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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략적 관계 2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1-12-29 17:25
조회
757

홍미정/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교수


□ 이슬람혁명 이후의 비가시적인 동맹 관계
: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이스라엘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정권의 지지자로 간주하고, 팔레비 정권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유대관계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1979년 2월 11일 시가전에서 반란군들이 샤에 충성하는 군대를 제압하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공식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2월 18일 이슬람혁명 임시 정부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반란군들이 시가전에서 미국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어떻게 제압했을까? 이 의문은 새롭게 기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들을 인용한 2016년 6월 3일 BBC 보도에서 일정 부분 해소되었다. 이 BBC 보도에 따르면, 1979년 1월 27일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지미 카터 정부에 거래를 제안하는 다음과 같은 비밀 메시지를 보냈다. “이란 군부 지도자들은 당신의 말을 듣지만, 이란 국민들은 내 명령을 따른다. 카터 대통령이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정권인수의 길을 열어준다면, 내가 국민을 진정시킬 수 있고, 안정이 회복될 수 있으며, 이란에서 미국의 이익과 미국 시민들은 보호받을 것이다.”
이 비밀 메시지는 프랑스에서 호메이니의 참모인 이란계 미국인 의사 에브라힘 야즈디와 프랑스 주재 미국 대표 웨런 지머만 등이 수차례 직접 대화한 최종적인 결과이며, 호메이니의 이란 귀환과 권력 장악을 이끌어 내었다. 텍사스 휴스턴에 거주하는 야즈디는 이미 CIA요원 리차드 코탐을 통해 워싱턴 미국 관리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실 카터 행정부는 1978년 이란 반정부 시위 때부터 이란 정권 교체 논의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고, 호메이니가 이에 응답한 것이다. 그러나 이란혁명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의하면, 호메이니는 용감하게 미국에 저항했고, 샤의 권력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하는 ‘그레이트 사탄’ 미국을 물리쳤다.


 미국의 중동 정책에 비판적인 이란 태생의 바흐람 알레비가 1988년에 쓴 「호메이니의 이란 : 이스라엘 동맹」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 기간에 이란 사박 요원을 영입하여 이스라엘의 외부 정보기관인 모사드와 협력하게 하였다. 이스라엘이 고용한 사박 요원 중에는 마누체르 고르바니파르가 있었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샤가 몰락한 후에, 고르바니파르를 비롯한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하의 사박 요원들은 계속해서 호메이니 통치하의 사바마 요원으로 일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용했다. 고르바니파르는 양 측, 이스라엘 모사드와 호메이니의 사바마를 위해 일했다. 이란-이스라엘 관계에서 그들의 중심적인 역할은 이란의 샤와 미국 중앙정보국과 이스라엘 모사드가 협력하여 창설한 비밀경찰을 유지하기로 한 호메이니의 결정으로 가능해졌다. 호메이니 정권은 1979년 2월-9월 사이에 사박의 전직 수장 세 명을 처형하고, 사박 조직의 이름을 사바마로 바꾼 것 외에, 그 기능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 호메이니 정권은 많은 사박 요원들을 사바마 요원들로 다시 고용하였고, 사바마 요원들은 사박 요원들이 샤를 위해 수행했던 것과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사바마 요원들이 이스라엘과 이란 이슬람공화국 사이에서 무기거래 등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시대와 이란 이슬람공화국 시대는 정권과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이념은 바뀌었으나, 실제 정책에 있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연속성이 있으며, 내부적으로도 권위주의적이며 억압적인 정권 유지 방식은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9년 8월 7일, 호메이니는 ‘예루살렘의 해방을 전 세계 무슬림들의 종교적 의무’라고 선언하면서, 라마단의 마지막 금요일을 전 세계 무슬림들이 연대하여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에 반대하고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하는 ‘예루살렘의 날’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이란 이슬람 혁명정부는 이스라엘 지배로부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주도하는 PLO 편에 서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 동안, PLO는 이란 반체제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많은 이란 반체제 인사들은 1970년대에 레바논의 PLO 캠프에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PLO 또한 1979년 혁명을 지지하였고, 1979년 2월 17일 야세르 아라파트는 31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테헤란을 방문하였으며, 2월 18일 호메이니를 만났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오늘 이란 혁명이 중동의 세력 균형을 뒤집어 놓았다. 오늘은 이란, 내일은 팔레스타인”이라고 선언했다. 테헤란 라디오 방송은 “아라파트는 이란이 전력을 강화한 후에, 이스라엘에 대한 승리문제로 눈을 돌릴 것이라는 서약을 호메이니로부터 받았다.”고 보도했다.


 2월 18일 야세르 아라파트 환영행사에서 총리 메흐디 바자르간이 이스라엘 외교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테헤란 소재 이스라엘 공관이며 이스라엘 외교의 중심지였던 팔레스타인 사무소 열쇠를 아라파트에게 넘겨줌으로써, 팔레스타인 사무소는 PLO에게 넘어갔다. 동시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시아파 운동이 이란을 정치·군사적으로 장악한 이후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가 통치하던 이란과 이스라엘의 긴밀한 정치·군사적 관계가 종식되고, 이란의 정책이 아랍 국가들과 PLO에 우호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실제로 2월 18일 이란 혁명 임시정부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이란 국영 테헤란 라디오 방송은 ‘모든 이스라엘인은 이란을 떠나고, 이스라엘 주재 이란 대표들은 귀국하라고 명령을 받았다’라고 보도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혁명 정부와의 사이가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가 이란을 공격함으로써, 8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1988년 8월 20일에 종결된 이라크-이란 전쟁이 시작되었다. 100만-200만 명 정도의 엄청난 인명 살상을 초래한 장기 지속적인 이 전쟁의 결과, 이라크는 이란의 영토를 장악하거나 이라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란 석유생산의 중심지 쿠제스탄 주(이란 내륙 유전 매장량의 80%, 이란 전체 유전 매장량의 57% 보유)에서 아랍분리주의를 강화하는데 실패했고, 이란은 이라크 군사력을 무력화시키거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실패했다. 사실 무기 판매상들만 이익을 본 전쟁으로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PLO 사이의 관계는 아라파트가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이라크를 지원하는 아랍세계에 합류하면서 악화되었다. 게다가 호메이니 정권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운동을 장악하기 위하여 PLO 내에 이슬람근본주의 파벌을 만든 다음 PLO 내 세속적인 지도부를 친이란 이슬람 근본주의 지도부로 대체하려고 시도하였다. PLO 지도부가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침투에 점점 저항하자, 호메이니 정권은 관영언론에서 PLO를 ‘팔레스타인의 대의가 이슬람 운동의 불가분 구성 요소임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라고 공격함으로써 PLO와 이란 이슬람 공화국과의 관계가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현재도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를 후원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정책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조직들의 통합을 막고, 팔레스타인 조직들을 분할통치 하는 이스라엘 전략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스라엘과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무기거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이스라엘과 이란 이슬람공화국 사이의 동맹이 은밀하게 구축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이란 전쟁이 시작되자 이란 이슬람공화국 대표단은 파리에서 이스라엘 국방부 차관을 만나 ‘무기와 유대인 교환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이란은 유대인들의 이민을 허용했고, 이스라엘은 치프틴 탱크와 미국제 F-4 팬텀 항공기를 위한 탄약과 예비 부품을 이란에 팔았다.


 이후,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이란 유대인들의 이주를 허용하였으며, 이슬람혁명 이후 10년 동안 이란 유대인의 대다수인 약 6만 명 정도가 이란을 떠나 미국, 이스라엘, 유럽 등지로 이주하였다. 사실 8년 가까이 계속된 장기 지속적인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전쟁터를 떠나 이주하는 것은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부여한 혜택이자 특권으로 보인다.


 텔아비브 대학의 자페 전략 연구소에 따르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이스라엘이 이란에 판매한 무기는 총 5억 달러에 달했다. 대부분은 이스라엘에 전달된 이란산 석유로 지불되었다. 호메이니 정부를 위해 일한 이란의 무기상 아흐마드 하이다리에 따르면, 전쟁 시작 직후부터 호메이니 통치 기간 동안 테헤란이 구입한 무기 중 약 80%가 이스라엘에서 왔다. 무기 구입은 정권 유지와 강화에 필수적인 요소이고, 무기거래는 국가 간 동맹의 핵심적인 동력이며 상징이다.


 1991년 12월 8일 The New York Times 보도에 따르면, 지난 3개월 동안의 100명 이상의 전·현직 정부 관리, 무기거래상, 정보 요원들과의 인터뷰를 포함한 The New York Times 자체 조사는 “1981년에 미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와 이스라엘의 총리 메나헴 베긴은 이스라엘에게 이란이 요청한 미국산 예비 부품과 기타 장비 문제를 사안별로 검토하고 승인하기로 하는 합의를 도출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1981년 이스라엘 국방부 고위관리로 후에 외무부 국장을 지낸 아브라함 타미르 소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무기거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매달 우리는 이란에 팔고 싶은 미국제 무기 목록과 예비 부품 목록을 미국에게 주었다. ‘구두 합의’는 적어도 18개월 동안 유효했고, 우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였던 사무엘 W. 루이스에게 요청 사항들을 기록한 목록을 주었다. 헤이그 장관과의 합의에 따라, 1981년과 1982년 미국산 무기를 이란에게 판매하였다. 그 후 세계 각국의 무기 무역상들, 이스라엘인, 미국인들, 영국인들이 이란에 계속 무기를 판매했다. 이란에 판매한 미국제 무기는 수십억 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렇게 이란 이슬람공화국에게 무기를 제공한 이스라엘의 동기에 대해, 1981년 메나헴 베긴 총리는 “1980년 9월 시작된 전쟁에서 이라크가 승리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는 이스라엘의 강한 열망 때문에 이란에 예비 부품을 기꺼이 제공하려고 했다.”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중동 역내에서 이라크를 가장 큰 적으로 보고, 1981년 6월 7일 이라크 원자로를 파괴하였다.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은 “이스라엘이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큰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란 이슬람공화국에 무기를 판매했고, 무기판매는 미국 관리들과 철저히 논의되었다”라고 미국에서 연설 중에 밝혔다. 1982년 10월, 당시 주미 이스라엘 대사였던 모세 아렌스는 “이스라엘이 이란에 무기를 수송하는 것은 미국 정부의 최고위층과 조율하여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도 이라크가 이란을 지배하게 되면 역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화될 것을 우려하면서, 이스라엘의 대이란 정책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란 이슬람공화국 무기고는 샤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 통치 기간 획득한 미국제 무기와 영국제 무기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미국제 및 영국제 군사 장비를 필요로 했다. 1980년 10월 24일, 스콜피온 탱크 부품과 F-4 제트기용 타이어 250개가 이스라엘에서 이란으로 운송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스라엘 소유의 다른 군수품들이 유럽의 저장소에서 이란의 차바하르, 반다르 압바스, 부셰르 항구로 비밀리에 수송되고 있었다. 군수품에는 미국이 제작한 F-4 제트기, 헬리콥터, 미사일 시스템을 위한 예비 부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1981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 직후, 레이건 행정부는 이스라엘에게 이란 정부에 수십억 달러 상당의 미국제 무기, 예비 부품, 탄약을 팔도록 허락하였다. 1979년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납치된 미국인 인질들이 레이건 대통령 취임에 석방되고 난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무기가 이란으로 이송되었다. 1981년 7월 터키-소비에트 국경에서 이 무기들을 운반하던 3대의 항공기 중 1대가 추락하면서 이스라엘에서 이란으로의 비밀 무기 수송이 폭로되었다. 이스라엘 관리들에 따르면, 이 3대의 수송기는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식 날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의 인질들이 풀려난 직후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1981년 9월 16일 유엔 주재 이라크대표부 대표 사이브 바피가 유엔 총회에 보낸 공식 서한은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부와 이스라엘 사이의 무기 협력에 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서한은 이스라엘, 미국, 이란 이슬람 공화국 사이의 무기거래 협상 내용, 장소, 시기, 무기 종류 및 무기 운반 경로 등을 다음 기사들을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1980년 11월 2일 런던 주간 Observer, 1980년 11월 3일 서독의 Die Welt, 1980년 11월 5일 파리에서 발행된 정기 간행물 Al Watan Al Arabi, 1980년 11월 11일 프랑스의 V. C. D와 1980년 11월 14일 Jeune Afrique, 1981년 3월 31일 쿠웨이트 일간지 Al Siyassa, 1981년 7월 15일 미국 텔레비전 네트워크 ABC, I98I 7월 21일 이스라엘 일간지 Maariv, 1981년 7월 24일 아르헨티나 두 개 일간지 Cronica와 La Prensa, 1981년 7월 25일 런던 Sunday Times, 1981년 7월 27일 프랑스 신문 Le Figaro, 1981년 7월 27일 서독의 Der Spiegel, 1981년 7월 29일 스위스 Tribune of Lausanne 등이다.


 세계 각국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들로 볼 때 이란-이라크 전쟁 초기부터 이스라엘, 미국, 이란 이슬람공화국 사이의 무기거래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메이니가 통치하는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표방한 反시온주의・반미 정책이 대외적으로 이스라엘이나 미국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은 대내적으로 팔레비 왕정을 전복시킨 이슬람혁명을 합리화시키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있어 1978년-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협정으로 이집트 아랍공화국이라는 강력한 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외견상 새로운 적의 필요성으로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1년 현재까지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및 역내 분할통치 전략, 대체로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권위주의적인 정권과 이슬람 세력의 대결 구도라는 측면에서 활용도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정책은 아랍국가들이 후원하는 서안을 통치하는 자치 정부와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 대결 구도에서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호메이니 정권은 이스라엘로부터의 무기구입에 반대하고 이라크와 평화를 추구하는 초대 이란 이슬람공화국 대통령 아불 하산 바니 사드르(재임: 1980.02.04.–1981.06.22)를 축출하였다. 유엔 주재 이라크대표부 대표 사이브 바피가 유엔으로 보낸 서한은 1981년 8월 20일 미국 텔레비전 ABC가 방영한 바니 사드르의 인터뷰 내용을 포함한다. 이 인터뷰에서 바니 사드르는 “이상한 것은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구입한 것이다. 이스라엘로부터의 무기구입은 이슬람 성직자들이 권력에 대한 욕망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대통령이었을 때, 나는 이스라엘로부터의 무기 구입을 반대했다. 나는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면, 왜 이라크인들과 화해를 하지 않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이라크인들과 화해하는 것이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바니 사드르는 이스라엘과의 무기거래를 반대했으며, 각료회의에서 이란인들이 이라크와 화해하고 이스라엘과 무기거래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니 사드르는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세속주의자들이 통치하는 이라크와 평화를 성취한다면, 이란 집권 종교세력은 이란 군대가 종교지도자들에게 등을 돌려서 전복당할 수 있다고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라크와 평화를 성취해보려는 사드르 자신의 노력이 좌절되었다’고 역설했다.


 사실, 바니 사드르는 샤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과정에서 1963년 프랑스로 도피하여 호메이니가 이끌던 반정부 조직에 참가하였다. 1979년 2월 호메이니와 함께 귀국한 바니 사드르는 1980년 1월 25일 국민투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75.6%의 압도적인 득표(총 투표율67.42%)로 4년 임기 대통령에 당선되어 2월 4일에 취임하였다. 그는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으며, 성직자들이 직접 통치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이슬람공화국 헌법 하에서 호메이니는 대통령을 해임할 헌법상의 권한을 가진 이란 최고지도자로서 실권을 장악했으며, 세속주의와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새로 구성되는 의회를 장악하면서, 바니 사드르 대통령 축출에 나섰다.


 사실, 이란 혁명 기간 동안 세속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민전선당은 이슬람공화국이 군주제를 대체하는 것을 지지하였고, 혁명정부 초기에는 민족주의의 주요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1년 6월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의회는 대통령의 입법 저지권을 제한하는 법안과 보복법을 승인한 이후, 호메이니의 신정정치 세력과 국민전선당・바니 사드르 대통령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1981년 6월 11일, 호메이니는 자신이 바니 사드르 대통령에게 1980년 2월 19일 수여한 이란 군사령관 직위를 박탈하면서 바니 사드르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을 무력화시켰다.


 1981년 6월 15일, 바니 사드르 대통령과 국민전선당은 테헤란 시민들에게 호메이니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으며, 처음으로 호메이니에게 억압과 공포 정치에 책임이 있다고 호메이니를 직접 공격하였다. 이에 맞서 호메이니는 이 시위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시민들에게 국민전선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세속적인 바니 사드르 대통령에 대한 호메이니의 공격도 이 과정에서 나왔고, 호메이니는 바니 사드르 대통령이 TV와 라디오에서 국민전선당이 주도하는 시위를 지지한 것에 대하여 공개 사과해야한다고 선언하였다. 호메이니는 국민전선당을 규탄하고, 보복법 반대자들을 배교자라고 위협하였다.


 결국, 1981년 6월 21일, 이슬람 성직자가 다수를 차지한 이란의회는 바니 사드르 대통령에 대한 탄핵동의안을 채택하였고, 22일 호메이니는 이 탄핵동의안을 승인했다. 1981년 7월 28일 바니 사드르는 다시 프랑스로 망명하여, 호메이니 정권 전복을 호소하였다. 1981년 7월 국민전선당은 금지되었고, 공식적으로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란 내부에서 여전히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이 이란 이슬람혁명 이후 상황은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1952년 이집트 혁명에서는 세속적인 자유장교단과 무슬림형제단이 연합하여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축출하는 혁명을 성공 시킨 후, 세속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자유장교단 출신의 나세르가 정권을 장악하고 무슬림형제단 세력을 축출하면서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1979년 이란에서는 성직자들이 최종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혁명 동지들을 축출하면서 상징적으로 여성들에게 베일을 씌우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이란 이슬람 성직자들은 세속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반대파 국민전선당을 제거하고 이슬람 성직자들이 주도하는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슬람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1979년 혁명 동지였으며, 이스라엘과 무기거래를 반대하고 이라크와의 화해를 추구하던 바니 사드르 대통령을 제거하였다. 반면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표면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설정한 이스라엘과 실제로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함으로써 정권을 유지・강화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9년 2월, 이란 이슬람공화국 초대 대통령 바니 사드르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호메이니는 1979년 이란혁명의 원칙을 배반했고, 그와 함께 테헤란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매우 쓴 맛을 남겼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경제제재를 통해 이란을 굴복시키려는 노력은 기존 체제를 강화하면서 일반 이란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을 내버려 둔다면, 이란 체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바니 사드르의 주장을 뒷받침하듯, 2016년 이후 이란에서는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2019년 11월 15일 정부가 가스 가격 200% 인상 발표 이후, 마슈하드, 케르만, 쿠제스탄 등에서 반정부 시위가 발발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위대는 “성직자들은 왕과 같이 살고, 국민들은 더 가난해지고 있다”는 구호와 함께 성직자들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테헤란을 비롯한 100개 이상의 도시로 퍼져나갔다. 이 시위에 맞서 2019년 11월 17일,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대통령 재임;1981.10.09.-1989.08.16., 최고지도자 재임: 1989.06.04-현재)는 정부 관리들과의 회의에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위험에 처해 있다. 시위를 중단시키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라. 이것은 내 명령이다. 만약 시위를 즉시 중단시키지 못하면, 책임을 묻겠다.”고 명령을 내렸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하메네이는 시위대가 거리에서 자신의 포스터를 불태우고, 호메이니 동상을 파괴한 것에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단체 메흐르 센터(Middle East Human Rights Center, Mehr Center)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11월 15-17일에 3천명 이상의 시위대가 이슬람공화국 보안대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2만 여명이 체포되었다. 이는 1979년 이슬람공화국 수립 이후 가장 광범위하고, 격렬한 시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바니 사드르의 주장처럼 이란이 경제제재를 받지 않고, 개방되고 발전된 체제로 나아간다면, 성직자가 주도하는 보수적인 이슬람 정권은 유지되기 힘들어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 정권에게 개방과 경제 발전은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미국에는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체제를 가진 이란보다, 권위주의적이며 취약한 체제를 가진, 적대적인 이란 이슬람공화국이 중동의 한 축을 운영하는 형태로, 중동을 세속주의 세력과 이슬람 세력으로 분할 지배하는 것이 유리해 보인다.


□ 관계 정상화 가능성?
: 이란 핵 문제와 이란-이스라엘 관계 전망
 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이 이라크 원자로를 파괴한 직접 공격을 이란에 대해서도 되풀이할 수 있는가? 2021년 10월 18일, 이스라엘은 이란 핵 프로그램에 맞서는 군사 공격 가능성에 대비해서 15억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이스라엘이 1960년대 중반부터 중동 역내에서 군사적 우위 및 핵 독점을 누려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표면적으로 이란은 이스라엘의 역내 군사적 우위 및 핵 독점에 도전하며, 이스라엘의 역내 패권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기 보유 시도에 맞서 군사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위협하며, 이란에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반면 이란은 미국의 모든 불법적인 제재를 제거하기 위해 핵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이란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이란에 대한 모든 경제제재를 해제하기를 원한다. 사실, 2018년 5월 미국이 핵 협정에서 탈퇴한 이후. 이란 국민들은 지난 3년 동안 미국의 경제제재 강화와 Covid-19 대유행에 대한 정부의 대처 부족, 높은 청년 실업률 속에서 고통을 받아왔다. 게다가 기후 변화 및 무리한 댐 건설로 인하여 이란의 강 하류 지역은 심각한 물 부족에 직면하고 있다. 이란 기상청에 따르면, 2021년 현재 이란의 97% 지역이 가뭄을 겪고 있다. 2021년 7월에는 섭씨 50도에 달하는 쿠제스탄 주의 아랍계 농민들이 물 부족에 대하여 야간 시위를 벌였으며, 11월에도 이스파한 등지에서 식수 부족으로 인한 시위가 증가하고 있으며 다른 도시로 확산되고 있다. 이란 보안군은 실탄발사, 최류탄과 곤봉 등으로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제스탄 주 시위대 동영상에는 “시위는 평화적이다. 왜 총을 쏘느냐? 독재자에게 죽음을, 하메네이에게 죽음을” 등의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담겨있어, 이 시위대가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를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2020년 9월 이후, 이스라엘은 UAE, 바레인, 모로코, 수단 등과 국교 정상화 등으로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는 2002년 3월 당시 사우디 왕세자 압둘라가 베이루트에서 개최된 아랍연맹 정상회의에서 아랍평화안(Arab Peace initiative)을 제안했을 때 이미 예고된 바 있다. 아랍평화안은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및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종식에 대한 응답으로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이 관계 정상화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아랍평화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종식과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전제 조건으로 강조하였으나, 당시에도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아랍평화안의 실제 목표는 이스라엘-아랍국가 간의 관계 정상화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2020년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과 아브라함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종식 및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라는 표면적인 아랍대의 명분을 버리고, 실제 목표를 성취하였다.


 그런데 2003년 4월 말-5월 초에 이란도 2002년 아랍평화안을 수용하면서, 미국 국무부에 포괄적인 이란-미국 평화안을 제안했다. 로마 소재 Inter Press Service 보도에 따르면, 이란-미국 평화안은 존스 홉킨스 대학의 이란외교정책 전문가 트리타 파르시가 입수하여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이란-미국 평화안은 “이란이 2002년 아랍평화안을 수용하고, 1967년 국경 내에서 민간인들에 대한 폭력 행위를 중단하기 위하여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에 압력을 가하고,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중단하고, 헤즈볼라가 레바논 내에서 단순한 정치 조직이 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며, 평화적 핵 기술에 대한 완전한 접근을 조건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훨씬 더 엄격한 통제를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다. 트리타 파르시를 비롯한 이란 안보정책 분석가들에 따르면, 이란 국가안보 고위관리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수용하고 양보하는 대가로,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이란의 안보와 지정학적・정치적 이익을 증진시키는 내용으로 구성된 미국과의 협상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2003년 이란이 제시한 이란-미국 평화안에 대한 답변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볼 때, 이란도 역시 국익을 추구하고 국제 사회에서 활발하게 기능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이미 준비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10월 26일 이란 대통령 마흐무드 아흐마디 네자드는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이란 최고지도자이며 이란 외교정책의 궁극적인 책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이슬람공화국은 결코 어떤 나라도 위협한 적이 없으며,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아마디 네자드의 발언이 국제 사회에서 야기한 논란을 잠재우려고 시도하였다. 역사적으로 이란 이슬람공화국 초기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이란의 입장은 이란 내부 반대파들을 누르고 역내에서 편을 가르는 공격적이며 선동적인 발언과 이와 모순되는 국익을 추구하는 전략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이 뒤섞여 있다. 따라서 이란의 외교정책을 이야기할 때,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수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실제 정책이 은폐될 가능성이 있다.


사진 출처 - KBS


 2021년 1월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중단시킨 2015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합의한 159쪽으로 된 이란 핵 문제에 관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JCPOA)의 복구 및 재협상 여부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2015년 7월 20일, JCPOA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2231호에 의해 승인되었다. JCPOA는 2014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13차례에 걸쳐 미국과 이란 간의 협상을 통해서 마련된 이란 비핵화 방안을 유엔안전보장 이사회 상임 이사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와 독일(P5+1)이 수용한 결과다. 이란이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이 JCPOA의 핵 관련 조항을 준수하는지 여부를 협정에 명시된 특정 요건에 따라 검증한다. 또한 JCPOA는 2015년 10월 18일부터 2025년 10월 18일까지 10년 동안 실행되며, 동시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2231호는 종료된다.


 그런데 이란의 명백한 합의 준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2018년 5월 8일 일방적으로 JCPOA에서 탈퇴했고, 그 후 이 협정에 의해 해제된 이란에 대한 모든 제재를 다시 가했다. 2018년 5월 21일 트럼프 행정부의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는 이란에게 재협상 조건으로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핵 프로그램을 포기해야하고, 플루토늄 농축을 중단하고 재처리를 절대하지 말아야하며, IAEA에게 이란 전역에 대한 완전한 사찰을 허용하고, 탄도 미사일 규제,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예멘의 후티 민병대 등에 대한 지원 중단, 시리아 전역에서 이란의 통제하에 있는 모든 병력 철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등 테러리스트에 대한 지원 중단, 이스라엘 파괴 위협 및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로의 미사일 발사 등 위협 중단” 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재협상 조건은 이란이 JCPOA를 위반했다는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고, 핵문제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이란의 역내 패권과 관련 있는 문제들을 포함한다.


 이란과 나머지 국가들은 미국의 탈퇴에 반대했다. 2019년 5월 8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미국이 JCPOA 탈퇴를 발표한 지 1년이 된 날, 국영방송에 출연해 이란도 우라늄 농축과 중수 생산 제한 등 JCPOA 일부 조항의 이행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2021년 10월 14일, 이스라엘 신문 Haaretz에 따르면, 이스라엘 총리 베네트는 JCPOA 합의를 2015년 네타냐후가 주장한 것처럼 ‘역사적 실수’로 보지 않으며, 네타냐후 총리의 촉구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5월 8일 JCPOA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을 더 이상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베네트 총리는 2018년 미국이 JCPOA 탈퇴 이후 3년 동안 이란의 핵 능력이 대약진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핵협정이 이란이 핵보유국으로 가는 길을 막는 최선의 방책으로 보고 있다. 사실, 미국이 JCPOA를 탈퇴할 때까지 이란은 JCPOA를 준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021년 9월 27일, 유엔 총회연설에서 베네트는 “이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분수령을 맞이했고 우리의 관용도 마찬가지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임계점에 왔다. 우리는 이란의 핵무기 획득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란은 핵우산 하에서 이 지역을 지배하려고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란 핵 문제는 중동 역내 패권 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관점은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JCPOA를 탈퇴한 후에 내놓은 재협상 조건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따라서 이란 핵 문제는 타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2021년 11월 5일, 이란 국영 Press TV에 따르면, 이란 원자력기구 대변인 베흐루즈 카말반디는 이란이 20% 농축 우라늄 210kg 이상을 생산했고, 순도 60%로 농축된 우라늄 비축량이 25kg에 달했다고 밝혔다. 이란 에브라힘 라에시(대통령 재임: 2021.08.03-) 정부는 미국의 모든 불법적인 제재를 제거하기 위해 핵 협상을 재개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이란은 핵 협상이 원활하게 타결되기를 원하지만, 열쇠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란 이슬람공화국 초대 대통령 바니 사드르가 주장한 것처럼, 미국과 이스라엘 및 국제 사회의 이란에 대한 제재가 일반 주민들에게는 경제적인 고통을 주지만, 이란의 이슬람 정권에게 직접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2020년 5월 18일 이란의회가 통과시킨 ‘이스라엘의 행위에 맞서기’ 법 제정 등은 반정부 시위 등에 맞서 주민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일반 주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대를 잠재우고, 주민들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유효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행위에 맞서기’ 법은 공식적, 비공식적 이스라엘 단체들과의 상업적·학술적·문화적 활동, 정치적 합의·협상·정보 교환 등을 금지하고 있다. 이 법은 이란의 모든 행정 기관은 평화와 안보를 해치는 시온주의 정권의 적대 행위 및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인들, 이슬람 국가들, 이란 이슬람공화국에 대항하는 범죄 등 시온주의자 정권의 적대 행위에 맞서기 위하여 지역적, 국제적 역량을 사용할 것을 규정한다.


 이렇게 이란과 이스라엘이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갈등은 유대인이냐 혹은 무슬림이냐 등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차이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며,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열정으로 강화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국가는 종교적・이데올로기적 수사를 정치적 타협을 가로막고, 적대관계를 연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결국,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이스라엘은 각각 종교적・이데올로기적인 정치적 수사를 통해서 반대파를 제압하고, 동맹 세력들을 결집하고 지원함으로써 역내 정치에서 분할 지배를 위한 비가시적인 사실상의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이란은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세력들, 즉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를 지원함으로써, PLO로의 팔레스타인 민족통합을 저지하고, 결국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분할통치 지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反시온주의 수사를 활용하여 유대인들이 탄압받아왔으며, 강제로 추방되었다는 수사를 개발하고 활용함으로써, 유대인을 위한 이스라엘국가 존재와 이스라엘국가 방위를 위한 무장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 유대인,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략적 관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