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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사회로의 전환(정한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5-14 12:07
조회
234

정한별 / 사회복지사


 오는 6월부터 장애의 정도가 극히 심한 발달장애인에게 일상생활 훈련, 취미활동, 긴급돌봄, 자립생활 등을 전문적·통합적으로 지원하는 통합돌봄서비스가 시작된다. 정부의 아이돌봄사업 예산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노인장기요양보험·노인맞춤돌봄 서비스 예산 역시 점점 증가하고 있다. 바야흐로 돌봄의 시대이다.



  “대체로 무엇이 엄청나게 강조된다는 것은 그것이 엄청나게 위협받고 무시당해왔다는 반증일 때가 많다”*



스웨덴과 한국의 차이: 사회적 인식


  제도는 점점 발전하고 있는데, 돌봄 현실은 녹록지 않다고 느껴지는 일은 왜일까.스웨덴의 아동보육 제도는 단순히 공공보육의 확대가 아닌, 아동이 적절하고 건강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즉, 정책의 핵심이 시설, 기반의 확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돌봄을 통한 아동의 건강한 성장, 가족의 건강한 유지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이런 방향성에 기초해, 보통의 주 양육자인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최대한 잘 돌볼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한다. 자녀를 돌볼 수 있는 육아휴직을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어린이집과 시간제 근무를 부모 모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돌봄은 엄마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같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 아이가 건강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자리 잡혀 있다.


  반면에 한국의 아동보육 제도는 부모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데, 보다 신경을 쓴다. 부모를 대신하는 다양한 보육 제도를 늘리고, 보육기관에서 보육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을 늘리고, 보육 비용을 지원하는 식인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육아휴직, 탄력근로 모두 제도로서 규정되어 있다. 다만, 제도가 있는 것과 제도를 쓸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최근 한 언론에는 직장인 대다수가 10년도 넘은 가족돌봄휴가 제도를 쓰는 일이 어렵다는 기사가 실렸다.**  돌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구성원들의 인식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이는 단순히 복지(제도)의 확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클레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수용소)의 이야기를 전한다. 소설의 주인공 펄롱은 석탄, 목재상이다. 윌슨이라는 미망인이 미혼모인 펄롱의 어머니와 펄롱을 진심으로 돌본 덕에 펄롱은 딸 다섯과 아내와 함께 나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자라났다. 펄롱은 딸들을 도시의 유명한 여학교에 보내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며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느날 우연히, 펄롱은 석탄 배달을 간 수녀원에서 헐벗은 채 청소를 하는 소녀들을 보게 된다. 당시, 수녀원은 어린 미혼모 등을 세탁소에서 일을 시키고 그의 아기들은 해외에 판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곳이 었다. 펄롱은 세탁소에서 목격한 일들로 내적 갈등을 겪지만, 펄롱의 주변 사람들, 심지어 아내마저도 ‘다들 그렇게 모른 채 하고 살아간다. 우리랑은 아무런 상관 없는 일 아니냐’ 며 펄롱에게 세탁소에 대한 관심을 끊으라고 책망한다. 하지만, 펄롱은 윌슨부인이 아무런 관련도 없던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을 돌봐 줬던 것처럼, 수녀원 석탄 광에 갇힌 소녀를 돕게 된다.


  펄롱은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 자신과는 상관 없다며 침묵으로 동조하던 일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그 사소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결코 사회가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엘리너 루즈벨트의 세계인권선언 10주년 연설문과도 맥이 닿아 있다.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인권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 입니다.” 돌봄은 때론 사소하다고 치부된다. 이에, 돌봄노동의 의미는 격하되고 돌봄을 제공하는 자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자의 존엄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전복적 사고: 취약성 인식과 돌봄사회로의 전환


  김영옥·류은숙은 인간의 취약성이 존재론적, 보편적 특성이라고 설명한다. 인간 존재 자체가 취약하고, 모든 인간은 취약한 존재로 태어나 취약한 존재로 사멸한다는 공통점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돌봄에 대한 논의, 돌봄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부모가 되었든 부모가 아닌 타인이 되었든 누군가에 대한 의존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게 된 인간이, 제 스스로 자라나 제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은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있으며, 자신 스스로가 생각의 주체로서 삶을 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사유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생각, 돌봄은 가족이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 타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생각, 생산노동 중심의 사회에서 돌봄노동(재생산노동)은 가치가 낮다는 생각, 돌봄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생각. 이 모든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했던 생각들이 사실은 사유와 공부의 끝에 갖게 된 생각이 아니라, 무비판적·무지성적 수용으로 습득하게 된 것은 아닐까.


  뇌리에 박혀 태도가 되어버린 생각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의 부재와 인권의 상실로 가득 찬 소멸사회를 돌봄사회로 바꾸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인권에는 유보가 없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하는 것이다.”****





      *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중에서
    **한국일보, “아픈부모·아이는 어쩌나...가족돌봄휴가, 직장인 60%엔 그림의 떡” (2024. 5. 12.)
  ***김영옥·류은숙, 「돌봄과 인권」 참고
****홍세화, 「미안함에 대하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