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모든 게 가정환경 탓이라고요? - 장윤미/국민대 학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6:33
조회
336

장윤미/ 국민대 학생



3월, 개강이다. 이번 학기 일탈과 범죄와 관련된 수업을 하나 듣게 됐다. 첫 시간, 교수님은 수업 이해를 위해 영상물 하나를 보여 주셨다. 청소년 범죄에 관한 내용이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기 전, 교수님은 덧붙이셨다. 청소년 범죄에 대해서 원인 분석이나 조사를 잘 해서 상당히 잘 만든 보도물이라고.

처음엔 어린 아이들이 절도와 폭행을 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걸 보고 청소년들을 그냥 저렇게 방치해도 되나 싶었다. 최근 여중생이 친구를 사정없이 폭행하는 영상이 떴을 때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충격적이었다. 국가의 미래, 희망이라 일컬어지는 청소년이라는 사회 내 특수한 위치가 있는지라, 청소년 범죄는 사회에서 더욱 심각하게 다뤄진다. 나 역시 그렇게 죄책감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을 보며 한국 사회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생각에 답답해졌다.

하지만 이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각각의 사례를 보여주고는 그 원인은 가정환경이라며 파고 들어가는 패턴을 느끼면서부터였다. 모든 건 가정환경의 탓이었다. 물론 사례로 나오는 아이들의 가정환경은 다 불우했다. 가난하고 부모님이 이혼했다든가 자주 싸웠다든가. 어쨌든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마치 그게 사실의 전부인 양, 가정만 화목하면 청소년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는 의심할 만하다.

영상을 보면, 아이에게 열린 질문은 하진 않는다. 질문은 이미 '가정문제'로 앞서 나가 있고 카메라는 벌써 그 아이의 가정사를 훑고 있다. 이때 정부의 역할은 그저 부모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상담하거나 교육하기를 요구받는 데 그칠 뿐이다. 비단 청소년 범죄의 원인에만 가정환경을 헤집고 들어가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사회적 범죄가 일어나도, 늘 그 사람의 가정환경부터 파헤치기 일쑤다. 오히려 사람들은 범죄자에게 불우한 가정환경이 있어야지만 안심하지 않는가.

가정환경이 청소년 범죄의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가족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사회 전체에 폭력이 난무하는데 가정 내에서 폭력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런 폭력에 노출돼 있다면 꼭 청소년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정신이 쇠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정환경을 열악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무슨 이유로 아이들이 자꾸만 폭력과 가난에 노출되는 가정환경에 놓이게 되는 것인가?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특히 청소년 문제를 곧바로 가정불화와 연관 짓는 문제의식의 틀이 그토록 불편한 걸까. 나는 더듬더듬 내 불편함의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개인의 불행한 원인을 가족에서 줄곧 찾는다. 외부에서도 그렇게 규정하고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그럴수록 가족은 잘 보호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힘을 받는다. 가족의 임무는 막강해진다. 재생산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해지면서 말이다. 과연 가족이 작동되는 원리는 무엇인가. 가족은 이러해야 한다는 환상은 계속 주입되고, 그 환상은 현실과 이상과의 틈을 자꾸 벌여서 개인의 행불행을 가늠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정상적인 가족의 모형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족의 구성원 역시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에만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은 1순위이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짐처럼 여겨지는 걸까. 솔직 하자. 나는 그렇다. 사회의 모든 질서와 도덕의 결정체인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나는 늘 싸워야 한다. 수긍하지 않기 위해서. 물론 개개인과의 애정은 별도다. 그것과 별개로 '가족'이라는 것은 내게 짐이다.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때의 그 행복의 구성에 대한 고민 없이 구호만으로 어떻게 가족 구성원의 행복이 가능할까.

090318web06.jpg
가정환경이 청소년 범죄의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가족이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청소년'이라는 집단을 늘 구분해서 나누는 것도 내겐 늘 목에 가시와 같다. 청소년은 늘 보호의 대상이다. 청소년은 판단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성숙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많은 정책들이 청소년 보호를 이유로 앞세운다. 영화 심의등급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 존재 이유는 청소년 관람불가와 전체 이용가를 나누기 위함이다. 청소년이 봐도 되는가 보면 안 되는가를 말이다. 학교에서 일제고사를 친다고 해도 청소년에게 의사를 물어보진 않는다. 그나마 부모님께 동의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보호하겠다는 국가의 임무가 청소년들을 더 나약하게 만든다. 청소년이라는 위치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도록 하는 일은 필요하겠지만, 보호가 명분이 되어 청소년이 가족에 의존하고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에 그저 따르는 것이 과연 당연한 걸까?

청소년을 무조건 가정 안에 밀어 넣고 그 안에서 부모의 역할을 강요하는 게 뭐 그리 범죄 예방에 효과 있을까.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저 범죄를 막기 위한 범죄 예방이 얼마나 대단하게 청소년들을 '희망'으로 꽃피울 수 있을까. 나는 기차에 내려 서울역 밖으로 나설 때마다 ‘청소년은 한국의 미래입니다’ 라는 커다란 글귀를 본다. 갸우뚱해진다. 이걸 추구하는 사회의 방식에 대해.

비단 청소년만 그렇겠는가. 우리는 늘 어떤 희망이 되고 싶은 사람들인데. 우리는 행복을 강요당할 뿐 행복의 구성을 고민하는 일은 늘 뒷전이다. 누군가의 진짜 희망이고 진짜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을 사유해야 하지만, 늘 쫓기듯 오늘도 고단해 하며 달릴 뿐이다.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범죄 예방.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섣불리 책임전가하지 않고 차근차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세상을 바란다는 건 다들 비슷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