 엘리트들이 최대 다수의 동등한 참여를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는 민주 공화의 문화적 가치를 저해하거나 방해하는 쪽으로 행위 하는 것은 곧 헌법, 그것도 최상의 준엄한 헌법 조항을 위반하는 것이다. 2.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날 숨죽이고서 텔레비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충분히 이기겠구나 하는 희망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아뿔싸 자정이 넘어서부터 충분하다고 여겼던 그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고 있었다. 새벽 두 시쯤이었지 싶다. 이윽고 돌을 삼킨 듯 가슴 어딘가에서 내뱉을 수 없는 먹먹함이 더해지더니 얼마 가지 않아 암울함에 이어 절망이었다. 결국은 0.73% 차이의 패배였다. 눈을 뜨고 있었으나 시야가 어둠에 휩싸였다.  후보 윤석열 씨가 이른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후보 이재명 씨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텔레비전을 차마 보지 못했다. 그동안 수시로 드나들던 유튜브도 끊었다. 며칠 그냥 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베란다 바깥을 하릴없이 내다보곤 했다. 우울이었다. 벗어나야 한다는 각오를 억지로라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은 다시 유튜브를 뒤적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사람이 마찬가지로 납덩이 같은 심정을 겨우 버티어냈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쏟아냈다. 보기 싫은 그 얼굴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등장하는 것이 두려워 한동안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고들 했다. 패배한 자들 간의 격한 공감이었다. 다들 향후 5년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하는 황망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 내면의 진상은 무엇일까? 정확하게 짚을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후퇴할 것이다, 남북의 평화와 자주적인 나라의 도래가 물 건너갔다,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양극화의 해소는커녕 더욱 심화할 것이다, 검찰 권력이 강화되어 이른바 ‘검찰 공화국’이 도래하여 죄 없이도 누구나 불안에 사로잡힐 것이다, 보수 언론의 권력과 부패한 금융 세력과 재벌 세력들이 불공정한 자의를 휘두르는 검찰 권력과 결탁한 기득권 카르텔의 위세가 더욱 등등해질 것이다, 심지어 합리성을 내팽개치고 손바닥에 새긴 ‘王’자가 여실히 말해 주듯 무속이니 신내림이니 하는 영기(靈氣)를 맹신한 가운데 말도 안 되는 어이없는 일방통행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통치자의 무식과 무능함에 그의 주변에 호가호위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네들만의 이익을 위해 설쳐댈 것이다, 여러 기준의 갈라치기에 의한 갈등과 대립이 판을 칠 것이다, 첨단고도과학기술에 의한 대전환의 위기를 헤쳐나가지 못해 정치가 사회경제의 거대한 물결에 휘청대면서 국가의 명운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등등이지 싶다.  소위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대선 경쟁을 하던 중에 주당 120시간까지라도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로 많은 사람들을 아연실색게 했다. 주 5일을 근무한다면 하루 24시간, 아예 잠도 자지 않고 오로지 일하기만 하는 인간으로 산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는 식의 발언이다. 반발이 심해지자, 마치 창조적인 노동을 하는 인간은 자발적으로 그렇게 아예 잠도 자지 않고 일하고자 하니 허용해야 하지 않느냐는 변명으로 바꾸었다. 노동을 최소화하고 제대로 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을 때 인간다운 인간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아예 어떤 실마리조차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참다운 인간의 삶인가에 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 후보였던 이재명이 “정치는 종합예술입니다. 정치를 통해 내가 아닌 국민이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래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말한 김구 선생의 말을 인용하면서 제시한 문화인으로서의 국민 개개인의 삶을 지향하는 일종의 예술로서의 정치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오로지 기업활동의 자유만을, 잘 먹고 잘사는 강자들의 편에 서서 통치를 할 것이다. 그가 혹시 국민 모두의 삶을 윤택하게 하겠다고 말하더라도 입에 발린 겉치레에 불과하고, 그는 본능적으로 기득권 카르텔을 중심으로 한 강자들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다. 그러니 “약자의 삶을 보듬는 억강부약의 정치로 모두 함께 잘 사는 대동 세상을 열어가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상대 후보였던 이재명의 애민(愛民) 통치의 바람을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그 의의의 실마리조차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검찰 권력이 무소불위의 권력임을 믿고 살아온 현재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드디어 그 자신 패거리 권력 투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정치판’에서 가장 유리한 우두머리의 지위를 차지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힘을 정확하게 의식한 탓임에 틀림이 없는 대통령 당선인으로서의 기이한 첫 행보를 보인다. 무슨 이유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청와대에는 단 한 발짝도 들이지 않겠다.”라는 발언을 하고, 전혀 들먹이지 않았던 용산 국방부 건물을 접수해 대통령 집무실로 쓰겠다는 고집을 고수하여 관철하는 행보를 계속한다. 그러니, 상대 후보였던 이재명이 “국민이 역사의 주체이고 대한민국의 주인입니다. 국민이 결정해준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발언을 왜 했는지, 그 배경과 의의 및 취지를 어떻게 조금이라도 알겠으며, 무엇보다도 동학 혁명의 정신을 들먹이면서 국민을 향해 여러분이 ‘역사의 주체’라고 한 이재명의 말에 담긴 처절한 애국의 심정에 어찌 조금이라도 공감하겠는가.  현 대통령 당선인인 윤석열 씨는 대선 후보 때 핵을 탑재한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있을 경우를 가정해 “선제타격 말고는 방법이 없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아울러 북한을 일러 주적임을 명시적으로 내세웠다. 남북 간의 평화 공존을 지향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안보 불안을 부추긴다. 그뿐만 아니라, 남북 분단과 대치 상황을 빌미로 미국이라는 국제적인 예외국가가 어떻게 우리를 강압해 반(半)-종속국으로 만들어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훼손해 왔는가에 대한 의식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러한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다행한가, 하는 내심을 전혀 감추지 않고 강하게 내세운다. 어떻게든 남북의 평화를 이루고자 노력해 온 문재인 정권을 ‘빨갱이 정권’ 운운하면서 꽉 막힌 반공적 냉전 의식에 사로잡힌 세력에 힘을 싣는다. 그러니 “3.1운동 당시에 만세를 부르던 우리 선조들의 뜻을 이어서 평화로운 나라, 진정 독립되고 자주의 나라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이라고 외치는 상대 후보인 이재명의 말에 실린 미래를 향한 긍정적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의사가 전혀 없거니와 심지어 그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새겨볼 한순간의 겨를조차 있겠는가.  우리가 새롭게 만들어가야 할 나라가 어떤 상태를 지향해야 하는가에 관련해 이처럼 가치가 충돌하는 전격적인 투쟁에서 패배해 버렸으니, 어찌 크나큰 희망에서 더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출구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갱 속에 갇히고 말았다는 심경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3.  그러나, 포기할 겨를도 이유도 없다. 대선 패배 직후 등장한 <재명이네 마을>에 몰려든 십 수만의 이른바 MZ 세대의 젊은이들이 벌이고 있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가 크게 힘을 북돋우고 있다.  이 기회에, 일하기 위해 노는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해 일한다는 사실, 싸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놀기 위해 싸운다는 사실, 모두가 제대로 놀기 위해서는 모두가 일군 일의 성과를 제대로 배분하여 양극화를 극복하고 이를 통해 배타적인 소유 의식을 떨쳐버리고 놀이의 기초 조건인 열린 평등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 아울러 놀이의 재료이자 목적이 되는 문화 예술을 비롯해 학문의 성과를 창의적으로 드높여야 한다는 사실,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한 창의적인 기술 개발에 힘써 전 세계적으로 놀이의 다채로운 방식을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 무엇보다 전쟁의 가능성과 위협을 미리 방지하고 소멸함으로써 놀이의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평화와 자유가 자리를 잡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 등을 떠올려 강조하게 된다. * 워낙 중차대한 국가적인 사태를 맞이한 탓에 흥분한 어조로 중언부언 깜냥에 넘치는 원칙적인 이야기들을 뇌까린 것 같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양해하시기 바란다.
2022-04-05 | hrights | 조회: 897 | 추천: 3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유인원(類人猿)은 사람을 닮은 대형 원숭이를 말한다.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보노보 등이 유인원에 속한다. 전통적 동물원이든 사파리라 불리는 개방형 동물원이든 동물을 서식지로부터 분리해 가두어 사육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갇혀 있는 동물을 구경하러 가는 일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지만, 기린 같은 이국 동물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열광했다. 하지만 원숭이 우리 앞에서는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쳐다보기 민망하고 불편했다. 유인원이라는 이름처럼, 사람과 닮아도 너무 닮은 비인간 동물이 나를 쳐다본다. 특히 침팬지의 손, 특히 손바닥은 사람 손바닥과 똑 닮았다. 그 응시 앞에서 내 눈은 어디를 응시해야 할지 모르고 흔들렸다.  가둔 자와 갇힌 자의 위치가 역전되는 착시현상은 사람과 닮은 동물일 때 더 극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갇힌 쪽이고 갇힌 나를 고릴라가 바라보는 것이라면? 털 없는 원숭이 사람을 고릴라가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이라면? 으스스하고 묘한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원숭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은 발달이 늦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다. 타잔을 보는 원숭이 엄마 카라의 눈길이 그러했다. 타잔은 미국 소설가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Edgar Rice Burroughs)가 창조한 인물이다. 소설 『타잔(Tarzan of the Apes)』이 1914년 출간되고 모두 26권의 시리즈가 나왔고, 수많은 영화와 TV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타잔의 부모는 아프리카 식민지에 부임한 영국 귀족이었다. 부모를 잃은 타잔을 카라는 정성으로 돌보지만 1년이 지나도 제대로 걷지도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털도 나지 않는 하얀 피부라니! 원숭이 형제들과 물을 마시러 간 호수에서 처음으로 자기 얼굴을 본 타잔은 충격에 휩싸였다. “어째서 내게는 굳센 입술과 날카로운 송곳니가 없는가, 형제들의 넓적한 코에 비해 내 코는 어딘가 뜯겨나간 것처럼 작았다. … 그들의 코가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고 부러웠다.” 1) 타잔의 독백이다.  으스스한 기분을 억누르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 그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이빨을 드러내고 웃기도 하고, 입술을 주욱 내밀고 먼 곳을 보기도 한다. 끽끽 소리를 내고 머리통을 두드리며 항의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했다. 따개비, 지렁이, 비둘기, 개는 다윈이 특별히 사랑했던 동물들이다. 다윈은 동물원에 가서 유인원을 관찰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는데, 1872년 출판한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에서 원숭이의 감정 표현에 대해 썼다. 다윈은 다양한 종과 속의 원숭이들의 감정 표현을 관찰하는 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인간의 감정 표현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쁨, 즐거움, 애정을 표현할 때면 인간도 원숭이도 입술을 내밀고, 웃는 소리 내고 눈이 반짝인다. 고통, 슬픔, 고민, 질투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의 표현도 유사하다고 했다. 회색손올빼미원숭이가 슬픔에 빠졌을 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는 주인과 사육사의 증언에 대해서는 자신이 동물원에서 동종의 원숭이를 면밀히 관찰했지만, 비명은 질러도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더라도 원숭이도 사람처럼 슬픔을 느끼는 것은 틀림없다고 했다.  다윈은 “어린 오랑우탄과 침팬지가 건강이 좋지 않아 실의에 빠진 모습은 아이들 못지않게 뚜렷하고, 아이들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애처롭다. 그들이 이와 같은 심신 상태에 놓여 있음은 그들의 힘없는 동작, 낙담한 표정, 흐린 눈, 그리고 변한 안색 등을 통해 드러난다” 2) 면서 어린 원숭이와 사람 아이의 감정 표현의 공통점을 찾아내 서술했다. 또한 “그림 18은 오렌지를 받았다가 빼앗긴 침팬지가 부루퉁해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 침팬지와 유사한 입 내밀기 혹은 입술 샐쭉거리기를 부루퉁한 아이들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다” 3) 고 적기도 했다. 오늘날 동물학자들은 인간의 감정을 동물에 곧바로 적용하는 지나친 의인화를 비판할지 모르지만, 다윈의 시대에 동물이 느끼는 감정을 인간과 같은 수준에서 논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시도였다. 다윈은 인간을 동물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동물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끌어 올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림1: 실망해서 부루퉁해진 침팬지, 우드 씨의 그림 출처: Darwin, C. R. 1872.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London: John Murray. First edition. (darwin-online.org.uk)​  유인원은 사람과 유전자가 거의 같다. 사람과 침팬지는 98%, 오랑우탄은 97%의 DNA를 공유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지능이 높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있고 자아가 있는 유인원의 동물실험을 2015년부터 금지하고 있다. 유인원의 실험은 금기시되고 있지만, 영장류는 여전히 실험에 쓰이고 있다. 신약 개발에서 쥐나 돼지가 아니라 영장류를 쓰면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유혹 때문에 금지법이 없는 중국에서 실험용 영장류의 90% 이상을 사육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8년 11월 6일 전북 정읍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영장류자원지원센터가 준공됐다. 원숭이 3천여 마리를 집단사육할 수 있는 규모로 필리핀원숭이·붉은털원숭이 590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난치병 치료 임상 연구에 활용할 실험용 원숭이 집단 사육시설이다. 준공식 당일 중국 윈난성이 고향인 붉은털원숭이 한 마리가 높이 7m, 상단에 최대 1만2000V의 전류가 1초 간격으로 흐르는 울타리를 넘어 사라졌다. 나이는 4살. 무게 4~5㎏, 키 60~70㎝의 이 원숭이는 탈출 13일 만에 생포됐다. 4)  최근에는 유인원에게 비인간 인격체의 지위를 부여하는 판결이 아르헨티나에서 나와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2014년 오랑우탄 산드라에게 비인간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인정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동물원에서 20년간 갇혀 지낸 수마트라 오랑우탄 산드라를 대리해 아르헨티나동물권변호사협회(AFDA)가 인신보호영장을 청구했고 승소했다. 두 번째 사례가 멘도사 동물원의 침팬지 세실리아였다. 세실리아는 동물원의 작은 콘크리트 우리에서 브라질의 소로카바 침팬지 보호구역으로 이주했다. 세실리아의 승소에 힘을 실어주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영장류학자 알도 히우디세는 “인간과의 엄청난 유사성에 비추어 볼 때, 여전히 그들이 억류돼 있다는 사실은 부조리하다” 5)고 말했다. 그림2: 오랑우탄 산드라 출처: Orangutan Granted Legal Personhood, Moves to Florida, Becomes Florida Woman (newsweek.com) 그림3: 침팬지 세실리아 출처: Cecilia, first chimpanzee released by Habeas Corpus - GAP Project (projetogap.org.br)  동물의 법적 인격성을 인정한 두 판례는 동물은 단지 동물복지법 같은 보호법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하게 보통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는 사고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제기한다. 이런 소송들이 동물이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이고, 동물은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가 다양한 종의 생명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동물은 비인간 외계 영토의 ‘저쪽’에 사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 행사가 불가피한 다종 공동체 안에 살고 있다. 6) 인간은 동물과 함께 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다종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동물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를 물어야 하고, 동물의 내재적 가치를 존중하는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2021년 7월 19일, 동물권에 관한 주목할만한 법 개정안이 발표된 것이다. 민법 98조 물건의 정의를 다룬 조항에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명시하는 법 개정안이 발표된 것이다. 민법 98조 개정안이 확정되면, 앞으로 관련 법이 개정될 예정이고 여러 변화가 예상된다. 동물보호법은 30년 전에 제정되었지만 7) , 현재 반려동물은 민법상 물건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상해를 입혀도 주민의 물건에 대한 재물손괴가 되고, 사체는 재활용 불가 폐기물로 취급되어 쓰레기봉투에 담겨 버려진다. 법 개정안은 동물을 생명체로 존중하고 공생해야 한다는 사회적 감수성이 어느 정도 높아진 것의 반영이 틀림없지만, 4명 중 1명이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다는 한국의 현실에 비춰보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윈 진화론 이후 인간은 다른 생명체에 비해 특별함을 주장할 근거를 상실했다. 진화론은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로서 다른 생명을 활용하도록 신으로부터 허락받았다는 기독교 사상의 오랜 도그마에 균열을 가져왔다.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뒤얽힌 강둑(Entangled Bank)’의 묘사에서 함축적으로 말해 주듯이, 인간은 다양한 종들이 이루는 생태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연의 요소에 의해 가지치기하듯 생물 종이 변형하고 분화되고, 그렇게 변화한 종들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생태계를 다윈은 뒤얽힌 강둑이라고 표현했다. 다윈의 혜안은 인간종(種)중심주의(Anthropocetrism)를 넘어서, 인간-비인간동물이 이루는 다종 공동체를 어떻게 일궈나가야 하는지 실마리를 제시해 준다. 1) 에드가 라이스 버로스, 안재진 옮김, 『타잔』 (다우, 2002), 58쪽. 2) 찰스 다윈, 김성한 옮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사이언스북스, 2020), 206쪽. 3) 위의 책, 210~211쪽. 4) 허정원, 「1만2000V 넘어 탈출한 원숭이, 살아 있다는데...일주일째 행방 묘연」, 『중앙일보』, 2018년 11월 13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119015#home ; 송경은, 「실험용원숭이는 왜 고압전류 위험 무릅쓰고 사육장을 탈출했나」, 『동아사이언스』, 2018년 11월 21일.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25212 5) 데이비드 보이드, 이지원 옮김, 『자연의 권리: 세계의 운명이 걸린 법률 혁명』 (교유서가, 2020), 94쪽. 6) 앨러스데어 코르런 지음, 박진영, 오창룡 옮김, 『동물의 정치적 권리 선언』 (창비, 2021), 11쪽 7) 시사기획 창, 개는 죄가 없다. https://news.v.daum.net/v/20210829225327190 2021년 8월 29일 방영. ‘시사기획 창’은 동물보호법 제정 30주년을 맞아 학대와 방치의 대상이 된 동물, 특히 그중에서도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 개가 처한 현실을 취재했다.​
2022-03-30 | hrights | 조회: 1762 | 추천: 6
: 외국인 우크라이나 유대인 수용, 원주민 팔레스타인 배우자 거부 홍미정/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교수  2022년 3월 10일, 이스라엘 총리 나프탈리 베네트는 이민 흡수부 각료회의를 시작하면서 “오늘 우리는 위험에 처한 우크라이나의 유대인들과 그 주변 지역 유대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귀향작전(Operation Returning Home)을 개시한다.”라고 밝혔다. 3월 10일 현재 이민 흡수부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 이민을 희망하는 러시아인 1만 4천 건, 우크라이나인 7천 건의 신청서가 접수되었다. 유대기구(The Jewish Agency)는 올해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들 수만 명이 이스라엘로 이민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외국인 유대인 이주 정책은 1950년에 제정된 귀환법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귀환법은 ‘약 2천 년 전 로마에 의해서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 현대 유대인들은 로마에 의해서 추방된 고대 유대인들의 후손들이며, 독점적인 상속인들이다’라는 신화를 토대로, 전 세계 유대인들에게 조상의 땅,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할 권리를 부여한다. 귀환법에 따라, 이스라엘 정부는 전 세계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유대 이민자들을 데려오고, 귀환 유대인은 이스라엘에 도착한 날부터 이스라엘 시민이 된다. 귀환법은 유대인을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거나, 유대교로 개종하고 다른 종교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귀환법은 1970년에 수정되면서 유대인의 자식들과 증손들, 유대인 자식의 배우자와 유대인 증손의 배우자에게까지 귀환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역사 연구 성과들은 ‘고대 유대인들과 그 후손들 다수는 기독교, 이슬람교 등 타종교로 개종을 했으며, 현대 유대인들 대다수는 유대교로 개종함으로써 형성되었다.’라는 것을 밝혀준다. 게다가 현재까지 진행된 언어학, 인구학, 민속학 등의 연구 성과들은 수천 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여 유대 종족의 혈통적 연속성이 유지되었다는 주장을 부정하며, 현대 유대인의 혈통이 투르크인, 쿠르드인, 아랍인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유대교로 개종한 다양한 종족들과 관련된 현대 유대인들의 고향이 팔레스타인 땅이라는 주장은 신화다. 사진 출처 - istock  인류학자인 로셀레 테키너는 “이스라엘의 귀환법은 사실상 이스라엘 국적법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귀환법은 이스라엘에 이민 오는 외국인 유대인들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이스라엘 국적 취득권을 원주민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부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국가 수립과 함께 추방되어 난민이 된 다수의 팔레스타인인 원주민들은 이스라엘 국가로의 입국이 금지당하고,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다. 귀환법은 원주민 팔레스타인인을 배제하고, 외국인 유대인을 수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인종차별적인 국민 국가로 만들었다.  공교롭게도 이스라엘 총리 베네트가 우크라이나와 주변 지역 유대인 귀향작전 개시를 발표한 2022년 3월 10일, 이스라엘 의회는 2003년 처음 제정되어 1년마다 갱신되는 임시법 ‘이스라엘 시민권과 입국법’을 45대 15로 통과시켰다. 이 임시법은 이스라엘 시민과 결혼한 이스라엘 점령지, 서안이나 가자지구 출신 팔레스타인 배우자들의 이스라엘 영주권이나 시민권 취득을 금지하였다.  3월 10일, 임시법 ‘이스라엘 시민권과 입국법’이 이스라엘 의회를 통과한 이후, 이스라엘 내무장관 아옐레트 샤케드는 “이 법은 포기해서는 안 될 우리 국가의 안보를 위한 시온주의 법이다.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민주주의 국가이며 모든 시민을 위한 국가이다”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이스라엘 의회는 “이 법의 목적은 이스라엘 점령지 서안과 가자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적대 국가들, 이란,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시민들의 이스라엘 시민권이나 영주권 취득을 차단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유대인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과 이스라엘 안보를 위해 필수적인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공동명부 소속 아랍계 아이만 오데 의원은 “이 법은 이스라엘 안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법이다.”라고 비난하였다.  사실 1952년 제정된 ‘이스라엘 시민권법’ 7조는 “이스라엘 국적자의 배우자는 귀화를 통하여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라고 명시함으로써 이스라엘 시민권자와 결혼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러나 2003년 제정된 임시법 ‘이스라엘 시민권과 입국법’은 1952년 제정된 ‘이스라엘 시민권법’을 무력화시키면서 서안과 가자 출신의 팔레스타인 배우자들이 이스라엘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을 닫아버렸다. 2003년 임시법은 “내무부 장관은 1952년 제정된 ‘이스라엘 시민권법’에 근거해서 서안과 가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이 법은 시행 시작일로부터 1년간 유효한 임시법이며, 정부는 1년 이내에 의회의 승인을 받아 그 효력을 연장할 수 있다.”라고 분명하게 규정하였다.  이번 달에 이스라엘은 임시법 ‘이스라엘 시민권과 입국법’을 갱신함으로써 이스라엘 시민권을 소유한 팔레스타인인들과 결혼한 서안과 가자 출신의 원주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였다. 반면 현재 이스라엘 정부는 수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이주시키기 위한 귀향작전을 추진하고 있다.
2022-03-22 | hrights | 조회: 1782 | 추천: 6
윤요왕/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봄비가 내리는 산골의 밤이다. 안방 침대에 누워 창문을 여니 일찍 잠에서 깬 앞 논의 개구리들이 수줍은 듯 구슬픈 듯 우는 소리가 들린다. 봄이 오는구나. 매년 어김없이 봄비와 개구리 울음소리로 봄이 찾아온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이었을지라도 봄은 어김없이 겨울을 이기고 찾아온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요 우주의 섭리다.  전쟁 같은 하룻밤을 보낸 듯하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상할 게 없어 보였던 선거였고 작은 소도시 춘천의 인구만큼도 안 되는 박빙의 표차로 20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나보다는 훨씬 절박했을 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대선과 지방선거가 겹친 올해는 활발한 활동을 하기에 어려운 시기임이 분명하다.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온갖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선거소식에 사업의 이슈도 선점하기 어렵다. 선거결과에 따라 조직과 사업이 불투명해지는 불안감에 일도 잘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여전히 정치 권력의 집중과 권한의 절대성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급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어찌 보면 4년, 5년의 대리인일 뿐인데 너무나 많은 절대권력으로 흘러가는 국가운영이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선거가 끝나고 내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결과가 나오면 박수쳐 주고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품게 하는 선거문화를 바라는 것은 헛된 꿈인 것일까? 선거국면에서 후보자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목이 터져라 외쳐대던 국민을 섬기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국가와 국민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국민 통합을 이루겠다는 목소리들이 실현되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은 과거 불법과 탈법, 관권선거로 점철된 권위주의 정권 시절과는 달라진 세상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시민들은 깨어있는가 하는 의문점은 남는다. 검증되지 않은 수없이 많은 각종 미디어 천국인 세상에서 바른 정보를 골라내고 선택할 수 있는 우리들의 민주 의식과 정의에 대한 주체적 관점은 얼마나 성장했는지 곰곰이 돌아봐야 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주민자치, 마을공동체 관련 강의, 컨설팅, 간담회를 다니다 보면 “마을 의제를 제안하는 것과 민원을 이야기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종종 듣게 된다. 이거 해결해 주세요~ 저거는 왜 안 해주나요? 이런 건 민원이다.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요런조런 방법으로 해보자~ 이런 건 마을의 자치의제이다. 직접민주주의의 현실적 가능성을 마을공동체와 주민자치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지방분권, 지방자치를 넘어선 ‘시민이 주인인 도시’ ‘국민이 주인인 나라’의 현실적 실현은 시간과 경험과 노력이 필요함에는 틀림없다. 이런 풀뿌리 민주주의를 통해 선거에 자유로울 수 있는 근본적인 체제전환과 문화혁신이 필요하다. 선거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들이 각자의 마을에서, 지역에서 스스로 행복한 마을주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뭐 해주세요라는 ‘민원’이 아니라 우리가 자치적 방식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우리 마을에서부터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시민력과 자치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통령, 시장/군수가 바뀐다고 우리의 삶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정치 권력의 중요성만큼이나 우리 시민들 스스로의 노력과 힘이 점점 더 큰 흐름으로 자리 잡고 흔들리지 않는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 출처 - pixabay  봄은 반드시 온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농부님들은 이제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희망과 생산의 봄맞이를 시작한다. 바야흐로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봄’인 것이다. 어머니의 품 같은 대지 위에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따스하고 포근한 봄이 찾아오길 기대한다. 봄은 으쓱으쓱                                        박노해 겨울은 위로부터 으슬으슬 내려왔지만 봄은 아래로부터 으쓱으쓱 밀어옵니다 겨울은 얇은 자에게 먼저 몰아쳐 왔지만 봄은 많이 떨고 견딘 자에게 먼저 옵니다
2022-03-16 | hrights | 조회: 968 | 추천: 9
이윤/ 경찰관  자치검찰제는 검찰개혁 이슈 중 상대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적게 받고 있다. 검찰로부터 경찰과 공수처에 수사권 일부를 넘겨준 것으로 충분하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불완전하나마 지금의 수사권조정에 이르기까지 험난했던 여정을 감안하면 자치검찰제는 언감생심이긴 하다. 그래도 나는 완전한 형태의 자치경찰제를 바라는 만큼이나 완전한 형태의 자치검찰제가 시행되기를 바란다.  형사소송법을 처음 공부할 때 접한 ‘검사 동일체의 원칙’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웅동체’라는 말도 동물의 왕국에서 달팽이의 연애를 목격하기 전까지는 상상이 되지 않았는데, ‘검사 동일체’는 새로운 생물종도 아니고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네이버에 검색하니 ‘검찰권의 행사에 있어서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상하복종 관계에 있다는 원칙’이라고 한다. 상명하복이라면 군인이 끝판왕인데 ‘군인 동일체의 원칙’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상하복종 관계 외에 뭔가 더 있는 것 같다. 도대체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검사를 안 해봐서 모르겠다. 2003년에 검사 동일체 원칙을 ‘일부’ 폐지하여 '검찰사무에 관한 지휘·감독 관계'로 변경했다고 하는데, 뭐가 달라진 것인지 역시 모르겠다.  수사, 기소, 영장청구, 형집행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조직이 하나의 몸처럼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중앙집권적 조직은 일사불란한 의사결정과 행동력으로 큰 힘을 가진다. 게다가 검사는 선출직이 아니라서 정년까지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 오죽하면 ‘정권은 유한하지만, 검찰은 영원하다’는 말을 한 검사 출신 정치인도 있지 않은가. 거대하고 영속적 생명을 가진 리바이어던을 눈앞에 둔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형사사법기관은 생명, 신체, 재산을 박탈할 수 있는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부여받는다. 국민은 그 권한의 수여자이면서 동시에 대상자인데, 통제 수단이 변변치 않으면 자신이 수여자였음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처분 대상자로만 인식한다. 그래서 리바이어던의 압도적 힘 앞에 굴복하게 된다. 이런 거대한 힘에 대해 국민이 주권자로서 통제할 수단은 분권, 다원화, 민주화다. 이 세 가지는 자치검찰제와 잘 어울린다.  검찰이 굳이 중앙집권적 조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범죄는 각각이 별개의 사건이다. 사건별로 범죄사실이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확인하고, 위법성과 책임성을 검토한 후 실체적 판단 근거인 증거가 충분하고 형식적 요건에 맞으면 기소하고 공소유지하는 것이 검사의 임무다. 전문성을 갖춘 수사관과 검사에게 중앙집권적 조직에 의한 명령체계 및 통일성과 효율성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자치검찰제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외국의 자치검찰 사례를 보자. 독일은 연방대검찰청, 주고등검찰청, 주지방검찰청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연방대검찰청이 주검찰청에 대하여 지휘감독권을 갖고 있지 않아서 16개의 주검찰청이 각기 분리/독립하여 운영되고 있다. 미국은 대부분의 형사사건이 주 관할(95%)인데, 주 아래 자치단위인 카운티별로 검찰청이 조직되어 있고, 카운티 검사장(District Attorney)은 대부분 주민이 직접 선출한다. 연방검찰, 주검찰, 지방검찰은 상호 견제를 통해 권력분립의 이상인 ‘견제와 균형’을 실현한다.  2005년 베를린의 한 경찰서에 방문했을 때 마침 그 경찰서 담당 검사도 들렀기에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검사는 거의 매일 경찰서에 방문하여 경찰에서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법률적 자문을 하고, 경찰이 수집한 증거의 증거능력과 증명력에 대해 조언하며, 수사 방향을 논의한다고 했다. 부러웠다. 한국 검사는 개별 사건에 대해 수사관들과 머리를 맞대고 그런 논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지휘권이 있을 때에도 경찰이 보낸 수사서류만 보고 서면으로만 지휘할 뿐이었다. 글로만 하는 의사소통은 일방적이고 얕다. 진정한 협력 관계는 서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때 가능하다. 자치검찰제를 하면 자치경찰과 함께 지역 주민을 범죄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검사업무의 주된 목적이 될 것이다. 그런 검사는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영웅이 된다. 배트맨 시리즈 ‘다크나이트’ 속 정의로운 지방검사 하비 덴트처럼.  ‘더 킹’이라는 영화에 보면 1%의 정치검사들이 부정부패에 눈 감고, 수사 정보로 협박하여 부와 권력을 탐하는 모습이 나온다.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긴 하지만 현실로 구현될 위험성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정적을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해 의혹만으로 많은 검사들이 달려들어 전방위적 수사를 할 위험도 자치검찰제에서는 적어질 것이다. 하이에나가 사자보다 무서운 이유는 상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가서 다수 집단의 힘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자치검찰제와 관련된 논의는 이미 여러 번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2016년 검사장 직선제가 포함된 검찰청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한 적이 있고, 2019년 6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도 미국의 검사장 선출방식이 자치검찰제라며 도입에 찬성한 바 있다. 검찰개혁 과정에 검찰이 요구한 자치경찰제가 2021년에 첫발을 떼었다. 경찰은 엉뚱하게 뒤통수 맞은 격이긴 하나 그래도 자치경찰이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이니 불만은 없다. 이제는 조건이 갖추어졌으니 자치경찰의 파트너가 될 자치검찰제 논의도 본격화되어야 할 때다.
2022-02-23 | hrights | 조회: 1261 | 추천: 17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지난 세기에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이를테면 천방지축이던 그 당시 X세대들에게 기성세대가 엄근진하게 한마디 하기 딱 좋은 표현이었다.  곧 IMF 금융위기를 맞아 ‘세계는 넓지만 할 일이 없다’로 바뀌었지만, 자서전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음을 알렸던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이 책 제목은 지금도 심심치 않게 인용되고 있다.  세상은 바뀌었다. 세계화라는 단어는 이제 낯선 시대이다. 탄핵 된 전 대통령은 ‘중동으로 가라’고 호기롭게 솔루션을 던졌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세계화는 레드오션이 됐다.  외부와 바깥을 바라보는 것에 미래를 걸었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젠 내부와 주변을 살펴야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그래서 ‘동네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니 동네에서 무슨 일이 있겠냐고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신의 근처에서’ 거래가 이뤄지는 ‘당근마켓’만 떠올려보자. 당근마켓이 처음 등장할 때 이 자질구레해 보이는 사업이 국내 전체 소셜커머스 시장에서 상위 순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지역을 영어로 표현하면 로컬(local), 조금 더 쪼개서 동네를 표현하는 단어는 하이퍼로컬(hyperlocal)로 불리운다. 이 하이퍼로컬 비즈니스가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의 ‘넥스트도어’와 중국의 ‘핀둬둬’는 중고물품 거래 뿐 아니라 공동구매, 물품 공유 등 지역과 동네 단위의 커뮤니티를 바탕에 둔 사업을 통해 기존 시장을 위협하는 플랫폼으로 떠오르고 있다.  당근마켓의 성공이 우연이 아니라 큰 흐름을 탄 이유는 뭘까? 일단 초연결사회에서 대자본에 의해 독과점 시장을 이룬 플랫폼 경제에서 파생된 서브 플랫폼의 등장이라는 배경설명이 가능하다.  또 동네에서 뭘 하고자 하는, ‘슬세권’이라고 하는 공간적 범위에 포커스를 맞추고 거기서 더 나아가 가치소비를 덧붙인 하이퍼로컬 비즈니스가 확산될 조짐이다. 이를 테면, 새벽배송으로 받은 상품에 겹겹이 쌓인 택배 포장이 부담되는 사람들을 위해 지역 내 생산품의 직송 거래를 통해 포장지 절감과 신선도를 확보해주는 업체가 등장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사실 하이퍼로컬 비즈니스라는 개념은 이전 국내 시민사회에서 회자되던 골목경제, 공동체경제,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에서 크게 벗어난 개념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방식에 있어 앱 기반의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연계와 확장이 매우 유연한 사업 모델이다.(뭔가 새롭게 보이기 위해서는 외국말 신조어가 필요하다)  하이퍼로컬 비즈니스가 대자본의 집중과 독점에 균열을 내어 다양성을 유지하고 공동체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공룡인 IBM을 상대로 ‘Don’t be Evil(악이 되지 말자)’고 외치던 스타트업 구글이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지 본다면, 건강한 하이퍼로컬 비즈니스 또는 골목경제란 무엇인가를 먼저 고민할만하다.  하이퍼로컬 비즈니스가 지역화폐와 만난다면 어떤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수 있을까 궁리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이 정부 차원의 활성화 지원이 이뤄지며 급속하게 성장하고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근래 지역화폐가 확장하는 모습에서 아찔한 장면이 목격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전방위 플랫폼을 이끄는 기업이 지역화폐 운영사로 선정되고, 그 이유를 분석하는 언론기사에서는 자사 플랫폼 확장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지역화폐가 카드사의 영역 확대에 홍보마케팅 비용 투입 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너무 쉽게 나오기도 한다. 자, 정신 차리자. 지역화폐는 세금으로 급속 성장한 공공재이다.  각설하고, 지역화폐가 하이퍼로컬 비즈니스, 공동체 사업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지역화폐의 최고봉은 동네단위 공동체에서 유휴노동, 시간과 시간을 교환하는 시간화폐(타임뱅크)라고 생각한다. 지역화폐와 이런 사업이 연계된다면 도구로써 화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지점이 될 것이다.  이 같은 궁극의 지역화폐에 앞서 시흥시가 준비하고 있는 지역화폐-하이퍼로컬 비즈니스 정책을 소개하려 한다.(결국 시흥시 자랑으로 귀결되는 이 뻔한 전개) ‘시루 동키마켓’과 ‘시루 동네티콘’이 그것이다. 이미 글밥이 채워질 만큼 채워졌으니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사실 사업 명에서 다 나왔다. 동키마켓은 ‘동네를 키우는 마켓’의 줄임말이다. 동네티콘은 ‘동네에서 쓰는 기프티콘’이다. (다음 회에 계속)
2022-02-16 | hrights | 조회: 936 | 추천: 3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12월의 지리산에 눈이 내린다. 새벽녘부터 내리던 눈이 아침 녘으로는 눈발이 굵어지면서 더욱 세차게 흩날린다. 뱀사골산장을 떠나 간신히 연하천산장에 이르러 눈이 좀 진정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디를 돌아봐도 온통 흰색의 침묵이 깊게 내리고 있다. 그 풍경에 넋을 놓아 버린다. 어제 뱀사골산장에서 인사를 한 청년과 우리를 배웅한다고 연하천까지 따라나선 뱀사골 산장지기랑 연하천 산장지기가 그 깊은 침묵에 젖어 든다.  그치지 않는 눈과 함께 어둠이 내린다. 더 이상 출발은 어려우니 옹기종기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개인의 고민도 있고, 산악인의 전설 같은 무용담도 있고, 세상을 유람하며 도를 닦는 기인의 기행 같은 만담도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이질적이기보다는 묘하게 서로 어우러지면서 우리를 흥겹게 한다. 깜깜한 하늘을 이고 흰 눈으로 덮인 능선이 줄기줄기 서로를 이고 달리는 밤,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또랑또랑한 하늘의 별처럼 우리의 귓전을 울리는데, 어느새 권커니 잣거니 하던 술도 차도 떨어지자 하나둘, 각자의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세상이 하얗다. 그저 하얗다. 그 하얀 능선을 따라 길을 나선다. 우리를 배웅하는 산장지기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벽소령 지나 세석을 거쳐 장터목에서 바로 중산리로 하산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하루를 묵었으니 걸음은 더욱 바쁘다. 그렇게 오름길 내림길 다시 오름길 내림길을 반복하며 세석 지나 장터목으로 돌아드는데 지쳐 퍼진 사람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동안 동행한 청년이 깜짝 놀라며 이름을 부른다. 친구란다. 산에 간 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걱정하자 친구를 찾아서 겨울 산에 오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달리다시피 하산길을 재촉하여 중산리로 내려오니 어느덧 어둠이 끼어들고, 저기 버스 정류장까지는 다시 한 시간쯤 가야 하는데, 진주 가는 막차 시간이 간당간당하다. 한 사람이 배낭 벗고 달려가 버스를 잡아 놓기로 하였다.  땀으로 흠뻑 젖어 뒤이어 정류장에 도착하니 앞서 달려간 청년이 쫓아와 배낭을 받아 주고, 버스 기사는 웃으며 출발시간 늦었으니 어서 타란다. 몇 명 안 되는 승객들도 버스에 오르는 우리를 보며 오느라 고생했다며 안도하는 표정으로 맞아준다. 자리에 앉으니 긴장이 풀리며 꾸벅꾸벅 조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진주란다.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려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지갑을 찾으니 아차, 배낭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다. 허겁지겁 배낭을 다 헤집어 찾았으나 역시나 없다. 아마도 고마운 마음에 버스요금을 내주고는 지갑을 손에 쥔 채 졸다가 버스 바닥에 떨어뜨린 모양이다. 다시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으나 막차들이 들어온 시외버스 정류장은 문을 닫아 껌껌하다. 순간 하늘이 까매지는 게 이제 어쩌면 좋은가 싶은데 동행한 청년이 “가시죠!” 한다.  진주고속버스터미널로 와서 서울행 버스표를 구입하려고 하니 이제는 표가 없단다. 다시 막막해하자니 매표소에 있는 분이 혹시나 TMO 예비용 표가 한두 장 있을 수 있으니 사무실로 가보란다. 예전에는 TMO라고 적힌 입간판이 기차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 한쪽에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역시나 남은 표는 없단다. 어쩌나 싶은데 사무실에 있던 분이 혹시 안내양 자리라도 괜찮으냐고 묻는다. 고속버스 안내양 제도는 사라졌지만, 버스에 보조석은 아직 있었다. 동행한 청년이 버스표를 구해 줬다. 청년은 되로 받고 말로 주는 선행을 베풀었다. 강제된(?) 청년의 선행으로 나는 무사히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물론 고마운 마음 한가득 안고서.  고속버스 보조석은 출입구 계단 위 운전석 조금 아래 있었다. 좌석은 물론 편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뜀박질하듯이 산행하고 내려온 몸은 물먹은 솜이 따로 없었다. 나른하게 처지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또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등받이는 허리까지만 오고 졸다 보면 몸은 흔들거렸다. 자격지심에서인지 기사 아저씨가 자꾸만 흘끔거리는 것만 같다. 운전하는 옆에서 조는 게 안 좋아 보여 그러는가 싶어 정신 차리자 하면서도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버스가 휴게소에 들어섰다. 기사 아저씨가 내리면서 “자꾸만 흘끔거려 신경 쓰이죠! 백미러 보느라 그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하신다. “아휴, 참!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오해하고 말이야~~” 그 말씀에 이제는 아예 대놓고 졸았다. 꾸벅꾸벅, 그러다 몸이 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졸고, 5시간을 넘게 그러면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불편한 자리 앉아 오느라 고생하셨네! 잘 들어가시게!” 기사 아저씨의 인사를 뒤로하고 돌아서는데, 불빛 휘황한 도심 속에서 어제오늘 일을 돌아보니 그 시간이 마치 꿈결 같다.  새까만 밤하늘, 맑은 종처럼 댕그랑 소리를 낼 것같이 밤하늘을 수놓던 수많은 별들, 그 아래 깊은 바다처럼 내려앉은 하얀 능선, 그 능선을 휘돌아 들던 눈보라, 그곳을 떠돌던 인생 나그네들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 우연의 일상이 빚어낸, 계획되지 않은 그 축복 가득한 시간을 떠나 돌아온 현재가 오히려 낯설기만 하다. 우연의 일상성이 추억으로 들어서는 시간이다.
2022-02-11 | hrights | 조회: 1078 | 추천: 5
석미화/ 평화활동가  지난해 말, 친한 그림책 작가가 투박하고 조그마한 도자기를 보여주며 선물 받은 것이라고 자랑을 했다. 거친 표면에 녹색 빛이 도는 그 도자기는 우리가 아는 매끄러운 도자기와는 거리가 멀었고, 흙인 듯 돌인 듯 자연을 닮아 있었다. 집안에 놓아두고 감상하면 좋겠구나 생각하던 참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내가 죽으면 돌아갈 곳이에요.”  모든 게 재가 되고 남은 뼈가 돌아갈 집... 유골함이라고 했다. 잠깐 멍하니 이해를 못 하다가 “유골함을 선물해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유골함을 미리 장만해 곁에 두고 산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그것을 선물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08골호 프로젝트, 집을 태워 영혼의 집을 구한다> 도예가 김대웅은 108개 뼈의 단지를 만들었다. 108개 흙덩이에 인연들의 삶을 담아내고 기억의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나무 장작 쌓아 올린 집을 지어 흙을 구워냈다. 재가 될 인생들에게 욕심내지 말라 하며. 그렇게 마지막 집으로 인연들을 위한 작은 항아리를 만들었다. ‘남편의 유골함을 침대 곁에 두고 자는 스위스 할머니와 오빠의 유골함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어느 화가의 고민 속에 나의 유골과 죽음을 위한 흙의 덩어리는 태어났다.’ 2021.10월 작가노트 중 사진 출처 - 도예가 김대웅  루게릭병에 걸려 죽어가는 노스승 모리 슈워츠와의 대화를 담은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어떻게 죽을 준비를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모리는 이렇게 말한다. “불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하게. 매일 어깨 위에 작은 새를 올려놓는 거야. 그리곤 새에게 ‘오늘이 그날인가? 나는 준비가 되었나? 나는 해야 할 일들을 다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원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나? 라고 묻지... 어떻게 죽어야 좋을지 배우게,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우게 되니까.”  돌아갈 유골함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노스승 모리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깨 위에 작은 새를 올려놓는 것과 같은 것일까. 죽음은 삶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도록 만든다. 2022년을 시작하며 다소 무겁지만, 생에 대한 진지한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했다. 그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 삶의 전환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다 보니 늙음 그리고 죽음에 생각이 가 닿았다. 청년의 날들을 지나 중년으로, 나이 듦의 길목에서 나도 새 한 마리를 어깨에 올려놓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름 엄숙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프랑스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책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를 펼쳤다. 삶에 대한 철학을 담은 이 책은 단지 노년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만 공감을 주는 내용은 아니었다. 작가는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젊은이의 시간이 아닌 노년의 삶을 연장시켰음을 환기시켜주고, 과학발달과 수명연장이 가져다 준 성숙과 노년 사이의 모라토리엄을 잘 활용하여 인생의 인디언 서머(Indian summer)를 살라고 말한다.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삶을 그 끝에 대한 생각으로 재단하는 것,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만큼 인생의 즐거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또 있을까, 현재만 산다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실존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철학은 삶을 배우는 것, 특히 유한의 지평에서 다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단지 어깨 위에 새를 올려놓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금 더 책으로 들어가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 생을 받았다기보다는 잠시 빌려 사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우리에겐 생의 이용권만 있고 소유권은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으레 생각하듯 의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새로운 의무를 질 각오부터 해야 한다. 자유는 느슨한 풀어짐이 아니요, 책임의 증대에 더 가깝다. 자유는 우리 어깨를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 어느 나이에나 구원은 일, 참여, 공부에 있다.’  ‘생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지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오솔길에서 길을 잃은 채 이성과 아름다움의 빛에 비추어 더듬더듬 나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형제, 친구, 동지, 가족이라는 타자들 속에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체념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때만 자유롭다.’  위의 인용을 그냥 눈으로 휙 읽었다면 다시 천천히 읽어보길 권한다. 일, 참여, 공부를 통해 삶을 배우는 것,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존재로서 생은 아름답고 값지고 찬란하다. 나는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글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2022년, 나와 더불어 함께하는 이들이 삶을 배우고 자유로운 존재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박한 글을 나눈다.  참, 어깨 위의 새는 어쩐다지?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이성과 논리로 죽음을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죽음을 부정적이고 금기시하는 문화에 대해 죽음이 왜 나쁜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죽으면 삶이 선사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박탈이론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죽음에 대한 이해를 바꾸고 질문을 고쳐보려 한다. 어깨 위의 새에게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는 것으로 말이다.
2022-01-26 | hrights | 조회: 1193 | 추천: 6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1.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한겨울 밤중에 늑대울음이 들리면 불길함이 온몸을 파고들어 으스스한 감정에 사로잡힌다고 말하듯이, 울음은 동물들에게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웃음은 오로지 인간만의 반응이다. 일어나는 사건의 규모가 크건 작건, 사건이 실제 현실에서의 것이건 가상적인 상상에 의한 것이건, 이미지에 의한 것이건, 언어에 의한 것이건, 각종 사건에 대해 각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나타내는 특이한 반응이 웃음이다.  그러하기에 웃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오매불망 바라던 일이 성취되었을 때, 기쁨에 넘쳐 주먹을 불끈 쥐고서 허공을 때려잡을 듯 아래위로 내려치면서 ‘오케이!’ 하고 혼자 춤을 추기도 하고 주변에 누구라도 있으면 부둥켜안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좋아하고서 더없이 즐거워하며 온몸으로 웃는 파안대소(破顔大笑)랄까 하는 웃음이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부마항쟁 때 진압군이 아스팔트 바닥에 총을 쏘며 다가오는 지척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다 도망친 뒤 특공대에 의해 장악된 도시 공포의 상황에서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아침 라디오에서 박정희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런 위대한 웃음이 찾아온 적이 있다. 그 뒤, 세월이 많이 흘러 스무 번 이상의 촛불 시위에 참여한 끝에 그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는 헌재의 최종 판결이 알려졌을 때도 그에 못지않은 위대한 웃음이 온몸을 관통하며 넘쳐 흘렀다.  광대놀음을 덧붙인 판소리 마당극을 보면서 너무나 통쾌 유쾌한 나머지 죽으라고 손뼉을 치면서 아랫배를 끌어안고 심지어 숨이 넘어갈 듯 신나게 웃어젖히는 박장대소(拍掌大笑) 역시 대표적인 웃음이다. 거짓으로 위장된 권위의 껍데기를 벗겨내자 그 속에서 드러나는 비천한 알몸이 훤히 드러났을 때, 그 알량한 모습을 보고서 박장대소 숨이 넘어갈 듯 깔깔대면서 한껏 즐거워하는 민중의 그 미련없는 웃음이야말로 누구나 자유로운 존재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별달리 잘난 데도 없으면서 유난히 남들을 무시하면서 저 잘난 체 자랑질을 하는 꼬락서니를 목격했을 때 내놓고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은근슬쩍 비난의 염을 내보이는 흔히 냉소(冷笑)라 부르기도 하는 비웃음에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동한다. 하지만, 아차 그 의지의 끈을 놓쳐 풀리게 되면 실소(失笑)를 금치 못해 씩 웃게 되면 상대로부터 ‘너, 날 비웃는 거야?’ 하는 반응을 유발하여 예기치 않은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그리하여 그동안 쌓아온 우정이 깨지기도 하고, 심지어 원한과 복수심에 치를 떠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습지도 않은데 높은 놈이 웃으니 억지로라도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어 웃는 선웃음이 있는가 하면, 선웃음의 효과가 좌중에 전염되듯 넘쳐 흘러 드디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너나 할 것 없이 그 높은 놈이 웃은 것보다 더 크게 입을 벌려 높은 소리를 내는 홍소(哄笑)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장면이야말로 소극(笑劇)이 아닐 수 없고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2.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당치 않은 일을 일방적으로 당했을 때 짓게 되는 고소(苦笑)라 일컫기도 하는 쓴웃음이 있다. 적당한 수준에서 마땅치 않거나 씁쓸한 느낌이 들면 그저 입가에 씩 입술연지를 바르듯이 쩝쩝거리는 시늉으로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어이없음은 일정한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나 원 참!’ 하는 식으로 하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 때도 있고, ‘차라리 죽고 말지.’ 하는 식으로 너무나 어이가 없는데도 도무지 어쩔 방도가 없어 가슴이 먹먹한 나머지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목숨을 유지하는 것조차 창피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 정도쯤 되면, 쓴웃음을 지을 여유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욕지기가 있는 대로 치밀면서 원한과 분노가 솟아올라 견딜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 욕지기와 원한과 분노는 그저 상대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이 말도 안 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고, 그 어처구니가 없음이 겹겹이 쌓여 황당함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급기야 심중(心中)이 무너져내려 무슨 돌 하나를 삼킨 듯 말 그대로 가슴이 먹먹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 것이다.  김건희-이명수 전화 녹취록을 통해 전국에 알려진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 그러하다. 농락을 당해도 유분수지 너무나 어이가 없어 쓴웃음조차 지을 수 없다. 통화를 통해 들려오는 김건희라는 여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물론이고 그 목소리조차 너무나, 하도 어이가 없다. “내가 정권 잡으면 그것들 그냥 두지 않을 거야.” ― “너도 양다리 걸쳐. 세상이 어찌 될지 누가 알아? 권력이란 게 무서운 거잖아.” ― “보수는 대가를 정확하게 지급하잖아. 진보는 말이야, 바람은 피우고 싶고 돈은 없고, 그러니까 미투를 당하는 거야.” ― “조국 사건도 그렇게 크게 갈 일이 아니었어. 구속할 필요도 없었는데, 유시민이니 김어준이니 무슨 유투버니 하는 것들이 하도 검찰을 욕을 해대니까, 희생된 것뿐이야. 조국도 안 됐지 뭐.” ― “내가 뭐가 아쉬워서 유부남을 만났겠어? 우리 어머니처럼 돈 많은 사람이 어떻게 딸을 팔아먹어? ― “나는 영적인 사람이야.”  많은 뛰어난 논객들이 이 한마디 한마디에 새겨져 있는 정치 사회적인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으니, 필자로서는 더는 덧붙일 말이 없다. 필자로서는 맨 먼저 그저, 미쳤구나!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변의 사람들을 제 뜻대로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정의나 불의, 선악이나 미추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구나.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특히 그녀와 꼭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숭배한다고 확신하고 그러한 사람들의 심리를 역이용하면 되지 않을 일이 없다고 믿고 있구나. 반(反)사회적이건 몰(沒)사회적이건 아무런 상관도 없이 자신만의 영달을 중심으로 가치 체계와 그에 따른 판단 체계를 정확하게 형성했구나. 그러한 자신의 가치와 판단의 체계가 옳다는 것을 자신이 획득한(또는 타고난) 배타적 지배의 ‘영적인’ 힘이 뒷받침한다고 정확하게 오인하여 믿고 있구나. 그리하여 자신의 그러한 가치와 판단 체계가 옳다는 것을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돈과 권력의 확보를 통해 실제로 입증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그 ‘영적인’ 탁월함과 배타적인 지배력의 위력을 자타가 공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있구나. 남편이 대검중수부장과 검찰총장을 거쳐 바야흐로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지지율 선두로 달리도록 한 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이고 따라서 남편은 자신이 부리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구나. 이런 정도로 자신의 영적인 역량을 발휘해 성공했으니, 이야말로 진짜 최고의 정치적인 수완이고 능력이 아니라면 뭐겠어? 하고 생각하겠구나.  저런 미친 여자가 “(내가) 정권을 잡아” 대통령이 되면 도대체 이 나라는 무슨 꼴로 어떻게 나락에 빠져들 것인가? “최순실보다 더한 제2의 최순실”이 등장했다고들 한탄한다. 지금 필자는 하도 너무나 어이가 없어 쓴웃음조차 짓지 못하고 얼굴이 화석처럼 굳어버린 상태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필자의 심경이 이렇게까지 한 덩어리 돌이 되다시피 뭉치고 만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상 이러한 김건희의 폭로된 광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여자가 미쳤구나 하는 생각은 다른 일은 제쳐두고라도 부지기수로 반복해서 학력과 경력을 위조하는 것을 보고 이미 생각한 바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안 하면 바보가 아니냐, 하는 식의 그 여자의 삶의 태도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번 전화 녹취록의 폭로를 통해 그 광기의 본색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른바 ‘본부장’의 숱하게 드러난 범죄와 거의 입증되다시피 한 의혹은 물론이고 그녀의 남편 윤석열 후보가 창피해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손바닥 ‘王’자 사건과 그 외 어처구니없는 발언과 핑계의 태도에서 드러난 그 무능력은 우리 모두의 ‘공정과 상식’에 입각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진정 필자가 하도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원한과 분노에 휩싸이는 것은 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광기가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과 수구 언론 권력’을 관통하고 휘감아 나라의 정치판을 이전투구의 장으로 만들고 그리하여 수많은 유권자 국민의 눈과 귀를 오랜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여 판단력을 납작하게 뭉개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잖아도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1위 운운하면서 언론에서 발표될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지곤 했는데, 그 지지율이 실현되는 바탕의 한 축에 심지어 후보자의 아내라는 여자가 ‘발휘하는’ 무속적인 영적 자기도취의 광기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니 이 어찌 하도,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누군들 마음과 얼굴이 돌처럼 굳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확인하고서 같은 당의 유명 정치인인 홍준표 씨조차 “가슴이 먹먹하다.”라는 글을 올렸으니, 하물며 ‘공정과 상식’을 믿는 집단지성의 국민은 오죽하겠는가. 3.  참으로 다행이다. <서울의 소리> 유튜브 방송과 그 이명수 기자가 큰일을 했다. 이제 이재명 후보가 늘 말하듯 ‘국민의 집단지성’이 크게 발휘되어 광기와 미신의 정치적인 굿판을 확실히 작파(斫破)하여 그 뿌리를 아예 불살라버리는 기회로 삼아 합리적인 공론장을 통한 민주주의 정당 정치의 토대를 제대로 구축하는 데 모두가 힘을 모아 발휘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사회 정치의 파안대소를 맘껏 누렸으면 하고 바란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새삼 신동엽 시인(1930∼1969)의 외침이 뇌리에 사무친다.
2022-01-18 | hrights | 조회: 1053 | 추천: 5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어린 시절 내 눈에 기린은 단연코 가장 매력적인 동물이었다. 창경궁 동물원인지 서울동물원인지 기억도 희미하지만, 휴일에 부모님에 이끌려 방문했을 터이고 동물 구경인지 사람 구경인지 모를 정도로 혼잡했다. 사람 숲을 헤치고 동물 우리에 다가가도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았다. 하지만 기린은 달랐다. 다 자란 기린은 암컷이 4미터, 수컷이 5미터나 되니까 대략 아파트 2층 높이 만큼 된다. 어린아이라도 발돋움을 하고 고개를 처들고 시선을 멀리 던지면 기린을 너끈히 볼 수 있다. 길고 강인한 목 끝에는 작은 머리와 세 개의 뿔이 얹혀 있다. 어린 나뭇잎을 씹느라 입을 연신 좌우로 움직이며, 동그란 눈망울을 굴려 내 쪽을 바라본다. “아, 저기 봐, 기린이다!”  기린에 대해서는 유독 궁금한 게 많았다. 기다란 다리를 휘저으며 뛰는 자태는 에너지와 스피드가 맹수 못지않다. 몸에는 표범 무늬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얼굴은 선량한 모습이다. 몸체와 얼굴이 안 어울린다. 기다란 목의 뼈는 도대체 몇 개일까? 혹시 수십 개 뼈가 아코디언처럼 이어져 있는 건 아닐까? 심장과 머리 사이가 저렇게 멀어서야 혈액을 어떻게 공급할까? 작은 머리가 의료용 스포이드처럼 저 아래 심장에서 피를 죽 빨아올리는 건 아닐까? 어린 마음에 상상력을 보태 자문자답해보기도 했다. 기린은 다른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7개의 경추를 갖고 있지만 긴 목을 상하로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위해 제1흉추가 기능상 ‘8번째 목뼈’ 역할을 한다는 사실 1), 심장과 뇌 사이가 워낙 멀어서 뇌까지 혈액을 보내기 위해서는 혈압이 높아야 하기 때문에 기린의 최고 혈압은 300mmHg로 지구상에서 가장 혈압이 높은 동물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기린이 신기했던 건 유럽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린은 이국 동물 중에서도 경이와 호기심이 집중된 대상이었다. 기린은 로마제국 원형경기장에 등장했었지만, 16세기 메디치 군주를 위해 진상되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18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살아있는 기린을 볼 수 없었다.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Pliny the elder)는 기린을 카멜로파르달리스(Cameloparadalis)라고 명명했다.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플리니는 기린을 낙타표범(camelopard), 즉 낙타의 형체와 표범의 피부를 섞어 놓은 미지의 동물로 인식했다. 아프리카 내지로부터 들어온 기린 뼈나 가죽은 접해봤지만 살아있는 기린을 직접 보지는 못했던 18세기 유럽 박물학자들은 플리니의 전통에 따라 기린을 유니콘, 그리핀, 피닉스와 같은 신화 속 동물로 인식했다.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Georges-Louis Leclerc, Comte de Buffon)의 『자연사(Histoire Naturelle)』에 실린 기린 삽화에는 기린의 뿔 2개가 유니콘의 뿔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플리니의 『자연사(Naturalis Historia)』에 나오는 서술을 시각적으로 번역한 것이었다. 2)  “이 신비로운 동물”, “신성한 피조물”에 대한 목격담으로, 사체와 뼈와 가죽으로 점차 기린의 실재가 알려지자 이 동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기 위한 증표로서 실물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졌다. 프랑스 탐험가 프랑수아 르 발랑(François de Vaillant)은 남아프리카 케이프 내지에서 야생 기린을 관찰하고 기록을 책으로 발간했다. 1810년대가 되면 영국의 탐험가이자 자연학자 윌리엄 존 부쉘(William John Burchell)도 남아프리카 내륙을 탐험하고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네발동물”에 대해 면밀히 기록했다. 부쉘이 수집한 약 5만점의 표본 중에는 암수 기린 한 쌍도 있었다. 부쉘이 기증한 박제 기린 한 쌍은 영국박물관에 2층 계단 복도에 전시됐다. 3)  1827년 6월 30일, 파리 국립자연사박물관에 살아있는 기린이 도착했다. 1826년 수단에서 붙잡힌 새끼 기린이 뱃길로 나일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를 거쳐 프랑스 남부 항구 도시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기린이 처음 밟은 유럽 땅은 마르세유였던 것이다. 마르세유부터 파리까지는 육로로 900킬로미터를 걸어서 이동했다. 수단에서부터 파리까지 이동거리를 모두 합치면 무려 6,000킬로미터에 달한다. 새끼 기린은 ‘자라파(Zarafa)’라고 불렸다. 아랍어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럽다’는 뜻의 ‘zerafa’에서 변형된 단어라고 한다.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의 giraffe, girafe, giraffa는 모두 여기서 유래했다.  기린을 생포해 프랑스 국왕 샤를 10세에게 보낸 이는 이집트의 부왕 무함마드 알리였다. 자라파는 오스만제국 지배에 반대하는 그리스의 봉기를 진압하는 것을 눈감아 달라는 알리의 정치적 계산을 위한 희생양이었다. 당시 왕정복고기의 프랑스도 정치가 불안정한 상태라 알리의 뇌물이 효과를 발휘할지는 의문이었다. 부왕 알리의 명을 받은 사냥꾼들은 어미는 죽이고 생후 2개월의 새끼 자라파를 생포했다. 젖을 떼기 전의 새끼 기린이라야 길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젖먹이를 지난 기린은 도망치려다가 불구가 되거나 굶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기린의 정강이 뼈는 곤봉으로, 기린 가죽은 방패용 가죽으로, 꼬리는 파리채로 쓰였고, 고기는 고급 식량으로 팔렸기 때문에, 어미는 도살해 네 마리 낙타에 나눠 싣고 이동했다. 자라파는 어미의 사체와 함께 걸어야 했던 것이다. 어미 잃은 자라파에게 매일 96리터씩 우유를 먹이기 위해 소 세 마리도 일행에 포함되었다. 4)  기린은 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었다. 마르세유에서 파리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동안 지나는 도시마다 기린을 보러 인파가 모여들었다. 낮에 30km 이상 걷고 밤에는 쉬어야 하는데 기린을 보러 사람들이 여관으로 몰려들어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리옹에서는 3만 명이 연도에 나와 구경하는 바람에 대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수단인 하산과 아티르가 여정을 동행하며 기린을 돌봤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저명한 자연학자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Étienne Geoffroy Saint-Hilaire)가 마르세유로 와서 파리까지 동행하며 관찰 기록을 책으로 남겼다는 사실이다. 통풍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중년의 생틸레르에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 사이 자라파는 3미터 70센티까지 자랐다. 5) 파리에 무사히 도착해 국왕 샤를 10세를 알현했을 때 생틸레르는 감격에 겨워 경과를 보고했고, 국왕은 한 시간 동안이나 생틸레르에게 기린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6) <그림 1> ‘아 라 지라프(à la Girafe)’ 헤어스타일과 기린 색상 드레스를 입은 여성 출처: Women began to truss up their hair à la Girafe and style themselves in giraffe-coloured dresses. Well you would wouldn’t you? The Repository of Arts, Literature, Fashions &c. Third Series, Volume 10. Photograph: Internet Archive Photograph: Internet Archive  1827년 첫 6개월 동안 파리에서 누적 약 6만 명의 관람자가 기린을 직접 보러 왔다. 당시 파리 여성들 사이에서는 기린 색과 무늬 패션, 기린 뿔 모양 헤어스타일이 유행했고, 인기 색깔은 ‘기린 노랑색’이었다(그림 1). 남성들도 기린 모자, 기린 타이를 맸다. 직물, 벽지, 도자기, 장신구, 가구 어디에도 기린이 새겨졌고 기린 무늬와 긴 목을 디자인에 응용했다. 기린 열풍은 1830년대까지도 계속됐다. 7)  아티르는 수단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자라파를 보살폈다(그림 2). 파리 자연사박물관에서 자라파 옆에 거주하며 극진하게 돌봤던 아티르에 대해 파리지엥들은 기린의 정부(情夫)라며 입방아를 찧기도 했다. 자라파를 고상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숙녀로 의인화하고, 아티르와의 친밀한 관계에 야릇한 시선으로 함부로 성애화함으로써 인간의 의식 속에 가둬버린다. 어미를 잃고 900㎞를 걸어와 파리에 갇힌 기린 자라파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유순하고 우아한 모습이 혹여 체념은 아니었는지 우리 인간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1842년 죽은 자라파는 박제가 되어 라로셀 자연사박물관 계단참에 아직도 서 있다. 영면에 들지 못한 자라파가 강제이주에 영원히 항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인간의 호기심과 과학연구를 위해 동물을 가두어 사육하는 일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질문하는 건 아닐까? <그림 2> 니콜라 위에가 그린 기린 자라파와 아티르의 초상화 "Study of the Giraffe Given to Charles X by the Viceroy of Egypt," by Nicolas Huet the Younger (1827) A watercolor depiction of the first giraffe ever seen in France, alongside the groom who would look after it for the next eighteen years. 출처: Wikimedia Commons 1) 기린의 8번째 목뼈는 일본의 기린 연구자 군지 메구(郡司芽久)의 발견이다. 군지 메구, 이재화 옮김,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 (더숲, 2019). 2) Takashi Ito, London Zoo and the Victorians 1828–1859, Woodbridge, UK: Boydell and Brewer Limited, 2014. p.55-56. 3) Ibid., p.60. 4) 마이클 앨린, 박영준 옮김, 『자라파 여행기: 이집트가 프랑스에 선물한 자라파를 통해 본 19세기 정치 문화사』 (아침이슬, 2002), 77-80쪽. 5) 같은 책, 139-152쪽. 6) 같은 책, 184쪽. 7) 같은 책, 186-187쪽.
2022-01-12 | hrights | 조회: 1693 | 추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