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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다시 자기만의 방을 생각할 때(신종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4-03-13 11:50
조회
107

신종환 / 공무원


정신과 약을 먹으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니체의 말 중 몇 가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인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고병권 작가가 니체의 책 ‘선악의 저편’의 문장, ‘도덕적 현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 있을 뿐.’ 을 변용해 적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없다. 일은 일일 뿐이다, 다만 일에 대한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는 문장을 체감하게 된 것이다. 문득문득 찾아드는 공황에 공황 약과 보조 영양제를 복용하면 이내 머리에서부터 쏟아지고 심장에서 파도치며 얽어매는 온갖 상상들이 잦아드는 것을 불안하면서도 익숙한 듯 침착하게 바라보고 있자면 그 문장이 그렇게 동의가 될 수가 없다.



서두에 정신과 약을 썼기 때문에 누군가는 불쌍함과 동시에 남 얘기로 느낄 수 있지만, 약을 먹고 초조함와 진정을 오가며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발생하는 일 외부로 인해 희비가 갈리고 선택이 종용되거나 좌절되는 걸 생각하면 어떤 현상 자체가 아니라 현상이 유발하는 파장에 휩쓸리는 일은 모두가 겪는 일인 것도 같다.


그리고 결혼과 출산은 그런 외부적 요인이 야기하는 파장이 제일 두드러지는 요소 중 하나 같다. 사회⦁경제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위해서는 나아져야 할 요인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당연한 얘기나 반대로 난세에 결혼과 출산이 많았다는 반대가 할 얘기는 아니다. 반대로 결혼이나 출산이라는 결과에 다다르지 못해 사라지는 파장이 되지 못한 생각들과 감정들을 생각한다.


결혼과 출산은 자기 삶에 대한 다른 선택들과 비교해 되돌릴 수 없고 모두에게 같은 말로 지칭되어도 차이가 크며 전자는 기존에 알던 이와 스스로의 모르는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자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하나의 별개의 존재를 결심하기에 원하든 원치 않든 주체적인 행동이다. 행동이 주체적이게 되는 까닭은 비근한 예시와 타인이 행한 동일한 행위를 타인이 전시함으로써 나타나는 파장의 영향을 받아도 형언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영역이 유난히 선명하고 명백하게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까닭 중 어느 정도는 고통과 비관뿐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곳으로 도약한 경험이 적기에 형언할 수 있고 종용 되는 곳으로 흘러온 관성 속에 머무려는 심리라고 느껴진다. 이는 비단 요새 질리게 듣는 mz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과거의 어려움을 종종 훈장처럼 달고 나를 위시한 요새 세대를 비판하는 나의 모친도 결혼과 독립을 생각하면 본인 주변 지인들이 자녀들에게 어떤 아파트를 해줬는지를 언급하며 상심과 미안함을 섞은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그 정도 준비 없이 나가냐고 양면적인 말을 자주 하곤 하기에(물론 속초라는 작은 지역에서 30년을 근무한 교사라는 특징도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런데 사는 건 본디 고뇌와 고독이 필연적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고뇌와 고독은 어쨌든 외부와의 불일치로 해소되지 못한 것들을 스스로 해소해야 하는 과제다. 그리고 과제를 해결해 나가며 나는 고유하지만 그것이 나만은 아님을 대자적이자 직관적으로 느끼고 그래서 삶이 상통한다는 걸 ‘사는 게 다 그렇지’라는 함축적인 문장으로 받아들일 때 스스로와 세속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는 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가 결혼과 출산율이 떨어지는 그늘에는 우리가 사회 전반에서 때로는 삶의 어떤 부분은 스스로의 삶의 질료로 짜맞추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서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을 당시와 다르지만 상통하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이 유통되지 않거나 왜곡되고 잊혀져 고통와 고독에 대한 고유한 해석 대신 그로부터의 도피만이 권장되어 산다는 것의 의미가 절반정도 가려진 탓으로 보인다. 그래서 결혼을 지양하는 이들은 결혼의 고통을 전시하고 권장하는 이들은 고통보다 더 크게 보이는 기쁨을 반짝이게 닦아 전시하고 도약을 머뭇거리게 하는 그 사이의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 공허로 더부룩하게 남는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가치를 가리키거나 그런 과정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감각으로 사람들을 이끌 글들은 사회 표면에 잘 나타나지 않고 통상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고통들에 대한 용인을 표하는 글들이 유통되고 형언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어떤 인력은 힘과 설 자리를 잃었다. 나아가 사회 전반은 이로 인해 발생하는 허기를 잊기 위해 짧은 주기로 같지만 새로운 느낌으로 추동하고 유도하는 파장을 직간접적으로 요구한다.


존재의 허기를 채울 단초는 허기를 느끼고 타인이 나의 허기를 메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단초를 허기를 자각케 하는 글에서 찾을 것이다. 목적의 성취를 떠나 그러기 위한 여정이 녹아 까닭 모르게 마음 한구석을 뻐근하게 하는 글. 뻔하고 어렵지만 그런 글을 쓰려는 시도가 사람들을 자기만의 방으로 이끌 가능성을 품는다. 강철벽을 두드리는 사람은 두드림이 벽을 뚫거나 누군가 두드림을 들을 가능성이 낮지만 그래야하는 까닭을 더 크게 받아들이듯. 그래서 세상이 내일 망할 것 같은 비보가 넘치는 날에 케케묵은 원칙을 생각한다.