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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발전이 시민의 권리구제에 기여할 수 있을까(정한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2-21 11:10
조회
317

정한별 / 사회복지사



대한민국의 장애계에 2008년은 상당히 뜻 깊은 해이다.


 

2007년에 제정되고,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차별금지법인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이 2008년 첫 시행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대한민국은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의 당사국이 되었다. 헌법 제6조 제1항에 따라, 국회에서 비준한 조약인 장애인권리협약(CRPD)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고 있다.


 


출처 - 공익인권변호사모임


 

장애인권리협약은 21세기 최초의 국제 인권법에 따른 인권조약이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도농을 가릴 것 없이 장애인은 차별받았던 존재이고, 현재도 차별받고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차별적 상황의 개선과 장애인의 존엄과 가치를 위해 시혜적 차원이 아닌, 권리적 차원에서의 제도적 장치 마련이 논의되었다.


 

2001년 제53차 유엔총회에서, 멕시코의 빈센트 폭스 대통령은 장애인권리협약을 제안했다. 2006년 12월 13일 제61차 유엔총회에서 장애인권리협약이 채택되어, 2008년 4월 3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사우디 아라비아를 포함한 20개국이 이 협약을 비준하였고, 2008년 5월 3일에 발효되었다. 2022년 12월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유엔 회원국의 185개 국가가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했다. 다만 대한민국은 2008년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하면서, 선택의정서는 비준하지 않았다. 선택의정서에는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한 장애인이 직접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는 ‘개인진정제도’와 위원회가 ‘직권조사’를 할 수 있는 직권조사권이 포함되어 있다.



태현(가명)씨는 전동휠체어를 이용해 이동을 한다. 학교에서 시내에 나갈 때는 저상버스를 이용하는데, 저상버스는 계단이 없고 버스의 높이가 승강장의 높이와 유사할 만큼 낮아서,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 유모차를 끄는 사람들, 지팡이를 짚는 사람들이 버스에서 타고 내리기 편한 교통수단이다. 2021년 기준 전국 (시내)저상버스 도입률은 30.6%이다. 특히, 충남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2023.2.20. 국토교통 통계누리 검색).


 

출처 - 경인일보


어느 날 저녁 태현씨는 시내에서 학교 기숙사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물론 휠체어를 탄 채로 탑승이 가능한 저상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여느 때 처럼 잘 오지 않았다(사실, 버스가 늦은 것이 아니라 버스가 없는 것이다).


 

한 시간 가량 기다렸을까,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버스의 문이 열리고, 버스에 타려는 태현씨에게 버스기사가 말했다.


"어떡하죠, 미안해요. 리프트가 작동을 안하네. 고장 났나봐요"


또 한시간 가량 기다렸을까, 두번째 버스가 왔다.


이번에도 버스의 문이 열리고, 버스기사는 미안해하는 표정과 말투로 태현씨에게 말을 했다.


"미안합니다. 이게 제 버스가 아니라, 사용법을 몰라요. 다음 버스 금방 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 날 태현씨는 30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2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했다.



태현씨에게 이런 일은 평생 한번 겪을 만큼 드문 일이었을까?


AI가 글도 대신 써 줄 수 있다는 시대,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으로 안되는 게 없는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버스를 타는 일을 거부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태현씨는 또 버스를 기다렸다.


한 참을 기다려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기사는 또 다시 사과를 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사용법을 몰라요. 다른 사람들도 기다리니까 다음 차 타세요."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된다는 말인가.


얼마나 기다리면 버스를 탈 수 있다는 말인가. 장애가 없는 승객은 기다리면 안되는데, 장애가 있는 승객은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당연하다는 것인가.


버스기사들은 한결 같이 사과를 했다. 사람 좋은 미소와 적당히 미안해 하는 표정을 섞어가며 난처한 모습을 취했다. 자신이 일부러 장애인을 버스에 태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변명을 꾹꾹 눌러 담았다.



버스기사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다.



보통의 시민 태현씨는 저상버스에서 탑승을 거부당한 일련의 일들에 대해 소송을 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 위반되는 장애인 차별을 당했다며 버스회사와 버스회사가 속해있는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를 대상으로 차별구제소송을 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정당한 사유없이 장애인을 장애를 사유로 제한, 배제, 분리, 거부 등으로 불이익하게 하는 것을 장애인차별로 정하고 있다. 소송은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소송 결과 버스기사. 버스회사의 장애인 차별은 인정되었으나 지자체의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다. 법원은 지자체를 상대로 한 소송은 모두 지자체의 손을 들어주면서, 소송비용 마저 원고인 태현씨에게 부담하도록 했다. 장애인차별이 인정되었지만, 대중교통 관리의 책임이 있는 지자체는 장애인차별에 법적 책임이 없으며, 법적 책임 없는 지자체에게 장애인 차별의 책임을 물은 못된 시민, 못난 시민은 소송비용을 부담하라는 것이 우리 사법부의 판단이었다.



지자체는 법원의 판단대로, 태현씨에게 소송비용을 청구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권리협약이 비준된 지 14년 만인 2022년 12월 장애인권리협약의 선택의정서가 드디어 비준되었다. 이제 장애인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 당한 경우, 국내에서 모든 구제절차를 취하고도 권리구제를 받지 못한다면, 개인이 직접 유엔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되고, 장애인권리협약이 비준된 지 15년이 지났다. 장애인의 인권, 장애인의 권리는 분명 신장된 것 처럼 보인다. 제도는 더욱 촘촘해 졌으며, 사회는 더욱 발전했다. 특히 과학기술(편의시설)은 소위 눈부시게 발전했다.



시민들의 인식은 2008년에서 15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진보했을까.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단 5분도 못 참는 선량한 시민들이, 과연 내가 아닌 다른 시민들의 손해에는 귀 막고, 눈 가리고, 입을 닫고 있지 않나. 되려 돌을 던지고 있지는 않은가.



스테판에셀은 「분노하라」에서 공적 분노가 없는, 사회에 무관심한 현재의 세태에 대해 탄식하며 시민들의 연대를 주문했다.


 

사회가 아닌 사인(私人)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넘치는 요즘 시대, 각자도생이 현명한 생존전략으로 여겨지는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 사적분노와 혐오 대신, 공적분노와 연대가 함께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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