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찬란하게 살아 남은 자의 봄은 어디로 오는가?(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3-08 09:43
조회
190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나는 살아 남았다. 지난 1월 15일 은평구 기온은 영하 19.5도를 기록했지만 기후위기에도 길거리에서 얼어죽지 않았다. 우리나라 온실가스 감축 계획에는 단 한줄도 장애인에 대한 언급이 없고 연이은 화재에 죽어나가는 장애인들, 여전히 전체 장애인 정책을 책임진다는 장애인 개발원의 재난 구조 매뉴얼에서도 휠체어 이용 장애인도 불이나면 계단을 이용하라고 지극히 형식적으로 장애인을 구조할 지경이지만 아직까지 서울 시장에 의하여 혼자 살기 힘들고 돈이 많이 드니 시설에 강제 입소당하지는 않았다.



출처 - 픽사베이


나는 여기 구산동에서 혼자서 개인 핸드폰을 열어 보면서 살아 남았다. 지난 달에 비해 난방비 요금이 두 배로 뛰고 휠체어로 접근할 수 있는 대중 목욕탕을 찾을 수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혼자 아파트 욕실에 흡착판 손잡이를 달아 대며 살아 남았다.



오늘 서울 초미세먼지 주의보가 발령되어도 카페마다 흔하디 흔한 공기 청정기를 가동시키지 않고 KF94 마스크 쓰기도 어려움이 많지만 멀리 보이는 북한산과 고양시 넘어가는 서오릉 가는 둔덕의 바람길 덕분에 맑은 공기를 접할 수 있어 아직까지 홀로 살아 남아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장애인 조사망률은 53.6%로 사망 원인 중 10위를 차지하고 건강검진 역시 3년째 마음대로 편히 받지 못하고, 외출하는 일도 사람을 만날 일도 생기지 않아 아직 코로나를 경험하지 않아서 집에서 혼자 격리할 일도 없고, 활동지원사 선생님의 조력이나 간병인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한 채로 병원에 입원할 일도 없이 질병의 두려움에도 여전히 살아 남았다.


 

큰 길 건너 은평구 재개발 공사 현장에서 무연고로 사유 알길 없는 오래된 유골들이 다수 외롭게 발견되어도 그 누구도 치밀한 수사나 탐문 조사를 의뢰하지 않았다.


 

대구 장애인 생활시설 희망원에서 최근 2년간 거주 장애인 3명이 질식사한 것으로 확인되어도 그 어느 언론도 기사를 쓰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이유없이 방문하는 동창생들, 친구들 때문에 정신없이 청소기를 돌리고 세탁기를 열일시키며 꿋꿋이 살아 남았다.


 


출처 - 픽사베이


 

여전히 서울 고양시의 어느 학교에서는 버젓이 교장이 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급 설치를 거부한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80년대 때는 지금처럼 장애인 학생을 지원하기 위한 특수학급이나 전문성을 지닌 특수교사도 없었지만 자원 봉사 따위로 나를 의무 교육을 퉁치지 하지 않았고 사회복무요원같은 사람들이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기 마음대로 강당에 끌고 가서 벌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내 담임 선생님이 나를 화장실에 데리고 다니면서 신변처리를 지원하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기에 화장실에서 목발로 수십번 넘어졌지만 난 기꺼이 살아 남았다.



등교를 하려고 가끔 아침에 기본 요금 600원짜리 택시라도 잡을려면 많은 차들이 불운이 온다면서 마냥 지나치기 일쑤였고 놀이공원에서는 아무도 놀이 기구에 태워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내 모교에서는 다니기 위험하다거나 비장애인 학생들이 힘들다고 하거나 집에 얌전히 있으라 절대 말하지 않았다. 6학년 수학 여행에는 늙은 교감 선생님께서 나를 업고 먼저 토함산 석굴암에 올랐다. 나는 그렇게 교감 선생님의 등줄기를 적시던 땀과 함께 즐겁게 살아 남았다. 같이 지하철로 출퇴근 이동하자는 장애인들은 더 이상 사회의 약자가 아니라며 시민의 기본권마저 부정하는 정치인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따금씩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새치기 하여 먼저 자동차 문을 열어 제끼는 사람들을 타박하고는 나를 제일 먼저 태우는 택시 운전사 분들, 그게 운전하는 사람들의 의미라는 사람들로 날마다 날마다 깨어서 살아 나오고 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대사들이 미디어에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겉멋으로만 인권을 말하고 지켜야 하는 이 곳, 온갖 겁박과 회유 과도한 업무에도 가끔 같이 밥먹는 동네 마을 사람들 덕분에 그만두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나는 아직 사무실에 고독히 앉아 일을 하며 계속 인권을 말하며 쌀을 팔아 오듯이 살아 있다.


 


출처 - 은평시민신문


 

사는 곳에 하루가 멀다하고 생기는 각종 무인 가게는 계단과 출입문들이 천안문 앞 무장 탱크처럼 목발과 휠체어를 막아서고 자동차를 타고서 주문을 할 수 있는 그 유명한 가게들은 음성으로만 주문이 가능해서 목소리 없거나 약한 사람들을 거부하지만 깡통에 담겨와 끼우기 쉬운 캡슐커피 덕분에 나도 도시 시민처럼 설탕 두 숟갈 가득 넣은 아침 가배(커피)를 먹으며 잠에서 깨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었다.


 

창문마다 맻힌 서리와 이슬로 말미암아 체중을 실어 밀어도 해뜨기 전까지는 창이 얼어 붙어 바깥 공기를 만날 수 없고 천장에 붙은 전기 콘센트에 선을 연결할 수 없어 키가 되고 손이 닿는 사람이 방문하는 날이 되어서야 전기 장치가 멈춘 지 일년이 지나서야 다시 환풍기가 돌아갔지만 나는 질식해 쓰러지 않고 또다시 살아 남았다. 딴딴하게 경직된 근육과 피사의 탑처럼 비스듬히 넘어진 몸뚱아리는 겨울잠을 마치지 못하고 한기에 노출된 개구리처럼 바짝 웅크리고 있지만 늘 그러하듯이 버티고 있는 현관문의 산세베리아는 동네 누나의 마음처럼 새순이 빠꼼히 올라오고 뭘하지 않아도 항상 죄송하다고 말해야 했던 우리 장애인 학생들도 명지전문대의 신입생이 되고 우리 아파트 옆 구산중학교의 일학년이 되었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교사 일을 하는 벗은 오랜 암투병을 마치고 찾아와 오는 3월 복직을 한다고 수다를 떤다.



인구는 광속으로 소멸되는데 여전히 국가와 사회는 장애인 학생 한명 지역 사회를 돌아 다니는 장애인 한명을 소중히 할 줄을 모른다.


 

대학교는 벚꽃이 피기도 지기 전에 사라지는 작금인데 장애인 입학을 여전히 거부하고 지원에 대한 인식은 새마을 운동 전에 머물러 있는 교육계, 한국이 없어진다고 난리 피는 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인 장애인 이동권도 혐오와 돈문제로 이전 투구를 벌이면 어느 누가 노산과 난산에 도전하겠는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동성애자든 어떤 존재든 낳기만 해라고 해도 낳을까 말까 할터이다. 언제부터 장애인의 이동권과 관광권을 신경썼다고 국립 공원에 장애인 핑계삼아 케이블카를 만들고 공항을 짓고 길을 내고 있다. 아마도 20년 안에 나무 한그루 자리값이 그 케이블카 개발비보다 더 비싼 날이 올터이다. 나는 그렇게 오늘도 지금도 버텨내고 았다. 그렇게 우리의 땅에, 광장에 파르나니 봄이 오고 있다. 아무리 외롭고 슬프더라도 좌절과 실패가 휘몰아 치는 눈보라처럼 절망스러운 분노가 온몸을 휘감고 좋은 사람들이 힘들게 곁을 떠나도 우리의 봄은 우리를 바라보며 기다리며 오고 있다. 불광천에, 여의도에 솜사탕 가득하게 벚꽃이 몽실 몽실 넘칠 때까지 우리는 그 때까지 함께 살아 내야 한다.



<본 글은 은평시민신문에 올린 기사를 재수정 추가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