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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가자지구의 마르와의 이야기(이동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3-19 11:05
조회
83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향한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과 전면 봉쇄 조치가 5개월 이상 지속되면서 가자 지구의 모든 주민은 포탄과 미사일, 총탄이 만들어 내는 죽음의 공포와 함께 굶주림과 배고픔, 갈증과 질병이 양산하는 고통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습니다. 아디를 포함한 국내 시민사회 단체와 개인들은 가자 지구 피해주민을 위해 긴급모금을 추진하여 지난 2월에 송금하였고, 도움을 받은 현지 피해 생존자 중 일부가 한국에 감사 소식과 영상을 보내왔습니다. 그 중 마르와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이스라엘 측에서 전하는 소식과 뉴스가 아닌 팔레스타인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현실이 어떠한 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진 1. 인터뷰에 응해준 마르와 나쉬완(인터뷰 캡쳐사진, 출처: 사단법인 아디, 영상: 유튜브 “[가자지구 긴급 모금] 현지 사용 보고 인터뷰 영상


제 이름은 마르와 나쉬완(Marwa Nashwan)입니다. 30세이고 남편과 3명의 자녀가 있어요. 그 날(10 8)이 있던 때에는 임신 5개월이었지요. 그 날 제 남편은 이스라엘 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우리(이스라엘)는 베이트 하눈(Beit-Hanoun, 마르와 거주지) 전 지역을 파괴할 것이다. 너희들은 5분 안에 집을 떠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짐을 집에 남겨두고 도망쳐 나왔어요. 그리고 정말 10분뒤에 저희 집은 파괴됐어요.


우리 가족은 걸어서 베이트 라이아(Beit-Lhia)로 갔어요. 우리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었는데 많이 두려워했고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알-인도네시안(Al-Indonesian) 병원 근처에 있는하마드 학교(Hamad school)’에 도착했어요. 학교 상황은 이미 재앙과 같았어요. 교실은 가득차서 우리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없고, 씻는 곳과 화장실은 너무 더러웠고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죠. 깨끗한 물도 없고 한마디로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저는 그곳에서 38일간을 머물렀고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사용했어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나 구호물품, 음식도 전달되지 않았어요.

이스라엘은 학교근처에 있는 알 인도네시안 병원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갑자기 학교에도 로켓이 날아오기 시작했죠. 우리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인근의 모든 곳이 위험 해졌죠. 다른 곳으로 이동할 교통비도 없었기 때문에 제 머리속은 복잡 했지만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우리는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했어요. 우리는 남쪽으로 무작정 걸어갔어요. 아이들도 함께요.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데이르 알 바라(Deir-Al Balah, 중부지역)로 가는 차를 발견하고 도움을 요청했어요. 저는 임신한 상태였고 지친 상태로 아이들을 데리고 먼 거리를 걷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뱃속의 아이에게 너무 위험 했거든요.


저와 우리 가족은 다행히 바다 근처의 데이르 알 바라의 B초등학교(Deir- Al balah primary B school)에 도착했어요. 그 작은 학교에 2만 명이 있었어요. 저는 한 교실안에 70명의 여성과 아이들과 함께 있었어요. 이 곳 학교도 이전 학교와 마찬가지였어요. 물도 없고 근처 시장에는 상품이 고갈됐어요. 간혹 지급되는 구호품은 턱없이 모자랐고 무엇보다 얼마 남지 않은 생필품의 가격이 너무 올라서 도저히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그림 1. 마르와 이동경로(베이트 하눈->베이트 라히아->인도네시안 병원인근 하마드 학교->데이르 알 바라->알 아와다)


출산일은 점점 다가왔어요. 아기 상태 때문에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했어요 하지만 이 지역에는 임산부를 위한 병원이나 의료시설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다시 다른 지역으로 갈수 밖에 없었어요. 다행히 누세리아트(Nuseriat)지역의 알 아와다(Al-Awada) 병원이 운영되고 있다고 해요. 하지만 그 곳으로 가는 차가 없었어요. 저는 만삭이었고 그 곳으로 걸어갈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당나귀를 타고 가야 했어요. 만삭의 몸으로 당나귀를 타고 갔을 때 제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요? 병원에 가서 저는 정말 다행히도 무사히 아이를 낳았고, 하이쎔(Haitham)으로 이름 지었어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후 저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저는 UPWC(팔레스타인 여성위원회 연합, 기금 현지 배분단체)을 통해 한국에서 보내준 기금을 전해 받았어요. 정말 꿈만 같았어요. 저는 이 돈을 가지고 하이셈의 기저귀를 샀어요. 지금 기저귀는 현지에서 정말 비싸답니다 분유도 샀고 아기 옷도 샀어요. 저를 위해 생리대 및 여성용품도 샀어요. 가족들을 위해 비누와 삼푸도 샀어요. 냉동 닭 1마리를 샀는데 진짜 비쌌지만 꿈만 같았어요. 그리고 계란 5, 야채들, 통조림(, 당근, , 참치, 치즈 등)을 샀어요. 그리고 저에게 필요한 약품(혈액응고제)과 주사기를 샀어요. 남은 돈으로는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살 예정이에요.


너무너무 감사하고 한국에 있는 분들에게 꼭 이 메세지를 보내고 싶어요. 팔레스타인 여성을 돌보고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이들은 누구도 없어요. 여러분의 도움이 어둠속에서 빛과 같아요. 더 많은 분들이 우리에게 연대해 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