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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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얼마 전 큰 물이 들 때 저기 한려수도 한 귀퉁이 경남 사천으로 인권교육을 가야 했다. 학교와 교장들이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하는 대면교육으로 몇 달 전부터 그곳 특수교육지원센터가 무척 많이 애쓴, 지역의 통합 교육을 위해 중요한 행사였다. 바로 앞까지 어떻게 갈지 나는 결정하지 못했다. 혼자 운전하면 왕복 12시간이었다. 자칫 가는 길에 수해라도 나면 제때 도착할지 기약할 수 없었다. 일정을 맞추더라도 정작 강의할 체력이 남아 있을지, 무사히 다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어 고속 버스도 위험했다. 기차는 없었다. 다행인지 사천 공항은 가까웠다. 김포 공항에서 뜨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진에어 항공사라는데 그곳까지 장애인 승객이 어떻게 이용했는지 경험과 정보가 없다. 더구나 대한항공의 자회사 임에도 진에어는 과거에 나와 같은 목발을 사용하는 장애인 승객을 차별하여 간부임원이 직접 당사자의 집에까지 찾아가 사한 사례도 있었다. 김포공항에도 억수와 같은 비가 쏟아지니, 목발로 가면서 애써 입은 양복과 셔츠를 어떻게 뽀송하게 지킬지도 알 수 없다. 일단 휠체어 서비스를 요청하고 비행기 출발 시간 오후 4시 20분 보다 3시간 먼저 김포공항 진에어 데스크 앞에 도착해야 한다. 비장애인 손님은 한시간이면 넘쳐나게 충분한 시간인데 나 혼자 가려면 남들보다 3시간의 시간을 더 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어떤 웃지못할 차별과 사건들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3시간 전에 가려면 항공사 접수처에 도착하려면 그 1시간 전까지는 박터지는 김포공항 1주차장 장애인주차구역에 도착 해야 한다. 자칫하면 주차하는데만 2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폼나는 노트북은 언감생심이다. 2kg도 넘지 않는 노트북 가방도 두 손을 모두 목발질에 써야 하는 나로서는 20kg 캐리어 보다 더 무겁고 번거롭다. 또한 공항의 휠체어 서비스는 주차구역에서는 불가하기 때문에 비상 체력은 남겨둬야 한다. 시설에 살지 않고 혼자서 직업 활동을 하는 뇌병변장애인의 삶은 늘 시간과의 양자적 전쟁이다. 그래서 동트기도 전인 새벽 4시에 잠을 깼다. 이제 샤워하고 옷을 챙겨 입고 짐을 챙겨 두어야 한다. 내 장애가 만드는 경직은 내 시간에게 작용하는 중력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내 작업은 남들보다 2~3배는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비행기 뜨는 5시간 전까지 깨어 있을까 하다가 비행기에 오를 때 이동 계단에 구르는 아찔한 일은 벌어지면 안되기에 내 순발력을 위해서 잠시 눈을 붙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일어나다 침대에서 떨어지면 아니된다. 잠시 고민했다. 내가 국가 급여를 거부하고 개인적으로 찾아서 고용한 시급 2만원 + 특별 수당을 주기로 한 대학생 활동지원사를 호출할지. 옷을 다 갖춰입고 출발 준비를 하더라도 정장에 맞는 양말을 신으려면 현관문 신발장 앞에서 10분 넘게 걸릴 지도 모른다. 주차지역에서 공항 지붕이 있는 횡단보도 30미터를 가는 동안 이 양복도 홀딱 젖어 버릴지 모른다. 나같이 양쪽 어깨 목발로 넓게 휘저으며 오랫동안 보행한 뇌병변장애인에게 비가 오는데 무작정 긴 장대우산을 내미는 사람들, 무게를 덜기위해 엉덩이허리가방만 메고 공항 주차장 횡단보도 잎에서 신호기다리는데 저 멀리서 빈카트 이용하라면서 내 앞으로 가져오는 사람들의 당황스러운 마음들은 어찌 멋지고 매너있게 거절할 것인가? 최근에 서울시가 장애인의 탈시설지원조례를 폐지하고 공공돌봄을 책임지던 서울사회서비스원도 문을 닫겠다 했다. 그러면서 오세훈 시장은 점진적으로 장애인 활동지원 중개기관은 활동지원서비스 이용자 주말 서비스 이용을 하지 못하도록 할 방침을 공지 내렸다. 내가 국가의 장애인 활동지원 급여를 거부한 가장 큰 이유는 장애인의 인권과 생존을 정치인 입맛에  따라, 전문가의 탁상 공론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줬다 뺏는 그 폭력성 때문이었다. 장애인의 손발과 지역사회활동을 사회적으로 구체적으로 책임져서 비장애인과 동등한 시민권과 사회권을 보장하겠다고 해놓고서, 주말에는 먹지도 씻지도 돌아다니지도 말라는 뜻인가? 이제 중증 장애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이 받아 주는 시설로 강제 이주라도 하라는 말인가? 서울시에 따로 장애인 보호구역이라도 만들려는 것인가? 내가 1박 2일 강의를 하면서 버는 돈은 고작 버는 돈은 70만원이 채 안된다. 그러나 그 70만원을 벌기 위해 내가 지역 사회와 국가를 향해 쓰는 돈은 숙박비, 교통비 30만원에 개인 활동지원사 인건비 16시간 32만원에 숙박 수당, 야간 특별 수당까지 붙이면 40~50만원이 넘어갈 것이다.  즉 통화 회전율에 따른 경제 효과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내 적자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아무리 장애인 시설 앞에 안전을 내세워도 그건 시설 관리자에 따른 구속 영장도 없는 감금이며 아무리 장애인 시설 앞에 인권을 붙여도 시설 설립자와 운영자들은 장애인과 함께 시설에 들어와서 살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장애인들을 이윤으로 보지 않는다 말해도 장애인 거주자에게 시설 재산권에 대한 지분이나 결정권을 내어주지 않는다. 장애인들은 서울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시민, 특히 원주민이 될 수 없다.
2024-07-12 | hrights | 조회: 68 | 추천: 0
정한별 / 사회복지사  2020년 2월 19일, 청도대남병원 정신과 폐쇄병동에서 코로나19 국내 첫 사망자가 나왔다. 그 후 입원환자 103명 중 101명이 감염자로 확진되었고, 첫 확진 이후 엿새 만에 7명이 사망했다. 첫 사망자의 몸무게는 고작 42kg 밖에 되지 않았다. 4년 전,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었고, 아무나 잘 지키고 있었던 사회적 거리두기는 정신병원, 장애인거주시설, 노인요양시설에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2022년 8월, 전국에는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특히 서울은 관측 역사상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기록적인 폭우는 사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지 않았다. 2022년 8월 9일 밤,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집에서 일가족 3명이 사망했다. 40대 여성과 그 여동생, 그리고 여동생의 딸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 여동생은 사고 전날 집으로 빗물이 들어오자, 지인에게 침수 신고를 해 달라고 했고, 지인의 신고로 배수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가족은 아무도 돌아올 수 없었다. 여동생의 언니는 발달장애가 있었다. 사진: 이모작뉴스  전염병 상황 하에도, 수해에도, 화재에도,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대개 돈이 많고, 전문직에 종사하며,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뉴스를 본 일이 없다. 정신장애가 있는 가난한 사람, 반지하에 사는 발달장애인, 열악한 환경에서 불안정한 일자리를 구할 수 밖에 없는 이주노동자까지. 사회가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대개는 사회에서 쉽게 배제되다가 이런 뉴스가 있을 때나 비로소 대중에게 드러나게 된다.  2024년 6월 24일, 경기 화성시의 한 리튬배터리 공장의 화재로 23명이 사망했다. 한국의 배터리 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피해자의 대다수는 이주노동자였다. 언론의 발표에 따르면 부상자는 8명, 사망자는 중국인 17명, 한국인 5명, 라오스인 1명 등이었다. 이주노동자 100만명 시대, 국내 체류 외국인은 200만명이 넘는 시대라고 하지만, 국내공장에서 발생한 화재 피해자의 대다수가 이주노동자라는 사실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진: BBC  문득,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중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안산과 화성을 다녔던 2019년이 떠올랐다.  장애가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모으는 일을 했다.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 중 장애가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외국인으로서 겪는 차별과 장애인으로서 겪는 차별을 함께 경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질문을 했고 다양한 답변을 들었다. 그 중 아직도 기억나는 답변이 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 노동자로 한국에 입국하는 일은 어렵다. 일을 하다가 산업재해를 당하고 장애를 갖게 되었다면 한국에서 일을 할 수가 없다.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한국을 떠나게 된다. 한국에서 장애를 갖게 되면 두 가지 방법으로 한국을 떠나게 된다. 첫 번째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돼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 두 번째는 자신 스스로 죽어서 떠나는 일.  장애 때문에 차별을 겪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먼저 외국인이어서 차별을 겪는 일이 많다. 아, 외국인도 백인은 다르다. 그런데, 장애를 갖게 되면 한국에서 살 수조차 없으니, 그런 의미에서 차별을 겪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나.  출입국관리법 제11조는 입국의 금지와 관련된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제1항 제5호에는 “사리분별력이 없고 국내에서 체류활동을 보조할 사람이 없는 정신장애인, 국내체류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없는 사람, 그 밖에 구호(救護)가 필요한 사람”은 입국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물론 해당 규정이 모든 장애인의 입국을 금지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완전성을 갖주치 않은 몸들에게 한국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한국에 들어온 뒤에, 일을 하다가 장애를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장애인등록이 가능할까? 사실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등록을 한 외국인은 소위 선택받은 자들이다. 외국인의 장애인등록은 장애인복지법 제32조의2에 따라, 재외동포(F-4), 영주권(F-5), 결혼이민자(F-6), 난민(F-2-4)비자를 가진 자만 제한적으로 가능하다. 장애인복지법 제32조의2(재외동포 및 외국인의 장애인 등록) ① 재외동포 및 외국인 중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은 제32조에 따라 장애인 등록을 할 수 있다.   1.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 제6조에 따라 국내거소신고를 한 사람   2. 「주민등록법」 제6조에 따라 재외국민으로 주민등록을 한 사람   3. 「출입국관리법」 제31조에 따라 외국인등록을 한 사람으로서 같은 법 제10조제1항에 따른 체류자격 중 대한민국에 영주할 수 있는 체류자격을 가진 사람   4. 「재한외국인 처우 기본법」 제2조제3호에 따른 결혼이민자   5. 「난민법」 제2조제2호에 따른 난민인정자  장애인등록이 되면, 외국인이 내국인에 비해 차별없이 장애인복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을까? 그렇지도 않다. 한국의 장애인복지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장애인 등록을 전제로 해서 제공되고 있다. 이에 장애인 등록 후, 장애의 특성과 정도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중증의 발달장애인에게는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지급되는 장애연금과 발달장애를 이유로 제공되는 발달장애 관련 서비스들이 제공되는 것이다.  중증의 장애를 갖고 있는 외국인이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장애인 등록을 한다면, 장애연금과 활동지원서비스 등 장애의 특성과 정도를 고려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유는 바로, 장애인복지법 제32조의2 제2항에 있다.  “장애인복지법 제32조의2 ②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제1항에 따라 등록한 장애인에 대하여는 예산 등을 고려하여 장애인복지사업의 지원을 제한할 수 있다.”  악은 디테일에 있다고 했나, 국가는 이렇게 세심하고 꼼꼼하게 외국인의 국적과 장애를 이유로 이중차별을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2024년 장애인복지사업안내 제2권에 따르면, 장애인복지서비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장애인연금(중증장애인에게 지급), 장애수당(경증장애인에게 지급), 장애아동수당, 활동지원서비스, 발달재활서비스 등은 난민인정자 등에 한해서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장애인 자동차 표지 발급”처럼 등록 장애외국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가 있기는 하다.  이에,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 제2·3차 병합 국가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2022)”를 통해, 한국의 장애외국인에 대한 차별에 우려를 표명하며, 국적과 체류자격에 상관없이 필요에 따라 서비스를 보장할 것을 권고하였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자국 장애인에 대한 지원에도 따가운 눈총과 혐오발언을 쏟아내는 사회에서 국내에 체류하는 장애가 있는 외국인까지 고려하는 일은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니냐는 인식도 있다. 여성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자고 주장할 때도,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도, 다수의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비난하곤 했다. 사회변화의 출발은 다수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할 때, 정말 아닌게 맞나 하고 의문을 던지는 소수의 웅성거림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권리 보장은 국적을 불문하고 보편적인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2024-07-03 | hrights | 조회: 89 | 추천: 4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8개월 동안 지속되고 있다. 계절은 가을을 지나 겨울과 봄을 거쳐, 한국도 팔레스타인도 무척이나 더운 여름이 됐다. 37번째의 주말을 지났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서의 전쟁범죄는 멈추질 않고 있고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초창기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언론을 뒤덮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련 뉴스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고 사람들의 관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나블루스 라는 도시에서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 프로젝트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필자는 당일의 현지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날은 현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수십 년간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철옹성과 같은 이스라엘의 장벽이 무너지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강탈당한 빼앗긴 자신들의 땅에 조금이나마 도달한 순간이었기에 그들은 기뻐했고 환호했다. 하지만 전 세계의 시선은 당일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폭력성에 사로잡혔다. 언론과 권력에 의해 반복적으로 노출된 이스라엘의 피해는 참혹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 2023년 10월 10일 (사진: 알 자지라) 이스라엘은 곧바로 하마스 박멸을 선언하며 인구 230만명의 전세계적인 인구밀집지역에 수백, 수천 톤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초창기 3달 동안에 쏟아 부은 폭탄의 양은 핵폭탄 2개 수준이라고 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의 사망보다는 아이와 여성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병원과 구급차가 공격당하고 학교와 종교시설, 난민보호시설이 파괴됐다. 전쟁을 보도하는 기자는 취재 중 자신 가족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보도해야 했다. 10월 7일이후 짧은 6일간의 휴전기간을 빼고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늘어갔다. 사망자와 부상자, 실종자를 합친 숫자는 십만명을 훌쩍 넘어섰고 이제는 구호물품을 받으러 오는 이들까지 공격하고 있다. 계속되는 민간인 학살에 전세계의 비판이 높아지고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도 휴전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오늘도 이스라엘의 폭격과 군사 공격은 멈추질 않는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격퇴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지만 소수의 지도부를 제외하고는 하마스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듯하다. 이스라엘 주장에 따르면 전체 사망자 중 1만 5천명이 하마스라고 하는데, 이들이 하마스 전투원인지 민간인 인지 구분하는 최소한의 정보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전쟁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지켜야 할 규칙이 있고 의무가 있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지키지 않고 있다. 유엔도 미국도 그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와 학살을 막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박멸을 목표로 하지만 하마스와 너무도 무관한 이들이 계속 살해되고 있고,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최악의 현실은 나날이 갱신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전쟁의 참상을 치유하고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유엔이라는 기구를 창설하고 각종 국제조약과 법령을 만들었다. 특히 제노사이드 협약은 나치의 유대인학살을 반복시키지 않기 위해 만들어 졌지만 그 제노사이드 협약으로 이스라엘은 제소되었고 가해자임을 판정 받았다. 세계대전을 막지 못해 큰 참화를 겪었던 인류는 이스라엘의 지독한 점령을 70년 이상 견디며 지내는 이들의 처절한 현실을 어찌 바라봐야 할까? 우리 일이 아니라고 무심한 듯 지나쳤던 시간들이 쌓여 누군가에게 이토록 절망적인 현실을 발생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2024-06-27 | hrights | 조회: 83 | 추천: 3
신종환 / 공무원 시청 주변에는 내가 자주 보는 동물 친구들이 몇 있다. 시청 직원 주차장 뒤쪽에는 해조류 도매업을 하는 노부부의 창고 겸 작업장이 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창고 앞에는 2m 조금 안되는 줄에 고양이가 묶여 있었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아 슬쩍 물어보니 갑자기 죽었다고 했다. 나처럼 오가며 고양이를 이뻐하던 집배원 아저씨는 아마 안 묶인 채 살다가 어느날부터 묶여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죽었을 거라고 했다. 또 어느 날인가부터는 내 손바닥만한 바둑이 새끼 고양이가 창고 앞에 나타났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창고 쥐 잡는 용으로 얻어왔다고 했는데 누가 봐도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왜 병원에 안데려가나 욕하면서도 그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아 허락을 구하고 병원에 데려가 주사를 맞히고 약을 타서 하루에 세 번 귀에 발라주고 안약은 하루에 두 번 넣어주라고 했다. 틈틈이 가보니 점점 건강해지는 것 같았던 고양이는 다음 예방접종을 맞히기로 한 전날 내 앞에서 차에 깔려 죽고 주인 아저씨와 삽으로 시청 주차장 앞에 고양이 간식과 묻어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노랑 고양이가 다시 생겼고 나는 무심코 아주머니한테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했다. 정도 붙이기 전 고양이는 얼마 되지 않아 비오는 날 창고 문앞에서 죽어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이제 저집이랑은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하던 어느날 또 고양이가 나타났다. 또또 속으로 온갖 욕을 했지만 이번 친구는 제법 오래 살았고 정신 차리고 보니 트럭에 꼬리가 찝힌 친구를 내가 병원에 데려가고 수술 시키고 있었다. 미역집 아줌마는 지금도 이름없이 야옹이라고 얘를 부르고 나는 병원 데려가던 날부터 얘 이름을 맘속으로 또또라고 지었고 또또는 아직 잘 지낸다. 시청 뒤편 인근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골목에는 1m 안되는 줄에 매인 콜리 믹스로 보이는 강아지가 있었다. 똘똘이 자유롭지 못한 개 특유의 발랄함에 마음이 안좋아서 출퇴근 때마다 간식을 주고는 했는데 어느날 마주친 주인이 얘 이름은 똘똘이라며 마음에 들면 데려가 키우라고 했다. 아저씨의 태도에 속으로 ‘음 주인이 시발놈이군.’ 하고 좀더 자주 가서 놀아주던 어느날인가 똘똘이는 혈뇨를 보더니 배가 부풀어 올랐다. 딴에는 챙겨준다는 생각인지 집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사료 대신 잔반을 주길래 그러지 말라고 하고는 내가 곧 병원에 데려간다고 했다. 다음 날 똘똘이는 보이지 않았고 짐작대로 죽었다. 그러고 일주일 즈음 뒤에 누가 봐도 믹스인 강아지가 똘똘이 주인 아저씨 옆에서 발랑 거리고 있길래 나도 모르게 “개를 또 데려 오셨어요?” 라고 묻고 아저씨는 모르는 개인데 자기 따라온다고 데려고 키우라고 했다. 더운 날이고 열심히 내게 달려들어 냄새 맡고 핥아내는 친구에게 물이랑 먹을 거라도 주려고 잠시 차로 간 사이 이친구는 없어졌다. 한시간 내내 보이는 사람마다 물어보니 여길 갔다 저길 갔다 제보가 있어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나는 혹시 주인이 있을까봐 올릴 수 있는 곳에 전부 그 친구의 사진과 발견장소 등을 적었지만 연락은 오지 않고 그 날 저녁 속초시 동물보호소 사이트에서 그 친구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마주친 시간은 아주 잠시였지만 마음이 무거워 저녁도 넘어가지 않아 이런 부분에는 마음이 너그러운 엄마를 부엌으로 불러 사진을 보여주며 입양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엄마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집에 어르신 견(각각 12세, 11세) 둘이 있어 안되는 걸 알지 않느냐고 했고 나도 알고는 있어서 조금 질질 짜고는 이내 포기했다. 지금도 다른 친구들의 사진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은데 그 아이의 사진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뭉개지는 느낌이 든다. 뭉개지는 마음을 느끼면서도 왜 이전에 떠난 친구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아마 난 그때 그 아이가 내게 전적으로 스스로를 기대고 있고 세상에서 그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걸 있어서였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아이는 몰랐지만 그 아이에겐 내가 전부였던 셈이다. 다른 친구들도 나에게 기댔지만 그때는 ‘내가 주인도 아닌데’라는 핑계로 도망갈 구석이 있었다. 돌돌이(유기동물 보호센터) 속초시 유기동물 센터는 안락사를 하지 않아 아마도 아직 거기 그대로 있을 그 친구를 생각하면 비슷한 처지에 있고 또 있을 것이고 있다가 죽었을 것들을 생각하다가 그런 친구들이 전국에 있고 또 전세계에 있을 것이고 그보다 못한 애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 줄을 이어 잠시 질식하는 느낌에 둘러쌓이다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그대로 산다. 하지만 마음에 흔적은 남고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결국 익히 듣게 되는 한국의 비극과 세상을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학생 시절 언론과 인터넷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른다. 북유럽 몇몇 국가에서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고양이를 기르게 했고 이후 수감자들의 폭력성과 스트레스가 유의미하게 감소했다는 내용. 사회인이 되기 전 나는 그런 글들을 읽으며 사랑은 각자의 삶에 의도치 않게 어떤 존재가 비집고 들어와 비중을 차지하고 그 존재에게 자기를 비추게 되면서 자연히 스스로와 타자를 연결지을 줄 알고 그 범위를 확장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 자체는 그래서 순간이 주는 강렬한 열감보다는 고통에 의미있는 이름을 붙일 줄 알게 되는 감각적인 자각이라고 생각했고 몇몇 의미있는 경험과 배움이 더해지면 그게 다른 존재들에게까지 확장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일부분은 맞아떨어져서 사람 말고 말 못하는 친구들에 대한 관심은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아졌고 처우도 나아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평등을 정당성의 근거삼아 스스로의 조롱을 자랑스럽게 전시하는 이들, 나아가 전장연의 시위에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초한 일이라는 사람들이 의견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도 뭉개지고 있을 사람들, 사람 아닌 것들을 생각하면 짙은 염세가 마음에 드리우고 세상은 결국 망할 것이고 그래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다가 로마노 과르디니가 그래서 본인의 책 ‘삶과 나이’에 올바른 성년은 의미를 무력화하는 붕괴 과정의 한가운데서 의미를 지탱하려고 노력한다고 썼구나 싶다. 피 없이는 현실이 움직이지 않고, 한편으로는 피로 인해 변한 곳에서는 사랑이 싹틀 여지가 마련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요원한 긍정적 내일에의 길에 사람들이 그래서 기꺼이 피나는 발로 발자국을 겹쳤으려니 해서, 같이 가지는 못해도 그 궤적의 의미를 생각하고 잊이 않아보려 한다.
2024-06-18 | hrights | 조회: 77 | 추천: 1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1. 아플 때의 풍경. 본인은 2년 전에 은평구로 전입신고한 장애인 중년 남성 1인 가구이다. 서대문구에서 20년을 넘게 살다가 은평구 노후 안착을 고민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의료접근성이었다. 연희동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 날 나는 대상포진을 발견했다. 그 이전부터 통증은 있었으나 뇌병변장애의 일상적인 경직이 주는 통증과 구별하기가 어려워서 발견이 늦었다. 얼른 병원을 가야했지만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피부과와 가정의학과, 내과 등은 모두 계단을 올라야 하고 혼자서 진료침대에 오르는 건 고역이며 무엇보다 진료를 받으러 간 내 질환보다 내 장애를 직관하고 더 당황스러워 하는 의료진 앞에서 내 장애로 불안해 하지 말라고 되레 내가 설득해야 하는 문제를 겪는다. 그래서 은평구로 이사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의료협동조합(살림병원)에 가입하여 조합원 인사를 하는 김에 '내 장애가 여기 있소' 미리 공개하고 장애인 주치의 제도를 신청한 것이다. 그러나 덜컥 갑자기 한밤중에 코로나 확진으로 열이 오르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밤중에 몸을 움직여 갈 수 있는 응급실이 있는지, 장애인 주치의는 이한밤 중에 요청할 수 있는지, 아니면 119를 불러야 하는지, 정작 심히 아프니 아무 생각도, 아무런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섣불리 움직였다가 낙상 사고가 나지 않을지 그게 더 두려웠다. 가까스로 병원을 가더라도 의료진들이 내 장애에 대해 익숙할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아플 때 심야에 활동지원을 요청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제도지만 일상같이 병원을 진료를 본다고 해도, 서울시 병원 안심 동행 서비스 이용은 가능한지도 알 수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안전을 안심할 수 없으니 결국 부정확한 자체 진단을 내리고 불안한 자가 치료를 할 수 밖에 없다. 2. 병원 갔을 때의 풍경. 그렇게 겨우 코로나로부터 회복하고 나니 이번에는 발들이 문제였다. 왼쪽 발목은 걷기가 힘들었고 오른쪽 발가락은 알 수 없는 통증이 심했다. 파스와 연고로 버티다 버티다 드디어 병원을 갔다. 인권적인 진료로 유명하고 기본적인 장애인편의시설은 잘 갖추었지만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 장애인주차구역은 딱 한 곳이라 서둘러야 한다. 간 김에 건강검진이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마침내 혼자 소변검사를 위한 샘플을 만들었다. 아무리 인권활동을 하더라도 진자처럼 목발을 휘저으며 온몸을 땅바닥으로 쏟아질 듯 병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늘 익숙하지 않은 긴장을 만든다. 보통 목발이 딱딱 들어서는 순간 병원 접수처는 일순간 침묵이 흐르고 오만가지 대답을 준비해야 하는 시선들이 내 몸에 꽂혀 든다. 난 휴지를 팔지 않고도, 보호자 없이도, 당신들의 특별한 도움이 없어도 의사 앞에서 꼬꾸라지지 않고 또박 또박 아픈 증상을 진술할 수 있음을 최선을 다해 증명해야 한다. 일상적인 아픔은 병원을 잘 가지 않는다. 코로나에 걸려도, 정기 건강검진을 받아야 함에도 병원을 잘 가지 않는 장애인들이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처음으로 코로나에 걸려서도 내원하지 않은 후유증으로 관절염과 욕창을 얻고 나서야 집 밖을 나서 동네 병원으로 향했다. 굳이 장애인 주치의 제도를 이용하지 않은 이유는 정확한 치료를 하려면 어치피 다시 병원을 가야할 번거로움이 있고, 장애인 주치의를 부른다고 바로 통증 완화과 질병을 위해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간을 조율해야 하며, 무엇보다 외부 사람을 위해 내 집안을 완전히 개방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필요할 때, 급할 때 가서 기다리더라도 30분 거리 안에 1차 진료를 마음 편히 받는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할 권리를 위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병원 문을 여는 것은 경직된 일이지만 장애인 주치의가 우리집을 방문한 지 1년만에 찾아간 병원에서 아무도 내가 접수처에 도착할 때까지 신경쓰지 않았고 웃음띤 수다를 멈추지 않으셨다. 이제 진료실까지 넘어지지 않고 의사 선생님과 눈인사를 하며 등받이 없는 진료 의자에 무사히 안착하는 것이 남았다. 작년 정기검진을 놓친 이후 몸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았다. 무리한 강의로 말미암아 발목 관절염과 코로나 후유증 면역 저하로 치유가 쉽지 않은 발가락 욕창을 진단하셨다. 그리고는 한마디에 덧붙이셨다. “휠체어는 아직 타기 싫으시죠?” 솔직히 당황스럽기 보다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보통의 의사들은 이제는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다소 단정적으로 진단 내리거나 내 장애로 인한 2차적인 질병을 잘 모를 때가 많다. 덧붙인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는 적어도 장애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공감이 묻어남을 신뢰할 수 있다. 사실 의사 선생님은 내 장애보다도 내가 진료가 용이하게 신고 간 벗기 쉬운 신발에 더 관심을 가지셨다. 더구나 머리조명까지 이마에 차고서 맨손으로 내 발가락을 꼼꼼히 소독하신다. 진료용 라텍스가 끼기가 귀찮아서일까? 아니면 감각에 민감한 내 장애의 경직을 이해하기 때문일까?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약국까지 가기 어려운 사정을 헤아려서인지 일주일 분의 소독재료까지 챙겨 주신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보았다. ‘건강검진도 미리 받을 수 있을까요’ 혼자 사는 장애인에게 정기검진은 위 대장 내시경을 제외하더라도 너무나도 큰 일이다. 그 중에서 자기 소변을 검사용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곤란할 것이다. 공식적인 활동지원사 옆이라도 민망하고 간호사 선생님이 직접 지원을 해도 부끄럽기 그지 없을 뿐 아니라 다들 혼자 뭐라도 하겠다 하면 그 불안 가득한 눈빛 때문에 더 긴장하여 검사를 위한 샘플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 동네 의료조합은 장애에 대하여 자연스럽고 화장실도 신식은 아니더라도 장애인 위한 필수적인 환경은 갖추었으니 드디어 자력으로 성공해 냈다. 혼자서 소변 샘플을 안전하게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많이 이동하며 검사하는 사람마다 내 장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무엇보다 안심이다. X-레이도 혼자 찍고 심지어 키를 재는 기계에도 스스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아쉬운 하나는 키를 잴 때 장애로 굽어진 무릎을 누군가 눈치껏 꾹 눌러 주었다면 내 키가 오센티는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장애인의 온당한 권리는 다른 것에 있지 않다. 다른 사람처럼 본인 동네에서 일상을 누리며 필요한 지원을 민망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것에서 받을 수 있음에 있다. 매년 오는 장애인의 날은 바로 당신 옆에서, 당신의 일터에서 이를 존중하고 고민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호들갑스러운 감동이나 위선이 아니라. 지역 사회 어디서나 어느 진료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장애인이든 우리 병원의 환자이며 내 환자이며 내 지역 주민이라서 정중히 거절할 수도 피할 수도 차별할 수도 없다는 의료인과 의료 기관의 책임의식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의료 종사자들의 의무적인 장애인 인권교육을 실증있게 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 책임 의식이 장애인에 대한 익숙함을 숙지하고 그 익숙함이 장애인에 대한 의료전문성을 높일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의료전문성이 높다는 것은 장애인을 존중하고 의료기관을 깊이 신뢰해서 어떤 물리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쉬이 병원을 올 수 있게 하여야 장애로 인한 차별과 2차 질환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물리적인 접근성이 떨어지더라도 당장 의사소통이 어렵더라도 지금 당장 장애인들이 병원 앞에 올 수 있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본 쪽글은 지난 5월 중순 은평구에서 열린  제2회 장애인 건강권 세미나 - 장애인의료접근성 향상을 위한 지역사회 변화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의 토론문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2024-05-28 | hrights | 조회: 145 | 추천: 2
정한별 / 사회복지사  오는 6월부터 장애의 정도가 극히 심한 발달장애인에게 일상생활 훈련, 취미활동, 긴급돌봄, 자립생활 등을 전문적·통합적으로 지원하는 통합돌봄서비스가 시작된다. 정부의 아이돌봄사업 예산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노인장기요양보험·노인맞춤돌봄 서비스 예산 역시 점점 증가하고 있다. 바야흐로 돌봄의 시대이다.   “대체로 무엇이 엄청나게 강조된다는 것은 그것이 엄청나게 위협받고 무시당해왔다는 반증일 때가 많다”* 스웨덴과 한국의 차이: 사회적 인식   제도는 점점 발전하고 있는데, 돌봄 현실은 녹록지 않다고 느껴지는 일은 왜일까.스웨덴의 아동보육 제도는 단순히 공공보육의 확대가 아닌, 아동이 적절하고 건강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즉, 정책의 핵심이 시설, 기반의 확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돌봄을 통한 아동의 건강한 성장, 가족의 건강한 유지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이런 방향성에 기초해, 보통의 주 양육자인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최대한 잘 돌볼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한다. 자녀를 돌볼 수 있는 육아휴직을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어린이집과 시간제 근무를 부모 모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돌봄은 엄마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같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 아이가 건강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자리 잡혀 있다.   반면에 한국의 아동보육 제도는 부모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데, 보다 신경을 쓴다. 부모를 대신하는 다양한 보육 제도를 늘리고, 보육기관에서 보육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을 늘리고, 보육 비용을 지원하는 식인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육아휴직, 탄력근로 모두 제도로서 규정되어 있다. 다만, 제도가 있는 것과 제도를 쓸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최근 한 언론에는 직장인 대다수가 10년도 넘은 가족돌봄휴가 제도를 쓰는 일이 어렵다는 기사가 실렸다.**  돌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구성원들의 인식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이는 단순히 복지(제도)의 확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클레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수용소)의 이야기를 전한다. 소설의 주인공 펄롱은 석탄, 목재상이다. 윌슨이라는 미망인이 미혼모인 펄롱의 어머니와 펄롱을 진심으로 돌본 덕에 펄롱은 딸 다섯과 아내와 함께 나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자라났다. 펄롱은 딸들을 도시의 유명한 여학교에 보내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며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느날 우연히, 펄롱은 석탄 배달을 간 수녀원에서 헐벗은 채 청소를 하는 소녀들을 보게 된다. 당시, 수녀원은 어린 미혼모 등을 세탁소에서 일을 시키고 그의 아기들은 해외에 판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곳이 었다. 펄롱은 세탁소에서 목격한 일들로 내적 갈등을 겪지만, 펄롱의 주변 사람들, 심지어 아내마저도 ‘다들 그렇게 모른 채 하고 살아간다. 우리랑은 아무런 상관 없는 일 아니냐’ 며 펄롱에게 세탁소에 대한 관심을 끊으라고 책망한다. 하지만, 펄롱은 윌슨부인이 아무런 관련도 없던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을 돌봐 줬던 것처럼, 수녀원 석탄 광에 갇힌 소녀를 돕게 된다.   펄롱은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 자신과는 상관 없다며 침묵으로 동조하던 일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그 사소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결코 사회가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엘리너 루즈벨트의 세계인권선언 10주년 연설문과도 맥이 닿아 있다.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인권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 입니다.” 돌봄은 때론 사소하다고 치부된다. 이에, 돌봄노동의 의미는 격하되고 돌봄을 제공하는 자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자의 존엄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전복적 사고: 취약성 인식과 돌봄사회로의 전환   김영옥·류은숙은 인간의 취약성이 존재론적, 보편적 특성이라고 설명한다. 인간 존재 자체가 취약하고, 모든 인간은 취약한 존재로 태어나 취약한 존재로 사멸한다는 공통점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돌봄에 대한 논의, 돌봄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부모가 되었든 부모가 아닌 타인이 되었든 누군가에 대한 의존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게 된 인간이, 제 스스로 자라나 제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은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있으며, 자신 스스로가 생각의 주체로서 삶을 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사유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생각, 돌봄은 가족이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 타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생각, 생산노동 중심의 사회에서 돌봄노동(재생산노동)은 가치가 낮다는 생각, 돌봄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생각. 이 모든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했던 생각들이 사실은 사유와 공부의 끝에 갖게 된 생각이 아니라, 무비판적·무지성적 수용으로 습득하게 된 것은 아닐까.   뇌리에 박혀 태도가 되어버린 생각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의 부재와 인권의 상실로 가득 찬 소멸사회를 돌봄사회로 바꾸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인권에는 유보가 없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하는 것이다.”****       *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중에서     **한국일보, “아픈부모·아이는 어쩌나...가족돌봄휴가, 직장인 60%엔 그림의 떡” (2024. 5. 12.)   ***김영옥·류은숙, 「돌봄과 인권」 참고 ****홍세화, 「미안함에 대하여」 중에서
2024-05-14 | hrights | 조회: 233 | 추천: 6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코로나19로  한동안 미얀마에 갈 수 없다가 드디어 지난 3월 말, 10일간의 미얀마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미얀마 중부지역에서 7년간 진행하고 있는 아디의 평화 도서관 사업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는데요. 이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2번째 방문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미얀마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출장 때가 되면,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가슴에 얹은 것마냥 답답하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번 출장에서 가장 먼저 놀란 것은 무섭게 치솟은 기름값과 현지 화폐의 환율폭락이었습니다. 방문 시 미얀마의 기름값(휘발유 기준)은 리터랑 2600~2900짯(MMK, 현지화)이었습니다. 한화로 계산하면 리터당 천 원 정도인 셈이죠. 이 가격은 쿠데타 전과 비교했을 때 거의 3배(기존 800~1000짯)가 뛴 금액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미얀마 화폐 가치의 폭락입니다. 쿠데타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 환율은 한화와 비슷하거나 심지어는 한화보다 높았으나, 현재는 1짯에 0.35원, 즉 1원에 2.8짯으로 극심한 폭락 현상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현지 초등학교 교사 급여는 대략 30만짯으로, 쿠테타 전에는 한화 30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쿠테타 이후, 환율로만 따졌을 때 대략 19만원이 떨어진 11만 원 정도 수준입니다. 여기에 기름값을 포함한 현지 물가까지 2-3배로 뛰면서, 현지 교사의 월급은 체감상 4~5만 원 정도의 가치뿐이 지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올해 2월 1일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미얀마 시민저항 3주년 행사사진 이번 출장에서 눈여겨봤던 또 하나의 사실은 여전히 시민불복종운동(CDM, Civil Disobedience Movement)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민불복종운동은 2021년 2월 군부 쿠데타 발발 직후 미얀마 전역에서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학생과 교사, 의사와 은행원 등 많은 이들이 등교와 출석, 출근을 거부하며 군부에 항거하는 자발적 시민운동을 벌였는데요. 물론 군부에 저항하는 반대 시위나 집회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시민불복종 운동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아디의 도서관만 하더라도 도서관 이용자였던 대학생들의 등교 거부가 이어지며 제적 상태에 처한 경우가 대다수이고, 기존 초, 중등 교사들 또한 출근 거부가 지속되며 강제로 해고되거나 군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려져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들조차 부모에 의해 등교를 거부하기도 하였는데요. 물론 군부는 이러한 아이들을 학교에서 모두 퇴학 처리시켰습니다. 아디가 평화도서관 창립하던 때 많은 도움을 줬던 현지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군부의 수배를 피해 미얀마 국경 지역으로 피신했거나 일부는 붙잡혀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시민불복종 운동은 각자의 자리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례로 이들 중 일부는 도서관에서 교육 봉사를 자처하며, 퇴학당한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못다 한 공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미얀마 군부는 소수민족군대와 미얀마 시민방위군(PDF, People’s Defence Force) 사이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돌연 강제 징집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강제 징집으로 끌려간 현지인들은 쿠데타 세력에 맞서 싸우는 시민방위군과 쿠데타 군부 사이의 총알받이가 될 거라며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지만, 강제 징집을 거부할 시 징집대상자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처벌한다는 군부의 경고에 불안에 떨며 살고 있습니다. 아디가 함께하는 평화도서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교사와 사서, 자원활동가들이 징집 대상이며, 실제 도서관 활동가 중 일부에게는 징집의 사전단계인 등록부 조사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회피 방법은 많지 않아, 대개 외국으로의 피신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쿠데타 발발 초기,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대한 규탄과 제재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외교적으로 단절될 거 같던 미얀마 군부는 중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미얀마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 정부는 미얀마 군부가 임명한 미얀마 대사를 무기 홍보 행사에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세상의 관심은 더 이상 미얀마 군부 통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모두의 관심이 사그라들수록 미얀마 군부는 더욱 활개를 치며 자국민을 탄압합니다. 그럼에도 미얀마에서 만났던 수많은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방식으로 미얀마 군부를 거부하며 저항하고 있습니다. 출장 내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되묻는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갑갑하고 야속한 현실만 안고 돌아온 듯합니다.
2024-05-14 | hrights | 조회: 140 | 추천: 3
신종환 / 공무원 때때로 어떤 이를 기억하는 것은 기억하는 이의 삶을 비추는 일을 거친다. 그 분을 적게 알았던 이의 짧은 삶이 그분을 반사하며 새롭게 비추기에. 그리고 그의 삶에서 멀리 있던 나같은 사람의 마음이 가끔은 선생님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미처 모르던 선생님의 어떤 색을 보여줄지도 모르니까.. 사진: 독서신문 홍세화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같이 틈나는 대로 토론을 나누던 친구들과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와 ‘세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었을 때였다. 저항이 삶의 당연한 방향이거니 했던 그 때 글에 비치는 선생님의 인상은 당시 두서 없이 읽던 책들에 등장하는 부당함에 굴하지 않던 수많은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대학생활이 시작된 2009년의 대학가는 아직 취업의 압박이 세지 않고 사고의 자유와 청춘의 열기가 배움의 열의와 잘 붙어있던 시절이었고,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허기진 그들을 접하려는 명사들의 강연들이 도처에 있었고 홍세화 선생님은 그런 명사들 중 한 분으로 기억되었다. 많은 이들이 마이크를 놓고 조용히 사라진 어느 날 선생님의 이름이 인터넷에서 보였다. 악화일로를 걷던 진보신당의 대표직에 홍세화 선생님이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해야 한다는 당위에 기꺼이 투신하는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난파선같은 당에 뛰어드는 모습에 탄식이 흐르는 한편 그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았다. 가야 하는 길을 가는 태도의 빛남에 마음을 기대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무게는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해 뒤 인권연대의 송년회에서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선생님께 질문을 드린 일이 있었다. 5‧18 혁명 당시 어떻게 그 많은 이들이 현장으로 발길을 향했는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선생님은 고민할 일이 아니라는 듯 말씀하셨다. “그야, 사람이니까.” 나는 그 말이 인상에 남아 당시 세월호 집회 현장에 나가자는 대자보를 쓰며 그 말을 적었고 속된 말로 오래 우려 먹었다. 지금에 이르러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불해야 할 것이 많다는 걸 배우고서야 선생님의 대답은 사람이기 위해 스스로 겪었던 많은 시도들이 만들어낸 말임을 막역하게 안다. 또 약간의 시간이 지나 선생님은 인권연대에서 벌금을 낼 여력이 없는 이들을 위해 준비한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이 되었다. 선생님을 전혀 모르는 이가 이 글을 읽으면 역순으로 적은 것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장발장 은행장에서 진보신당의 대표로, 대표에서 이름난 명사로. 한겨레 기획위원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말과활 발행인이 된 행보도 마찬가지. 가능성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선생님의 길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한결같은 자의적 떨림이 만든 선명한 궤적이었다. 어느 시간 동안 있을 만한 방향 대신 있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계속 묻고 그대로 가는 이는 드물다. 그가 있었던 곳이 계속 머물 만큼 아늑한 곳이었다면 더욱. 고병권 선생님은 공학적 지식과는 달리 철학적 지식은 자신의 삶이 이론을 비추기에 그렇지 다른 삶을 살면 앎이 훼손된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홍세화 선생님은 의도치 않게 본인이 말한 바를 삶으로 증명했다. 가능성의 유무와 사회‧경제적 기준에 머무는 시선으로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다. 눈 돌리면 물러지는 당위성의 경도를 단단히 다듬고 잠깐이면 어두워지는 가야 할 미래를 애써 밝혀 아마 스스로를 비추고 덥혔을 거라 조심히 짐작만 해봄직한 잊히는 감각. 선생님은 잊어서는 안되는 어떤 감각의 증명이었고 이를 위해 수반하는 노력의 총량이었고 수반되는 노력이 설명되는 까닭으로 내 삶에 뿌리내려주셨음을 애써 마음 어느 곳에 새긴다. 당연한 것이 드물어진 나날에 선생님이 없으실 세상이 무서워지고 슬퍼지고 아쉬워 바둥거리기에 앞서 선생님이 있어 살아가는 큰 방향이 어긋나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한 명으로 지면을 빌려 마음을 전해본다. ‘선생님이 계셔서 크게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고마웠습니다. 힘껏 살겠습니다.’
2024-04-30 | hrights | 조회: 219 | 추천: 3
이원영 / 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1. 어머니의 신장투석 작년 하반기부터 양평 시골집에 사시는 어머니가 신장투석을 시작하셨다. 신장이 10% 정도밖에 역할을 못 해서 결국 신장투석을 치료 방법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자식들은 어머니를 일주일에 세 번 병원에 모시고 오가는 일을 분담하고 있다. 사는 동네에 몇 군데 병원에선 2년~3년을 기다려야 하므로 양평에서 하남시를 50분 가까이 차를 몰고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신장투석은 혈액을 인공신장 기계를 통해 빼내서 노폐물을 걸러낸 다음에 다시 몸으로 돌려보내는 치료 방법이다. 신장은 그 모양새 때문에 콩팥이라고도 불리는데 몸 안의 체액, 전해질, 염기 등을 조절하며, 혈액 안의 노폐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일주일에 세 번 병원에 가서 세 시간 이상을 혈액투석을 하는 일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는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그걸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병든 몸은 치료해야 하고 다행히도 신장투석 덕분에 어머니는 식사도 잘하시고 농사일도 조금씩 하시면서 그럭저럭 저물어가는 노후를 보내고 있다. 어머니가 신장투석을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들은 인체에서 신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덜 짜고 덜 맵게 먹는 습관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번 망가진 신장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고 한다. 운이 나쁘면 젊어서부터 신장투석을 평생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니 건강한 몸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다시금 고마워할 수밖에. 2. 톨스토이에게 던진 세 가지 질문 인체와 사회는 복잡한 유기적 화합물이다. 혼자 살 수 없는 동물, 사람. 우리는 이런저런 사람들과 매일 만난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 사람 관계이다. 관계가 틀어지면 고통스럽고 회복하기도 어렵다. 좋은 관계를 가꾸며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모든 사람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너무 피곤하다. 하여튼 어리석음 투성이인 나를 돌아보면서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궁금해하다가 존경스러운 톨스토이 이야기를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너무나 유명한 톨스토이에게 던진 <세 가지 질문>이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톨스토이의 대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인간은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날마다 그때그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3. 새해에 품은 소망 어머니 신장투석과 톨스토이 세 가지 질문이 무슨 상관일까? 첫째, 어머니는 자식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에 대해 무척 미안해하신다. 하지만 어머니의 큰 사랑을 받고 자란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긴다.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 주고받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 생각해보니 자식 여럿 고생해서 키우길 잘했다고 말씀하신다. 빌려준 것을 다시 받는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시니 그렇게 생각하시라고 했다. 둘째, 꼭 톨스토이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너무 소홀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더 자주 잔소리하고 화내고 무언가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뇌과학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처럼 여기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분석하기도 한다. 때론 남으로 여기는 것이 더 현명하고 인간적일 때도 있으니 그렇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셋째,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톨스토이도 그렇고 타인에게 크고 작은 선을 행하며 평생을 살았다.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은 존경의 마음을 보냈다. 하지만 결국 병들고 외롭게 세상을 떠나는 게 인생인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면 매우 안쓰럽고 허무하다. 아프지 않고 늙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낀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많은 재산과 명성에도 매우 가난한 삶을 택했고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비록 허무하지만 만족스러운 삶, 아주 작은 것들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란 무엇인지? 2024년에 나는 느리게 비우는 삶을 살려고 애쓰기로 했다. 느려야 돌아볼 수 있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고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성급하고 건조하고 빡빡한 일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벌써 4월 하순이니 이런 새해 소망이 잘 실천되고 있는지는 지나 봐야 알 일이다. 우리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래 가사가 삶에 큰 위안이 되는 나이가 어느덧 되었나 보다.
2024-04-23 | hrights | 조회: 205 | 추천: 2
윤요왕 / 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3월 마지막 날 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총회를 통해 4년만에 이사장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이사장을 맡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이 들었다. 자유롭게 살았던 지난 1년의 생활을 조금더 연장하고픈 생각과 새롭게 설레는 일들에 대한 구상으로 24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떠나있던 4년이 아니라 지난 20여년의 기억들을 되새김하게 되었다. 방과후 마을공부방과 농촌유학, 마을어르신 돌봄, 도시청년들의 시골 이주살이까지 지난 20여년 작은 농촌마을에서 벌인 일들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무던히도 애를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자꾸 일벌리는 대표 때문에 힘들고 수고했던 많은 별빛샘들과 아이들, 부모님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작은 시골마을에 기쁘고 행복한 모습들이 있었으리라. 이사장으로 복귀하면서 기존 활동들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하면서 스멀스멀 맘속에 자리잡은 일들도 병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별빛 부설 ‘마주연구소’다. 마주연구소는 마을주민의 약자이면서 사람들이 마주하면서 살아간다는 공동체성을 표현한 이름이기도 하다. 마주연구소는 기존 별빛이 하던 일을 보좌하기도 하지만 마을의 중장기적인 일, 새롭게 필요해진 일 등을 고민하는 상근자 한명없는 연구소다. 개인적으로 전에 다니던 센터에서 나온 몇분들을 비상임연구원으로 위촉해서 함께 사부작사부작 작당모의에 들어갔다. 그 중 한가지 아프지만 설레는 일을 소개하고 싶다. 마을교육공동체, 작은학교살리기, 청년살이 등 전국 곳곳의 현장에서 수많은 활동가들과 주민들이 지역을 살리고 마을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데, 문득 뒤돌아보니 가슴 한켠이 뻥뚤린것처럼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유가 뭘까? 이런 노력과 수고에도 시골마을은과 지방은 사그라져가고 있다는 숨길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얼마 전 들은 얘기가 있다. 화천은 군차원에서 화천군 청소년들이 대학을 가면 4년치 등록금 전액(국립,사립 상관없이)과 월 생활비(졸업할 때까지 매월 50만원)를 지원해주고 있다. 교육지원으로 소멸해가는 작은소도시를 살리고자 무진 애를 쓰고 있고 그래서 좋은 사례로 언론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런데, 한켠에서는 이 사업에 대해 한탄하는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왜일까? 그렇게 지원한 청소년들이 청년이 되어서 어른이 되어서 다시 돌아와 화천군민이 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장학사업, 교육사업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교육불평등이 심한 지방에서 지원사업을 통해 그 인재가 널리 나가 지역을 빛내주는 것이 목적이었으리라. 그러나 지역소멸, 과소화 문제가 지역의 가장 큰 화두가 된 지금 돌아오지 않는 소위 ‘인재’들에 대한 지원이 얼마나 유효하고 적절한지에 대한 내부의 성찰하는 목소리인 것이다. 비단 화천만 그럴까? 지난 1년 전국을 돌아다녀보니 여기저기 상황은 다르지만 앞서 얘기한 ‘공허함’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지역의 우수한 인재가 서울로 가든 세계로 가든 지역을 빛내고 자신의 꿈을 키우는 지원에 누가 반대할까만은 지역을 지키고 남는 마을인재에도 지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역에 마을에 남아 모색하는 청소년, 청년들을 능력없는 ‘루저’로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올해 설레고 필요한 구상중에 하나가 이거다. (마을의 청소년을 지역의 청년으로-)청청 로컬 스쿨! 20세 전후의 청소년들을 위한 새로운 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20여명 정도의 20세 전후 청소년들을 모아 3년+a의 과정으로 스스로 지역의 시민으로 어른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랫폼 캠퍼스를 구상 중이다. 지붕없는 캠퍼스가 전국, 세계 곳곳에 있다. 또, 전국의 시민교사들로부터 생활기술과 지혜를 배우고 세상에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커리큘럼을 만들고자 한다. 이에 먼저 시민교사 소위 ‘키다리아저씨’를 모집했더니 10일만에 춘천과 전국에서 110명이 신청을 했다. 댓가도 없고 명함도 없다. 우리시대 청소년들을 위해 내가 가진 생각과 삶과 지혜를 오롯히 나누고 싶은 선한마음의 키다리 아저씨, 키다리 아지매들이다. 초중고 그리고 대학까지의 국가교육체계를 통하면 안전하게 사회에 어른으로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느 통계를 보니 은둔형 외톨이가 청소년 14만명, 청년 54만명이 있다고 한다.(출처: 청년재단) 고등교육 선진국이라고 불릴만큼 교육열이 높고 교육강대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정규교육과정을 다 이수했지만 사회의 어른으로 자리잡는 것은 청년들에게 막막하고 두렵고 절망적인 일일수 있겠다는 지표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국가교육과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또, 필요한 정보보다는 ‘돈이 최고’라는 사회분위기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금수저가 아니면 살아내기 힘든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 청소년들의 내적 근육을 키우는 자존감, 주체성, 자기철학이 필요하다. 이를 가르쳐주는 곳이 없다는 생각이 ‘청청 로컬 스쿨’을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한 공업고등전문학교의 현장수업 꼭 지방에 살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지붕없는 캠퍼스와 전국의 시민교사들의 삶을 살피고 관계하면서 희망을 잃지않고 자기만의 길을 꿈꿔볼 수 있으면 좋겠다. 얼마전 다녀온 일본의 한 시골마을에 5년짜리 학교가 개교했다. 고등학교 3년+전문과정 2년으로 보통의 학교와는 다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실질적인 배움이 일어나고 있는 걸 보았다. 일본 전역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지원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24년 고등학교 졸업생 38만명, 24년 전국의 대학 신입생 51만명!(이 차이로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이 늘어나고 있다) 이 단순 수치로만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모두 행복하게 20살을 맞이해야 한다. 모두가 대학을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면 인생이 보장되는 시대는 옛 유물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사회부모로 시민교사로 전국의 키다리아저씨아지매들을 찾습니다~” ‘청청 로컬 스쿨, 춘천’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지역에 맞는 청청 로컬 캠퍼스가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2024-04-17 | hrights | 조회: 172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