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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라 봄 - 이은규/ 전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6:34
조회
242

이은규/ 전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이거 참 야단인걸...”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음이 괜스레 찜찜하고 부산스럽다. 갓난아기의 살결 같은 봄이 왔다. 미처 환영할 시간도 없이, 봄을 살아야 할 준비도 안했는데 이렇게 봄은 내 앞에 와있다.

지난주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꽃들의 꽃망울들을 볼 때는 환한 기쁨이었다. “반갑고 고맙다.” 겨울이라는 깊은 고요를 견디어 내고 다시 살아낸 생명들에 대한 경이로움에 감동하면서 눈인사를 나누었더랬다. 그렇게 천천히 봄을 음미하며 맞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춘분이 지난 며칠 사이 꽃들은 활짝 피었다. 천천히 다가올 줄 알았는데 왈칵하고 달려든 봄이 못내 야속하다. 인간들의 탐욕이 빚어낸 온난화의 영향이 자연 조차도 숨 가쁘게 돌아가게 하고 있다. 일찍 서두르느라 얼마나 힘들까. 꽃들 역시 준비 없이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영 어색할 것 같다. 자연이 자연스럽지 않을 때 일어나는 정화작용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재앙을 동반한다. 인간에게는 재앙이지만 자연에게는 생명의 순환이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계절의 변화를 보며 두려움이 드는 까닭이다.

이렇듯 마음이 번잡한 생각들로 가득차서 한숨이 나왔다. 함께 일하고 있는 아저씨가 묻는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 무슨 걱정이 있어?”
“아니요... 난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는데 봄이 벌써 왔잖아요. 보세요, 온갖 꽃들이 너무 일찍들 피어나고 있어요. 쟤들도 즐겨야 할 시간이 있을 텐데 너무 일찍 피는 게 안쓰럽고 그래서요.”

아저씨는 웃는다.

“이 사람아 준비는 벌써 했어야지. 암튼 날씨도 미친 게야. 그렇지 않고서야...”

말끝을 흐리시며 아저씨는 한 말씀 더 얹어놓으신다.

“일찌감치 준비해둬. 조금 있으면 여름이야 허허허.”

땅을 밟고 앉아 가만히 꽃들을 바라보았다. 간밤에 내린 비로 복수화와 미선나무의 꽃잎들이 꽤 저물어 있었다. 촘촘히 빗물을 머금고 있는 풀들과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꽃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순환하는데 인간의 탐욕은 변함이 없다.”

화들짝 놀라 몇 걸음 물러앉았다.

“우리들을 짓누르고 있는 너의 신발을 벗어라. 그래야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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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나무의 곷잎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러고 보니 나는 흙을 밟고 있었다. 막 피어나고 있는 풀들로 가득한 흙. “아 이것이 생명이구나. 어느 것 하나 생명 아닌 게 없는 세상이구나.” 뭇 생명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흙 한줌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일 텐데 나는 종종 잊고는 한다. 편리함과 무지의 탈을 쓴 이기심 따위들로 인해 말이다. 신발을 벗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신세라니... “그렇구나! 봄을 맞이할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구나.” 봄과 함께 살기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일치가 있어야 하겠다. 그러나 생명의 봄은 왔지만 나는 생명의 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 마음은 겨울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파헤치고 덧씌우고 짓누르고 불태우는 건설과 파괴의 시절이다. 건설과 파괴는 자본이 아니라 자연의 몫이어야 한다. 피의자의 얼굴로 권력의 실체를 가리는 파렴치한 시절. 권력은 생명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전토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권력은 노상강도와 같다. 청와대 비서관과 대법관이 전자우편으로 헌법과 법을 유린하는 대한민국이다. 이 웃지 못 할 상황에서 나는 매우 똑똑한 총리에게 영어 단어를 배웠다. 전자우편은 e-mail이다. 젠장!

생명들이 스러지고 유린당하는 곳에서 내 마음은 어찌해야 할 줄 몰라 서성거리고 있다. 시시각각 꽃들은 피어나고 나무는 푸르러질 터인데 말이다.

잠시 눈을 감는다. 세상근심에 마음을 빼앗긴 내가 스승과 함께 걷고 있음이다. 순간 스승이 뒤돌아 가시며 처음 머물렀던 자리로 향한다. 나는 놀라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흐르는 곳이 네가 머물러야 할 자리이다”
“흐르는 곳에 머무름은 무엇입니까?”
“지금 있는 그 자리가 흐름이며 머무름이야. 들꽃들과 나무들의 변화는 있는 그 자리에서의 흐름이며 또한 머무름이다. 그럴 때에 꽃들은 피어나고 열매는 맺어지는 것이지.”
“아...”
“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너는 네 자리에서 흐르며 또한 머물러라. 깨어 있는 꽃들은 제아무리 혹독한 겨울을 겪어도 피어낼 줄 안다.”

눈을 떠보니 여린 풀잎들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머무는 자리에서 바람과 함께 흐르고 있음이다. “그래 그렇지.” 고개 주억거리며 마음이 스르르 눈 뜨는 순간이다. 그렇다 봄이다. 이제야 온전히 봄을 환영한다. 꽃은 피어야 한다. 아직 피지 않은 나는 다만 깨어있기를 바랄뿐이다. 피어라 꽃이여 피어라 생명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