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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호] 통일이 되면…,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잠시지만 행복했습니다.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18 15:21
조회
406

 여준민/ 인권연대 회원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는 것이 ‘인권’


 몇 해 전 장기수 선생님들을 처음 뵀을 때,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의 신기함은 내가 살아온 나날보다 많은 그 3~40여 년간의 긴 세월 동안, 어떻게 폭력과 감시가 일상화된 좁디좁은 감옥에서 ‘살아남기’가 가능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신기함은 ‘인간의 품위’였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지켜내는 것이 ‘인권’이라면, 철저히 인권이 유린되는 감옥 안에서 한 평생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저리도 품위 있고 당당한 기운을 잃지 않고 꼿꼿한 자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하는 점 말이다.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가진 사상의 신념 하나로 버티어온 장기수 선생님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인권’연대가 가장 자랑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회원이 바로 이 분 아닌가 싶다.



선생이 감옥에 간 까닭은?


양희철 선생(7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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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출소하기까지 37년을 감옥에 있었던 비전향 장기수 선생이라는 것, 낙성대 근처 <양지 탕제원>을 운영하신다는 것, 나이 차 때문에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결혼을 하시고, 4살 난 딸아이가 있다는 것. 실은 고백컨대, 이것이 선생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인터뷰 후 선생이 감옥에서 주고받았던 지인들과의 편지와 자작시를 중심으로 구성한 저서 <자유의 시, 저항의 노래/ 두리미디어>를 보니, 그가 감옥에 간 이유가 상세히 적혀있었다. 이미 알만한 분들은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실천적 통일운동의 의지를 되새겨 보기 위해서라도 간략한 소개가 의미 있을 것 같다.

선생은 20대 혈기왕성한 청년시절 남북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야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해 형과 함께 월북을 단행했다. 안정을 찾아가는 북에서 체코로의 유학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이남의 5·16 군사쿠데타의 소식을 접하고는 다시 3개월 만에 내려왔다. 월북 당시 고려대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서울지역의 대학생들과 함께 ‘평화통일’에 대한 여론을 확산시키는 활동에 열중했다. 하지만 삼엄한 군사독재정권 시절,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살아야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때라, 그는 곧 간첩 혐의로 구속,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27세…. 다시 사회에 나왔을 때는 65세였다.



5번째에 허가받은 금강산 방문


 푹푹 찌는 날씨 탓에 헥헥 숨을 고르며 땀을 닦다가 “휴가는 다녀오셨어요?”라고 가볍게 던진 질문에, 선생은 ‘올커니!’ 기다리셨다는 듯이 유쾌한 답변을 쏟아내신다.


 “아, 글쎄 5번 신청 끝에 지난 7월에 처음으로 금강산에 다녀왔어요.” 보안관찰 처분 대상이라 처음 두 번은 담당 검사가, 이후 두 번은 국정원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는 바람에 겨우 다녀오셨다고 한다. 금강산에서 찍은 사진을 내보이시며 자랑하시는 모습을 함께 기뻐해야 했지만, 기쁨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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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은 ‘금강산’이란 자작시를 꺼내놓으시더니, 직접 낭송까지 해주셨다.

 “내가 읽어야지, 다른 사람이 읽으면 재미없어.”하시며. 그러나 첫 소절부터 아팠다. “나는 죄인입니다. 만인 앞에 조국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그리도 그리워하던 또 하나의 조국 땅에 드디어 한 발을 내딛으셨건만, 선생의 시에는 감격보다 회한과 성찰이 묻어 있었다.

 선생은 그곳에서 무릎 꿇고 흙을 부여잡고 한없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살포시 안기고 왔습니다. 청수(淸水), 배불리 먹고 왔습니다. 흙냄새는 말할 것도 없고 흙의 맛까지 보고 왔습니다. 통일이 되면…,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잠시지만 행복했습니다.”

말씀을 잇는 그 순간에도 선생의 눈에는 한 깊은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고독한 혁명가


 “요즘 근황이요? 참 편해요,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인데…, 심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죠.”


 장기수 선생님들이 북으로 송환되신 후 ‘남아 계신 어르신들의 외로움이 크겠구나’ 싶어 여쭈었지만, 반면 4살 난 딸아이 지담이를 통해 또 다른 삶의 의미를 확인하고 계시단다.


 “말을 너무 잘해. 약국(사모님이 운영하시는 양지약국)에 간다고 하기에, 왜? 라고 물었더니, 엄마 보고 싶으니까 가야지, 하면서 아까 갔어.” 선생 스스로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조선의 딸로서 다른 사람 밑에 임하며 뜻을 펼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지담이 이야기라면 그저 좋으신가보다. 선생의 얼굴에 기쁨이 한 가득이다. 선생은 또 다른 이산가족을 만들 수 없어 송환을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선생은 스스로를 ‘은자(隱者)’라 표현하며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의 외로움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나는 숨어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린 마시는 공기가 달라. 표현되지 않고 나타나지 않아도 은둔자적인 불안감이 있어요. 마치 살아있다는 걸 증명이나 하듯.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난 혼자라고 생각해요. 그걸 고독이라고 하지. 사람은 일정한 사회와 국가 속에서 자신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라야 살아있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난 참여가 아니라 격리 당하고 있거든. 뜻이 있다하더라도 배제당하고 있으니까.”


 ‘혁명은 왜 고독한가~’란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계속되는 저항을 요구하는 분단의 현실


 선생은 감옥이 바깥 사회보다 생존경쟁이 훨씬 혹독한 곳이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예를 지키는 것’이라 여기며 살아오셨다. 자칫 폭력에 굴해 ‘불의에 영합하고 타협할까봐’ 그것이 가장 두려우셨기 때문에, 몸 하나 제대로 지켜내는 것이 ‘저항’ 그 자체였다고도 하신다.


감히 상상으로도 근접할 수 없는 긴 영어(囹圄)의 시간 동안의 ‘소리 없는 저항’. 하지만 허리 잘린 분단 조국의 현실은 선생과 우리 모두에게 ‘계속되는 저항’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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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기나긴 감옥생활에서처럼 여전히 갖가지 채소를 가꾸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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